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8-9년 전에 쓴 글입니다. 그 무렵 우리 학부모들에게 서비스 차원에서 한 주에 한 편씩 글을 써서 보내곤 했었는데, 없어진 모교에 대한 아쉬움과 추억들을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글쓴이 : 이슬기
모교가 없어졌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무척 섭섭하대요. 어쩌다, 정말 어쩌다가 한 번 갈까 말까 한 학교였지만 그래도, 그 근처를 지날 때면 저기가 내 모교였는데, 라는 생각과 함께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런 것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니 마치 고향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한 때 500여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뛰고 달리며 꿈을 키우던 곳이었는데, 이제 다닐 학생들이 없어져서 학교가 없어져야 한다니 이게 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상상이나 했던 일이겠습니까.
처음에 그 학교를 만들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겠어요. 그 학교가 있기 전에 학생들은 4킬로미터 이상을 걸어 다녔다고 했습니다. 웬만큼 교육열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지요. 그러다가 학교의 필요성을 느낀 몇몇 분들이 땅을 기부하고, 기관으로 발이 닳도록 쫓아다니면서 겨우 설립했다는 모교.
몇 년 전에는 총동창회 주관으로 그 당시에 공이 가장 많았던 분의 공적비를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 때 공적비를(비문을 써준 인연 때문에 더욱 가까워진) 세우면서 그렇지 않아도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든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그사이에 현실로 나타날 줄이야.
누구나 한 번쯤은 다 경험했을 터이지만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게 왜 그렇게 가슴 뛰면서 벅차 오르던지요. 학교에 다닐 적령 아동을 조사 나온 선생님이 (그 당시에는 학교 선생님이 동네를 방문하면서 조사를 했었음) 혹시나 오지 말라고 하면 어쩌나 싶어서 그 분 동네를 떠날 때까지 졸졸 따라 다니면서 팔짝팔짝 뛰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았습니다.
입학식 날은 더 가슴 설레었지요. 아침 일찍 학교로 찾아갔을 때 운동장은 얼마나 넓어 보였던지, 교실은 또 얼마나 커 보였던지......
우리가 처음으로 들어가 공부하던 교실은 흙벽에 지붕을 이엉으로 엮은 초가집이었습니다. 또, 책상이 없어서 마루바닥에 그냥 앉아서 공부했습니다.
| 그 당시 6학년 교실에만 아주 낡은 책상이 있어서 책상에 앉아 공부할 수 있는 6학년이 빨리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한 주일에 한 번씩 있는 특활 시간이 되면 6학년 담임선생님이 맡은 부서는 상당히 인기가 있어서 많이 몰렸습니다. 그 분이 잘 가르쳐 주셨던지 어쨌던지 그건 기억이 없고, 한 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책상에 앉고 싶어서였습니다. 그 후 전 교실에 책상이 들어온 것은 5학년 때였는데, 그 때 까지 선생님이 설명을 할 때에는 양반 다리로 꼿꼿하게 앉아서 들었고, 공책에 쓸 일이 있을 때에는 꿇어 엎드려서 글씨를 썼습니다.
지붕이 초가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을이 되면 집집마다 지붕을 이을 이엉 한 마람( 짚 열 단으로 엮은 이엉을 한 마람이라고 불렀음)과 겨울에 난로를 땔 장작 한 짐씩을 의무적으로 내야 했습니다.
