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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봉, 고사목, 연하봉, 천지개벽, 민간신앙
제석봉.
장터목에서 천왕봉 3km 구간은 제석봉 고사목 지대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이 특출하고 낭만적인 코스.
제석봉(1,806m)은 천왕봉 중봉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
동쪽에 중봉, 서쪽에 제석봉을 나란히 거느린 천왕봉.
제석봉은 옛부터 산신제를 올리던 제단이 있어 제석단
제단은 양지바른 곳에 있고 그 옆에 샘터가 있는 명당.
제단 주변은 예전에 야영장으로서 각광 받았던 곳.
지리산 [ 제석봉 & 천왕봉 ] 산행지도
무엇보다 눈길 끄는 비경은 제석봉 일대 고사목 지대
광활한 구릉지에 고사목들이 서 있고 그 아래는 초원.
반세기 전 화재로 생명을 중도에 마감한 나무들의 시체
10만평에 걸쳐 안개 속에 듬성듬성 서있는 특이한 경관
이 곳은 전나무 구상나무들이 불타 죽은 고사목 군락지
이곳에서의 야영과 취사행위 및 고사목 훼손행위는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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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일출을 감상하려면 장터목산장에서 일박 한다.
하여, 새벽 어둠 속을 뚫고 제석봉을 지나가게 된다.
제석봉 고사목 지대 위로 환상처럼 흐르는 새벽 운무.
제석봉 지나 통천문을 올라 맞이하는 천왕봉 일출.
통천문은 옛부터 천왕봉 성지를 오르기 직전의 관문.
'부정한 자는 통천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옛 전설.
장터목에서 제석봉을 오르는 길목에 옛 향적사 터.
국가 제사를 지내던 사찰로 지금은 터 만 남아있다.
제석봉 남쪽 장터목 산장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절 터.
.......................향적사 터....................
김종직은 2년간 중이 살지 않았다는 그 사찰에서 일박.
향적사는 사찰 창건에 관한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져 온다.
향적사는 지리산의 수호신 '천왕성모'를 모시기 위한 사찰.
태고의 옥황상제가 딸 마고를 지리산 수호신으로 임명.
후토지신이 신라왕 꿈에 나타나 경주옥돌 석상 조각을 명.
하여, 꿈의 계시대로 천왕봉에 사당을 지어 그 석상을 봉안
가까이에 향적사를 지어 향화를 받들게 했다는 '전설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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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적사는 전설 내용을 보면 신라시대 건설한 사찰.
삼국사기에는 신라 박혁거세 왕의 어머니 선도성모.
지리산의 산신으로 모셔 국가수호신으로 삼았다는 설
고려태조가 왕위에 오른 후 모신 어머니 위숙왕후의 석상.
천왕봉에 모시고 그곳을 성모사라 하였다는 설이 전해온다.
신라시대 이래로 국가 주요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조정에서 제관을 파견해, 제사를 지내왔던 제석단.
제석단은 신라 헌강왕 때 '제석천녀 전설'에서 유래
이조 후기 제석당은 8도 강산 당집의 중심.
무속을 믿는 남녀들의 풍기문란 장소로 전락.
결국, 성모사를 철거한 소동까지 일게 되었다.
유교가 융성해지며 제석단이 소홀해진 흔적.
국가 제사터는 차츰 접근이 쉬운 곳으로 이전.
국가 제사터였던 곳들은 오늘날 기도처로 변모
'지리산 십대'란 기도처 대부분 고대국가 제사터.
이조시대에 들어와 사라진 사찰 옛터들이 기도처.
오늘날 국가 제사는 화엄사에서 남악제로 대신한다.
..........,,..<제석천녀>의 전설.............
신라 41대 헌덕왕 14년에 창건한 엄천사.
(875~886 재위) 헌강왕 재위 중 처용가무.
당시는 태평성대였으나 그 이후부터 쇠퇴기.
선왕들의 위령을 추모하기 위한 사찰이다.
헌덕왕은 선조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심성.
그당시 지금 전북 금산사 주지였던 법우화상
그를 불러 지금 함양군 휘천면 엄천사를 창건.
당시 고승이었던 법우화상은 엄천국사가 된다.
헌덕왕은 낙성식에 참석하여 친히 엄천사라 명명
'부처님 뜻을 엄하게 가져 그 복을 받는 후손이며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듯 후세까지 받으리라는 의미.'
왕으로부터 국사 중책을 받은 법우화상은 주야로 정진
어느덧 세월은 흘러 어느 해 여름 날 법상에 앉아 선정
이때 문득 밖이 소란해 문 열고 바라보니 개울물이 넘쳤다.
법우화상은 주장자를 짚고 물길 따라 지리산 상봉에 도달.
그곳 바위 위에 天女가 곱게 앉아 빙그레 미소로 반겼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소녀는 하늘에 계신 제석천왕 딸이고
옥황상제에게 벌받아 귀양 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인간 세상을 살펴 보니
스님과 백년해로 할 인연이니 허락 바랍니다."
법우화상은 꿈인지 현실인지 몰라 정신이 혼미.
천녀는 법우화상을 바라보며 다시 거듭 애원했다.
법우화상은 스님의 신분이기에 단호하게 거절한다.
"사람의 목숨은 풀잎 끝에 이슬 같고,
바람 앞에 등불처럼 힘없이 사라지는 것
어찌 한평생을 애욕의 구렁에서 보내리까?"
"스님! 도를 닥아 부처를 이루는 것도
고해 중에 빠진 중생을 구제 하려는 목적
우리가 부부 되어 재난에 울부짖는 인간을 구제
재난을 면하게 하고 복 받게 하면 그게 부처님 일."
결국, 법우화상은 천녀와 부부가 되어 백무동에 움막.
원앙의 보금자리를 틀고 인간생활의 즐거움을 누린다.
그리고, 백무동에 살며 선녀 사이에서 8 딸을 낳는다.
법우화상은 8 딸에게 경문을 가르치고
선녀는 굿하는 무술(巫術)을 가르친다.
8딸은 무당이 되어 조선 8도로 퍼져나간다.
천신에게 제사올리는 제장을 당굴이라 한다.
신라시대 제장 또는 당굴은 성직자로서 예우.
이조시대에 들어와 무당이라 부르며 천민 취급.
법우화상이 선녀를 처음 만난 곳에 지은.. 성모사.
지리산 제석봉은 제사 지내던 곳.
제석당은 당할머니를 모신 성모사.
제석 할머니가 세상에 내려와 길흉화복을 점쳐주었고
독경 무술 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하여 제석당은 종가.
지리산 인근 각지 부락 근처 분가들은 당집이라고 한다.
당집 있는 곳에는 돌무더기를 모아 조탑을 세웠고.
잡귀를 물리고 신성시 하였던 이곳을 일컬어 '당산'.
새해가 되면 마을사람들은 당산에 모여 제사를 올린다.
이 풍습은 신라 이전 모계사회부터의 천신 숭배신앙
불교와 한반도 민속신앙이 자연스럽게 접합되는 과정.
신라시대 제석천녀는 고려에 와서 위숙왕후로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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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성모사에 안치된 성모상 모델은 위숙왕후
한편으로는 석가여래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상.
이조시대 들어와서 천왕성모 민간신앙의 상징 석상.
성모석상이 언제부터 모셔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지리산신을 국가 수호신으로 삼았던 한반도 민속신앙.
성모석상은 그 상징으로 모신 민속신앙의 대상이었다.
1472.8.14~ 8.19(5박 6일) 함양군수 김종직의 유두류록.
김종직 일행은 말방울을 울리며 함양 마천 벽송사, 영랑대
하봉, 중봉 거쳐 천왕봉에 오른 후 세석평원 영신사로 하산.
.......'1472년 8월 16일 향적사 일박 기록.'.......
정오가 지나 비가 조금 그쳤다. 돌길이 미끄러웠다.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쇠사슬을 박아 놓은 길.
돌 구멍을 뚫고 나와 힘을 다해 걸어 향적사에 도착했다.
향적사에는 중이 살지 않은 지가 이미 2년이나 지났다.
그럼에도 골짜기 물은 나무 홈통 타고 물통으로 떨어지고,
문 자물쇠와 향반의 불유가 옛모습 그대로. 깨끗이 청소 후
향불을 피우고 안으로 들어가 쉬었다. 어둠이 깔릴 무렵 천왕봉.
남북의 바위를 두루 보면서 달 뜨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동쪽이 밝아 오기도 전에 추위가 느껴졌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관솔불을 피워
향적사 방안을 훈훈하게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밤중에 이르러서야 달과 별이 환히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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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류록을 보면 향적사는 이조시대에 사라진 듯 싶다.
향적사는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국가 수호신을 모신 사찰.
지금은 터만 남아 있을 뿐 더 이상 아무 것도 찾을 수 없다.
선사시대 토우신상(土偶神像)과 부여(夫餘) 부인목상(婦人木像)
한반도의 여신(女神)은 고대사회부터 민속신앙이었음을 증명한다.
약 5천 년전 단군신화와 관련된 웅녀(熊女)는 산신에 가까운 여신.
서울 용산구 동빙고동 단군 할머니와 단군 할아버지 영정
여신들은 주로 농경의 수호신으로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다.
웅녀는 천신인 환웅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단군신화.
그러므로, 천신의 배우자가 되는 지신(地神)은 지모신(地母神)
山 위에 있는 천지나 산 어디엔가 있는 샘은 龍이 거처하는 곳,
땅은 모든 생명체에게 생명을 주고 키워주고 돌보아주는 어머니.
우리나라 고대 선인들은 '하날님' 또는 '할머니'라 불렀다.
'하날님'을 뜻풀이 하면 천주(天主)이고 천왕은 불교 영향.
하여, <'하날님' = 천왕>, <할머니 = 성모(聖母)>라고 한다.
..................거인설화(巨人說話)...................
설문대할망, 마고할미, 노고할미, 김수로왕비 허황후.
거인들은 거대한 몸을 이용하여 산천·섬·바다를 창조.
거인이 배설한 똥·오줌·눈물이 산천을 이루었다는 설화.
주로, <삼국유사〉에 등장하고 있는 설화들.
건국신화 이전 상고대(上古代)의 거인에 대한 설화.
제주도나 해안지방에 많고 전국적으로 산재한 설화.
원래 우리나라의 천지창조 신화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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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수호신 대혈신(大穴神)은 바로 여성 생식기 표상이다.
여성 생식기를 국가 민족적인 종교 가치관에 연관시키고 있다.
산신 아가씨 또는 산신 마누라라고 하는 것이 즉 산신의 처(妻).
'우리나라 민족에게 여신은 어떤 존재일까?'
산은 인간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어머니의 존재.
고대사회에서 우주는 여성 상징인 생식기의 역할
'구멍신'은 하늘을 믿는 것이고 어머니를 믿는 것.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덕적산(德積山)
백악(白岳), 송악(松岳), 목멱산(木覓山)의 산신제.
매년 봄가을에 내시 및 무당과 여악(女樂)으로 제사.
산악신과 산천신 제사는 나라에서 직접 관장하였는데,
제단을 마련하거나, 단이 없으면 3칸 사당을 지어 제사.
제를 지내기에 앞서 먼저 제관은 모범 주민 중에서 선정.
제관은 1~3명, 또는 5명에서 많게는 12명까지도 선정했다.
제석봉은 우리나라의 고대국가에서 산신제를 재냈던 곳이다.
산신제 또는 동제 풍습은 아직도 우리나라 곳곳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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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시대에 성모사는 무당들에게 으뜸가는 성소
백무동은 무당의 본거지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천왕봉 성모사는 원래 천년간 산신제 제당의 최고 명소.
