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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격려는 기적을 행한다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감동 에피소드 듣던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갑자기 극장의 2층 출입구에서 한 소녀가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다 그 아이를 쳐다보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그칠 줄을 몰랐다.
그가 바로 루치아노 파바로티 이다. 파바로티 : 1935년 10월 12일(이탈리아) ~ 2007년 9월 6일 (향년 71세) 데뷔 - 1961년 오페라 '라보엠' 1935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12살이 되던 1947년 고향 모데나의 시립극장에서 이탈리아 최고의 성악가였던 테너 베니아미노 질리를 통해 성악가로서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공부를 계속하거나 운동을 하여 교사가 될 것인지 자신의 소질을 십분 발휘하여 성악가가 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습니다. 아버지의 극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격려로 용기를 얻은 파바로티는 30세가 되어도 성악가가 되지 못하면 다른 길을 모색하겠다고 약속하고 험난한 음악의 길을 선택합니다. 파바로티는 1955년 대중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실력자이자 좋은 음악선생인 아리고 폴라를 만나는데 그는 파바로티의 꾸준함과 성실성을 보고 제자로 삼아 2년 동안 무료로 레슨하며 완벽한 발성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폴라가 완벽한 발성을 가능하게 한 스승이었다면 캄포갈리아니는 오페라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준 스승이었습니다. 캄포갈리아니는 작품의 정신세계에 대한 암시와 가수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곡 해석에 관한 세련된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탄탄한 실력을 쌓은 파바로티는 몇 번의 뼈아픈 실패를 딛고 1961년 이탈리아의 레조 에밀리아에서 열린 ‘아킬레 페리 국제 콩쿠르’에서 수상하여 오페라 출연 계약하면서 본격적인 음악 인생을 출발합니다. 1961년 4월 29일 레조 에밀리아 극장에서 대타로 <라 보엠>을 공연 하면서 빛을 발한 그의 재능과 탄탄한 기본기는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1967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라 보엠>을 공연하면서 미국 무대에까지 데뷔하게 했는데, 1968년에는 뉴욕 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데뷔하여 1971년부터는 고정적으로 출연하기에 이릅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수많은 배역을 소화하며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지만 연기를 잘하는 음악가는 아니었습니다.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고 대본도 잘 못 외우는데다가 연기력도 부족한 그는 나이가 들면서 뚱뚱해져서 아무리 열심히 연기를 해도 어설프고 열심히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치명적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파바로티는 그의 스승 ‘아리고 폴라’의 증언처럼 “2년 동안 음역을 두 옥타브나 확대 시킬 정도로 쉬지 않는” 열정적 도전자로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성실하고 꾸준하게 이 모든 한계를 극복하고 누구보다도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해냈습니다. 특히 <연대의 아가씨>의 ‘토니오’라는 배역은 파바로티에게 ‘하이 C의 제왕’(King of the high C's)이라는 영광의 별명을 안겨주었는데, ‘하이 C’는 ‘가슴에서 나오는 가장 높은 도’ 음으로 특별한 능력이 없으면 도저히 낼 수 없는 음이었습니다. 전성기의 파바로티는 이 음을 탁월하게 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철저한 자기 관리로 40년 이상의 오랜 기간을 현역 성악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열두 살 때 혼수상태에 빠질 정도로 심각한 병에 걸렸다가 기사회생한 경험 때문에 늘 건강에 철저하게 대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파바로티는 어린 시절에 질병과 장년에 비행기 사고 경험으로 인해 생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갖고 가능한 한 인생을 풍성하게 살기를 원했는데 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기에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좋아했고 축구와 테니스 승마와 같은 스포츠를 즐겼으며 붓을 잡고 아홉 시간 동안이나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인생을 즐기는 태도 또한 그의 성공에 기여한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습니다. 파바로티는 또한 자유로운 상상력,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즉흥적인 것, 예상치 못한 것을 분출시키는 스타일이어서, 너무 정확하고 교과서적인 지휘자를 만나면 몹시 힘들어 했지만 그들과의 마찰은 파바로티의 음악을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방법과 매체를 통해 자신을 광고함으로 열정적인 팬들을 광범위하게 확보했고 특히 1990년에 시작한 쓰리테너 콘서트와 수많은 대중스타와 함께한 ‘파바로티와 친구들’을 통해 자신을 대중의 아이콘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건재하던 파바로티도 2006년 2월 10일 이탈리아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른 것을 마지막으로 7월 파바로티는 뉴욕에서 악성 췌장암 수술을 받았고 결국 2007년 9월 6일 그의 파란만장했던 음악 인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파바로티는 탈세 문제로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무수한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말년에는(2003년) 35살 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는 호색한의 기질을 보여 주기도 했지만 누가 뭐래도 음악을 위해 열정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음악에 바친 최고의 음악가로 기억될 것입니다.
<주케로와 파바로티가 함께 부른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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