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이 부처 앞에 나아가 "세존이여, 만약 모든 중생이 대비신주를 지송하고도 삼악도에 떨어진다면 저는 깨달음을 얻지 않겠습니다. 대비신주를 외워 간직하고도 현재 삶 속에서 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이루지 못하는 이가 만약 있다면 대비심다라니라는 이름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世尊 若諸衆生 誦持大悲神呪 墮三惡道者 我誓不成正覺 誦持大悲神呪 於現在生中 一切所求 若不成就者 不得名爲大悲心陀羅尼也)"고 아뢰고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障句大陀羅尼)를 설하였다. 신비롭고 오묘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다라니는 《천수경》에 수록되어 있으며 능엄신주(楞嚴神呪)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독송되고 있다.
《천수경》은 다라니를 중심으로 개경(開經), 계청(啓請), 사홍서원(四弘誓願), 삼귀의(三歸衣)와 같은 의식문과 준제보살과 관련된 준제주(准提呪)로 이루어져 있다. 현존하는《천수경》체제는 가범달마(伽梵達磨), 불공(不空) 등이 한역한 초기 번역본과는 차이를 보이지만 변하지 않는 근원과 정수는 신묘장구대다라니이다.
통일신라시대에도 관음신앙과 관련하여 천수주·대비주를 독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역사가 제법 깊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천수경》편찬과 유포는 송나라의 사명지례(四明知禮 960∼1028)에 의해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에는 고려 중기부터 유통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몇 차례의 간행을 거치면서 《천수경》은 의식용 경전으로 점차 짜임새를 갖추게 되었고 지금의 체제로 완성되었다.
조선시대 《천수경》과 관련된 흥미로운 움직임은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뜻을 풀이하고자 했던 시도들이다.
당나라의 역경가인 현장스님(602∼664)은 불경을 번역하면서 다라니와 같이 주문, 바가범과 같은 고유명사, 염부수와 같은 인도에만 있는 나무 이름,
야뇩다라삼먁삼보리와 같은 최상의 깨달음을 표현한 용어, 반야와 같은 불교에만 있는 독특한 용어 등은 번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오랜 세월 다라니는 해석없이 범자 원음만 고스란히 읽어왔으나 이 불문율도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성종 7년(1476)에 간행된《관음보살주경언해觀音菩薩呪經諺解》에서는 진언을 한글로 음역하는 작업이 이루어졌고,
숙종 38년(1712)과 영조 38년(1762)에 간행된 《관세음보살영험약초觀世音菩薩靈驗略抄》에는 한문 해제가 붙은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실리게 되었다.(도 1) 직지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신묘장구대다라니 목판>은 조선 후기에 있었던 또 다른 다라니 해제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신묘장구대다라니 목판>에는 다라니 전문이 목판 앞뒤에 걸쳐 판각되어 있다. 앞면은 '恩赦滅罪隨意萬福'이라는 제목 아래 진언과 여래삼존도가 있고, 그 밑으로 29개로 나누어진 작은 변상도가 있다. 뒷면 상단은 '千手神妙章句大陀羅尼'란 제목과 아미타여래로 추정되는 여래도가 있고, 그 옆에 관세음보살을 방문한 선재동자를 그린 변상도가 있다.
그 아래에는 앞면과 마찬가지로 21개의 작은 변상도가 자리한다. 작게 구획된 변상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림을 중심으로 한글로 된 진언 독음이 있고, 변상도 아래 왼편에는 진언이, 그 오른편에는 다라니를 한글로 풀이한 해제가 있다.
이 목판은 《관세음보살영험약초》에 실린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변상도, 진언의 한자 독음 등을 모본(母本)으로 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문 해제가 아닌 한글로 다라니의 뜻을 풀이하였다. 다라니의 마지막 7구절은 변상도 없이 진언과 '當得見佛'이라는 한자 뜻풀이만 달아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탑다라니부(塔陀羅尼符)와 화합부(和合符)를 포함한 7개의 부적을 실었다.
이 부적들은 관세음보살이 언급했던 다라니 지송자의 세속적인 염원과 이를 성취시키는 주술적인 힘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다라니가 당시 민중들의 삶에 얼마나 친숙하게 다가섰는지를 보여준다.(도 2)
현대에 와서 산스크리트에 근거해 신묘장구대다라니의 의미를 해석한 몇 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이들의 의견을 살펴보면, 신묘장구대다라니는 관세음보살을 찬탄하는 글이며 그 속에는 힌두신인 시바(Siva)와 비쉬누(Visnu)를 상징하는 용어들이 관세음보살에 비유되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해석은 '관세음보살이 손에 바리대를 가지시다'·'불공여래와 나석보살이 천병을 거느린 양' 등 서로 다른 독립된 내용을 연결하여 해석한 조선후기 신묘장구대다라니와는 확연히 다른 내용이다.
(도 3) 어디에 근거하여 이런 해석이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점은 언문으로 해석된 신묘장구대다라니는 조선시대 불교를 믿던 많은 이들에게 쉽고 친숙한 우리 것으로 이해됐을 것이고 그들의 가장 가까운 존재로 관세음보살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이용윤(직지성보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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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