노고단, 마천당벌, 백무동, 세석고원, 화개골 등의 신제당
그 중 으뜸 명소라고 이조시대 이중환의 택리지에 적혀있다.
.........................택리지 기록......................
"지리산 북쪽 자락 물이 모여 임천이 되어 용유담을 이루며
함양군 남쪽 엄천에 이르는데 시내따라 강돌이 모두 아름답다.
또 온 산에 귀신을 모시는 사당이 많아
매년 봄가을에 각지 무당이 모여들어 기도.
이때 남녀가 서로 섞여 같이 잠을 자기도 하고
술과 고기 냄새가 낭자하여 불결한 곳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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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당시 민중들이 신령스러운 산봉우리에서
잡신을 섬기고 무당들과 가까이 지냈음을 의미한다.
지리산 북쪽 백무동은 천왕봉 오르는 들머리로 인기.
한신계곡을 거쳐 세석고원을 오르는 길목으로 붐빈다.
산장 스타일의 휴게소와 민박시설을 갖춘 집들도 있다.
경남과 전북에서 오가는 대중교통 시외버스 편도 빈번.
1950년대 관문 인월과 1970년대 관문 마천(가흥리) 등등.
차량의 시발점과 종착지에서 지금은 통과지역으로 변했다.
첩첩산골, 아름다운 산과 물을 거느린 백무동
오늘날 지리산의 북쪽 들머리는 우연이 아니다.
늘 무당 100명이 있었고 옛부터 기도객이 붐빈 탓.
전국 무당들 우두머리가 천왕봉 성모사를 받들던 곳.
하여, 백무동은 옛부터 기도객이 붐빈 곳이라 백무(百巫).
무속이 시들해지면서 행정 지명도 백무(白武)로 바뀌었다.
지금도 이곳 하동바위 밑 샘터에는 많은 기도객들이 몰린다.
음력 초하루, 보름, 한식날, 삼월삼짇날, 9월 9일날이 되면
촛불을 밝히고 향을 사르며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여, 성모사에서 백무동에 이르는 곳곳은 무속인들의 본거지.
제석단 산신제가 구례 화엄사 남악사로 옮겨지자
향적사 터는 무속인과 기도객들의 기도처로 탈바꿈.
제석봉 지명은 국가 제사를 지내던 제석당에서 유래.
제석천은 신들의 지배자 '샤크라'가 머무는 곳.
'인도의 신' 샤크라는 야훼(여호와)와 매우 유사.
우리나라 애국가에 나오는 하느님과도 같은 존재.
'하늘색 사파이어는 곧 하느님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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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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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고려시대에 행한 국가적인 종교 제례의식.
〈삼국사기〉에 의하면 팔관회는 551년(진흥왕 12)
처음 행해진 이래로 4 차례를 지냈던 기록이 보인다.
신라 때 팔관회는 모두 호국적인 성격이 짙으며,
10월과 11월에 종래 제천의식과 불교의 결합 형태.
고려시대에도 연등회와 함께 국가 2대의식 중 하나
당시 팔관회는 불교적인 색채를 거의 띠지 않았고
천령(天靈) 오악(五嶽) 명산(名山) 대천(大川) 용신(龍神)
등 토속신에게 지내는 의식을 개경과 서경에서 만 행해졌다.
'개경에서는 11월 15일, 서경에서는 10월 15일.'
개경 팔관회는 행사 전날에 소회일(小會日)과
행사 당일 대회일(大會日) 제례의식이 있었다.
소회일엔 왕이 불법을 통해 호국을 염원
법왕사(法王寺)에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때에 따라 위봉루(威鳳樓) 또는 신봉루에서
여러 신하들 인사를 받거나 군신간 헌수(獻壽),
그리고, 지방 수령들의 선물 봉정식 등이 있었다.
대회일에도 축하와 헌수를 받았으며,
외국 사신들로부터 인사를 받기도 하고
개경의 팔관회를 이용해 무역도 이루어졌다.
서경 팔관회는 조상제의 성격을 띤 예조제(藝祖祭)로서
정부에서는 보통 재상을 파견하여 재제(齋祭)를 행했다.
팔관회는 고려 초기에 성하다가 현종 이후부터 점차 쇠퇴.
그러나 고려말까지 국가 최고의 의식으로 행해졌으며,
몽골 침입으로 강화도 천도 시기에도 의식이 행해졌다.
그러나, 이조가 건국되면서 배불정책에 따라 철폐되었다.
.............참고할 만한 문헌 내용.................
"산의 절정에 있는 향적사 등 몇 개 절은
모두 판자로 지붕을 덮었고, 사는 중이 없다.
오직 영신사만이 기와로 지붕을 덮었고 거처하는
중 한둘이 있을 뿐.." - 1463년 이륙의 유두산류록 -
주: 향적사는 고려 때 국가제사를 지내던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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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목.
산행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취미생활.
자연의 품에 안기면 인간은 동물에 불과함을 느끼게 된다.
제석봉 고사목지대는 태고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인간은 현대사회에 살면서도
때로는 원시사회를 향한 동경.'
배낭 하나 둘러메고 현대문명에서 벗어나는 산행은 새롭다.
주말마다 세대교체하 듯 피고 지는 이름 모를 풀꽃도 신비롭다.
도시에서는 콘크리트 포장에 가려져 소중하게만 보이는 풀꽃.
사람은 잠재의식 속에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 싶은 꿈이 있다.
울타리 안에 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고 잔디 밭을 갖고 싶은 꿈.
그것은 인간의 본능 속에 깊이 도사려 있는 동물적인 근성이다.
'나무 열매를 먹고 물고기를 잡고 동굴에 살며 초원의 사냥.'
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살았다는 이상향이 에덴동산이다.
기독교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는 추세가 대부분.
그렇다 해도 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는 구석기시대 인간을 상징.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산다.
마치, 인간이 빙하기 후 구석기 문화에서 신석기 문화로 바뀌듯.
인간은 빙하시대의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며 두뇌가 점점 발달했다.
그러나, 인간의 원초적 욕망속에는 구석기 시대 본능이 숨쉰다.
현대 첨단과학 속에 살면서도 태초로 돌아가고 싶은 인간의 욕망.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 싶은 꿈은 인간의 원점회귀본능의 발로인 듯.
인간의 기본적 욕구는 입고 먹고 자고 그리고 남녀가 함께 잠자는 것.
'양지바른 나만의 쉼터 잔듸밭'과 나무 열매와 그늘..그리고, 마실 샘물.
그것은 인간이 자연환경과 동떨어져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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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상의 생명체는 자연환경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연환경을 파괴하며 사는 생명체는 인간 뿐.
지구 상에서 자연보호를 부르짖는 생명체 역시 인간 뿐.
인간 문명이 발달할수록 자연환경 파괴는 더욱 심각하다.
문명이기 속에서 사는 인간은 그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다.
동물은 자연환경의 변화나 천재지변에 매우 민감하다.
인간이 감지 못하는 천재지변을 동물은 육감으로 안다.
하여, 동물은 재앙 진원지에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한다.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그 감각이 퇴화해 버린 듯.
인류의 첨단 과학도 천재지변 앞에서 때로는 무용지물.
산행을 하다보면 현대과학의 한계선을 절실히 깨닫는다.
인간은 좀 더 겸허한 마음으로 자연환경을 아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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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후손에게 물려줄 때 자랑스러울.. 자연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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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봉(1,806m)
장터목과 천왕봉 사이 3km 구간
제석봉의 고사목 지대와 통천문.
제석봉에서 바라보는 반야봉, 노고단의 운무.
사진 작가들이 사진기를 설치해 놓고 밤샘작업
제석봉 고사목 지대 환상적인 풍경을 담으려는 듯.
운무가 없을 때는 가물가물 보이는 노고단.
동틀 무렵 어둠속에 흐르는 제석봉의 운무.
고사목 지대를 휘감고 흐르는 운무는 환상적.
천왕봉 일출을 감상하려는 새벽 어둠속 인파.
동틀 무렵이면 지나게 되는 제석봉 고사목 지대.
환상 같이 서성거리는 안개 속에 펼쳐진 고사목들.
'마치, 타임머쉰을 타고 태고로 떠나는 느낌.'
제석봉(1,806m)은 지리산에서 중봉 다음 세번째 높은 봉우리.
천왕봉은 동쪽에 중봉을, 서쪽에 제석봉을 거느리고 있다.
제석봉은 옛 국가제사 터.
그 옆에 샘터가 있는 제단.
제단 주변 공터는 예전에 야영장 터.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고사목 군락지.
'아!~~ 안타까운 고사목 숲의 아름다움.'
쓰러질 듯 비스듬히 버티고 선 앙상한 고사목들.
반세기 동안 눈, 비바람 속에서 용케도 버텨온 듯.
해가 거듭할수록 썩고 쓰러져 점점 줄어들고 있다.
10 만평 완만한 비탈에 고사목 숲과 야생화 초원.
고사목은 중도에 생을 마감한 고목들의 살벌한 시체.
마치, 이곳이 사막이었던 태고로 되돌아간듯한 느낌.
이곳은 주목과 구상나무 고사목 군락지
고사목 풍경 자체가 귀중한.. 자연 경관.
해발 1,700m에서도 고목의 성장이 가능한 사실을 입증.
한편, 1950 년대 지리산의 아픔을 40년 침묵으로 증언
남은 고사목이라도 잘 보전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제석봉 고사목 사이로 보이는 반야봉과 노고단
그 경관이 유난히도 아름답게 여겨지는 제석봉.
고사목(枯死木)이란 저절로 말라 죽은 나무를 의미.
하지만, 제석봉 고사목은 고사목이 아닌 피살목(被殺木)
1950년 6·25와 빨치산 전투를 이겨낸 제석봉 구상나무들
1962년 도벌꾼들이 증거인멸을 위해 불질러 태워 죽인 결과.
단 한번의 산불로 원시림이 사라진 제석봉.
고사목지대로 변한 후 사막화 되어버린 곳.
이젠 사진 찍는 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고,
많은 등산객들의 출입으로 고사목이 줄어 들었다.
15년 휴식년제를 실시하고 이곳에 심어진 구상나무
'20m 넘게 자라려면 약 100년 걸리는 구상나무.'
15년 휴식년이 끝나도 옛 모습을 찾기 어려울 듯
제석봉은 '살아서 천년 죽어 천년 산다.'는 주목 군락지.
주목(朱木)은 나무 표피가 붉고 수형이 아름다운 상록수.
공해의 척도를 알려주므로 기념식수 용도로 많이 쓰인다.
'나무의 왕'으로 알려진 유래는 마패 만드는 나무이기 때문.
산천초목도 부들부들 떤다는 이조시대의 마패 원료는 주목.
1950년대 인기 높았던 주목 바둑판. 주목 뿌리로 만든 탁자.
당시 정원의 고급 관상수로서 인기가 높았던 주목.
그 탓에 자유당 시절 그곳 나무들은 무분별하게 굴취.
소를 끌고 올라가 그곳에서 몰래 캔 나무를 끌고 갔다.
쇠파이프를 레일 삼아 철판을 깔고 소로 끌어내렸던., 주목.
그렇게 거칠게 천년 수령 주목을 운반하다 보면 대부분 죽는다.
하여, 기적적으로 산 주목 고목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격.
그곳에 살아있는 나무는 물론 고사목까지도 수난을 당했다.
자유당 고위인사까지 연루된 내막이 드러나자 증거인멸 방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제석봉은 마치 사막과도 같이 황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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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장터목에서 천왕봉 3km 구간은 고사목과 원시림 숲속.
1950년대 산불이 나기 전까지 천년 수령 주목이 가득 찼던 곳.
