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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가을,
네팔의 연락장교가 폴란드의 등산가 예지 쿠쿠츠카는 마칼루에 오르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고
자기 나라 관광성에 설명했다.
그러나 당신은 지구상에서 다섯 번째로 높은 산을 혼자 오르고
그 성과를 무척 기뻐했으며 이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런데 실은 당신이 히말라야에서 이룩한 이 업적을 남들은 잘 모른다.
그말이 맞다.
12월 초에 나는 보이테크 쿠르티카와 같이 폴란드로 돌아왔다.
인터뷰와 보고를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12월 13일은 신문이 없는 날이어서 한참 후에야 히말라야 정복에 대한 보도가 있었고 크게 이목을 끌었다.
그러나 이때 나온 이야기에 관한 한 내가 마칼루를 어떻게 올랐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원정 초기에는 한결같이 어려움이 많았고
1981년 여름은 원정 준비하는 데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폴란드의 식량사정이 아주 궁했다.
보이테크가 자기는 귀국하지 않겠으니 나더러 식량과 장비를 가지고 오라고 카트만두에서 편지를 보내왔다.
다행히 그는 봄에 많은 물자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나는 보이테크가 등반을 준비하면서 마음에 맞는 짝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동분서주하고 있었는데, 나에 대해서 알아보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언제였던가 나더러 마칼루 서벽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럼, 마음에 들지!" 하고 대답했는데 그말은 그때뿐이었다.
그뒤 그는 안드르제이 초크에게 산행을 제안했지만 무엇 때문이었는지 안드르제이는 흥미가 없었다.
마침내 보이테크는 나를 찾아와서 1981년 가을 원정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물론 이를 받아들였다.
보이테크는 힌두쿠시와 히말라야에서 훌륭한 성과를 올렸다.
그는 폴란드, 영국, 프랑스 합동 원정대에 참가해서
다울라기리를 알파인 스타일로 해내고 소수 정예 원정대의 선구자로 인정을 받았다.
우리를 목표를 마칼루의 서벽이든가 또는 보이테크가 봄에 여기서 성공한다면 로체 남벽으로 삼기로 했다.
나는 이 무렵 몇달 동안 슐레지엔 원정대를 따라 뉴질랜드에 가 있었다.
나는 로체도 에베레스트도 올랐지만 내가 속해있는 연맹에서 보내는 원정만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당시 연맹에서는 히말라야 원정 계획이 없어서 나는 지구의 반대편으로 갔던 것이다.
뉴질랜드에서 돌아오자 카트만두에서 온 보이테크의 편지를 받았다.
"자네를 기다리니 바로 오게!" 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여비와 식량 장비 등을 장만해야 했다.
그런데 이 여행은 정말로 네팔 식의 불세례나 다름없었다.
나는 도움을 청했던 리스자르드 바레키와 함께 원정대의 짐을 가지고 인도를 절반 가량 가로질렀다.
네팔에서 쓸 돈 외에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달러를 한푼이라도 아끼려고 애썼던 것이다.
우리가 원정에서 돌아오자 누군가 불가리아 신문을 손에 쥐어 주었다.
우리 원정을 주로 다룬 표제가 아래와 같이 되어 있었다.
"2,300달러로 마칼루 도전ㅡ 원정인가, 무책임인가?"
그들은 적은 돈으로 히말라야에 도전하여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인도대륙을 절반 횡단한 일도 말하자면 또다른 경험을 얻는 데 도움이 된 셈이다.
나는 어떻게 해냈는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당시 몇마디 영어로 세관, 포터, 역직원 그리고 도중에 만난 사람들과 다투다시피 하면서 일을 처리했다.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해냈는지 지금 이야기 하자면 입이 열리지 않는데 여하튼 약속한 날까지 카트만두에 닿았다.
보이테크는 영국인과 프랑스인 두 사람이 도착하는 것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해서 마칼루에서 인기 스타들이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하고 보니 르네 길리니라는 프랑스 사람은 못 오겠다고 전보로 알려왔다.
영국인 알렉스 매킨타이어가 마침내 도착했다.
우리는 길을 떠났다.
