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 >>은, 예전에 적은 글의 일부이다. 산냐는 상온, 파악, 판단 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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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에 있어... 산냐를 잡는 수행 중 예외적으로 효율적인 것이 있는데, ['없음'이라는 산냐]를 잡는 수행이다. 개인적으로 개발한 방법인데, 여러 감각기관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냄새를 맡으려고 시도하는 것이다(눈을 감을 필요는 없지만, 눈을 감고 있으면 더 효과적이다).
여기서... '냄새를 맡는 행위에만 집중하는 것' 즉 '냄새만 맡으려고 하는 것'이지, '코로 드나드는 공기'를 잡거나 '없음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없다'는 생각을 하면, 집중이 흩어진다. 드나드는 공기의 감촉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냄새만 맡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면, 없음이라는 산냐가 따라 붙는다. '없음이라는 관념'과 '없음이라는 산냐' 그리고 '없음(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은 같은 것이 아니다.
위에서... 후각은 쉽게 마비되기에, 냄새는 집중의 보조수단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하기에, 산냐를 잡는 수행으로 전용할 수 있는 것이다. 잠을 삼매에 이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기법은... 냄새가 난다면, 오히려 냄새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그냥 계속 냄새만 맡으면 된다. 그러면 금방 냄새를 맡을 수 없다.
보통 방에서 조용히 냄새를 맡으려고 시도해 보면, 냄새는 거의 감지할 수 없다. 그래서 냄새를 맡는 일에 집중하면, 대단히 빠르게 집중이 실현된다. 심식의 대상으로서의 색온의 파생물질을 잡는 수행보다 빠르다. 전환과정 없이 곧바로 산냐를 잡는데다가, 동일시할 대상이 없는 까닭이다. 과정이 대폭 단축되어 있다.
하지만 역시 부작용이... 뭐... 내가 개발한 방법들은 전부 '조금씩(솔직히 조금? 심각하게)' 부작용이 있는데... 흠... 이 방법의 부작용은... 집중이 실현되었을 때, 의식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작용을 막기 위하여, 암시를 시도한 바 있는데... 암시의 효력이, 유형의 대상이 아니라 없음이라는 산냐만이 대상일 때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듯 하다. 그래서 선정의 경계로 나아가는 삼매수행에서는 권할 바가 못된다. 따라서 삼매라 이름할 정도의 집중을 실현하기 전에 멈추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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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 [ '없음'이라는 산냐 ]를 붙잡는 것은, '체험' 즉 '사실'이다. [ '없음'이라는 산냐 ]는 있으니까... '있다'고...
최근 꼬리말에서 거론한 '발바닥 감촉'이라는 사실 곧 체험을 잘 고찰하면, 역시 최근 꼬리말에도 적었듯, 반야부의 '공'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파악 즉 산냐가 발생한다. 산냐가 발생? 따라서 산냐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산냐의 체험은 그 산냐의 내용을 체험한게 아니고, 그 산냐를 체험한 거다.
어쨌든 그것도 체험 즉 사실이기에 그 산냐 즉 '공'이라는 파악을 대상으로 붙잡는 집중도 가능하다. 그 산냐는 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단지 그 산냐의 내용이 '공'일 뿐이다.
'공'의 산냐, '비어 있음'의 산냐, '없다'는 산냐...
엄청 있어 보이지만, 위와 같이 냄새로 형성해도 똑 같이 '없다'는 산냐가 발생한다.
즉 그러한 산냐를 붙잡기 위해서는, 중관을 몰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사실' 즉 '체험'이 뭔지 몰라서 자꾸 말에 먹히는 분들이 많은 듯...
제발 가장 쉬운 사실 즉 체험이라도 붙잡고, 그 사실 즉 체험으로 뭔가 좀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단 한번이라도 좀 했으면 좋겠다.
불교를 하고 싶다면... 불교를 알고 싶다면...
스스로를, 자신의 시간을, 계속 말장난의 제물로 삼는 일은 좀 제발 그만하고...
첫댓글 기회가 되면, 여래장 즉 일심 계열이 취하는 꿈의 구조도 간단하게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한다.
a. "냄새만 맡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면 '없음 이라는 산냐'가 따라 붙는다. "
--> 냄새가 감지 되지 않아, '냄새가 없다는 관념'
b.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참으로 없음. 없다는 관념조차 없다.
a는 유위법
b는 무위법
방문객님 예전 글..
이렇게 다시 만나니
예전 열심히 공부하던 생각도 나고
당시 번창했던 화엄의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없음이라는 생각 = 없다는 생각을 하면 = 없다는 언어적 생각을 하면 = 없음이라는 관념 = 색온의 파생물질 = 색수상행식 모두 있음
빛으로 가득한 허공 = 어쨌든 허공 밝았다 = 어둡고 텅 빈 공간 = 끝 없는 어두움 = 색온의 파생물질 = 색수상행식 모두 있음
없음이라는 산냐 = 없다는 산냐 = 없다는 직관 = 상온(산냐) = 파악 작용 = 상온 있음과 식 있음 (행온은 잠재된 추진력, 수온 중립, 색온은 미발현 잠재력)
없음(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 소멸 = 멸진정 = 상수멸 = 감지(작용) 없음 = 식소멸
대충 위와 같이 볼 수 있습니다. 빛은 보너스... 빛(=공간)이 관념이거든요. 그런데 그냥 해보면 그냥 압니다. 어려운 거는 아니니까요.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강하게 발생하거나, 붕뜨는 느낌이 발생하면 여하간 강한 느낌이 발생하는 경우 멈추는게 좋을 듯.