제석봉은 옛날 산신의 제단인 제석단이 있어 더 한층 유명했다.
양지바른 곳에 있었다는., 제단.
맑고 시원한 샘물이 넘치는 명당.
지금은 그 흔적 조차 찾기 힘든 곳.
제단 주변은 평지라 등산객들의 야영장소로 각광 받았던 탓.
제석봉 일대를 뒤덮은 주목 군락지는 그렇게 폐허화 되었다.
지금은 10만 여평의 완만한 비탈에 고사목들이 서 있는 초원.
그곳 고사목들은 화재로 삶을 중도에 마감한 천년 고목들 시체
아고산지대 숲은 한번 파괴되면 회복이 어렵다는 산교훈의 장소.
특히, 천년 수령 주목나무 원시림이 파괴된 것은 참 안타까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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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은 아고산지대 사막식물.
사막이 숲으로 바뀌는 과정의 나무.
태고에는 제석봉이 사막이었다는 증거.
주목의 잎과 붉은 열매는 약재.
살모사에게 독을 제공하는 나무.
하여, 주목 군락지는 곧 '살모사의 서식처'.
살모사 독성은 10 분 내에 신경을 마비시킨다.
살모사는 갓 태어나 어미를 물어죽일 만큼 맹독.
꽃뱀 역시 철쭉 꽃에서 독을 제공받는다.
하여, 철쭉 군락지는 대부분 꽃뱀 서식처.
꽃뱀은 꽃의 유혹에 취한 동물을 먹이로 살아간다.
사막 같은 초원지대에서는 해충 독사 독버섯을 조심.
제석봉은 원시림이었지만 불탄 후 사막으로 변한 곳.
고사목 지대에 서성거리는 도마뱀들이 그 증거.
새끼 손가락 만한 크기로 이미 퇴화한 도마뱀들.
불과 반세기 만에 일반 도마뱀보다 덩치가 작아진 듯.
들쥐 한입 먹이 크기지만,
'쥬라기시대 공룡'의 후손.
지금으로부터 약 6천 5백만년 전 한반도에서 사라진 공룡.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공룡 발자국 화석들이 그 증거.
그 당시에는 먹을 것이 풍부해 덩치가 한없이 커졌던 공룡.
쥬라기 시대 화산폭팔로 한반도에서 어리로인가 사라진 공룡.
그 당시 한반도를 떠나지 못하고 겨우 살아남았을 소수의 공룡
도마뱀은 그후 겨우 생존한 공룡 후손이 차츰 퇴화한 모습인듯.
'다윈의 진화론'이 실감나게 떠오르는 제석봉의 고사목 지대.
'얼마나 조상 대대로 못 먹고 살았으면 저렇게 작아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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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은 중생대 백악기 시대에 번성한 대형 파충류의 한 무리.
<디노사우르>는 1842년 영국의 고생물학자 'R. 오언'이 명명
공룡 (디노사우르)은 그리스어.. 디노스( 두렵다,·끔찍하다 뜻)
사우로스(sauros;도마뱀)를 합성한 말이므로 도마뱀과 이웃사촌.
한반도에서는 1억 2천 만년 전에 창녕 우포 늪의 공룡 발자국 화석.
한반도 지리산 일대는 중생대 백악기에 공룡들의 천국.
넓은 호수, 온난한 기후, 풍부한 먹이는 서식처로 적당.
한반도에서 공룡이 사라진 시기는 지금부터 9천만년 전.
지구의 공룡은 6,500만년 전 중생대 백악기가 끝나며 전멸.
한반도에서 사라진 공룡은 2천5백년간 지구를 방황했던 셈.
특히, 한반도에서 공룡의 수난은 지구 상에서 가장 빨리 시작.
지구 상의 공룡들은 짧은 기간 동안에 전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대체 한반도에서 어떤 환경변화가 있었기에 공룡이 떠났을까?
'당시 한반도의 공룡은 어디로 떠났던 걸까?'
한반도 최남단을 거쳐 중동지역으로 대이동.
옛 해상 실크로드인 해안선 항로를 따라 탈출.
당시 한반도 삼면의 바다 속까지 공룡의 서식처
세계적인 공룡발자국 화석의 산지., 우리나라.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탈출 경로를 대변하는 듯.
해남 우황리로 가서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해보자.
.................해남 우황리................
불과 2000년전 지금과 달랐던 해남의 해안선
송지면 군곡리 패총은 그곳까지 바다였다는 증거.
경작지 개간 과정에서 발견된 논 가운데 있는 패총
약 2천년전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해남 군곡리 일대.
인근 해남 우항리는 공룡화석 자연사 유적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야외에 전시한., 공룡모형
세계 최대 익룡발자국(20cm~35cm 크기) 화석과
8,300만 년 전으로 추정하는 물갈퀴새 발자국 화석
공룡관에 대형 초식공룡발자국(52cm~95cm 크기) 화석
공룡이 번성했다가 멸종된 중생대 말기인 백악기
약 6천 5백만 년 전 이곳에 공룡이 살았던 흔적들
고성군 하이면 상족암 군립공원
산등성이에 건립 중인 공룡박물관.
상족암은 사천(예전 삼천포시) 인근
'통영 읍도'에도 공룡발자국 화석들.
해남은 수많은 도서들이 심한 굴곡을 이룬 침강해안
험준한 지세 탓에 하천은 짧고 바다로 직접 흘러 든다.
중생대 백악기 북서태평양 일원 화산지역이었던 해남
목포~ 해남 일원도 백악기 화산활동이 격렬했던 곳.
그 당시 뿜어져 나온 화산재가 개울 따라 떠내려왔거나
호수위로 비 오듯 떨어져 천만년간 쌓여 이뤄진 퇴적층.
퇴적층이 쌓인 시기는 8천5백만년전~6천7백만년 전 사이
중생대 해남의 화산활동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멀리서 화산 연기 등이 솟아오르는 큰 호수가 있고
그 호숫가로 조각류의 공룡들이 무성한 식물 사이에서
새들과 함께 어울려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거닐던 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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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이 폭팔하자 용암을 피해 죽음으로부터 탈출.
중동의 유전 지대는 공룡들이 떼죽음 장소로 추정.
천지개벽 환경변화로 지구상에서 일순간 사라진 공룡.
지금으로부터 약 9천만년 전에 몰살한 공룡.
한반도에서 6천 5백만년 전에 사라졌던 공룡.
2천5백만년 동안 방랑 후 최종 정착지는 중동.
약 9천만년 전 백악기 말 무렵,
우리나라 남부지방은 화산지대.
우리나라 남부지방은 용암이 용광로 상태로 3천만년간 지속.
화산에서 내뿜는 화산재로 대기 중 이산화탄소 양도 몹시 증가.
한반도 화산대는 경상도 중심으로 전남에 이어진, 활 모양의 산맥.
그 화산 활동지역의 중심부는 백두대간 뿌리인 지리산 일대.
분화구 흔적은 빙하기에 패여나가 흔적 조차 찾아볼 수 없다.
지질학자가 아니면 백악기시대 화산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화산 분화구를 간직한
우포 늪 인근의 화왕산.
...................화왕산.......................
화왕산 정상의 분화구는 5만 6천평 아늑한 분지.
그 안에 3개의 연못 '삼지'는 용암이 분출했던 곳.
화왕산성으로 둘러싸인 분지 안은 갈대밭 군락지대.
'화왕산 정상에 있는 거대한 화강석,.배바위.'
화왕산 정상의 5만 6천평 분지는 커다란 배와 같은 형태.
뱃머리 위치에 있는 배바위는 놀랍게도 강물에 깍인 흔적
분화구보다 높은 곳에 있고 용암으로 형성된 바위와 다르다.
'배바위는 화산 폭팔 이전부터 강가에 있었던듯.'
화산 폭팔로 인해 지면이 솟아오른 흔적인듯 하다.
화왕산 분화구는 빙하시대 대홍수에 피난처였을 듯.
석기시대 그곳 분화구에서 불을 얻고 태풍을 피한 듯.
화왕산과 우포 늪을 품고 있는.. 창녕
제 2의 경주라 부르는 비화가야 도읍.
신석기시대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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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목지대가 육지의 생성과정을 보여주는 듯.
지리산에도 선암(배바위)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한반도는 약 30억년 전부터 지각변동을 거쳐 융기.
바다 속으로부터 수면 위로 솟아올라 형성된 육지.
한반도에 분포된 암석층을 분석한 지질학 연구 결과.
강원도 시멘트 석회석은 예전에 바다 속이란 증거.
아울러 땅속 석탄은 나무가 죽어 쌓인 숲의 퇴적층.
화산 폭팔로 일순간에 전멸, 석탄으로 변한 것이다.
적어도 석탄 탄광의 깊이 만큼
지구 표면이 뒤바뀐 물증인 셈.
한반도는 육지와 바다가 여러 번 뒤바뀐 흔적.
온천수를 판 지하 암석층이 그 사실을 뒷받침.
한반도 위치는 해마다 조금씩 이동하는 중.
백두대간은 해마다 조금씩 계속 솟아오른다.
제석봉의 도마뱀은 자연 환경변화에 적응해 온 흔적.
9천만년 전 화산 폭팔 이후 살아남아 진화해 온 흔적.
쥬라기시대 거대한 몸집에서 작은 몸집으로 진화를 거듭.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한 퇴화를 거듭한듯.'
한반도가 사막이었던 태고의 흔적도 남아있는 제석봉.
인류역사 훨씬 이전부터의 지리산 유래를 알려주는 듯.
침엽수림, 주목군락, 파충류, 마사토 토질, 등이 그 증거.
산은 사막이 초원으로 변한 이후에,
차츰 숲으로 변하는 과정을 거친다.
태고부터의 동식물 진화과정을 보여주는 제석봉 고사목지대.
태고의 사막이 지리산 원시림 가운데로 돌아온 듯 신비롭다.
장구한 세월은 바다를 육지로, 사막을 원시림으로 뒤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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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태양을 축으로 우주를 돌며
공전과 자전을 하며 끊임 없이 변화.
무지개는 위성에서 관측하면 둥근 원이지만,
지상에 살고있는 우리 눈엔 언제나 반원이다.
인간의 짧은 삶으로는 그 변화를 느낄 수 없지만,
지구는 46억만년 전 생성 이후 계속 변하고 있다.
지금보다 해수면이 1400m 낮은 2만년전 서해는 저지대 육지.
서해(황해) 저지대 민족들은 고지대인 한반도로 이주해왔다.
제주도에서 출토된 구석기시대의 유물들이 그 사실을 뒷받침.
항해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구석기시대
구석기시대 유물은 아시아 일대가 비슷.
서해 해수면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1만 5000년 전부터 급격히 상승.
서해 갯벌은 6000년 전에 해수면이 지금과 거의 비슷한 형태로서 형성.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경사가 완만한 지형 덕분에 서해에 갯벌이 형성.
오늘날 지질학자들이 연구자료를 참고해보면,
한결같이 모두 비슷한 학설로 결론을 내린다.
지구의 육지는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고 수억년 후에는 뭉칠 듯.
지금 한반도로 북미 호주 대륙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이들 대륙이 유럽과 충돌하면 한반도는 히말라야 같은 산맥이 형성될 듯.
연하봉(烟霞峰)
534년전 점필제 유두류록에 지명이 없었던 봉.
그 이후에도 500 년간 봉우리 이름이 없었던 듯.
1970년대 초 지리산악회 전신인 연하반에서 명명.
연기 연(烟), 놀 하(霞), 봉우리 봉(峰).
늘 운무가 자욱해 연기가 노는 듯한 풍경.
한자를 우리말로 뜻풀이 한 연하봉의 의미.