비행기로 툼링타르에 내리자 포터 스무 명을 데리고 열흘 동안 걸어서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물론 마칼루에서 보복전을 벌이기로 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보이테크의 봄 원정대는 고도 7,800미터 지점에서 저지당했는데,
우리는 초등정자의 루트를 따라가며 고소순응를 한 다음 정상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며칠 동안 짐을 정리하고 무게를 줄이는 데까지 줄이려고 여러 번 배낭을 다시 꾸렸다.
1그램이라도 줄여야 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모두 며칠 동안 산 위로 올려야 했다.
알파인 스타일은 당시 첫 지지자를 얻었는데 당신들이 그 선구자였다.
그렇다.
오늘날에 와서도 우리는 얼마 안되는 알파인 스타일 실천자 가운데 들어있다.
우리보다 앞서 라인홀트 메스너와 페터 하벨러가 에베레스트에서 알파인 스타일을 실천했다.
그렇지만 세계 최고봉에서 제일 먼저 개척한 사람은 영국의 덕 스코트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에서 '순수한 알파인 스타일'을 언급한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앞서 간 원정대가 남겨놓은 고정로프와 만나게 되는 것은 거의 틀림없으니까.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앞에 간 원정대가 실패한 뒤, 같은 루트를 피해가기란 어려운 일로 보이는데,
이런 일들이 순수한 알파인 스타일에서는 용납이 안된다.
이 점을 생각해볼 때 나로서는 좋은 스타일로 오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원칙이 있을 따름이다.
말하자면 정상을 오르되 순서를 따라 안전하게 빨리 오르는 것이다.
물론 나는 알파인 스타일을 이상적인 등반형식으로 보며 이것을 배우려면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알파인 스타일로 오르는데, 대개의 경우 내가 말하는 '콤비네이션 스타일'로 하게 된다.
그 좋은 예가 최근에 오른 마칼루 안나푸르나 그리고 시샤 팡마 원정이다.
마칼루에서는 첫 비박을 암벽 하단에서 하고 두 번째는 6,300미터 고소에서 했다.
거기까지는 바위터가 아주 좋았다.
눈이 잘 얼어붙어서 빠른 속도로 오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뒤부터는 루트가 어려워졌다.
그야말로 빙판을 올랐는데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누구도 그를 살릴 수가 없었을 테니까.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자기까지 죽음의 위험에 빠져들게 될 판이었다.
우리는 이 위험을 최소한도로 줄이려고 노력했다.
세 번째 비박을 하고 나서 7,800미터 고소에 이르자 400미터가 넘는 높은 암벽이 나타나서 정상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처음에는 가장 어려운 곳으로 알았는데 길을 잘못 들어도 단단히 잘목 든 것을 바로 깨달았다.
우리는 하켄에서 하켄으로 이어가며 20미터의 암벽을 쉬지 않고 오르느라 꼬박 하루를 보냈다.
앞에 오르던 알렉스가 갑자기 거대한 오버행에 부딪쳤다.
알렉스는 그 자리에 선 채 안되겠다며 머리를 흔들었다.
무슨 길이 있어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식량과 장비가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아 보았는데 아직 3일 분이 있었다.
그러나 정상에 갔다가 베이스캠프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사기가 뚝 떨어지고 그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오후 시간도 늦어서야 햇살이 서벽을 비추었는데 추위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혹한이 퇴각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결심을 재촉했다.
"우리가 비록 벽에 부딪쳐 길을 잃었지만 그래도 산을 정복할 수 있다" 고
내가 말했으나 보이테크와 알렉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틀 뒤 베이스캠프로 돌아오자 알렉스는 카트만두로 돌아갈 생각으로 그 길로 베이스캠프를 떠났고
나는 보이테크와 함께 남았다.
알렉스가 포터를 보내주겠다고 했으니 여기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르지 못한 정상이 머리에서 가시지 않았다.
원정을 앞에 두고 보이테크가 파트너를 구하려고 애썼던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다시 해보자고 그를 설득할 판이었다.
그런데 보이테크가 단호히 거절하니 난들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는 발 한두 군데 동상을 입었는데 이것이 거절의 이유가 되었을까?
