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구세의 횃불
나는 그동안 늘상 구국구세(救國救世)를 말하고 생각하며, 또 그 속에 파묻혀 살다시피 했어도 사실은 구국구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았다. 즉 평소에 구국구세를 아주 잘 아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어도 실제로는 잘못 알고 있으면서 잘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고백이다. 아마 이번에 충격적인 기연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평생 착각 속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웃겼을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영락없이 세간에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수행자가 아닌 어릿광대가 될 뻔했던 내 자신을 생각할 때마다 아찔한 생각마저 든다.
그동안 내가 구국구세를 잘 안다고 착각했던 것은 어쩌면 내 머릿속으로 구국구세를 멋대로 이리저리 그리고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착각으로 오인된 구국구세에 파묻혀 살고 있던 나에게 이미 입적하신 스님께서 친히(?)오셔서 구국구세가 무엇인지, 다시 자세하게 당신 자신의 몸소 겪은 수행을 통해 알려 주었다. 그때서야 나는 원래의 거룩한 구국구세 앞에서 자괴(自愧)를 느꼈고 뼈아픈 자책과 반성을 했다. 그리고 고개 숙여 앞으로는 구국구세의 높은 법문 앞에 더욱 겸손할 것과 어긋나지 않을 것을 굳게 다짐했다.
사실 구국구세는 대비이고 보살행이며 진리 그 자체다. 그 까닭에 내가 임의적으로 이리저리 그리거나 자의적으로 만든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것(圓滿具足)이다. 다만 행동하고 노력하여 드러내는 것, 필요한 곳에 나투는 것일 뿐이다. 새로 만들거나 어디서 빌려오면 그 순간부터 크게 어긋나거나 매우 잘못된 것이 되고 만다.(실제로 그렇게 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설령 생각만 그렇게 한다 해도 벌써 그 생각이 십만 팔천 리나 어긋난 것.)아무튼 나는 구국구세의 바른 뜻과 원래의 이치를 스님의 무진보살행(無盡菩薩行)을 통해 다시 배워 얻게 되었다.
지난 2001년 3.1절 기념법회 때였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럽고 충격적이 자각과 배움의 기회였다. 그 날의 자각과 배움이 너무나 명백하고 확실해서 앞으로 다시는 구국구세에 대해서 의심이나 혼란이 없게 되었고 착각도 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왜냐하면 그 자각과 배움은 직접 스님으로부터 법을 전수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말보다 우선 그 기연(奇緣)을 소개하겠다.
그러니까 불기 2545년 3월 1일, 도솔산 도피안사에서는 몇 가지 법회를 한꺼번에 합동으로 봉행했다. 그 자리에는 종단의 대원로 이신 석주 노스님을 비롯하여 출가대중들만도 스무 명이 넘게 동참했고, 오백여 명의 신도들로 법당이 콱 차서 더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그 날의 성대한 법회 도중 주지인 내가 세 번씩이나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크게 놀랄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먼저 그 첫 번째 이야기.
(1) 자비는 진실 생명의 체온
그 날의 첫 번째 놀랐던 일은 아흔셋 되신 칠보사 석주 노스님 때문이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시작한 법회가 다 끝나고 시간을 보니 어느덧 오후 1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노스님은 그 긴 시간 동안 시자가 앞에 갖다 놓은 찻잔에 손 한번 대지 않고, 또 잠시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모든 의식을 대중과 함께 끝까지 여법하게 봉행했다. 법회 도중 차츰 시간이 길어지자 주지인 나는 노스님의 건강과 불편이 염려되어 방으로 들어가실 것을 몇 차례나 권했지만 한사코 자리를 지켰다. 무려 두 시간 반 동안이나 노스님은 자세 한번 흩뜨리지 않고 정좌한 채, 미소 띤 자안(慈顔)으로 법회를 원만히 증명했던 것이다. 노스님은 젊은 사람들도 힘들어 할 오랜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학 같이 앉아서 법회 진행을 주의 깊게 관찰하며 새로운 순서가 진행될 때마다 미리 주보의 내용을 찬찬히 읽어본 뒤 주지인 나를 행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해 주었으며, 또한 그윽한 자비의 눈길로 무언의 찬사를 보내주었다. 노스님의 그러한 배려는 행사 진행자인 나에겐 생각지도 않았던 실로 과분하고 놀라운 은혜였다.
(2) 원을 가진 사람이 나의 후계자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놀란 일은 그 날 설법을 맡은 서울 대각사 주지, 흥교 사숙으로부터였다. 우선 그 두 번째 내용부터 소개하겠다.
스님 말년, 당신의 출가 본사였던 부산 범어사 서지전에서 잠시 머물던 때의 어느 날, 사제(동생)인 흥교 사숙이 주동이 되어 문중의 다른 대덕들과 함께 스님 문병차 서지전을 방문하였다. 흥교 사숙은 스님이 젊은 시절 범어사에서 노스님(東山) 모시고 살 때의 여러 가지 모범적인 수행이야기를 꺼내어 잠시라도 환자의 무거운 분위기를 떨쳐 버렸다. 그리고 스님이 이룩한 종단이나 범어사의 불사, 동국대나 불광의 여러 업적에 대한 찬탄과 위로의 인사를 올리고 난 뒤, 끝으로 동석한 대덕들을 대신하여 스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즈음, 제자들은 부처님께 이제 누구를 의지해야 하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자기 자신과 법에 의지하고 귀의하며 계율을 근본으로 삼고 살아라’하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이제 스님이 사바를 떠나시면 불광의 대중은 누구를 의지하며 누가 과연 스님의 뜻을 이어서 전법 불사를 제대로 계승해 나가겠습니까?”