연하천(烟霞泉)과 동떨어진 연하봉(烟霞峰).
연하천과 연하봉은 <연하반>에서 붙인 지명.
지리산의 수많은 지명 중 가장 혼돈스러운 곳.
'일출봉으로 더 많이 알려졌던 연하봉.'
연하반은 대부분 총각으로 구성된 산악회였다.
연하봉은 '연하반' 산악회 이름에서 본 딴 이름.
1970년대 이전까지는 장터목 일대 산꾼들 야영터.
대자연 속 별밤 정취가 물씬거리는 야영장이 있던 연하봉.
장터목 산장이 비좁았던 시절에 이곳 주변은 수백명 야영장.
옛날에 장터목이 물물교환터였을 때 이곳은 조상들의 야영터.
물물교환 풍습이 사라진 후 산악인들 야영터로 바뀐 듯 보인다.
'천왕봉 일출'을 보려는 야영객들은 산장보다 이곳을 즐겼다.
이곳 야영장은 일기변화 극심해 지리산 능선 어느 곳보다 춥다.
장터목 산장이 들어선 후 이곳 야영장은 폐쇄.
옛 향적사 터의 무당들과 극성 기도객들도 사라졌다.
예전에 이 일대 야영장은 발 딛을 틈도 없이 붐볐다.
자리가 좋으면 텐트 안에서 일출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일출을 맛볼 수 있는 일출봉..............................
장터목 산장이 비좁아 야영이 허용된 시절에는 일출봉이라 했다.
굳이, 연하봉과 구분하자면 장터목 직전에서 살며시 솟은 봉우리.
연하봉에서 내려와 장터목에서 가까운 위치에 솟은 독립된 봉우리.
도장골이 길게 패인 산세가 보이고 남쪽으로 지능선이 뻗어 내린 곳.
장터목에서 20분 거리에 있고 기암과 고사목이 어울린 수려한 경관.
그 무엇보다도 호젓한 분위기에서 일출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장점.
지리산 정기를 일출봉에서 받으려던.,연인들.
텐트 밖으로까지 흘러나온 연인들의., 속삭임
장터목 산장이 들어선 후 사라진 일출봉 야영장.
연하천은 당시 '연하반 산악회' 이름을 본 딴 지명.
우리나라에서는 개척한 사람이 명명하는 것이 관례.
연하봉은 이름이 명명될 당시 정취 넘치던, 일출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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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리고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산새소리 바람소리에 눈물 흘린다.'
중산리에서 장터목으로 오르면 '지리산 10경의 연화선경'
<천왕봉, 제석봉, 연하봉> 암봉들이 빚어낸., 검은 실루엣.
계절에 따라 일기변화에 따라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탈바꿈.
장터목산장 일대는 옛부터 기후변화가 극심한 곳.
이 일대 혹한 악천후는 목숨을 위협하던, 저승사자.
잠자리 확보 못한 처녀들 하룻밤만 재워달라 통사정.
어쩔 수 없이, 텐트 속에 재워주면 낯선 남녀와 동침
하여, 뜬 눈으로 밤을 꼬박 지새우는 경우가 비일비재.
심지어 처음 만난 남녀끼리 한 침낭 속에서 지새우는 밤.
시시각각 온몸이 부서질듯 고통스러운 새벽 추위.
얼어죽지 않으려면, 한 침낭에 들어가야 하는 긴박한 상황.
체온으로 혹한을 서로 녹여주지 않으면 얼어죽을 수도 있다.
하여, 이곳 야영장은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 연인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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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선경(烟霞仙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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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봉의 기암괴석 사이로 온갖 기화 요초
이곳에서 앉아 있으면 신선이 된 듯한 기분.
중산리에서 동틀 무렵 바라보이는 경관이 장관.
장터목을 사이에 둔 새벽여명의 실루엣이 환상적.
연하선경은 기암괴석 절경지대.
고색창연하게 이끼 낀 기암괴석
그 사이에 향기 드높은 기화요초
그 위에 자연 고사목이 숲을 이루고
그 아래로는 수백 년 원시림이 가득.
하여, 연하봉 일대 비경이,,연하선경.
연하선경에 관한 기록은 드물다.
연하봉은 일출봉이라 부르던 곳.
일출봉은 원래 야영장 터였던 곳.
장터목 산장이 생긴후 야영 금지.
지금은 야영장 터마자 폐쇄했다.
하여, 일출 감상은 으레 천왕봉.
'천왕봉 일출' 풍습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중국 황산의 연화봉에서 비롯된 듯싶다.
연화봉은 일출 명소인 중국 황산의 정상.
동해 일출을 바라보며 소망을 기원하는 풍습.
'황산에서 동해는 우리나라 서해에 해당.'
불교는 인도에서부터 해 뜨는 동쪽으로 전파.
일출을 보며 소망을 기원하는 공통적인 풍습.
비경을 연꽃에 비유하는 풍습은 불교에서 비롯.
'옛부터 연꽃을 유난히 좋아하는 우리 민족.'
불교 발생 이전부터 저지대 민족의 공통점.
불교는 동아시아 저지대 민족의 공통 종교.
동아시아 민족이 공통적으로 선호하는 연꽃.
'아름다운 경관이면 으례히 연꽃에 비유.'
지리산 연하봉에서는 '연하선경(烟霞仙境)이라 표현.
황산의 연화봉에서는 '연화선경(蓮花仙境)이라 표현.
중국 황산의 연화선경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 황산의 연화선경.....................
중국 안휘성에 있는 황산은 세계적인 관광명소.
중국 5악에 들어가지 않지만, 그 못지 않은 비경.
황산은 무려 72봉 기암절벽과 온천을 품고 있는 곳.
연화선경은 중국 황산 정상 일대 비경을 말한다.
김포 국제공항에서 중국 황산공항까지 2시간 거리.
황산공항에서 황산 입구까지는 버스로 한시간 정도.
유네스코에서 세계의 문화 유산으로 지정한, 황산.
황산의 정상이자 일출을 즐기는 곳이 연화봉(蓮花峰).
일출이 가장 아름다운 광명정은 연화봉 다음 높은 곳.
광명정에서 정상 연화봉에 이르는 길은 망망대해 운해
연화봉 정상(1,860m)는 관광객이 제일 많이 찾는 명소.
'연화봉은 연꽃과 같은 아름다운 봉우리.'
불교적인 관점에서 최고의 아름다움은 연꽃.
불교에서 제일 성스러운 방향은 해 뜨는 동쪽.
그러므로, 연화봉 일출은 아름다움 + 성스러움.
중국에서는 연화봉 일출보다 광명정 일출이 인기.
정상보다 약간 낮은 곳에서 산을 바라보는 즐거움.
중국인의 도교사상으로 보면 광명정이 오히려 일출봉.
연꽃은 3천년 후에도 발아하는 수초.
천지개벽을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다.
연꽃은 천도복숭아와 더불어 불교의 상징.
3천년에 한번씩 열매 맺는다는 천도복숭아.
그 열매를 먹으면 불노영생을 누린다는 과일.
천도복숭아는 곤륜산 여신 서왕모 '젊음의 비결'.
서왕모가 산다는 요지의 선경을 뜻하는 연화선경.
온갖 기화요초와 연꽃이 만발한 전설 속 연화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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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산은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일까?
...................곤륜산.......................
곤륜산(崑崙山)은 중국 지나문화의 최초 발상지,
지나인의 정신적 고향, 지상선경, 이 곧 곤륜산.
곤륜산맥에서 지나대륙 서쪽에 있다는 전설의 산.
그 정상에 아름다운 못이 있고 북쪽에는 큰 폭포
사방으로 4 대하가 흐르고 3층으로 되어있다는 산.
신선이 살고 불사약이 있고 옥(玉)이 나는 곳이다.
지구 중심인 그 산에는 서왕모(西王母) 전설.
중국 곤륜산은 우리나라 백두산으로 추정된다
백두산에도 '서왕모에 대한 전설'이 있기 때문.
백두산 토착민들은 백두산을 곤륜산이라 하였다.
중국문화와 유교가 곤륜산에서 기원되었다는 믿음.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을 성역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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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산 여신으로 받드는 서왕모는 누구일까?
우리나라 지리산 천왕성모와 비슷한 인물인듯.
서왕모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서왕모(西王母)....................
중국 도교 신화 속에 나오는 불사(不死)의 여왕.
그녀는 서화(西華) 땅에 사는 여자 정령들을 관리,
그녀의 남편 목공(木公)은 동화(東華)의 남자를 감시.
서왕모는 본래 인간과 외모가 비슷하지만
표범 꼬리와 호랑이 이빨을 가진 산신령이
아름다운 여인 서왕모로 변했다고도 한다.
그녀의 서화 정원에는 희귀한 꽃들, 특이한 새들,
불로장생 복숭아인 반도(蟠桃) 등이 있다고 한다.
도교전설에서는 서왕모가 한 무제를 만났을 때
그 유명한 불로장생의 복숭아를 주었다고 한다.
그가 그 씨를 심으려고 하자, 서왕모는 만류했다.
중국 토질에 안맞고 3,000년 만에 열매 맺기 때문.
명(明)의 개국황제인 홍무제(1368~98 재위)도
원(元) 황실 보물창고에서 반도 씨를 얻었는데,
서왕모가 한 무제에게 주었다는 글귀가 적힌 씨.
서왕모 생일날에는 8 신선들(八仙)이 찾아와 축하
서왕모는 연회를 베풀고 맛있는 음식을 내놓았단다.
곰 발바닥, 원숭이 입술, 용의 간, 마지막으로 반도.
연화선경에서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면 하늘나라.
그곳 하늘나라에는 옥황상제가 살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여신 서왕모는 절대적 민간신앙의 대상
'곤륜산 서왕모 젊음의 비결은 천도 복숭아.'
지리산 천왕성모 역시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여신.
천왕성모의 영원한 아름다움과 젊음의 비결은 산삼.
천왕성모 역시 천신과 가장 가까운 곳 천왕봉에 산다.
'연화선경은 서왕모 전설 속 이상향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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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선경은 '연꽃의 아름다움'을 경관에 비유.
도교사상보다 불교적인 색체가 짙은 표현이다.
불교문화의 상징인 연꽃에 관해 좀 더 알아보자.
...................연꽃..........................
연꽃은 연못 관상용, 원산지는 열대아시아
비대한 뿌리와 잎자루 및 열매는 식용으로,
꽃받기는 꽃꽂이로, 잎은 수렴제 및 지혈제
연꽃은 다년생 수초로 7~8월경 연분홍 또는 흰색 꽃
열대 아시아가 원산지로 민간에서 야뇨병 치료에 사용.
뿌리는 강장제로, 열매는 부인병 치료나 강장제로도 사용
연뿌리 달인 물은 입안 염증이나 편도선염에 좋고
연뿌리 즙은 폐결핵 각혈 하혈 치료, 씨는 정력보강
뿌리 줄기는 다양한 약효와 많은 녹말을 함유하고 있다.
'진흙탕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
연하선경은 불교에서 사후 극락세계의 상징.
연꽃은 아시아 저지대 민족에게 불교를 상징하는 꽃.
한반도는 옛부터 천재지변 홍수와 전란의 피해가 극심.
'연꽃의 모진 생명력처럼 이땅에 뿌리내린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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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과 불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그 관련성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하자.
.............연꽃과 불교...........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다.
연꽃에 비유한 불교 설법도 많다.
부처님이 설법 대신 연꽃 한송이를 들어 보이자
제자 중 가섭 존자가 홀로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이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속속들이 전하는 도리로서
선종(禪宗)에서는 세곳에서 마음 전한 이치라 한다.
연꽃이 불교의 상징이 된 것은 마음 속 몇가지 이유.
