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46. 토지신과 곡식신 그리고 사직단과 사직제
송은석(대구향교장의·대구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지난 호에서 북구 읍내동 구수산 여제단을 소개한 뒤 독자들로부터 몇 통의 전화를 받았다. 통화 내용 대부분은 조선시대 ‘3단1묘(三壇一廟)’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성황단·사직단·여제단’ 3단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이번에는 여제단에 이어 ‘3단1묘’ 중 하나인 ‘사직단’에 대해 알아보자.
사직제 유래와 의의
사직제는 토지신인 ‘사신(社神)’과 곡식신인 ‘직신(稷神)’에게 올리는 제사로 국태민안(國泰民安)과 풍작에 대한 춘기추보(春祈秋報) 의식이다. 전통시대에는 임금과 백성에게 있어 전쟁과 역병, 그리고 농사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래서 국가적 차원에서 이를 기원하는 제사인 사직제가 시행됐다. 고대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같은 제천의식도 성격으로 보면 사직제 류의 의식이었다. 삼국시대에는 영고·동맹 같은 원시적 제천의식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어느 정도 유교식으로 의례화됐다. 백제는 서기 2년(온조왕 20)에 천지에 제사할 단을 설치했고, 고구려는 392년(고국양왕 9)에 국사(國社)를 세웠으며, 신라는 783년(선덕왕 4)에 사직단을 세웠다. 고려는 991년(성종 10) 사직단을 세웠다. 조선은 태조 때 사직단을 설치했으며, 태종 조에 이르러 사직제는 비로소 종묘과 더불어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제사인 대사(大祀)의 지위에 올랐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고래로부터 자연신에 대해서는 ‘사직’을, 인간신에 대해서는 ‘종묘’를 최우선으로 했다. 그래서 새로운 국가를 창업하면 ‘좌묘우사’(左廟右社)에 따라 종묘와 사직단을 세웠다. 이로써 종묘와 사직은 국가를 의미함과 동시에 국가와 흥망성쇠를 함께한다는 상징성을 얻게 됐다. 고려 성종은 사직단을 세우면서 사직제 시행 의의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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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듣기로, 사(社)는 토지의 주(主)이나 땅은 넓어 다 공경할 수 없으므로 흙을 모아 사신(社神)으로 삼아 그 공에 보답하고, 직(稷)은 오곡의 장(長)이나 곡식은 많아 널리 제사할 수 없으므로 직신(稷神)을 세워 이를 제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중략) 그러므로 국가를 세운 자는 사직을 세우지 않을 수 없으니, 위로는 천자로부터 아래로는 대부에 이르기까지 그 근본을 보이고 공에 보답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짐이 왕위를 이어받은 이래로 제도를 반드시 예전(禮典)에 의하고자 하여 자목부소(子穆父昭)의 실(室)을 경영하고, 춘기추보(春祈秋報)의 단(壇)을 장차 세우고자 하니, 군공(郡公)에게 명하여 땅을 가려 제단을 설치하도록 하라”(고려사 「예지」 ‘길례’ 대사 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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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중(京中) 사직제와 주현(州縣) 사직제
