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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소시집 서평
주름진 입술의 행간과 세공의 언어
권성훈(문학평론가)
시적 언어는 이미 발현된 재현이 고유한 시어로 착상된다. 꽃이 씨앗 속에 주어져 있는 것처럼. 백지라는 고원의 평면 위에 내재 된 실존으로서 사물을 존재자로 구성한다. 그것도 생각의 주름 속에서 기억의 접기, 펼치기, 다시 접기 등의 사유의 운동성을 가지며 조직화된다. 이 같은 주름 운동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침묵하는 가운데 말하고, 전달하고, 묻고, 고백하는 등의 발화 행위를 수행한다. 시로 언표되는 것은, 타자의 목소리를 통해 화자화 되면서 일방적인 관심사를 공통적인 관계로 치환된다.
여기서 시어는 역학적인 의미의 분화로서 존재하는 시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도 독립적인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 특정한 언어적 질서를 가진 논의될 수 있는 해석에의 기록이다. 이 같은 측면에서 시는 언어적 가운데 내던져진 언어 내 존재를 형성한다. 거기에 애매한 물음으로 존재를 문제 삼으면서 실존 방식에 따라서 세계가 개시되며 사물의 위상을 드러낸다. 언어와 관계 맺는 존재는 분명 타자와 세계를 현시하면서 사물이 가진 사유를 간취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목소리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목소리마저 산화시켜 의미를 유예하고 공통적인 의미에 참여하는 데 있다. 기
아래에서 살필 이동엽과 정온의 시편이 추구하는 것은 생각의 주름 속에서 사유를 공유하면서 공통적인 지평의 확장을 보여준다. 이들의 시편은 유예 된 의식 작용이 야기한 결과로서 나타나며 공간적인 객체화의 차이를 보인다. 말하자면 형식이라는 배열에 숨겨진 구조로서 그러한 대상에는 의미라는 층위가 숨겨져 있다. 이러한 의미의 층위를 이루는 것은 평면이며 이 평면은 시에서 백지가 된다.
이동엽의 「작문 속의 산술가들」처럼 “여기는 꽃 피는 나무들의 생태계를 떠받친/지구본의 표면”과 같이 대지라는 평지에서 벌어진다. 이 평지는 생명이 발화되는 ‘표면’으로서 작용한다. 이 생명은 정온의 「걸작」같이 “화분에 남은 흙을 탈탈 털고 새를 심습니다 화분이니까요”라고 실험적 접근을 통해 모호한 것들을 심으면서 죽음도 근원적 생명으로 이어준다. 이같이 이동엽과 정온의 시적 표면은 주름으로 연결되며 내재 된 모두가 존재가 놓여 있는 자리로 통한다.
여기서 감지되는 이들의 시편은 대지의 모든 유기체들을 주름으로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지의 주름이 생명을 발생시키는 영혼을 통해 언어 안의 주름을 무한의 사유로 고양시킨다. 주름의 겹이 시편에서 심화 될수록 내적 기능이 활성화되며 세계의 원리를 드러내면서 기존의 일반적 상식을 파기시킨다. 이것은 내재성에 주목하는 것으로 현상에서 발생하는 시적 원천들의 진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평면의 배후에는 감추어진 초월적인 것이 부가됨으로써 내재적 평면으로 통한다. 이 평면을 도면으로 이해할 때 머리 속에서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투사한는 것이다. 들레즈는 “그것은 신의 정신 속에 있을 수도 있으며, 생명, 영혼, 언어 등의 무의식 속에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항상 자신의 고유한 결과들로부터만 귀결된다. 그것은 항상 추론에 의해 이끌어 내진다. 설사 내재적이라고 예기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부재에 의해서만, 유비적으로 내적일 뿐이다.” 여기서 유비적인 것은 은유나 환유적인 것이 가지는 내재성이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 시인의 의식을 추론하게 된다.
이 가운데 이동엽과 정온의 시편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언어의 주름 속에서 내재 된 생명과 영혼, 그리고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신작시로 선보이는 이동엽과 정온의 시편에서 대지에서 벌어지는 유기체들의 활성화된 사유의 언표 작용을 살필 수 있다. 이로써 이들의 언어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 속에 계시되는 주름―언어의 운동성으로 던져진다. 그것도 언어 가운데 검증 가능한 존재 이해를 바탕으로 타자와 존재자를 호명한다.