첫째, 더럽고 추하게 보이는 물에 살지만,
그 더러움을 조금도 꽃잎에 묻히지 않는 것.
이것은 마치 불자(佛子)가 세속에 처해 있어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부처님 가르침을 받드는 것.
홀로 자신의 안락을 위해 열반의 경지에 머물지 않고
중생 구제를 위해 죄업과 더러운 세계로 뛰어드는 것.
둘째, 연꽃은 피어남과 동시에 열매가 자리잡는다.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한 수단이며 열매의 원인인 것.
이 꽃과 열매 관계를 인과(因果) 관계라 할 수 있으며
인과(因果)의 도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임을 깨우쳐 준다.
셋째, 연꽃 봉오리는 합장하고 있는 모습.
연꽃은 인도의 고대신화에서부터 등장한다.
불교 이전 인도 브라만교 신비적 상징주의.
혼돈의 물밑에 잠자는 영원한 정령 '나라야나'
그 배꼽에서 연꽃이 솟아났다는 내용의 신화.
하여 연꽃은 우주창조와 생성의 의미를 지닌 꽃
"그 연태(蓮胎)에 들어가면 모든 쾌락을 얻는다"
연태는 연꽃을 뜻하며 염불로 연꽃 속에서 화생하는데,
이 모습이 어머니 자궁에서 태어나는 것과 흡사해 연태.
석가모니가 마야부인 겨드랑이에서 태어나
사방으로 일곱 걸음 발자국마다 피어난 연꽃.
이는 바로 연꽃이 화생의 상징물 임을 뜻한다.
여덟장 꽃잎을 가진 연꽃은 불교 신앙체계의 상징
연꽃 중앙에 비로자나불 8 꽃잎은 4부처와 4 보살
4 부처와 4 보살은 하나로 귀결된다는 상징 8엽연꽃
스님이 입는 가사를 연화복 또는 연화의라고 하는 것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청정함을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관음보살이 손에 활짝 핀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
보살의 청정, 무염, 깨달음의 경지를 드러내는 것.
연꽃은 불교에서 관음과 관음신앙의 성격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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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사찰 대부분은 산위에 있는 것이 특징.
옛부터 저지대 민족에게 대홍수로부터 피할 곳은 산.
저지대 민족에게 산은 생명을 지켜주는 신앙적인 존재.
불교는 아시아 저지대 민족으로부터 유래된 종교.
저지대 민족이 홍수를 피해 높은 곳으로 차츰 이동.
불교 영향으로 산위 경관까지 연꽃의 아름다움에 비유.
우리나라에서는 도교사상으로 아름다음을 비유.
예를 들면, 신선놀음, 선녀처럼 아름답다는 표현.
이루 형용할수 없는 오묘한 아름다움이 곧 연하선경.
황산 연화선경은 불교식 아름다움의 표현
지리산 연하선경은 도교식 아름다움의 표현.
도교식 아름다움의 표현은 이조시대 유교관.
불교식 아름다움의 표현은 고려시대 풍류관.
연꽃과 관련된 불교경전 '연화경'을 살펴보자.
...................연화경.........................
연화경은 천태종의 근본교리인 묘법연화경에서 비롯.
불교에는 여러 종단이 있다. 그 중 천태종단(天台宗團)
560년, 진나라 문제가 즉위한 해에 지자대사가 만들었다.
'묘법연화경이란 흰 연꽃 같은 올바른 가르침'
인도의 대승불교가 일어난 시기는 기원 전후인데,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는 시기는 서기 1200년경
이것을 연대적으로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진다.
법화경은 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한 당시의 경전.
7반야경, 유마경, 화엄경과 더불어 초기의 경전.
법화경에는 다른 불교 경전에 없는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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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선경이 한눈에 잘 바라보이는 곳이 법화사.
중산리에서 천왕봉을 향해 오르는 길목에 위치.
불교경전 법화경은 법계사와 무관하지 않은 듯.
'조계종 비구니 노후복지 시설인, 법계사.'
문중 없고 사제 없고, 돈 없는
비구니 스님들 노후를 위한 사찰.
조계종에서 유일한 비구니 복지시설.
무료 양로원에는 오갈데 없는 노 스님들
일반 노인들 틈에 끼어 서글픈 생의 마감
말년에 의탁할 곳이 마땅치 않은 비구니들.
건강이라도 좋으면 인연 따라 뒷방 거처
그렇지 못하면 몸이 아파도 갈곳이 없다.
선뜻 아프다는 말조차도 할 곳 없는 실정.
조계종은 사찰 수가 3,000 에 이르지만
유일한 비구니 노후복지 시설은 법계사.
그나마 종단의 공식 복지시설은 아니다.
자제정사와 성라원, 수덕사 견성암, 선원사
등 10명 내외 노스님들을 모시고 있는 정도.
법계사는 천왕성모 전설과 무관하지 않은 사찰.
........................법화경.......................
'악인과 여자도 성불할 수 있다는 내용의 경전.'
부처를 죽이고 교단을 분열시킨 악인 '제바닷다'
열심히 수행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부처의 가르침.
'법화경은 천태종 불교 교리의 기본 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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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첫 절'인 지리산의 법계사(주지 진욱)는
보성스님(송광사 방장) 초청법회 및 적멸보궁 법당 낙성
천태종 대충스님(제 2대 종정)의 6주기 열반재를 가졌다.
천태종이란 어떤 불교종파일까?
.....................천태종.....................
6세기 승려 지의(智?)가 설법한 동아시아 불교 종파.
천태종의 기본 교의는 삼제원융(三諸圓融)이라 한다.
첫째, 모든 현상은 존재 실체가 없다는.. 공(空)의 진리,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로 존재한다는 가(假)의 진리,
셋째, 모든 현상은 비실체적이며 임시적이라는 중(中)의 진리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천태종이 전해졌다.
백제 현광(玄光),신라 연광(緣光),고구려 파야(波若)
고려 학승 제관(諦觀)은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 때 천태종은 대표 종파.
일본에서는 806년 사이초[最澄]가 천태종을 개창.
일본 천태종은 선(禪)·율(律)·밀(密) 등을 융합
사이초가 히에이 산[比叡山]에 세운 엔랴쿠사[延曆寺]
일본 불교의 중심 사찰이며, 대승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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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은 불교의 상징이자 서해 저지대 민족의 상징.
물위에 떠 고운 꽃을 피우고 생명력을 유지하는 연.
연꽃과 산위의 사찰은 불교 상징이자 대홍수 안식처.
지리산 주능선에서 가장 일기변화 극심한 연하봉 일대.
천왕봉에서 내려오면 주능선 상 연달아 이어진 제석봉.
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 남쪽능선 고갯마루가 <장터목>.
장터목의 변화무쌍한 일기변화는 악명 높을 정도.
한낮에는 무덥다가도 새벽녘에는 한여름에도 춥다.
하루에 몇번씩 날씨가 뒤바뀌는 변덕스러운 기상변화.
'천왕봉 남쪽 기슭의 사천주민과 북쪽의 마천주민.'
매년 봄가을 이곳에 장을 열고 생필품을 물물교환한 장터
지리산에 기대어 살던 옛사람들 강렬한 삶의 의지 깃든 곳.
장터목은 남쪽 중산리에서 9km, 북쪽 백무동에서 9km의 거리.
덕산이나 인월에서부터 오른 등짐 상인에겐 힘들었을 듯.
무거운 배낭을 메고 이곳을 오르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물물교환은 화폐가 통용되기 이전부터의 거래 수단이다.
신석기 시대에는 국가가 형성되지 않았기에 화폐가 없었다.
그렇다면,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 농경사회로부터 유래된 풍습.
'신석기시대는 토속신앙이 지배한 모계 중심사회.'
천왕성모 토속신앙은 신석기 시대부터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낙동강 주변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유물들 역사는 약 20.000년.
하여, 장터목은 아득한 옛날부터 물물교환 장터로 이용되었을 듯.
장터목 좌우 10분 거리에 제석봉(1,806m) 과 연하봉.
제석봉 지나 하늘과 통한다는 천왕봉 지킴이 통천문.
옛부터 심신이 부정한 자는 출입을 못한다는 통천문.
'천왕성모 성역 천왕봉 출입을 제한하는 석문.'
장터목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려면 통천문을 거쳐야 한다.
통천문 주변은 산세가 험해, 옛날에는 오를 수 없었던 곳.
그곳에 철제 사다리가 없다면, 암벽등반 바윗길 코스 수준.
'조상 3 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
그 전설도 통천문 일대의 험준한 산세에서 비롯된 전설.
하여, 천왕봉은 유구한 세월 동안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곳.
통천문에 등산객을 위한 사다리를 처음 설치한, 우천 허만수.
'장터목산장이 들어서며 대중화된 '천왕봉 일출'.
제석봉 일대는 지리산 최대의 고사목 지대로 독특한 경관지.
연하봉 기암괴석 층암절벽 고사목에 운무가 흐르면 신선된 듯.
산비탈 아름다운 연하봉 일원은 여름철 야생화의 원색 파노라마.
지리산은 6천 5백만년 전 화산폭팔로 형성된 화산.
오랜 세월 비바람과 빙하에 깍여나가 사라진 분화구
연하봉의 기암괴석은 용암이 분출된 흔적을 보여준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은 용암이 흐르는 땅속.
극락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하늘나라에 위치.
연하선경은 극락과 지옥을 상징하는 표현인듯.
................극락과 지옥..................
불교에서는 죽어서 가야할 극락과 지옥이 있다.
극락 정토는 아미타불이 서원으로 이룩한 이상향.
사바세계 서쪽 십만억 국토를 지나 부족함 없는 곳.
극락 정토는 사바 고해를 벗어난 안락의 세계,
중생들이 머무는 더러움과 동떨어진 청정 세계.
얽매임에서 벗어난 해탈, 대 자유, 열반의 세계.
지옥은 지하감옥을 말함이니 온갖 괴로움 뿐,
조금이라도 쉬거나 즐거울 수가 없는 곳이다.
지옥은 팔열, 팔한, 고독 등등 모두 136 가지.
끊는 쇳물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화탕 지옥,
칼끝이 산처럼 뽀족뽀족 서있는 도산(刀山)지옥,
괴로움을 벗어날 틈과 사이가 없는 무간(無間)지옥.
사람은 업보에 따라 극락이나 지옥에 간다는 믿음.
살아있는 동안에도 극락과 지옥 생활을 하기도 한다.
교통난은 교통 지옥, 고초가 심할 경우에는 생함지옥
극락과 지옥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자업자득.
현실속에서의 극락과 지옥은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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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징악 유래.............
노(魯)나라 성공(成公) 14년 9월에
제나라 공녀를 맞이하러 가 있던 교여
부인 강씨를 제나라로 데리고 돌아왔다.
교여라 높여 부른 것은
부인을 안심시켜 슬며시
데리고 오기 위해서였다.
이보다 앞서 선백(宣伯)이 제나라로 공녀를 맞이하러 갔을 때
선백을 숙손(叔孫)이라 불러 군주의 사자로 높여 호칭을 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이렇게 말한다.
“춘추시대 호칭은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알기 쉽고,
쉬운 것 같으면서도 뜻이 깊고, 빙글빙글 도는 것 같고
정돈되어 있고, 노골적 표현을 쓰지만 품위가 없지 않으며,
악행을 징계하고 선행을 권한다.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렇게 지을 수 있겠는가?”
...............................
고대사회부터 우리 민족의 가치관은 권선징악.
중국, 몽골, 한반도, 일본까지 공통적인 가치관.
특히, 우리 민족은 극락과 지옥에 관한 내세관.