이제는 체력도 그렇고 시간도... 여하간 예전처럼 길게 적고 그러는 거는 못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란 자기 방식대로 파악하려는 경향성이 있습니다..그렇듯 우몽도 예외일 수는 없어서 위 방장님의 본글과 꼬리글을 보니 다음과 같은 생각이듭니다.
뭉뚱거려 송구한 마음도 듭니다
그러니까 위 방장님의 = 이 들어간 꼬리말의 내용은 마치 비유하자면 황금을 어설프게 아는 사람이 꼭 황금 같이 생긴 가짜를 주워 들고 황금이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을 지적하신 말씀으로 들립니다..죄송합니다
우몽의 수준을 감안해서 살펴주십시오-()-
'공'을 보통 있지는 않지만 없지는 않음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있지는 않지만 없지도 않음'이라는 체험은 없습니다.
'있지는 않지만 없지도 않음'이라는 판단은 있어요. 그런데 그처럼 복잡한 판단은, 유효한 직관 즉 산냐를 만들지 못합니다. 언어적 판단에 한없이 가깝구요. 즉 색온입니다.
그래서 보통 공삼매니, 여하간 공으로 뭔가 사실을 체험하고 집중을 개발할 때는 없다는 산냐를 형성해서 합니다.
중론의 논리, 사실 좀 빈약해요, 빈약하다... 좀 과한 표현 같구요. 세부적으로 하나 하나 따지면, 논리적 허점은 있어요. 하지만 뭐...나가르주나가 그 논리를 전개한 상대에게는 유효한 논리였기에, 허점이라고 또 몰아붙일 수는 없구요. 상대방 논리에 대응해서 타파하신 거라서요. 상대방이 달라지면 또 다른 방식으로 논파하셨을 테니까요.
어쨌든 중관 논리로 뭔가 직관을 생성하고 수행하려고 할 때에는, 공즉시색을 쓰는게 아니라, 색즉식공의 논리를 가져다가 씁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요. 우리에게는 있으니까... 없는 거를 가지고 할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공즉시색 논리는 보너스고... 우리 조건에서 수행에서는 우선 색즉시공 논리가 필요한 거예요.
잘 살펴보겠습니다
방장님의 세밀함은 늘 감탄스럽습니다 -()-
그래서 우리에게 있는 것이 실제로는 없다는 것을, 사실 즉 체험을 가지고 점검하며 확신을 부여하는 작업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아... 없구나... 있는 이 사실 즉 체험이, 이치상으로 없는 거일 수 밖에 없다..."하고 무릎 한번 팍 치구요. 이제 없다는 산냐가 형성되는 겁니다. 위에 적었듯, 냄새만 맡아도 형성되기는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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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체험에서, 혼동이 많이 발생하기도 해서요.
빛이 있었냐? 어두웠냐? 공간이 있었냐...그런게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고런게 있었으면, 색온이 있었다는 뜻이거든요.
오늘 우몽님의 글을 보니, 화두 이야기가 나오고 꽂히는 거 이야기도 나오던데요. 화두를 들고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런 거는 화두에 꽂힌게 아니잖아요?
사람에 따라서 꽂히기 위해 그런 분석 작업이 필요한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되는 건데요. 하지만 그런 분석 작업을 하는 거를 두고, 우몽님이 화두에 꽂혔다고 한 거는 아닐 거 아닙니까?
없다는 산냐를 잡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냄새만 맡으려고 해야 하는데, 그러면 그냥 없다는 산냐가 따라붙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 거 같더라구요.
없는데 없는데... 그런 식으로 언어적 생각을 하면, 직관 즉 산냐를 잡는데서 멀어집니다.
언어적 생각, 관념 등등 빛, 공간 등등 이런 거를 강학상 색온의 파생물질로 보는 입장에 있거든요. 그렇게 볼 때, 가장 무난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요. 그 견해에 따라, 생각을 하면 산냐를 잡는 작업이 멀어진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분별해 놓은 겁니다.
티벳 불교 기준으로 중관을 모르면 불교의 최상승 견해를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유부, 경량부, 유식을 배우는 이유도 중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섭니다.
본글대로 냄새나 발바닥의 감촉 등을 이용해 없음이라는 산냐를 유도해낼 순 있지만
십이연기도 (실체가) 없고,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생멸도 없고, 현재미래과거도 없고, 시간과 공간도 없고, 식도 없고, 오온도 없고 등의 폭넓은 공성의 감수를 얻기에는 부족합니다. 즉 법무아를 완전히 체득하기 위해선 중관에 대한 이해와 사유가 중요합니다.
