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당(朴世堂, 1629년 음력 8월 10일~1703년)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이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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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1629년(인조7년) 음력 8월 10일 아버지의 부임지인 전라남도 남원부 관아에서 태어났다. 당대의 명문가였으나 박세당이 4살 때 부친이 병사한 이후로 가세가 기울어 10세가 되어서야 글을 배울 수 있었다. 17세 때 남구만(南九萬)의 누이와 결혼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처남 남구만, 처숙부 남인성(南仁星)등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는 데 힘썼다.
1660년(현종 1년) 32세의 나이로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1664년 황해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667년 이조좌랑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아 장형(杖刑)을 받았다. 그 해 동지사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4년 갑술옥사에 승지가 되고 공조판서를 거쳐 1700년(숙종 26년) 음력 8월엔 이조판서직이 내려졌다
박세당은 소론 출신으로 노론계의 송시열과 대립 관계였다. 이러한 연유로 노론에게 여러 번 비난을 받자 정치에 뜻을 버리고 경기도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
1702년(숙종 28년) 이경석(李景奭)의 비문을 지은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비문 속에는 송시열의 인품이 이경석의 인품보다 못하다는 내용이 있어, 노론에게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삭탈관직 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되었다. 일설에는 1703년(숙종 29년)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적인 학풍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발표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사문난적으로 몰렸다고 한다.[1]
박세당의 제자인 수찬 이탄(李坦)· 이인엽(李寅燁) 등의 소청으로 석천동으로 돌아왔으나 귀환한 지 3개월 만에 죽었다.
[박세당의 생애와 사상]
본관은 반남(潘南),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 서계(西溪),서계초수,서계 전수, 시호는 문정이다.좌참찬 동선(東善)의 손자이며,이조참판 정炡)의 아들로 인조7년(1629)년 태어나 숙종 29년(1703)년에 75세로 생을 마쳤다.
4세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원주,안동,청주,천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14세때 비로소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에게 수학하였다. 현종1년(1660년) 32세때에 증광문과에 장원하여 정6품 성균관 전적에 제수 되었고,이어서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 교리겸경연시독관,함경북도 병마평사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지만 붕당정치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료생활을 포기하고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났다. 그 후 한때 통진현감이 되어 흉년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휼하는데 힘쓰기도 하였으나, 관리였던 맏아들 태유(泰維)가 격지 근무중 병사하고, 둘째아들 태보(태보)가 인현왕후폐위를 반대하다 고문끝에 진도로 유배도중 노량진에서 죽자, 여러차례의 출사 권유에도 불구 하고 석천동에서 농사를 지으며 학문연구와 제자양성에만 힘썼다.
그 후 사망할 때까지 집의,사간,홍문관부제학,이조참의,호조참판, 공조판서,대사헌,한성판윤,예조판서이조판서,우참찬 등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그의 생애등을 통해서 형성된 사회현실관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곧 성장기의 고난과 장년기의 관리생활을 통한 개혁의식 그리고 붕당정치의 와중에서 겪은 가족의 수난과 어려운 농촌생활로 얻은 경험등에서 우러 나온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보기 드문 민족적 시련과 정치적 불안정 및 민생의 곤궁이 매우 심하였던 시기였다. 정묘및 병자호란의 국치와 붕당정치의 격화로 말미암아 국력은 약화되고 민생은 도탄에 허덕거리던 시기였다. 그는 이러한 상황속에서 국내의 현실을 직시하여 국가보위와 사회개혁을 통한 민생구제를 목표로 삼아서 사상
적인 자주의식을 토대로 그의 학문과 경륜을 펼쳐 나갔다.
그의 학문의 근본입장은 중국중심의 학문적 태도에 회의적 이어서 당시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주자학(朱子學)을 비판 하였다. 이 때문에 주자학의 열열한 신봉자였던 송시열등은 주자학 비판자들을 교리에 어긋나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하여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그가 이러한 학문적 경향을 지니게 된 데에는 젊었을때 지녔던 그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혁적 사고 때문이었다. 또 백성의 생활안정과 국가를 보위하는데 인간의 사회적 차별을 본질로 하는 유가사상 (儒家思想)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홍문관 재직때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임금께 올렸는데 그 내용은 양반 지배세력의 붕당정치로 인한 폐해와 그들의 착취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된 백성들의 생활안정책, 그리고 무위도식하고 있는 사대부들을 고발한 것이었다.
그는 요역(요役)과 병역의 균등화, 문란한 모든 정치사회제도의 개혁 및 낡고 쇠퇴한 법률을 현실에 맞게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당시 백성 가운데 공사천민(公私賤民)이 60%, 평민이 20% 사대부 양반이 20%인데 사대부 양반들은 80-90%가 놀고 먹으니 이는 봉록(俸祿)만 받아먹는 나라의 좀도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외정책에서는 중국대륙의 세력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를 주장하였다. 신라가 당(唐)나라에게 망하지 않은 원인은 외교 정책의 현실주의적 실리추구에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정몽주(鄭夢周) 나 자기 선조 박상충(朴尙衷)이 원(元)나라와 명(明)나라의 정권 교체기에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나라를 배척하였던 실리주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또 숭명배청(崇明排淸)이 풍미하던 시대였음 에도 민족의 생존과 국가보위를 위해 존명사대(尊明事大)의 명분을 버리고 민족자존의 실리를 추구해 친청정책(親淸政策)을 주장 하였다.
그가 숙종 28년(1702)에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을때, 이경석이 청나라와 강화를 위해 굴욕적인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짓지 않을수 없었던 불가피한 입장을 옹호한 것도 그와 같은 사상의 연장이다. 이로 인해 송시열(宋時烈)일파로 부터 완론자(緩論者)로 몰리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대내외 정책에 대한 개혁의식을 가졌던 그는 관직을 버린 뒤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도덕경' '장자' 등 육경(六經)의 글은 그 뜻이 깊고 심원(深遠)하여 그 본뜻은 흐뜨러뜨릴수 없는 것인데도 , 후대의 유학자들이 제 나름대로 훼손하였음으로 이를 바로잡아 공맹의 본지(本旨)를 밝혀야 한다는 뜻에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였는데 이 또한 그를 이단시 하는 유생들에게 사문난적으로 몰리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