종교를 갖고있던 무신론이던 공통적인 관념.
평소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사후에 천당 가고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사후에 지옥간다는 믿음.
권모술수, 궁여지책,
고육지책, 권불십년,
'우리 민족의 권선징악 내세관 등등
과연,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천지개벽.
마치 황량한 사막같은 고사목 지대.
태고의 자연 속 신비감이 느껴진다.
짙은 안개가 환상 속 같은 고사목 지대.
'지질학자들이 미래를 예고한대로
거대 산맥이 대기 순환을 차단하면
미래의 한반도 주변은 어떻게 변할까?'
사막으로 변할 것이란 지질학자들 중론.
황사는 그 지역이 사막화되고 있다는 현상.
황사가 바람에 날아가버리면 남는 것은 모래뿐.
..............황사현상(黃砂現象)............
황토지대나 사막에서 발생한 미세한 흙먼지
대기로 솟아 바람타고 날아가 떨어지는 현상.
우리나라에서 봄철에 흔히 일어나는 황사현상.
시야가 다소 혼탁한 정도는 0,
흙먼지가 약간 쌓이는 정도는 1,
황갈색 하늘에 흙먼지가 진하면 2
1970~89년까지 20년 동안 한반도 황사현상
매년 3~5월에 주로 연간 3일 정도 출현한다.
사막(타클라마칸, 고비, 아리산), 황하강 상류.
대규모 모래먼지가 계속되면 정밀기계 손상
호흡기 질환, 안질 등으로 살기 어려운 환경.
황사현상이 심화되면 차츰 사막화된다는 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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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생성역사 46 억년 동안의 한반도
수 차례에 걸쳐 사막과 빙하지대를 반복.
자구 온난화 현상으로 빙하가 녹으면 대홍수.
'지리산은 대홍수 때마다 동식물의 피난처.'
빙하시대 한반도 삼면의 바다는 드넓은 육지.
지구 온난화로 바다 속으로 잠겨버린 옛 육지.
한반도를 애워싼 삼면의 바다는 광활한 옛 육지
제석봉은 태고로부터 자연환경 변화의 산 증거.
공룡 서식처였던 원시림에서부터 사막까지 변화.
현재 제석봉은 사막지대의 한 부류인 '아고산 지대'.
'제석봉은 태고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리산의 사막시대...........................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메마른 황야를 사막이라 한다.
사막은 건조 한랭 이동 해안 암상 암극으로 세분한다.
사막은 혹독한 환경 탓에 동식물의 분포가 극히 한정.
사막에서 살려면 건조함, 기온, 일교차를 견뎌야 한다.
사막은 건기엔 가물다가도 우기엔 상당한 비가 내린다.
한낮에는 폭염이 작렬하지만 밤엔 기온이 급강하 한다.
사막에서 살려면 환경변화에 적응력이 최대 관건.
'한해살이 풀'은 짧은 우기 동안에
꽃을 피우고 씨를 만들고 스러진다.
단단한 껍질에 싸인 씨앗은 고온 건조함을 견디며 우기를 기다린다.
'여러해살이 풀'은 땅속 줄기나 알뿌리로 건기를 극복하며 잠을 잔다.
작은 곤충들은 먹이가 풍부한 우기에 집중적으로 번식하고
혹독한 환경변화 속에서는 알이나 번데기의 형태로 버틴다.
사막동물에겐 식물의 종자나 곤충의 알이 건조기의 먹이이다.
여러해살이 생명체는 각각 독특한 방법으로 환경변화를 견딘다.
한반도의 사막시대 침엽수림은 건생대 식물로 분류한다.
수분증발을 억제하려고 숨쉴 구멍만 남기고 잎을 축소한다.
나무잎 표면을 흰털이나 왁스로 덮어 뜨거운 폭염을 견뎌낸다.
나무는 표피를 코르크 같은 두터운 물질로 감싸 생명을 보호한다.
수분증발의 억제를 위해 밤에 꽃을 피우고 곤충을 불러 번식해 간다.
사막식물은 우기에 많은 수분을 빨아들이려고 뿌리를 얕고 넓게 뻗는다.
일부 사막식물은 건기에 지하수를 빨아들이려고 땅속 깊이 뿌리를 뻗는다.
사막동물 = 곤충 (개미 딱정벌레 메뚜기) + 무척추 동물 (거미·진드기·전갈)
이러한 작은 사막동물의 대부분은 건조기에는 쉬면서 거의 활동하지 않는다.
사막의 척추동물로는 도마뱀· 뱀·육지거북 등의 파충류
그 중 방울뱀은 모래땅을 헤엄쳐 다니는 특수한 몸 구조.
포유동물인 낙타를 제외하면 몸집 작은 설치동물이 주류.
사막동물은 고온에 잘 견딜 각질층 피부와 짙은 오줌이 특징.
낮엔 바위그늘의 땅굴에서 더위를 피하고, 저녁에만 활동한다.
새는 철새가 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건조기를 극복한다.
포유류, 조류, 사막동물은 씨앗과 곤충을 먹이로 건조기를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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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식물은 종자번식을 위해 열매로 사막동물을 유혹한다.
사막동물 배설물 속에서 살아남은 씨앗은 우기를 기다린다.
건기에 마른 배설물은 씨앗을 우기에 떠내려가지 않게 감싼다.
우기에 싹 튼 씨앗은 사막동물의 배설물 양분을 먹고 자라난다.
사막이 초원으로 변하면 관목이 뿌리내리고 교목이 자라게 된다.
교목이 자라 숲이 무성해지면 사막지대는 비옥한 땅으로 바뀐다.
사막이 숲으로 바뀌려면, 풀 한포기 해충 하나마다 모두 소중하다.
제석봉은 사막에서 숲으로 변해가는 한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곳 동식물 분포을 보면, 태고의 어느 시점엔 사막이었던 것 같다.
제석봉 일대의 자연발생적인 침엽수림은 사막식물이기 때문이다.
제석봉 일대는 지리산에서 인위적 조림 흔적이 전혀 없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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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개벽의 흔적을 품고 있는 제석봉의 고사목 지대.
용암 폭팔로 바다가 산이 되고 산이 바다로 변한 흔적.
사막이 초원과 원시림으로 변했다가 다시 사막이 된 흔적.
천지개벽 자연환경 장구한 역사에 비해 짧은 인간 역사.
BC 40,000 ~15,000 년 : 몽골리안이 베링 해협을 지나
알라스카를 경유해 북미를 거쳐 중남미 대륙으로 이주.
또는 한반도- 일본- 큐수열도- 캄챠카반도
-알류산 열도 -알래스카-북미 -남미로 이주.
제 4 빙하기 2만년 전까지 지구 육지는 하나.
약 만년 전부터 지구온난화가 시작
6~7천년 전에 나타난 현재의 해안선.
그 전까지 한반도는 양자강 하류지역.
'한반도는 아시아 대륙에서 분리.'
아시아 저지대의 야생동물들은 대이동.
저지대 민족들도 먹이사슬 따라 대이동.
양자강 하류는 서해로 변하면 이동 단절.
한반도 한수 이남은 양자강 하류 민족
한반도 한수 이북은 황하강 하류 민족.
하여, 한수 이북과 이남은 색다른 문화.
삼남 지역은 양자강 하류의 문화.
하여, 지리산 일대는 양자강 문화.
고라니 서식처도 중국과 한반도로 분리.
고라니 서식처는 서해에 가로막혀서 양분.
양자강 하류에 살던 민족도 둘로 나눠진다.
'중국 산동반도와 한반도는 같은 민족.'
고라니는 원래 저지대 습지의 야생동물.
저지대 민족의 이동 루트를 대변해준다.
고라니와 인간은 원래 상부상조하는 관계.
논밭에서 농산물을 훔쳐먹는 고라니.
고라니 등 야생동물은 인간의 사냥감.
동남아 고라니 서식처 = 한 핏줄 민족.
..........고라니...............
사슴과 포유동물 몸무계 9∼11㎏
등은 노란 갈색, 배는 연한 노란색
번식기 11∼1월, 임신기간 170∼210일,
5∼6월에 1∼3마리 출산
갈대밭이나 관목숲에 서식.
분포지역 한국, 중국 북동부
..............................
제 4빙하기 이후 지구온난화로 해수면 상승.
일본은 한반도와 분리되고 큐수 열도도 끊긴다.
일본 열도도 크게 나누면 4개의 섬으로 분리된다.
일본 열도에 사람이 살기시작한 역사는 약 10만 년.
이때 일본 열도는 동아시아 대륙의 끝부분으로 연결.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 구석기 유적이 고르게 분포.
약 1만 년 전 동아시아 대륙 끝과 이어진 육교가 사라지고
일본열도는 지금 형태로 고립되고 1만 2,700년 전 토기 발견
일본의 다양한 토기문화는 세계 최초의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즉,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학설.
한반도를 둘러싼 3면의 바다가 저지대였던 구석기시대.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 훨씬 이전에 이루어진 문명.
일본의 첫 주민들은 남북 두 방향에서 육로를 따라 이주.
그들이 쓰던 타제석기와 뼈 연장 등은 점차 세련되어졌다.
빙하가 녹고 충적세로 접어들 즈음 일본에 신석기시대 문화.
일본을 빠져나간 구석기시대 민족들이 정착한 메소포타미아.
그무렵 한반도를 거쳐 빠져나간 저지대 민족도 메소포타미아.
한반도 대동강 유역도 메소포타미아 이전 구석기시대 유적지.
'제주 구석기시대 유적 또한 북경 유적과 시기적으로 일치.'
실크 로드를 통해 서쪽으로 이동한 동양민족이 그곳에 정착.
유럽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서양민족도 메소포타미아에서 합류.
제 4빙하기 혹한을 시베리아 바이칼 호 온천지대에서 극복한다.
동서양이 합류해 이루어졌다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학설'.
구석기시대 동양문화는 오늘날 서양문화의 발원지.
구석기시대 서양문화는 오늘날 동양문화의 발원지.
그 학설은 신빙성 여부를 떠나 그야말로 천지개벽.
'인류의 기원이 <아프리카>이므로 일리 있는 학설.'
산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산이 되길 반복한 지구.
열대지대가 온대 또는 한대로 뒤바뀌어 왔던 지구.
사막이 숲이 되듯 열대우림이 사막으로도 뒤바뀐다.
'지구의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필사적인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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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천지창조 : BC 4,004 년 10월 23일 오전 9:00(천주교)
또는 BC 3,761 년(우리나라 단기처럼 유대인이 사용하는 년도)
'노아의 홍수'는 BC 2,348 년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연하선경은 구약성서 1장의 '창세기'처럼 천지개벽을 상징한다.
미국 E. R. Nelson 박사는 한자에 창세기 내용이 담겼다는 주장.
한자의 발생은 B.C.2500 경이고, 4500 년간 사용되고 있는 문자.
유교와 도교가 중국에 성행한 시기는 B.C. 5세기,
불교가 중국에 소개된 것은 B.C. 1 세기경 (67년).
공자, 노자, 석가의 사상 이전 B.C. 500년
그 이전 종교에 대해 현재 밝혀진 바 없다.
고대 중국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섬겼다는 증거들,
하나님= 하늘에 계신 통치자 =上帝(샹다이, Shangdai).
창세기(17:1)과 시편(91:1)의 하나님(샤다이, Shaddai)
'원어 상, 두 발음이 상호 비슷한 것이 하나의 증거.'
중국 하나라 대홍수를 극복한 '누아'의 자손...우씨.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에서 노아와 발음이 비슷.
몽고, 중국, 극동 아시아계는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종.
일부는 황하유역에서 한족, 일부는 만주 한반도로 이주.
