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춤
- 신석초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 없는 꽃잎으로 살어 여러*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 소리를 아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초이고
뒤안 이슥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 우는다.
아아 어이 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몸은 서러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짐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形役)*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내려가것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접동새, 우는 접동새야!
네 우지 말아라
무슨 원한이 그다지 골수에
사무치길래,
밤중만, 빈 달에 피나게 울어
남의 애를 끊느니.
이화(梨花) 흰 달 아래
밤도 이미 삼경인 제,
승방(僧房)에 홀로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나니,
시름도 병인 양하여
내 못잊어 하노라.
(시집 바라춤, 1959)
* 살어 여려 : 살아 가려.
* 형역(形役) : 육신의 욕망에 의한 정신의 예속, 육체의 지배를 받음.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시집 <바라춤>의 표제시로, 모두 402행으로 구성된 장시(長詩)이다.
1941년 <문장>지에 발표하기 시작하여 1959년 시집 <바라춤>이 완성되기까지 18년 여를 거쳐 완성된 작품이다. ‘바라춤’은 승무(僧舞)의 일종으로, 부처에게 재(齋)를 올릴 때 천수다라니경(千手陀羅尼經)을 외며 바라를 치면서 추던 춤이다.
▶성격 : 종교적, 명상적, 상징적
▶특징 : ① 불교 사상에 바탕을 둔 고전적 시풍
② 고전 시가의 운율을 원용함.
▶구성 : ① 현실과 이상의 갈등(제1연)
② ‘나’의 내면 세계(제2연)
③ 세속과 열반 지향의 갈등(제3연)
④ 세속의 인연을 끊을 수 없는 슬픔(제4연)
⑤ 종교적 구원의 염원(제5연)
▶제재 : 바라춤
▶주제 : 속세의 번뇌와 종교적 승화를 위한 갈등
<연구 문제>
1. 이 시가 불교적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시적 특징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하라.
☞ (1) ‘열반, 사바, 형역’ 등과 같은 불교적 언어를 사용하였다.
(2)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 끝없는 갈림길이여.’에서 보듯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세속적인 번뇌에 시달리고 있는 화자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2. 이 시의 화자의 내면 세계는 어떠한지 이 시에 나오는 시어를 적절히 이용하여 190자 정도로 설명하라.
☞ 이 시의 화자는 ‘구슬픈 샘물’, ‘잠 못 이루는 두견’, ‘짐승처럼 내 몸을 물고’ 등에서 보듯 현실적으로는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세속적인 번뇌에 시달리면서도 열반의 세계를 상징하는 ‘창해’로 흘러가는 꽃잎을 부러워하는, 즉 열반의 세계를 염원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3. 이 시와 조지훈의 승무의 공통되는 점을 주제와 표현면에서 각각 쓰라.
☞ (1) 주제면 : 인간의 번뇌를 종교적으로 승화하려는 점
(2) 표현면 : 불교적인 시어와 예스러운 말투를 사용한 점
4. ㉠에서 연상되는 두 시행을 윤동주의 시에서 찾아 쓰라.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 서시>
<감상의 길잡이>(1)
이 시는 바라춤이라는 제재를 통해 세속적인 번뇌와 그 종교적인 승화 사이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그 점에서 조지훈의 승무(僧舞)와 유사하지만, 승무와는 달리 이 작품에는 춤동작에 대한 묘사가 없고, 내적인 갈등이 더 강하게 표출되고 있는 점이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제1연에서는 화자가 추구하는 세계인 ‘티없는 꽃잎’과 이와 대립적 관계에 놓여 있는 ‘구슬픈 샘물’을 대비시켜 갈등의 양상을 드러낸다.
제2연에서는 갈등하는 화자인 ‘나’의 내면이 ‘잠 못 이루는 두견’을 통해 제시된다.
제3연에서는 ‘무상한 열반’을 꿈꾸지만, 세속적인 번뇌가 마음의 고요함을 깨뜨린다.
제4연에서는 ‘나’가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 육체의 욕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 갈등하고 있음이 ‘뱀이 꿈어리는 형역(形役)’란 표현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제5연에서는 열반의 세계를 상징하는 ‘창해’로 흘러가는 꽃잎을 부러워하는 화자의 모습을 통해 종교적 구원을 갈망하고 있다.
<감상의 길잡이>(2)
신석초는 1930년대 초반 카프에 가담하여 신유인(申唯仁)이란 이름으로 평론 활동을 한 바 있다. 그는 카프의 맹원으로서 당시 카프의 정치 편중주의의 노선을 비판하는, 「문학 창작의 고정화(固定化)에 항(抗)하여」라는 평론을 발표하여 창작방법론의 불씨를 제공하고는, 전향하여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하면서 시인으로 등단한다.
그의 시 세계는 카프의 정치성과는 전혀 다른 정신 세계를 보여 준다. 그는 프랑스 상징주의, 발레리의 순수시 운동과 이백(李白), 두보(杜甫), 나아가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은 제1시집 석초 시집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으로부터 제2시집 신석초 시선에 이르러 새로운 시적 질서를 획득하게 된다. 그 계기가 되는 작품의 장시 <바라춤>이다.
이 시는 불전(佛殿)에 재(齋)를 올릴 때 추는 ‘바라춤’을 통해 속세의 온갖 욕망과 번뇌를 극복하고자 하는 소망과 갈등을 노래하고 있다. 조지훈의 <승무>와는 소재 및 주제의 유사점이 있으나 이 시에서는 춤동작이 생략되었고, 무위 자연(無爲自然)의 도교적 색채가 가미되었으며 시적 자아의 갈등이 <승무>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표출되어 있다.
전 5연의 이 작품을 시상 전개 과정에 따라 나누면 기(起), 서(敍), 결(結)의 3단락이 된다.
첫째 단락(1~2연)에서는 일체의 세속에 물들지 않은 청정 무구(淸淨無垢)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상과 세속적 번뇌로 뒤덮여 있는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시적 자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는 ‘티없는 꽃잎’과 같은 삶을 추구하나, 그의 가슴에선 언제나 ‘구슬픈 샘물’이 샘솟듯 끊이지 않고 흘러 나온다. 그리하여 그는 ‘잠 못 이루는 두견’이 되어 울고 있는 것이다.
둘째 단락(3~4연)에서는 앞의 갈등 양상이 좀더 확대되고 깊어진 모습이다. ‘무상한 열반’인 드높은 초월의 경지를 꿈꾸었지만, 그 꿈은 ‘어지러운 티끌’ 같은 번뇌로 해서 무산되고 만다. 그 근원적 이유는 세속적 인연을 떨쳐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을 원망하며 ‘형역의 끝없는 갈림길’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 ‘형역’이란 육신의 욕망으로 인해 정신이 예속된다는 의미이다.
셋째 단락(5연)에서는 멈추지 않고 창해로 흘러가는 꽃잎처럼 자신도 온갖 번뇌를 끊고 열반의 경지를 얻고자 하는 염원을 유장(悠長)한 강물의 흐름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강물에 떠가는 꽃잎에서 ‘무릉 도원(武陵桃源)’의 도교적 색채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