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 2:4-6 자신을 대속물로 주신 그리스도 찬송: 6, 39, 229(성찬 전 찬양), 251장. 교독문: 131번
성찬의 때에 우리가 늘 묵상하고 기억해야 할 바는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셨는데, 이는 마 1:21의 예언대로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가 되시기 위함이었다. 물론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바는 단순하지 않다. 왜 예수께서 구원자가 되셨는가?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구원자로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가 무엇이며, 그의 제자로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알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이 예언의 구절과 성경 곳곳에 기록된 예언들을 토대로 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가, 즉 그분은 구약의 메시야, 신약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고, 그에 맞는 직분을 수행하셨음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마지막 식사를 통하여 성찬을 제정하신 것이다. 고전 11:26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의미한다.
중보자란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위치하여 사람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분이며,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중보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중보자를 통해 우리를 찾아오신다. 이 법칙은 이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약속된 것이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지켰다면 영생이라는 복을 얻게 될 터인데, 이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요 17:3이 이를 말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진리는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이나 이후나 동일하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부르는 것이 마땅한 것은 그분을 통해서만 사람이 구원에, 즉 영생에 이를 수 있으며, 영생을 소유한 자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사람을 대할 때 우리의 복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베푸시고, 구원을 베푸시고, 복을 누리는 자리에 부르시는 것이다. 이것이 중보자로서의 사역으로,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며,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게 된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 이후라 할지라도 사람이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것을 알아야 하는가? 단지 그분이 이 땅에 존재했던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아는 것으로 충분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분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임을 밝히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중보자는 어떤 분인가?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자. 타락한 사람에게 중보자가 왜 필요한가? 타락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셨다. 아담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살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다스리며 보존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이 보존의 상태를 영원토록 유지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영생을 약속하셨고, 아담으로 오직 한 가지 계명을 통해 이 영생을 유지할 수 있도록 가르치셨다. 그것은 바로 순종이었다. 어떤 순종인가? 하나님은 그의 주인으로서, 그분이 피조세계를 그에게 주셨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타락은 이것을 버리게 만들었고, 그 후손들은 이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진리가 가리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아오셔서 복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이심에 대한 진리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이 진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아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분께서 영생을 허락하시는 분이시며, 복을 주시는 분이시며, 주의 손으로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으로 붙드시는 분이심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보자가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끊어졌던 화목의 고리를 다시 이어주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는 중보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한 직후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중보자에 대한 약속이며, 그 약속하심 대로, 본문 6절의 말씀대로 하면,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가 된다. 타락 직후에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 때가 되어 이땅에 보냄을 받아 오셨고, 그분은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역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속물이 되시기 바로 전날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시면서, 떡과 잔을 먹으며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주의 죽으심을 기념할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중보자의 죽으심이다. 이 죽으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의 사역을 완성하셨고,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사람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고, 사람은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믿음을 통해 영생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찬에 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우리의 중보자가 죽으심으로 죄인에게 영생이 허락되었음을 기뻐하는 것이요, 동시에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중보자가 죽으셨다는 비통함으로 슬퍼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음을 언제나 기억하라.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심을 의미함을 기억하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이 구원의 자리, 영생의 자리에 들어왔음을 감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