그들이 사용했던 한자와 창세기의 내용이 일치되는 점들.
船 (배 선) : 배(舟)에 8(八) 입(口) = 노아의 방주.
造 (지을 조) : 土에 (') 생기를 口넣으니 人 + 다닐(造).
男 (사내 남) : 田에서 힘 쓰고 수고(力)하는 사람.
女 (계집 여) : 사람(人)의 갈비뼈(ㅡ)에 넣은 (') 생기.
示 (보일 시) : 제물을 차려놓는 제단을 본뜬 모양.
禁 (금할 금) : 하나님(示)께서 두 나무(林)에 대해 命.
神 (하나님 신) : 示(제단) + 申(펴다, 말하다).
祝 (빌 축) : 형(兄)이 하나님(示)께 부탁.
祈 (기도할 기) : 示(제단) 앞에 두손을 모우기 (斤).
祭 (제사할 제) : 제단(示) 위에 고기(祭=肉) 놓는 손(手).
祥 (상서로울 상, 복 상)) : 제단(示) 옆에 양(羊)을 놓기.
祀 (제사 사) : 오전 9 ~ 11시(사시, 巳時)에 제단 차리기(示).
火 (불 화) : 양손에 불을 쥐고있는 여인(人).
仁 (어질 인) : 최초의 인류 두(二) 사람(人).
西 (서녁 서) : 一人이 살던 쓸쓸한 동산(口)
要 (요긴할 요) : 쓸쓸한 동산에서의 여자(女).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문자.
기독교와 불교는 다른 종교지만 유사한 점도 많다.
옛날 실크로드를 지배했던 문화 사상 언어의 공통점
두 종교는 실크로드 양극 방향으로 퍼져 한반도에서 합류.
즉, 지구촌 문화는 나라마다 달라도 시대적인 주류는 일치.
한반도의 신구석기시대 유물들을 보면, 그 사실이 실감난다.
인류의 조상은 제 4 빙하기와 대홍수 재앙에서 살아난 극소수.
우리나라 민족은 해 뜨는 동남쪽을 향해 반만년에 걸쳐 대이동.
결국,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로부터 유래된 메소포타미아 문명권.
..............
제 4 빙하기.
...............
빙하기 생명체는 거의 전멸상태에 들어가게 되고,
간빙기에 다시 생명체들이 되살아났던 지구의 현상
제 1 간빙기와 제 4 빙하기 초까지., 전기 구석기시대
제 3 간빙기와 제 4 빙하기 사이에 네안데르탈인 출현
불을 사용하고 매장법을 알게 되었던 후기 구석기시대.
제 4 빙하기 이후 크로마뇽인 등 현생인류가 출현했다.
즉,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은 전혀 다른 인간
따라서, 고생인류는 빙하기 때 전멸한듯 추정된다.
제 4 빙하기 직후는 인류에게 가장 혹독한 시련기.
빙하가 녹아 흘러 저지대는 거의 바다 속으로 침몰.
육지는 빙하에 패여 나가 온통 화강암이 드러난 산.
지리산의 분화구도 거의 빙하에 깍여나간듯.
지리산 일대의 천지개벽 흔적이 있는 연하선경
빙하에 의해 패여나가 드러난., 쥬라기 화강암층.
지리산 주능선은 대홍수 때마다 동식물들의 피난처.
마치, 노아의 방주 역활을 했을듯 추정된다.
'제 4 빙하시대'가 훓고 지나간 흔적과 같은 황량함.
앙상하게 뼈가 들어난듯 보이는 제석봉 고사목 지대.
마치. 수만년전 빙하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 드는 곳.
지구 상에서 수백만 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빙하시대.
전세계 대륙의 지표면 형태와 특징을 뒤바꿔 놓았었다.
지구상 가장 오래된 빙하시대는 약 5억 7,000만 년 이전
최근의 빙하시대는 약 250만 년전부터 약 1만 년 전까지.
소빙하기는 13세기부터 현재까지 약 700 년 동안 산발적
소빙하기는 1750년 경 4 빙하시대 중 빙하가 폭 넓게 분포.
'북극과 남극은 빙하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극지.'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상지는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
우리나라 조상은 그곳 온천지대에서 빙하기를 넘겼다.
지구 온난화로 빙하가 녹으며 끝없이 동남쪽으로 이동.
태평양이 가로막은 한반도에서 정착했던 우리나라 민족.
우리 조상은 원래 빙하 속에 갇혀 극지에서 살았던 민족.
북극과 남극은 지구 생명체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현장.
남극은 빙하로 덮힌 대륙인 반면 북극은 대륙으로 둘러싸인 바다.
면적은 1천 4백만㎢로 지중해의 6배이며, 전세계 바다의 3%를 차지.
남극대륙의 면적은 1,360만㎢ 로서 지구상의 7개 대륙 중 5번째로 크다.
북극은 북위66도 이상의 북극권(Arctic Circle), 산림성장 한계선,
빙하 남하한계선, 영구 동토선 등을 지칭하며 7월 평균기온이 10℃
북극해 면적은 1천4백만㎢로 지중해의 6배이고 전세계 바다의 3%.
대륙붕에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주변해역은 전세계의 주요 수산어장.
남극은 지구의 남쪽 끝에 위치하며 남극점이 그 중심부이다.
남극은 북극과 함께 위도상으로 적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남극 면적은 1,360만㎢, 7 대륙중 5번째 크기(미국 + 멕시코)이다.
남극해는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과 남극수렴선(남위 55° 선)이 경계
1911 R. 아문센(노르웨이), 12월 14일 남극점에 처음으로 도달.
시라세(일본), 로스해 훼일즈만 상륙. 로스 빙붕위 남위 80˚5′까지 도달
D. 모슨(호주), 킹조지 5세 섬 등 발견해 자남극의 이동을 발견(~14)
1912 R. 스콧, 1월 17일 남극점 도달해 많은 과학조사 실시
1928 H. 윌킨스(영국·미국), 남극반도에서 처음으로 비행 성공(~29).
1929 H. 리즐란센(노르웨이), 프린스올라브해안 발견(~30)
1946 버드 지휘하에 미해군 하이점프작전(~47)
1949 노르웨이·영국·스웨덴 3국 공동탐험대, 서퀸모드랜드에서
설빙학·지학 등 조직적 관측에 성공(~52)
1955 각국 국제지구관측년(IGY) 준비에 돌입
1956 일본 제 1 차 관측대 파견, 57년 2월 동옹글섬에 쇼와기지 개설
1957 V. 훅스(영국), 남극대륙횡단에 성공(~58)
1994 허영호(한국), 남극점 도달
1995 허영호(한국), 빈슨 메시프봉 등정
1997 V. 오우슬란(노르웨이), 남극 도보횡단 성공.
R. 페리데르(프랑스), 여성 최초로 남극 단독 정복.
허영호(한국), 남극점 도달
2003 남극세종기지(한국) 연구원 8명 실종되었다가
7명 무사히 생환했고 1명(전재규 연구원)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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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문명 발상지는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그 온천지대에서 우리 조상은 제4 빙하기를 보냈다.
만년전까지 그곳 빙하지대에 갇혀지내다가 민족이동.
옷은 혹한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수단.
구석기시대 인간은 빙하기를 거쳐 극소수만 생존한다.
신석기시대 천재지변에서 살기 위해 인간은 두뇌발달.
불의 발견으로 인해 인류의 문명은 급격하게 발달한다.
B.C.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주석 광석을
목탄으로 가열하면 청동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B.C. 2000년 서아시아에서 철을 일상도구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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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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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약 10만년을 주기로 빙기와 간빙기가 교차
우리는 지금 <제 5 빙하기> 전 간빙기에 살고 있다.
빙하기 가운데서도 온난한 기후가 계속되는‘간빙기’
인류 문명은 1만년 전 혹독한 빙하기 이후에 탄생
지구 생명체의 대멸종을 가져온 빙하시대의 미스터리
특히 주목되는 점은 빙하기와 간빙기의‘일정한 주기’
빙하는 지구기후 변화의 주기와 지구역사의 기록이다.
나무가 나이를 먹을때 나이테를 남기듯
빙하는 매년 쌓인., 지구변화의 이력서
특히, 남극 빙하는 정확한 변화의 증거.
남극은 과거 기후변화를 연구하는데 가치가 높다
그래서 세계각국이 앞다투어 빙하를 시추해 연구.
과거조사는 앞으로 곧 닥쳐올 지구의 변화에 대비
빙하의 얼음은 수천년에 걸쳐 쌓여 압축된 것이라
미세한 층에서 지난 세월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한마디로 빙하는 지구역사를 대변하는., 타임 캡슐
지난 40만년간의 기후 변화에 대한 주기 측정 바로메타.
CO2 즉 이산화탄소의 양은 어떤 주기적인 변화를 보여왔다.
이것은 지난 40만년 동안의 기후 변화를 반영하는 바로메타.
이것으로서 지구기후에 일정한 주기가 있었고
그 주기가 10만년 정도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지구는 자전축의 기울기 23.5도 중심으로 자전한다.
그 기울기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4만년 주기로 변화.
지구는 팽이돌 듯 비틀거리는 자전이‘세차(歲差)운동’
지구의 세차운동 역시 2만3천년의 주기.
지구 공전궤도가 10만년 주기로 바뀌는., 이심률(離心率)
이산화 탄소, 세차운동, 이심율을 분석한‘밀란코비치 주기’
이 주기가 빙기와 간빙기의 주기와 거의 일치한다는 기상이론
민간신앙.
신석기시대 간빙기는 인류에게 큰 두려움.
빙하가 녹자 바다 속으로 잠긴 삶의 터전
하룻밤 사이에 수십리씩 사라져가는 육지.
천재지변은 하늘이 인간에게 내린 재앙.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저지대에서 고지대를 향해 목숨을 건 탈출.
대홍수, 질병, 전쟁에서 살아난 소수 인류.
하늘을 천신으로 섬기며 제를 올렸을 듯.
최초의 민간신앙은 그렇게 시작되었을 듯.
부족을 위기에서 이끌던 통치자가 제사장.
천제의 최초 제사장은 여성이었을듯.
남성보다 위기감지 능력이 탁월한 여성.
하여, 우리나라 고대사회의 통치자는 무당.
다가올 미래의 위험을 예견하는., 존재.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주술적인 힘.
신의 계시로 민족을 이끄는 존재., 무당.
한편, 만년설이 녹아내린 히말라야 초원.
목초지가 말라 삶의 터전을 잃은 유목민들
하천 따라 한반도까지 유목 민족들의 대이동
유목민족과 농본민족 간에 피할 수 없는 전쟁.
고조선은 유목 민족과 농본민족의 연합 공동체
부계사회로 바뀌며 무당은 통치자 권한을 상실.
'무당은 굿을 주관하는 무속인으로 전락.'
우리나라 민간신앙을 총칭하는 무속(巫俗).
좁은 의미에서 무속은 무당과 관계된 종교
무(巫)란 '신명(神明)을 다해 춤추는 사람'
'巫'자의 '工' 양변에 '人'자는 춤추는 모양
무당이 신에게 의탁하기 위해 가무를 하는 것.
무당은 여무를 칭하며 만신(萬神)이라고도 한다.
남무(男巫)는 박수 박사(博士) 또는 화랭
화랭은 신라의 화랑(花郞)에서 유래된 말.
광대 우인(優人) 재인(才人)도 무당을 뜻
이조시대 무당은 8천(八賤)민 중 하나
선사시대 청동방울·청동거울·청동두겁 등
무속이 청동기시대에 비롯되었음을 알려준다.