나는 두 차례의 원정이 바로 이어져 이뤄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정도의 동상이라면 누구나 체험하고 있는 일이다.
그때에 혼자 오를 생각을 했는가?
그렇다.
메스너는 벌써 낭가 파르바트와 에베레스트를 혼자 올랐으니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며칠 동안 날씨가 좋지 않아서 움직이지 못했다.
마칼루 산역에서는 한 시기에 두 원정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메스너와 스코트가 남릉에서 출발하여 마칼루 산군 한가운데를 종주하려고 했고,
오스트리아 원정대는 노말 루트로 해서 등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날씨 때문에 등반을 중단했다.
등반을 다시 해보려면 그때마다 바람이 무섭게 휘몰아쳤다.
날씨가 이러니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베이스캠프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정말 정상에 오르고 싶었으며 2, 3일이면 바람이 자리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얼마 안되서 등반을 도저히 계속할 수 없음을 알았다.
산의 위쪽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식사를 끝내고 "나는 간다" 고 보이테크에게 말했다.
그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조용히 대꾸하면서도 나를 타이르려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내가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는 전부터 영국인과 함께 산에 와 있었고 그의 장비 가운데 특히 의류들이 내것보다 사실상 좋았다.
그래서 그는 내게 많은 것을 주기도 했다.
나는 보이테크가 빌려준 긴 내복바지와 겉바지에 등산화를 신고 정복을 위한 행진에 들어갔다.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밤에 텐트를 갈기갈기 찢으려던 폭풍도 날카로운 바위 모서리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도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지 못했다.
그는 모든 일을 비논리적으로 다룬다고 보였으나
사실은 규칙적으로 가장 좋은 해결책을 선택하게 하는 길은 내적 명령에 따르는 길인 듯했다.
혼자 모험에 나선다는 것은 어리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모복과 2킬로그램의 식량과
가스 스토브에 봄베 세 통 그리고 하켄 둘과 스크류 하나 텐트와 9미터 자일 등을 배낭에 넣었다."
나는 10월 12일 12시에 떠났다.
23킬로그램의 무거운 배낭과 불확실이라는 큰 짐을 같이 지고 있었다.
16시쯤 암벽 밑에 당도했는데, 비박하기에는 시간이 이르고 암벽에 붙자니 너무 늦었다.
그래서 나는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까지 계속 가다가 비박하기로 했다.
그런데 해가 질 무렵에도 텐트 칠 만한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적당한 자리를 발견하기 위해서라도 한밤중까지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비박 장소는 내가 오르던 루트와 고전적 루트가 서로 만나는 곳에 있었다.
거기는 다른 원정대가 제2 캠프로 삼았던 7,000미터 고소였다.
그곳까지는 1,600미터를 올라왔는데 결코 나쁜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큰 일을 해낸 기분이었다.
이제 근심이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바람과의 싸움은 여전했다.
나는 텐트를 세우려고 두 시간 넘게 애썼지만 결국 헛수고였다.
이제는 앉아서 밤을 지새우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눈 속에 알루미늄 폴의 끝이 보였다.
나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텐트의 4분의 1을 파냈다.
그것은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버리고 간 텐트임에 틀림 없었다.
드디어 기어들어갈 만한 자리가 생겼다.
나는 텐트 안에 들어가자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잠에서 깨어나 밖을 내다보니 여전히 강한 바람이 능선 위를 불어 제치고 눈보라가 소용돌이쳤다.
그래서 다시 망설였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ㅡ "좋아, 이제는 해볼 대로 해보았으니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나는 마실 것을 조금 만들어 마신 다음 짐을 싸서 내려갈 준비를 했다.
지평선의 마지막 광경을, 그야말로 마지막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구름의 모습이었다!
변화가 일고 있었다.
하늘이 개더니 다시 어두워졌다.
폭풍은 적어도 두세 시간 동안 잠잠할 것으로 보였다.
아니 그러한 징후가 이미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래 올라가는 거다.
내려가는 것이 아니다!
오후 두 시쯤에야 나는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 시간 뒤에 티ㅡ파스(고개)에 섰고 우리들이 고소에 순응하느라 오르며 썼던 텐트를 눈에서 파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까지 텐트 안에 있었다.
