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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곡 1,2리(松谷里)
1. 마을의 자연환경
북으로 냉산(冷山) 서북은 대조봉(太祖峰)과 숭신산성(崇信山城) 남으로 낙동강을
바라보며 목계평야(牧溪平野)를 중심으로 행정리는 1, 2리로 되어있고 자연부락
9개로 형성되어 있다.
2. 마을의 역사
* 용수골(松谷1里)
도리사(挑李寺) 아랫마을로 마을아래는 못 2개가 있으며 쌍둥이 못이라고 하며,
옹기를 굽는 옹기점이 있었으나 문명에 시달려 지금은 없으며 주민의 입주 연대는
미상(未詳)이다.
* 배내(舟川, 松谷1里)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선산김씨(善山金氏) 탄옹(灘翁) 김 경이 인조(仁祖)를 호위
하다가 병환으로 수양 차 이곳에 이주하였다 하며 마을이 주 형(舟形)이라 하여
배내라고 한다.
* 못 안(松谷1里)
옛날부터 내려오는 소류지가 있는데, 잉어가 많아 널리 알려졌으며 년대는 미상
이나 인동장씨(仁同張氏)세거지이다.
* 구시골(松谷1里)
마을 형국이 소구시와 같다하여 구시골이라 칭한다.
* 숭 암(崇岩)
안강인(安康人) 경암(敬岩) 노경임(盧敬任)이 임란후 마을을 개척하여 태조봉 아래
큰 바위가 있다 하여 명칭하였으며, 불교유지로 사찰, 주춧돌, 우물, 맷돌, 기와
조각이 산재하여 있다.
* 가잠(柯蠶, 松谷2里)
나주정씨(羅州丁氏)가 개척하였으며, 뽕나무가 많아 양잠(養蠶)이 성하였음으로
명칭한 곳이다.
* 주평(舟坪, 松谷2里)
전주이씨(全州李氏)가 개척한 곳으로 옛날 낙동강 배가 이곳에 닿았다하여 주평
(舟坪)이라 이름 하였다. 옛날에는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한다.l
* 목계(牧溪) (松谷1里)
송곡1리 입구에 자연부락으로 있었으니 하천 개수사업과 경지정리 사업으로
마을이 없어졌다.
3. 성씨별 가구분포
총 132가구중 전주이씨(全州李氏) 26호, 선산김씨(善山金氏) 9호, 여양진씨
(驪陽陣氏) 9호, 안강노씨(安康盧氏)7호, 함안조씨(咸安趙氏) 13호, 경주손씨
(慶州孫氏) 7호, 나주정씨(羅州丁氏) 7호 기타 44호
4. 전설
* 도리사(挑李寺)
신라불교(新羅佛敎) 초전(初傳)법륜지(法輪地)로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이곳에 와서
참선을 할 때 엄동설한에 눈이 쌓여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개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도리사라고 하였다 하며 절 아래는 복숭아나무를 심어 과원단지로 조성하고
있다.
아도화상(阿度和尙)이 밤에 도리사(도리사)를 래왕할 때 귀신이 아도화상(阿度和尙)을
호종하니 아도화상(阿度和尙)이 귀신의 모양을 본 따 만든 것이 가면(假面)의
효시라 한다.
현재 도리사(挑李寺)는 금당암(金堂庵)으로 도리사가 화재로 소실된 후 금당암을
도리사라는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풍수지리설에 괘등형(掛燈形)이라 하며 절 뒷골은
등유곡(燈油谷) 송곡리(松谷里) 앞들을 “두배미(두야)”라 하며 부처님에 공덕이
영원히 비친다고 한다.
5. 유적, 유물
1) 문화재
도리사경내 화엄석탑(華嚴石塔)은 보물 4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77년 4월 18일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을 경내로 이전하다가 금동육각사리함(金銅六角舍利函)과
사리(舍利)가 발견되었다. 금동육각사리함(金銅六角舍利函 )은 국보 208호로 지정되어
현재 동국대학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도리사(挑李寺), 적멸보궁(寂滅寶宮),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 극락전(極樂殿),칠성각
(七星閣), 아도화상사적비(阿度和尙事積碑), 자운비(慈雲碑), 좌선탑(坐禪搭)
등이 있다.
용수골에는 향와(香窩) 정지원(丁志遠)을 기리는 향산정(香山亭)이 있다.
중앙에는 경암(敬岩) 노경임(盧敬任)을 기르는 냉악정사(冷嶽精舍)가 있다.
주천에는 탄옹(灘翁) 김 경을 기르는 탄옹재(灘翁齋)가 있다.
2) 중요사적
* 도리사 중요사적의 설명
1968년에 극락전(極樂殿) “아미타불” 불상을 개금(改金)하고자 불상을 옮기다가
불상아래에서 “도금중수기(塗金重修記)”가 발견되어 상고하여 보니 지금으로부터
약 310년 전에 원래의 『도리사(挑李寺)』는 화재로 타버리고 그 후 그 위에 있는
“금당암(金當庵)”으로 부처님을 옮겨 모시고 “도리사(挑李寺)”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남아있는 중요한 사적을 들면 아래와 같다.