당시 제정일치사회에서 무당의 권한이 절대적.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소도(蘇塗)는 신성지역
신라 2대 남해왕조(南解王條)는 왕 그 자신이 무당
고려시대에 이르면 현존하는 무속과 거의 일치된 기록
무속은 우리나라에서 역사상 많은 탄압을 받았다.
고려시대 신유학(新儒學)은 무속 폐해를 지적하고
무속배격 운동, 안향(安珦)은 상주에서 무당을 통제.
〈고려사〉열전에 권화가 요민 이금을 처단한 기록 등
이조 후기 무속은 유교의 강력한 배격에 당면하게 된다.
신당을 파괴했던 이조 숙종 때 제주목사 이형상의 행적
1702년(숙종 28) 삼읍(濟州·旌義·大靜) 음사(淫祀)와
불사(佛寺) 130 개소를 파괴, 무격(巫覡) 400 명을 귀농
무당의 풍기문란·민중현혹·재산갈취 음사금지법 5개조
동서활인원제(東西活人院制)·무세(巫稅)·
무사금률(巫祀禁律)·무의·출성(出城) 같은
무속금제(巫俗禁制)의 법적 조치가 이루어졌다.
또한 무속에 의지해 왕권에 도전하는 사례도 발생
태종대에 강신공창하다가 처벌된 요무(妖巫) 백이(栢伊),
세조 때 상왕복귀 요언모역죄로 능지처사 당한 무녀 용안(龍眼),
연산군대 요술로 혹민하던 무녀 돌비(乭非) 등
요(妖)는 곧 혹세무민자로서 능지처사를 당했다.
아울러 민란 시기마다 확산되어나갔던 남조선신앙·
정감록·미륵신앙 운동은 무속과 관련된 왕권 도전.
무속은 외래종교 이전부터 우리민족의 생활 일부
신라시대 이차돈의 순교로서 불교가 공인된 기록
그만큼 전래 무속과 새로 유입된 종교가 빚은 갈등
불교·유교·도교는 여러 측면에서 무속과 하나
칠성각(七星閣)·산신각(山神閣)·삼성각(三聖閣)·
삼불제석 등은 불교와 무속이 융합한 대표적인 예.
칠성신앙 남강노인은 도교 요소와 결합된 민간신앙
당산제 당산굿, 서낭제 서낭굿은 무속과 유교의 결합.
무속은 마을신앙·집안신앙·주술·점복 등을 포함
마을신앙은 마을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빌기 위해
1년에 1~2번씩 정기적으로 갖는 풍어굿·풍농굿 제의
각 지역 및 신격에 따라 당산제·동제·영등제·
골매기굿·서낭굿·동신제·장승제·거리제·우물굿
집안신앙은 집 안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신격들인
성주·삼신·터주·조왕·대감·업·문신·곳간신
등을 모시는 의례로 정초 안택이나 시월상달 고사.
집안신앙에는 독경(讀經)도 포함되며
경잽이가 집안에 와서 안택이나 환자굿
이때 '천수경'을 읽어 환자 치병과 축귀.
충청도는 앉은반 독경이 유명하며 장님이 행한다.
점복은 운명을 예언하는 전문적인 복사(卜師)가 행
쌀점·새점·복점·육효점 동식물숭배와 사귀신앙 등
이러한 토테미즘은 산신도에 등장하는 호랑이나
단군신화 곰과 연관되어 민간신앙의 기초를 형성
사귀신앙은 도깨비 수비영산(잡신) 왕신(처녀귀신)·
몽달귀신(총각귀신) 같은 사귀를 모시는 무속 의례로
사귀의 상징물로는 제웅 처용탈 도깨비문양 등이 있다.
자연신앙은 돌·나무 등의 자연물에 신이 있다는 믿음
당산목·서낭목·입석신앙·기자신앙 등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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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고려 시대에는 장승을 장생(長生),
고려 후기부터 조선 중엽까지는 장주(長柱),
그후 장승(長丞) 장승(長承) 장주(長柱) 장선(長善)
우리 말로는 더승ㆍ쟝승ㆍ쟝성ㆍ쟝선ㆍ장신
장승을 부르는 이름도 지방마다 달라
평안도 및 북부지역은 더승 혹은 더신
경기도는 장승(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충청도 일대에서는 '수살 수살막이 수구맥이'
몸체 동서남북 사방에 장승 이름을 써 넣었다.
영호남에서는 벅수 벅슈 법수 미륵 등으로 부르고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ㆍ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호남지역에서는 벅수라고 부르기도 하고
제주도는 돌하루방, 글은 새기지 않았다.
장승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신라 경덕왕 18년(759)
전남 장흥 보림사 경내 보조선사영탑비에 장생표주
《삼국유사》에는 청도 운문산 선원에
11개의 장생표탑(長生標塔)ㆍ국장생(國長生)ㆍ
황장생(皇長生) 등은 돌기둥으로 훗날 돌장승
처음에는 입석이나 목주(木柱)가 후세에 산신이나 칠성,
불교 사천왕과 연합, 武人을 조상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장승은 석장승과 목장승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
대개 목장승은 통나무에 무서운 형상의 얼굴을 조상
남장승에 홍색, 여장승에는 황색을 채색하기도 하며,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외에 마을간 거리를 써넣는다.
장승은 그 기능에 따라 세우는 곳도 다양
절 입구에 사원장승, 마을 입구에 벽사장승,
이정표 겸 노신으로 길가에 세우는 노표장승,
풍수지리설에 따라 허한 곳에 세운 비보장승
제주도 하루방처럼 성문 앞에 세운 수문장장승
현존하는 장승 중 가장 오래 된 것
전북 부안군 서외리 성문안 돌장승
이조 초 숙종 15년(1689)에 세운 것
전남 나주군 다도면 운흥사터 돌장승은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란 명문과 함께
숙종 43년(1717) 건립연대가 새겨져 있다.
1725년 실상사 모자 쓴 돌 남장승
왕방울같은 눈은 툭 튀어나와 있고
코는 주먹코이며 가슴까지 긴 수염
송곳니가 아랫입술 위로 삐져나와서
무섭다고 하기보다는 해학적인 형상.
목장승도 예술적 가치를 지닌 것이 많겠지만
쉽게 썩어 목장승 자체가 거의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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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신앙의 대상 솟대 = 신간(神竿), 조간(鳥竿)
그 장대 위에는 1∼3마리 목조나 철조가 앉아 있다.
조간은 대개 동구 밖 장승과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명칭 외 짐대, 진또배기 또는 '별신대'
장대 끝에는 한 마리 혹은 세 마리의 조형(鳥形)
때로는 용사(龍蛇) 형상 등을 각지에서 볼 수 있다.
거제도에서는 솟대를 별신대라 하여
3년에 한번씩 별신제 때 신간이 된다.
솟대의 명칭으로 나오는 솟ㆍ솔ㆍ소
이조 초 무헌에는 등(騰)이나 용(湧)
몽고와 만주어 용목(聳木), 고간(高竿)
소대ㆍ솟대 = '소도(蘇塗)' = 까마귀
우리 조상들은 산의 영물 호랑이를 산신으로,
나그네의 벗인 말을 노신격(路神格) 서낭신으로
곡식을 없애는 쥐나 참새를 잡아먹는 구렁이를 업
이외에도 소를 조사의 상징,
돼지를 지신, 개를 객귀의 상징
까마귀와 까치 등의 조류를 신성시
비둘기는 주몽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유화가 아들 주몽에게 보내는 신모의 사자
고대인에게 암흑을 막을 태양의 상징물 = 까마귀
까마귀는 불길함, 재앙을 예시해 주는 신성한 영조
(달 = 오리, 여자 = 따오기, 물 =외가리)로 바뀐다.
그후 (학ㆍ용ㆍ봉황) 등으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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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뼈요 흙의 정(精)이며 기(氣)의 핵"
고인돌처럼 무덤, 사후 안주처로 사용한 돌.
돌탑은 민간신앙 차원에서 매우 신성한 존재
사람들은 바위와 돌로 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탑을 신앙하고 공경하였다.
사찰 석탑, 또는 제단 누석단(累石壇),
고개마루에 있는 서낭당,
마을의 삼재를 막는 조산
돌탑은 장승처럼 보통 2개를 쌓고
할아버지탑, 할머니탑으로 부른다.
아울러, 돌탑 내부 감실에 넣는 내용물들
오곡단지 금두꺼비 쇠스랑 부적 숯 등이다.
오곡단지는 풍농을 기원하는 뜻에서 넣는 곡식단지,
금두꺼비는 지네를 잡아먹으라고 금으로 만든 두꺼비
숯과 소금은 마을에서 도깨비 불장난을 제어하라는 뜻.
간수(소금)는 부인들이 살림을 알뜰하게 하라는 뜻
거북이는 불과 상대되는, 음성적인 물에 사는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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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시작되었는 지 알 수 없는 민간신앙.
아득한 옛적부터 민족의 계승적인 신앙이다.
고대 자연종교를 저변으로 하는 애니미즘 단계.
애니미즘으로부터 발전한 영혼 또는 조상 숭배
농경 어업 생산 생활과 밀착하여 산영(産靈)신앙
천지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물상
땅에는 지맥을 통해 생기가 흐르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생기를 어떻게 타느냐에 따라 흥망이 좌우
그 생기를 타는 방법은 조상의 뼈를 통해서 전달
그러므로 후손이 번창하려면 명당을 찾아야 한다.
오행의 기는 땅 속에 흐른다는 믿음이 풍수지리설
풍수지리설은 천지개벽에서 비롯된 민간신앙.
제 4 빙하기 말 신석기시대에 잦았던 천지개벽.
인류는 오직 생존을 위해 지구를 방황했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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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시아에서 농경 가축사육의 역사가 1만 5,000년 전
서아시아가 청동기시대에 들어선 것은 6,000년 전의 일.
따라서 유목이라는 생활양식은 농경사회가 성립한 후 분기
유럽에서는 5,000~7,000년 전에 농경과 가축사육이 시작
신석기시대인 4,000~5,000년 전에 와서야 청동기시대로 이행
핀란드에서 서시베리아 삼림지대는 5,000년 전쯤 신석기시대
중국은 6,000년~7,000년 전 곡물·가축·토기·마제석기
동남아시아에서 청동기시대의 시작은 5,500년 전으로 추정
우리나라 신석기문화는 BC 3000 ~ 2000년 시베리아 쪽 계통
서해안으로 들어와 남해안을 거쳐 동북지방으로 전파
김해 농소리, 부산 다대포, 사천 구평리, 양산 신암리
주로 남해안지방의 조개더미유적과 암사동 집자리 유적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신석기시대 유적은 약 150 군데
약 6,000년 전 강 바닷가 움집에 살며 주로 조개를 채취
강가에서는 그물추, 바다에서는 이음낚시를 포함해 낚시
깊은 바다 물고기뼈들이 출토되어
먼 바다까지 나갔음을 알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배만들기와 항해술도 발달
깊은 바다에 오랫동안 잠수하여
변형 귀뼈인 사람뼈도 발굴된다.
사슴 노루 등의 짐승과 멧돼지.
족제비 너구리 오소리 여우 뼈도 출토
털을 얻으려고 겨울철에 주로 사냥한듯.
집짐승을 기른 흔적은 신석기말 경에 출토된 집돼지뼈
치레걸이 예술품 옷도 만들고, 외부와 교역도 행해졌다.
우리나라에서 고조선 고대국가 이전까지는 모계사회
단군 이전까지 농본사회에서는 무당이 부족들을 통치.
단군이 출현하면서 모계사회는 부계사회로 전환된다.
천신을 섬기는 제석단은 부계사회의 소산물.
성모를 섬기는 성모사상은 모계사회 소산물.
천왕성모는 부계사회 전환기의 민간신앙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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