구름이 어느새 마칼루 아래쪽을 덮고 천천히 피어올랐지만 바람은 상당히 누그러졌다.
그러나 높이 8,000미터 지점에서 땅을 편편하게 고르고 텐트를 세우려다가 폴 하나를 부러뜨렸다.
그래서 그동안에 활대처럼 휘어있던 폴을 눈 속에 단단히 박느라 애를 먹었다.
특히 전날 저녁에 시작했던 것이지만 능선을 따라 오르면서 내내 사람 눈을 끌던 것이 나를 괴롭혔다.
그것은 크게 걱정될 것까지는 없었으나 계속해서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두 사람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텐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내가 그에게 말을 걸었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신이 또렷했다.
도대체 이러한 망령이 어디에서 왔을까?
어쩌면 마술같이 순간적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은가?
이러한 물음이 나타난 현상보다 더욱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등반을 계속해도 괜찮을지 하는 의문도 곁들어 나를 못살게 했다.
아침에 정상으로 떠나면서 역시 누가 옆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다른 사람을 기다리거나 그 사람을 따라잡고 내가 앞에 섰다고 생각했다.
8,000미터 고소에서 행운이 어느 정도 작용하는가는 능선을 끊어놓는 위협적인 암벽 밑에 섰을 때 분명하다.
이 장해물을 돌파하는 데는 길지도 짧지도 않고 꼭 9미터 되는 자일이 있어야 했다.
50센티만 짧았어도 정상으로 전진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유리한 곳을 찾으려고 암벽 앞에서 위 아래로 오르내렸는데 왼쪽은 눈이 깊어서 몸이 빠졌다.
그래서 오른쪽을 살펴보았다.
바위의 작은 틈을 보니 조금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 자일 없이 오르자니 겁이 났다.
그래서 나는 하켄을 박은 다음 거기에 슬링을 걸고 자일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자일 길이만큼 오른 뒤 하켄을 또 박아서 자일을 다시 고정시켰다.
이제 나는 첫 번째 "휴식 장소"의 자일을 풀 생각으로 다시 내려갔다.
나는 프루직 매듭으로 계속 자기확보를 해가며 암릉에 올라섰다.
자일의 길이가 눈으로 덮여 있는 다음 암릉 밑까지 간신히 닿았다.
시계를 보니 14시였다.
정상까지 아직도 300미터 가량 남아있었는데 세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16시 45분쯤 나는 배낭에서 셀리나가 준 나무로 된 작은 무당벌레를 꺼냈다.
길을 떠나려는데 그녀가 아들 마시에크의 장난감인 무당벌레를 호주머니에 넣어주며 마칼루 정상에 놓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말대로 하고 프랑스제 하켄 두 개를 얻었다.
그리고 나서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해가 있을 때 암벽 지대에 도달하려 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는 내 발자국을 따라 내려갔는데 바람이 점점 세차게 불어와 그 발자국마저 지워버렸다.
전인미답의 지대를 가는 격이었다.
그러니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캄캄한 바위터 가장자리까지 가는 동안 마음은 더욱 불안했다.
이제 최악의 사태에 부딪쳤다.
나는 오르면서 쉬었던 곳을 다시 찾으려고 밑으로 내려갔다.
하켄을 박을 만한 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리고 자일을 조금이라도 길게 하려고 보조자일을 모두 이었다.
나는 하켄을 박고 천천히 내려갔다.
그런데 밑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였다.
자일 끝에 내려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나는 하강장치에서 몸을 풀고 팔로 매달리면서 조금씩 내려갔다.
손에 자일 끝을 느끼는 순간 등산화가 눈에 닿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나는 내려가려던 곳에 다다랐다.
"나는 그 다음날 베이스캠프 위에 있는 자갈밭 근처에서 그를 환영했다.
유레크는 지쳐서 얼굴이 잿빛이고 몸이 거꾸벙했다.
얼굴에는 기쁨도 슬픔도 없었다.
그는 그저 조용했다.
바람과 고도와 싸우며 시련을 겪은 이 사람과 끝없이 펼쳐진 세계가 뚜렷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정상에 올랐다'고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한 사람이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는 처음부터 연락장교와 문제가 많았다.