조선 성종 때 최종 완성된 국조오례서례 「길례(吉禮)」 ‘변사조(辨祀條)’에는 각종 제사를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기고제(祈告祭)‧주현제(州縣祭)‧속제(俗祭)’로 구분하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직제와 종묘제례는 국조오례의 제사 분류로 볼 때 서울에서 국왕이 직접 제사에 참여하는 친제(親祭)이자 대사(大祀)다. 하지만 종묘제례와 달리 사직제는 국왕이 주제자가 되는 서울의 ‘경중사직제’와 지방 고을수령이 주제자가 되는 ‘주현사직제’ 두 종류가 있었다. 경중사직제는 제사 분류상 ‘대사’에 속하며, 주현사직제는 ‘주현제’에 속한다. 두 사직제는 토지신과 곡식신에 대한 제사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단유제(壇壝制)’, ‘규례와 절차’ 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사직단에는 ‘제단’과 함께 담장에 해당하는 ‘유(壝)’라는 시설물이 있다. 고려와 조선의 경중사직단은 사단과 직단이 각각 세워진 ‘양단(兩壇)’과 사단과 직단이 하나의 단을 공유하는 ‘동단(同壇)’의 형태가 있었다. 유는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가 있었고, 유가 있는 경우도 유가 하나인 ‘단유(單壝)’와 유가 안쪽과 바깥쪽 두 개인 ‘양유(兩壝)’의 형태가 있었다. 고려 사직단은 양단(兩壇) 형식에 유(壝)가 없었다. 조선 태종 조에는 ‘동단(同壇)·양유(兩壝)’였다가 나중에 동단(同壇)·단유(單壝)로 바뀌었으며, 세종 조에 와서 비로소 양단(兩壇)·양유(兩壝)로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주현사직단은 동단·단유)
한편 조선 세종 때에는 사직신에 대한 신호(神號)에도 변화가 있었다. 고려 이후 신호를 ‘태사(太社)·태직(太稷)’으로 하다가, 세종 조에 와서 ‘국사(國社)·국직(國稷)’으로 개칭한 것이다. 이는 사직제를 ‘천자례’에서 ‘제후례’로 바꾼 결과다. 예기 「제법」에 따르면 ‘태사·태직’은 천자국 사직신의 신호이며, ‘국사·국직’은 제후국 사직신의 신호다.
사직제에서 볼 수 있는 ‘예모혈(瘞毛血)’
유교 제사의례에 근거한 조선시대 ‘대사‧중사‧소사‧기고‧속제‧주현제’ 등의 행례 절차는 기본적으로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이들 제사는 ‘영신(迎神)‧작헌(酌獻)‧송신(送神)’을 기본으로 하되, 제사의 종류에 따라 ‘예모혈‧신관례·전폐‧진찬‧음복‧망예’ 등이 추가되거나 생략되기도 한다. 이중 다른 제사와 달리 사직제에서 볼 수 특별한 절차로 ‘예모혈(瘞毛血)’이 있다. 이는 사신과 직신을 제단에 모시는 강신(降神) 절차로 가제(家祭)의 ‘분향강신’에 해당한다. 예모혈을 하는 방식은 제물로 쓰인 희생의 털과 피 소량을 땅에 묻는 방식이다. 이는 제사의 대상이 토지신·곡식신이기 때문에 제물의 기운을 땅에 접촉시켜 신을 모셔 온다는 의미다. 제사에서 신을 모시는 강신례 중에는 예모혈처럼 특별한 예로 천신제의 ‘번시(燔柴)’, 종묘제례의 ‘신관례(晨祼禮)’ 등이 있다.
에필로그
이상으로 사직단과 사직제에 대해 살펴보았다. ‘경중사직제’, ‘주현사직제’. 두 사직제는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올리는 제사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경중사직제가 원칙적으로 국왕 친제의 대사(大祀)인 반면, 주현사직제는 고을수령이 국왕을 대신해 주제자가 되는 주현제라는 차이점이 있다. 이처럼 조선이 서울뿐만이 아니라 지방 330여 고을에까지 국가가 정한 유교 제의례에 의한 주현사직제를 실시한 것은 이유가 있다. 유교국가를 표방한 조선이 고려조 이후 지방에서 유행하던 각종 음사(淫祀)를 유교 제의례로 재정비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은 주현사직제를 비롯한 각종 주현제를 통해 ‘예치(禮治)’에 의한 군현 정책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전국 330여 고을마다 있었던 주현사직단은 일제강점기 전후 대부분 사라졌다. 현재 전국에 10여 개 사직단이 복원되어 있다. 이중 대구광역시에만 2개의 사직단이 있다. 수성구 ‘노변동 사직단’(옛 경산현 사직단)과 달성군 ‘현풍 사직단’(옛 현풍현 사직단)이다. 조선시대 대구부 사직단은 평리동에 있었으나 사라졌다. 칠곡부 사직단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나박산에 있었는데, 발굴을 통해 유구 등이 확인됐다. 매년 봄 수성구 노변동 사직단에서 봉행되는 수성사직제 행례(行禮)는 대구향교가 맡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