1학년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학부님들에게도 인기가 많았고, 아주 예쁜 여 선생님이 담임이었는데, 한 달쯤 지나 갑자기 반이 두 반으로 늘어나면서 나는 꽤 못생긴 남자 선생님 반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억울하고, 참담한 기분이 들었는지 며칠 동안은 학교에 안 간다고 울고불고 했었습니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 다시 반은 하나로 합쳤는데, 그 이유는 같이 다니던 친구들 중에 나이가 많은 친구들이 꽤 많이 월반을 해서 바로 3학년으로 올라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에는 한 학년을 껑충 뛰는 월반제도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우리 학교 옆에는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는 도솔봉이라는 산이 있었고, 그 기슭 아래로 낙동강의 시작이 되는 제법 큰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내나 산기슭에 자주 올라갔었습니다. 냇물에 사는 생물을 공부할 때에도, 봄에 피는 꽃을 공부할 때에도 거기에 나가서 공부했는데, 특히 가을산은 가슴이 뛸 정도로 좋았습니다. 제각기 곱게 물이 드는 나뭇잎을 따 모으는 것도 좋았고, 사마귀, 오줌싸개, 풀쐐기 같은 곤충들의 겨울나기 집을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산 기숡에는 시퍼런 물이 담긴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물빛이 얼마나 진했는지 그 옆에 서면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 갈 것만 같은 현깃증이 나기도 했습니다.
그 속에는 천년 묵은 이무기가 살고 있는데 해마다 한 사람씩 잡아간다고 하는 말이 아이들 사이에서 퍼지면서부터는 웬만해서는 그 호수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 냇물은 제법 물이 많아서 저학년 때에는 다리가 아니면 건너기가 힘들 정도로 물살이 세었습니다.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 봄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봄 동산을 공부하기 위해 올라갔다가 나는 일행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학교로 가야겠다고 울면서 냇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냇물에 들어서니 물살이 세어서 금방이라도 떠내려갈 것 같았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어떤 아저씨가 다리 있는 곳을 가리켜 주더군요. 겨우 건너서 교실로 들어갔더니 아이들은 인사를 마치고 막 쏟아져 나오는 중이었습니다.
내가 그 때 교실로 들어갔더니 선생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아니, 너 같이 오지 않았었니?” 하고 놀라대요. 그 때 선생님의 표정이 한 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없어진 줄도 모르고 다른 아이들만 달랑 데리고 학교로 돌아온 선생님이 참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내가 그 산에서 아주 행방불명이 되었거나 냇물에 떠내려가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냇물은 비가 많이 오면 전구동 마을에 있는 아이들은 학교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에 멀쩡했다가 갑자기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그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조퇴를 하고 일찍 돌아가야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모두 냇가에 나가서 하나하나 업어서 건너 주어야 했고, 비가 계속되면 그 아이들은 비가 그치고 냇물의 양이 줄어들 때까지 학교를 쉬어야했습니다.
그 때에는 그게 참 부럽대요. 학교 건물은 두 개의 동으로 되어 있었는데, 건물 사이에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깊숙한 우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2학년 때였습니다.
그 날 우리는 청소 당번이었고, 오전 수업을 마친 선생님은 사택으로 점심 식사를 하러 들어갔습니다.

청소를 마친 우리들 중에 친구 하나가 난로에 불을 꺼야 한다면서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왔어요. 그 친구는 우리보다 나이가 한 두 살 정도 더 많은 친구였기에 우리는 그 친구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한다고 생각했고, 그의 말대로 하는 게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는 길어온 한 양동이의 물을 난로에 그대로 들어부었습니다.
피식, 원자폭탄 투하될 때를 방불케 하는 검은 연기가 천장까지 올라간 것까지는 괜찮았습니다. 난로 아궁이를 타고 잿물이 흘러내리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감당이 안되더라고요. 모두들 어리벙벙한 모습으로 보고 있는데, 마침 옆 교실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던 누나가 그 광경을 보더니,
“어머, 얘들아, 불은 이렇게 끄면 안 되는 거야.”
하면서 자기 교실로 가더니 걸레와 쓰레받기와 세숫대야를 가지고 와서 깨끗이 청소를 해 주대요. 시커먼 잿물에 손을 다 적시면서 걸레로 닦은 물을 세숫대야에 꼭꼭 짜곤 하던 그 모습이 아직까지 기억에 선명한 것은 그 때 그 누나의 행동이 너무나 고마웠기 때문이었지요. (이 이야기는 ‘엄마도 장난꾸러기였대요.’ 라는 책에 동화로 써서 실었습니다.)