이 20대의 젊은이는 출신가문이 좋았을 뿐,
외국 원정대가 자유롭게 여행하며 원주민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아무런 능력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관리는 자기 봉급으로 넘볼 수 없는 비싼 장비를 가지고 있으며 백인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해오면서
자기나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듯이 우쭐댔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나간 자를 만나게 됐는데,
그는 부모가 줄을 잘 타서 이런 자리를 구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한가지밖에 몰랐다.
그것은 연락장교는 원정하는 동안 돈을 벌되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와 만나자 자기 친구는 미국 원정대로부터 카세트 레코더를 받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돈많은 원정대가 아니어서 그런 선심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규정에 따라 장비를 받았는데,
장비가 이름난 상표가 아니고 폴란드 것이라며 투덜거렸다.
그는 매일 일당과 맥주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건강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누구는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시간 보내길 아주 좋아했다.
그러다가 야단을 맞으면 포터들을 선동했다.
그는 베이스캠프를 마지막 목초지보다 높은 곳에 세우면 안된다며 우리에게 지시하거나 명령내리듯 했다.
그리고 등반을 시작하려면 당장 불안한 얼굴을 하고 우리더러 며칠 쉬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어느날 꾀병을 부리기에 우리는 잘 됐다고 한숨을 돌리고 그를 카트만두로 이송했다.
우리는 카트만두로 돌아가자 요식절차를 따라 관광성에 원정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그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보이테크나 나는 '무당벌레'를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몰랐고
연락장교와 언짢았던 일도 보고하지 않았다.
우리는 훗날 그와 다시 일하게 됐는데, 그는 계속 우리한테서 돈을 뜯어내려고 청구서 한두 장 내놓았다.
말하자면 자기 꾀병에 대한 의사의 치료비를 청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자기가 철수할 때 쓴 텐트를 달라고 했다.
이것은 지나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관광성에 의견서를 냈다.
"만일 그렇다면 그 무뢰한에게 한 루피도 주지 말라" 는 답이 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젊은 장교의 교섭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는 설명을 늘어놓았다ㅡ
"예지 쿠쿠츠카라는 폴란드 알피니스트는 결코 마칼루 정상에 서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등반 목격자로 있었기 때문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높은 산을 혼자 오른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일로 나는 관광성에 불려 갔다.
그들은 나에게 창피를 주며 그에게 돈을 주라고 설득했다.
그들은 화해하기를 바랐다.
의심하지는 않았으나 이 젊은 친구가 워낙 교섭이 능하기 때문에 내가 양보하는 것이 더욱 좋았다.
마칼루의 사건은 그 연락장교가 '라이징 네팔'이라는 일간지에
자기 이야기를 유리하게 쓰려고 했기 때문에 결과가 좋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러나 누가 재빨리 눈치채고 그에 대해 어떻게 손을 썼는지 나를 '폭로'하려던 기사는 신문에 나오지 않았다.
관광성 관리들은 나에게 나의 입장이 정당한 것을 밝힐 생각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한번 기록에 남긴다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믿고 의심하지 않았어도 관광성에서는 이 문제가 미해결로 남았다.
연락장교의 우두머리는 역시 거물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끝내 밝혀졌다.
그런데 이제 당신의 마칼루 등정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는가?
1년이 지나 한국의 등반가 허영호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가 정상에서 나의 무당벌레를 찾았다고 알려왔다.
친애하는 예지 쿠쿠츠카
지난해 10월의 마칼루 등정을 축하합니다.
나는 1982년도 한국 마칼루 원정대 대원입니다.
우리는 정상에서 거북이 장난감(빨간 바탕에 검은 점이 있는)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카라비너와 바꾸었습니다.
마스코트는 당신의 원정대원이 놓고갔다고 할리 여사가 말했어요.
서울로 회신바랍니다.
허영호
충북 제천시 화산2동 191
대한민국
이 한국의 등산가는 자기가 발견한 사실을 네팔 관광성에도 보고했다.
이렇게 해서 마칼루 사건은 일단락 지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이 한국인이 무당벌레를 거북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허영호도 '무당벌레'를 영어로 무어라 부르는지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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