* 아미타여래좌상
도리사의 본당인 『극락전』에 모신 본존불(本尊佛)은 향나무로 만들었으며,
1600년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1731년에 처음으로 개금(改金 - 금으로 입힘)
하였으며 그 후(1764, 1876, 1968, 1976) 네 차례에 걸쳐 개금불사(改金佛事)를
한 불상으로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아도화상 잔영(肖像畵)과 석승상(石僧像)
1820년대에 지은 『조사전(祖師殿』에, 『아도화상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고
절 주위의 담벽을 보수하던 중 『아도』의 석승상(石僧像 - 돌로 만등 상)이 발견
되어 불교계에 큰 관심을 모았다.
*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 석옹(石饔 )
화강암으로 만든 석옹(石饔 ) 모양의 탑으로 그 동안 도굴당해 방치되어 있는 것을
경내에 옮겨 복원공사를 하던 중 1977년 4월 18일 이 속에『금동 육각사리함』과
함께 세존진신사리 1과가 발견되었다.
* 아도화상 사적비(事積碑)와 자운비(慈雲碑)
“아도화상”이 도를 닦았다는 좌선대(坐禪坮 - 일명 신선대)옆에 세워져 있다.
앞면에는 16대 인조17년(1639)에 새긴 아도의 사적이 있고 뒷면에는
17대 효종6년(1655)에 세운 『자운비(자운비)』가 새겨져 있다.
또한 도리사 서남쪽에너 서대(西坮)라는 망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아도화상”이
똑바로 금산(金山 - 지금의 김천(金泉)) 황악산을 가리키며 저곳에 유명한 가람을
지을 터가 있을 것이라하여 그 후 이곳에 영남 제일의 절을 세워 직지사(直指寺)
라 이름 하였다.
*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
석옹(石饔 ) 세존사리탑에서 복원 공사중 발견된 세존진신사리(世尊眞身舍利 ) 1과를
석옹세존사리탑에 봉안하지 않고, 1979년 금동육각세존사리함의 모양을 본떠
세존사리탑을 다시 세워 그곳에 봉안하였다.
* 도리사 금동육각사리함과 진신사리
도리사 금동육각사리함은 1977년 4월 18일 “세존사리탑” 복원공사를 하다가 발견
되었다. 도리사 사적기에 의하면이곳 냉산 기슭에 있는『석적사(石積寺)』옛터의
“불사리탑”에서 이 마을에 살던 김계장(金界丈)이란 사람이 불사리 1과를 얻었는데
그 크기가 “올미”만 하고 색깔이 백옥과 같았다. 그리하여 체안 선사가 석옹탑(石饔塔)
을 만들어 불사리를 도리사에 봉안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의 “석옹”모양의 탑이란 곧 세존사리탑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이 탑의
건조연대는 광해군(光海君, 1609~1623)때로 그 조각 형태로 봐서 17세기 전반기로
추정되는 데 아주 뛰어난 작품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사리함들은 모두 네모가 아니면 8각이었는데, 이번에 『세존사리탑』
속에서 발견된 『금동함』은 6각이다. 이는 처음 보는 예로서 사천왕(四天王)상과
보살상이 음각(陰刻)되어 있어 크게 주목을 하고 있다.
탑의 6면에 조각된 양식으로 봐서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이곳에 봉안 된『사리』는
그보다 훨씬 앞서 “아도화상(阿度和尙 )”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려 올 때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분명하겠다.
불교도에 있어 예배의 대상은 둘이 있으니 하나는 불상(佛像)이고, 또 하나는
불사리(佛舍利)로 옛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올 때(소수림왕2년 372)
승(僧) “순도”는 불상과 경문을 전하였고, 신라(진흥왕10년 549)에 가덕스님이
불사리를 갖고 오니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홍륜사” 앞길에 나와 이를 맞이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니 우리나라에 ‘불사리’가 먼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사리”란 “설리라”. “살리라”라고도 하며 “진신사리”, “법신사리”, 쇄신사리“등
으로 구분되며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것으로 불상보다도 더 중요하고 가장 으뜸가는
공경의 대상으로 제일의 복전이라고 한다.
부처님 몸에서 “8곽 4두”(84말)의 사리가 나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8등분으로 나누어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중 일부가 우리나라에 온 것으로 되어
있으며 사리에 대한 신앙은 호국(護國)과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해 봉안하고
정성을 다해 기원하는 것이다. 금동6각사리함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82년 12월 7일 문화공보부 고시 제 554호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었다.
* 도리사와 조산(造山)
신라 불교의 최초의 가람이요, 해동 불교 성지의 옛 도리사가 없어지고 옛 절터라는
이름만 남아 있다.
* 숭암사(崇岩寺) 유지
소재지 : 해평면 송곡리
냉산(冷山) 남쪽 숭앙(崇岩)에 있었다. 건축연대와 페사연대를 알 길이 없으며
지금은 다만 밭 가운데 주춧돌이 산재하여 있을 뿐이다.
* 냉악정사(冷嶽精舍)
해평면 송곡리 숭암에 있다. 경암(敬岩) 노경임(盧敬任)이 건축하여 강학한 곳으로
페허된 후 후손이 1975년 중건하였다.
* 나주정씨의 제사와 비각
* 선돌백
송암 뒷산 기슭에 선돌백이라 불리는 지명이 있어 이는 선사시대의 마을 유지가
아닌가 하나 고증이 없고 다만 지금도 전답 곳곳에 돌들이 세워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故鄕(海平)의 歷史와 文化 (구미문화원 해평분원 2005원발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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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동내의 구석구석을 상세히도 올려놓았군요 새로운것도 알게되었구요 잘살피고 갑니다
저도 이번 기회에 많은걸 알게 되었지요. 돌아서면 잊어 버리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