그 외에는 남아 있을 만한 나뭇잎의 산책도 없다
그 외에 우리는 죽어버린 나뭇잎을 끌어 앉아 있고
그 외에 우리는 떠다밀어야 할
쉬엄쉬엄한 사람들
그 외에 우리는 그것이 왜가 되는 줄 모르지
그렇게 치밀하지 않으면서 눅눅하다
그 외에 우리는 비 내리는 숲속에서
잠이 떨어져 나간 소식을 듣고
아직도 발설되지 못한 나뭇잎을 말하고
그 외에 우리는 그것이 일흔 살이라고 말했다
정분이 없어서 꽃피는 나무를 바라보고
시체들의 곳간을 뒤지며
돋아난 하모니가 되어서 돌아다닌다
그 외에 우리는 일찍이 없었으므로
비 내리는 숲속이
까맣게 칠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 이동엽, 「죽음에 이르는 병」 전문
말간 나를 쪼옥 따르고 남은 나, 당신이 마셔주어요
후르르 타다 만 각목 같은 분노
포도알처럼 쏟아져 번진 말의 껍질들
다 마셔주어요
자꾸만 흥얼거리는 노래의 후렴구처럼
휑한 생각 속을 떠돌다 지쳐 앙금처럼 가라앉은 나,
여기 왔어요
순한 짐승처럼 풀풀 웃을래요
마디마디 관절을 꺾어 작은 상자 될래요
희고 긴 손가락 쫘악 펼쳐서
-나는 껍데기, 알맹이 빠진 빈 껍데기가 사실은 나의 전부, 수시로 바뀌는 눈빛, 무수히 솟구치던 생각, 빠르게 돌던 피는 내 게 아니야 잠시 앉았다 가는 새들이야
당신이 마셔요
-정온, 「수목장」 전문
이동엽의 「죽음에 이르는 병」과 정온의 「수목장」은 죽음이라는 생명의 그늘 속에서 주체가 다른 차원으로 전이되어가는 형상을 나타낸다. 게다가 필연적인 죽음을 내재한 채 삶이 돌아가는 과정을 허공이나 환상이 아닌 대지 위에 사물로서 현시한다. 이동엽은 그러한 존재를 “그 외에는 남아 있을 만한 나뭇잎의 산책도 없다/그 외에 우리는 죽어버린 나뭇잎을 끌어 앉아 있고”한다. 실제로 죽어감은 자신의 신체를 상실한 채 부식되는 자연으로 환유한다. 이른바 ‘나뭇잎’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삶이 되지만 그 자리를 이탈하는 순간 죽음으로 치환된다. 따라서 “우리는 비 내리는 숲속에서/잠이 떨어져 나간 소식을 듣고”있는 것은 죽음을 감지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떨어진 나뭇잎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시체들의 곳간을 뒤지며/돋아난 하모니가 되어서 돌아다닌다”라고 한다. 이처럼 죽음은 ‘비 내리는 숲속’은 대지로 떨어지는 생명으로서 삶도 되지만 동시에 죽음도 되는 중의적 의미를 가진다.
정온의 「수목장」에서는 인간의 육신을 흡수하는 것을 대지의 나무로 상정한다. 여기서 나무는 주검을 통한 자연의 순환성이 깃들어져 있는데, “말간 나를 쪼옥 따르고 남은 나, 당신이 마셔주어요”라는 이면에는 생명성을 해학적으로 보려고 하는 의도가 있다. 화자의 생명이 대지로 돌아가면서 “후르르 타다 만 각목 같은 분노/포도알처럼 쏟아져 번진 말의 껍질들/다 마셔주어요” 육신이 ‘수목장’에서 나무로 산화되는 과정은 분명히 장엄한 생명의 잔치가 아닐 수 없다. 마치 “자꾸만 흥얼거리는 노래의 후렴구처럼” 주검을 죽음으로써 지우고 지워진 자리에서 다시 재생되는 과정은 한 곡의 노래같이 즐거운 사건이 된다. 그렇다면 화자의 주검을 안아주는 대지의 나무 속에 “나는 껍데기, 알맹이 빠진 빈 껍데기가 사실은 나의 전부, 수시로 바뀌는 눈빛, 무수히 솟구치던 생각, 빠르게 돌던 피는 내 게 아니야 잠시 앉았다 가는 새들”이라는 생명에의 순환성을 발견한다.