예..뭔 말씀인지 와닿습니다..
법무아님은 정말 국어 실력이 문제라...
님이 위에 적은 거와 같은 거는 이미 제가 다 적어놨어요.
다만 위 본글의 목적은 반야부의 판단을 체험한다고 하니까 그런 거라...
판단은 체험이 아니라니까...
체험에서 판단이 생기는 것이고...
그 다음 생긴 판단을 가지고 그 판단으로 집중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당최 말을 몬알아듣네...
봐요.... 어떤 놈이 나는 하나님이다... 전지전능하다는 판단을 했어.
그러면 그 사람이 하나님이야? 아니잖아요.
자신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는 판단은 있지... 그 판단은 체험했다고 할 수 있지... 체험으로 치면, 그뿐이잖아.
발바닥 감촉을 중관의 논리로 없다는 판단이 섰어.
그래서 그 없다는 판단으로 수행한다고 쳐...
다른 사실이잖아... 발바닥 감촉, 없다는 판단 이렇게 두개의 사실이잖아... 두개의 사실, 두개의 법, 두개의 체험이라고...
그러니 단 한번이라도 사실 점검을 하시라구요.
말장난 그만 하고...
그토록 중관이 좋으면, 발바닥 감촉이 없다는 논증을 하시라고... 추상적인 말만 늘어놓지 말고, 한번 해보세요.
그 단순한 사실을 가지고, 어떻게 논증하는가 한번 들어 봅시다.
===
반야부가 말하는 공을 아는 수행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위와 같이 두개 이상의 사실로 하는 경우가 있고... 분석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거고...
또 하나의 방법은 하나의 법에 집중하는 거야... 붙잡는 거...
집중으로 빡세게 붙잡다 보면, 그 대상이 없어져 버려...
집중이 돋보기 역할도 하지만, '무엇이든 꿰뚫는 창' 즉 바즈라의 역할도 하기 때문이라...
그렇게 대상이 없어지는 경우, 판단이 생기지... 아... 없구나... 없기에 붙잡을 수 없구나...
'없구나, 없기에 붙잡을 수 없다'는 판단이 공을 아는 거야... 이제 그건 또 판단이라고...
대상이 없어지는 체험에서 생기는 판단... 없어질 때까지 집중을 강화해 나가며 붙잡는 거는 체험...
그 사실에서 꼭 공으로 판단해야 하는 거는 아니지만, 공을 좋아하면 공으로 판단하면 되는 거...
무슨 최상승이고 고구마고 간에, 그런 거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뭔 최상승이야, 기초라도 하면 되요.
뜬구름 같은 말만 계속 하지 말고, 자기에게 맞는 방편 하나라도 붙잡고 시작이라도 좀 하시라구요.
방문객님처럼 자의적 해석으로 불교를 공부하면 그렇게 배타적으로 변합니다. 제가 말한 분석명상을 통한 공성의 감수 체득은 달라이라마나 오명불학원의 캔포가 그대로 말하는 내용입니다.
발바닥 감촉이 없다는 논증은 여러가지 차원에서 이뤄질 수 있는데 원인과 결과 차원, 부분과 전체 차원, 상호연기적 개념 차원, 시간 찰나적 분석 등 다양합니다. 밑에 글에서 말한 수즉시공에 해당합니다. 굳이 중관을 쓰지 않더라도 중고등 수준의 과학 지식으로도 발바닥 감촉은 없다고 밝힐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럼 한 가지 궁금하네요. 방문객님은 현재, 과거, 미래 세 가지가 모두 없다는 것을 방문객님 기법으로 어떻게 체험합니까. (추가 댓글은 일이 있어 나중에 답니다)
업어 오는 것도 아니고 내 입장을 무자게 적어 놨는데, 비판이라도 하고 자의적이라고 하셔야지...
발바닥 감촉 같이 뻔한 거를 이야기해 보라고 했두만 그거는 외면하고, 얼어죽을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없다의 체험?
시간과 공간은 조건 발생이라. 오온이 조건발생이야, 오온이 없으면 시공간도 없어.
방문객님 얘기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이것도 쉽지만은 않을지도..)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매우 단순하고,
뭔가로 향하는 것이 아니고,
속된말로 자극적인 맛이 없기 때문에..
산냐로 대단한 성을 쌓아보려는 행자는
도저히 받아들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ㅡ라는 생각이 드네여
더불어
승속 막론하고, 권위있는 이들의 말과 글이
법무아님과 같은 입장을 견고하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어서..
자신의 경험(산전수전)을 통해 그 권위를 넘어서는 과정이 필요한 듯도 합니다.
ㅡ 내 얘기..
현란한 판단과 분별
심심미묘한 산냐
형언할 수 없는 상태...
발바닥 감촉과 온전히 함께 할 때
신기루처럼 스러지니..
번뇌가 홀로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