그 우물은 학교 근처에 살고 있던 아이 하나가 (학교에 들어오기 전) 일요일 날 우물에 와서 들여다보다가 거꾸로 처박혀 목숨을 잃은 후에 폐쇄가 되었고, 그 바람에 우리는 물을 마실 때마다 학교 가까이에 우물이 있는 집으로 쫓아다니며 구걸을 하다시피 해서 마셔야 했습니다.
| 그 후 우물은 펌프로 바뀌었다가, 다시 수도로 바뀌면서 우리 학교의 역사를 지켰습니다. 누구나 학교 시절을 떠올릴 때면 소풍, 운동회, 학예회를 빼 놓을 수 없지요. 우리가 소풍을 갔던 장소는 주로 소백산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는 희방사였습니다. 앞에 높이 20미터에 가까운 폭포가 떨어져 내리는 절경과 역사 깊은 절이 어우러져 그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자주 찾아가는 곳입니다.
지금은 절 입구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왕복 12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갔다가 걸어왔습니다.
|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다가 희방사 계곡 안으로 들어서면 서늘한 산 공기가 온몸을 감싸 안아주던 기억도 새롭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물줄기가 어쩌면 쉬지 않고 끊임없이 계속 이어지는지 쳐다볼수록 신기하기만 했었습니다. 바위에 부딪혀 허옇게 이슬 때문에 생기는 무지개도 신비했고, 우리를 절 마당에 세워놓고 가사 장삼을 걸친 스님이 들려주던 희방사 유래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보물찾기에서 지우개라도 하나 찾아내면 기분은 하늘이라도 훨훨 날아가는 기분이었지요. 운동회의 추억도 새롭습니다. 매스게임, 줄다리기, 달리기, 기마전...... 그때에는 운동에 별 기능이 없어서인지, 맨손으로 달리기를 하면 꼴찌 아니면 꼴찌를 겨우 면하는 정도였는데, 이상하게 중간에 뭔가 놓여 있으면 그건 잘되더라고요. 장애물 경기나, 붕어 낚기, 구구셈, 손님 찾기 같은 경기에서는 꼭 입상을 했으니, 아마도 선생님들이 구상해 낸 경기가 나 같이 맨손으로는 못 달리는 사람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나 봅니다.
학예회는 내가 6년 동안의 학교 생활에서 딱 한 번 있었습니다.
5학년 때. 그 학교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학예 발표회를 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때 교실구조는 가운데를 가로막은 문처럼 되어있는 나무 벽을 뜯으면 세 칸을 하나로 합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5, 6학년 아이들은 우리 담임선생님의 지도로 연극을 했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별 기억에 없고, 연습을 하던 중에 아이 하나가 얻어맞는 장면에서 너무 아프게 맞았다고 대본을 집어 던지면서 뛰쳐나갔던 일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학예회를 바로 코앞에 두고 연극 안 하겠다고 뛰쳐나가는 바람에 지도 선생님이나 같이 출연했던 아이들을 모두 힘들게 만들었었지요. 겨우 사정을 해서 어쨌든 연극은 무대에 올랐습니다.
아이들의 책상을 한 군데로 모아 무대를 만들고, 전 학부모를 초청해서 펼쳤던 학예회에서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라갔었고, 그 때 현대 무용이나 고전 무용이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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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합창, 독창, 무용...... 직접 출연하는 아이들은 대기석에서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없었습니다. 틈이 나면 슬쩍 나와서 몰래 몰래 훔쳐보다가 지도 선생님의 호랑이처럼 변하는 표정에 놀라 후다닥 쫓겨 들어가기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 당시로는 굉장히 큰 무대였는데 이제는 한 장의 사진만을 남겨 놓은 채 학교도 학예회도 모두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로 엊그제 같은 일들인데....... 늘 내 가슴에 크게 자리했던 모교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내 가슴 한 쪽 모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아픔이 물결처럼 밀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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