가을이 되고 눈물이 되며 메마른 삶을 건져 올린다
그러한 삶이 그림자 진다
독특한 시각의 불빛들은 망가졌다
모든 일들은 한 발씩 늦게 당도하는
구름에 섞여 있다
구름의 마디마디가 소란한 틈을 타서
가을빛으로 전해진다
죽음의 색깔을 뒤집어서 그대가
풀을 뽑아낸다면 좋겠다
늦은 저녁의 불을 일구다가
나도 죽은 자들처럼 먹고 살아야지 하는데
어떤 바람은 살의 슬픔을 떠다밀 듯
그 생생함으로 빛을 빨아들인다
강물의 속을 들여다보면
오늘 하루도 빗방울이 흘러든다
- 이동엽, 「가을이 되고 눈물이 되며」 전문
문득 그 이름이 떠올랐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펑펑 울었는데
삼십 년도 더 된 첫 경험
세상의 모든 배수관을 내 심장에 꽂은 남성
한쪽 다리를 저는 예민한 말더듬이 남성
서머싯 몸은 그를 필립이라고 했다
마구 굴러다니던 구슬 같은 생각, 서 말도 넘는 생각, 그 이름으로 꿰어져
기이하게 살아남은 것들에게 있어
무서운 깊이
떨어지면 죽는 줄 알면서도 낭떠러지 끝까지 걸어가
그 아래를 내려다보는,
아뜩한 경험은 처음을 낳았지
두려움을 가진 처음은 또 다른 무서움을 낳고
빨간 구슬 조롱조롱한 맹독 열매, 아름다워
- 정온, 「천남성」 전문
보이지 않는 영혼은 정신과 구별되는 생명의 원리고서 육신에 이미 스며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까지 생명을 유지 시키는 영혼은 살아있을 때는 육신과 함께 존재한다. 그렇지만 육신의 죽음 이후에는 죽음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실체를 존속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인간의 경험과 지식으로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동엽의「가을이 되고 눈물이 되며」에서 ‘삶이 그림자’로 투사된 것으로, 정온의「천남성」에서 ‘기이하게 살아남은 것들’로서 증언되고 있다.
이동엽은 영혼이 “구름에 섞여 있다/구름의 마디마디가 소란한 틈을 타서/가을빛으로 전해진다” 구름처럼 만져지지 않는 영혼을 가을빛으로 현현한다. 그럼으로써 “죽음의 색깔을 뒤집어서 그대”로서 “나도 죽은 자들처럼 먹고 살아야지 하는데” 죽음 이후의 초월적 세계를 건너가면서 “그 생생함으로 빛을 빨아들”이는 것이 영혼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정온은 “마구 굴러다니던 구슬 같은 생각, 서 말도 넘는 생각, 그 이름으로 꿰어져” 있는데 생각으로 이루어진 ‘그 이름’이 바로 영혼이라는 것이다. 이 영혼은 그의 시편에서 “떨어지면 죽는 줄 알면서도 낭떠러지 끝까지 걸어가/그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야 알로 육신과 분리를 직감하는 영혼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것은 영혼이 가진 자발적인 운동성으로 죽음이라는 결말 앞에서 “두려움을 가진 처음은 또 다른 무서움을 낳고”를 통해 삶 이전의 죽음을 탐구해 나가는 영혼을 담보하고 있다.
길을 뻗어 나가면 멈추어있는 곳,
나는 이 땅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저 나뭇가지 나뭇잎을 하나씩 바라보며
욕망을 털어나갈 것이다
어떤 희망들은 색깔 아래에 있는데
바람이 불길을 분질러 놓았다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한 발짝씩 불어왔다
비가 오면 긴 밧줄을 타고 그 길을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죽은 자들의 습성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
어울리지도 않을 것 같은 낱말들이 떨어져 있고
풍년 속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
싯구절로 치면 그건 두어 행 짜리에 지나지 않는데
그에 대한 담화는 더욱 풍성해져서
소문처럼 흘러다니고 내 발에도 와서 밟힌다
그것은 입술의 행간을 읽는 일이다
-이동엽, 「길을 뻗어 나가면 멈추어 있는 곳」 전문
안경알 세공업자를 찾으러 갔다
오래된 방에 기다리는 건 성긴 눈발 같은 유리가루와 끊어질 듯 말 듯 가느다란 담배 연기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다고 들었다
사락사락 눈 내리는 소리 찻찻-차 비 오는 소리 뾰로롱 뾰로로롱 새 소리
안경을 쓰면 보인다고 한다
나이테가 선명한 나무 책상 그 위에 두툼한 책 그 위에 외알안경
백발의 노인 꼬부라진 긴 손톱으로 안경알을 잡고 눈을 가늘게 모았다
얇디얇게 편 창밖 세상을 한 겹 두 겹 안경알에 겹쳐 넣었다
아, 당신이군요
노인이 돌아다보는 순간
낡은 책상엔 흰 연기를 내는 태우다 만 파이프 담배 그 옆에 두툼한 책 그 위에 외알안경
넓게 보면 책장 한 장 접힌 거리일 텐데
구름은 비를 몰고 다니고, 350년 전 구름은 몇 번의 몸을 입고 벗어야 이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안경을 쓰듯 비가 촘촘히 매달린 창을 쓰고 그 두툼한 책 위에 앉은 먼지를 쓸어내렸다
-정온, 「헤이그에도 비가 올까요」 전문
이들이 평면이라는 대지의 결을 언어적 주름으로 파고들면서 펼치는 사유가 생명과 영혼에 맞닿아 있다. 생명과 영혼은 이동엽과 정온의 주요한 시적 테마로서 타자와 세계에 집중되면서 내재성의 평면을 통해 감추어진 초월성의 배후를 찾아 나선다. 여기서 부각 되는 것은 소재의 차이로서 환원되는 사유의 주름을 통한 동일성이라는 점이다. 각자의 시적 양태는 자신만의 내재성에서 촉발되는 언어로서 사유의 주름을 생명과 영혼이라는 내재성으로 펼쳐 보인다.
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보여주고, 규정하고 전달하는 행위로서의 새로운 언어라는 것이다. 누군가 말한 것을 다시 말하지 않고 그것의 우연성을 넘으려고 하는 태도에 있다. 이러한 시적 자아의 고립과 세계의 지배에 사로잡히지 않는 창조의 시작이 된다. 말하자면 이동엽은 “길을 뻗어 나가면 멈추어있는 곳”에서 미적 언어를 발견하고, 정온은 “성긴 눈발 같은 유리가루와 끊어질 듯 말 듯 가느다란 담배 연기” 속에서 미적 사유를 견인한다.
이동엽의 ‘입술의 행간을 읽는 일’은 새로운 언어를 새기는 것으로 가을 나뭇잎을 보면서 “죽은 자들의 습성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라고 언표 가능해진다. 게다가 그의 전복과 전이되는 그의 시작은 “어울리지도 않을 것 같은 낱말들이 떨어져 있”지만 그럴수록 언어의 “풍년 속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반면 정온의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는 대상은 ‘당신’으로, 이때 당신은 사실 “얇디얇게 편 창밖 세상을 한 겹 두 겹” 접고 있는 주름 속에 있는 것으로, 언어란 거기에 맞는 안경알과 같이 시적 세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럼으로써 이동엽 시인이 언술한 “싯구절로 치면 그건 두어 행 짜리에 지나지 않는데”라는 언어의 압축미에 대해 정온 시인은 “넓게 보면 책장 한 장 접힌 거리”에서 ‘주름진 언어’로서 세계를 통찰하는 것으로 화답하고 있다.
권성훈|2013년 《작가세계》 평론 신인상 당선. 한신대 종교학과, 경기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고려대 박사 후 과정(Post-doc) 수료.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외 2권과 저서 『시 치료의 이론과 실제』, 『폭력적 타자와 분열하는 주체들』, 『정신분석 시인의 얼굴』, 『현대시 미학 산책』, 『현대시조의 도그마 너머』, 편저 『이렇게 읽었다―설악 무산 조오현 한글 선시』 등이 있음. 고려대 연구교수 역임, 경기대학교 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