이 질문이 흥교 사숙의 입을 떠나는 순간, 동석한 대덕들은 침묵 속에서도 일제히 스님을 주시했으며, 동시에 스님과 흥교 사숙의 두 눈빛이 허공에서 섬광을 일으켰다. 이어서 스님의 목소리가 침묵의 무거운 방안에 찬찬히 울려 퍼졌다.
“송암이 잘할 것이고, 나의 대를 이을 것이여.”
“어떤 것이 스님의 본래면목입니까?”
“……양구(良久, 말 이전의 도리를 내 보임).”
그 날, 합동기념법회에 동참했던 모든 출가. 재가의 수행자들이 숨소리 하나 크게 내지 않고 침묵한 채 엄숙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대각사 주지인 흥교 사숙께서는 미리 준비한 메모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또박또박 분명한 어조로 스님과 나누었던 그때의 문답을 도피안사 대웅전 법상에서 공개했다. 그 순간 나의 눈은 화등잔이 되었고 몸이 감당 못해 흔들릴 정도로 가슴속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3) 구국구세는 청정이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다.
1971년 12월 25일, 서울 대연각 호텔 화재사건이 있었다. 그때 귀중한 생명이 무려 165명이나 희생되어 1950년의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참사였다고 했다. 그로 인해 나라의 분위기는 먹장구름이 끼어 있는 것처럼 무겁고 어두웠다. 그러므로 누구나 할 것 없이 우울한 연말, 가슴 답답한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당시 흥교 사숙은 서울 종로 대각사에서 스님 함께 살고 있었다. 스님은 작은 골방이나마 독방을 가지고 있었고 흥교 사숙은 대중과 함께 큰방에서 지낼 때였다.
대연각의 화재사건이 일어난 며칠 뒤, 해가 뜬 낮에도 쌀쌀한 날씨였는데 밤이 되니 찬바람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방안에서도 몸을 웅크릴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흥교 사숙은 평소처럼 대각사 큰방에서 이부자리 하나만 차지하고 한쪽 구석에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한밤중 스님께서 사전에 아무런 말씀도 없이 흥교 사숙을 흔들어 깨웠다. 엉겁결에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보니까 새벽예불 시간은 아직 한 시간이나 남은 정각 세시였다. 그 순간 어리둥절하여 단잠 놓친 아쉬운 표정으로 스님을 바라보자 스님의 기상천외한 말씀이 눈가에 달라붙어 있던 잠에 대한 미련을 천리만리 쫓아버렸다.
“흥교스님, 우리 일어나서 가사장삼 입고 밖으로 나가자. 나가서 서울 시내를 돌며 새벽 도량석을 하자. 어두운 먹장구름(사람들의 우울한 마음)이 가득 끼어 있는 이 서울 하늘의 구름을 염불로 몰아내자. 이대로 두면 틀림없이 또 무슨 일이 더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 같으니 우리라도 나서서 어둡고 불안한 기운을 부처님 위신력으로 싹 몰아내고 깨끗하게 씻어버리자. 이렇게 공기(사람의 마음)가 음울하면 신장님도 돌보지 못하고 성현들의 가호도 막혀 버린다. 서울에 이런 커다란 사고가 났다는 것은 신장님들이 돌보지 않는다는 증거이고 성현들의 가호가 없었기에 닥쳐온 재앙이며 모두가 정신을 소홀히 하여 자초한 불행이 아닌가.”
스님과 흥교 사숙은 그 날 새벽부터 서울 시내에 서려 있는 어두운 기운을 몰아내어 삼보님과 성현들이 가호하는 청정도량(서울)으로 장엄하기 위해 새벽 도량석을 시작했다. 대각사(종로 봉익동)를 나와서 먼저 돈화문,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광화문, 거기서 남쪽으로 꺽어 남대문, 명동을 거쳐 을지로 3가를 지나 대각사로 돌아오는 매우 커다란 도량석이었다.
절에서 도량석이라고 하면 매일 아침 예불시간 전에 절 안에서 하는 의식이다. 잠든 만물을 일깨우며, 도량을 청정하게 장엄하여 새벽예불 시간에 오실 부처님과 성현들을 맞이하기 위한 사전 준비이다. 왜냐하면 도량이 청정하지 않으면 부처님과 성현들이 오시지 못할 것이라는 수행자들이 정성스러운 생각, 대충 이러한 의미의 도량석을 서울 시내를 돌면서 하겠다는 것이 그 당시 스님과 흥교 사숙의 뜻이었다.
그때만 해도 통행금지 시간이 엄격하게 적용되고 지켜지던 때, 처음에는 두 스님이 앞뒤로 서서 목탁을 치며 염불하고 가노라면 경찰관들이나 방법대원들이 이상하게 여겨 제지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파출소로 연행하여 자초지종을 캐묻기도 했다. 그럴 때 스님은 파출소에서 결찰관, 방범대원을 상대로 또는 취객이나 경범자들을 앞에 놓고 설법을 했다.
스님과 흥교 사숙은 진리의 힘(淸淨)으로 서울을 새롭게 하기 위해 찬바람 부는 새벽거리를 염불과 목탁을 울리며 누볐고, 또 만나는 사람들에게 간곡하게 법(淸淨)을 설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루도 빠짐없이 정해진 시간에 서울 거리를 돌며 도량석을 하니까 그 후로는 경찰관이나 방범대원들과 만나게 되어도 더 이상 붙잡거나 무엇을 묻지도 않았다. 오히려 길을 비켜주며 경의를 표하고 도량석 하는 스님을 보호해 주기까지 했다.
대연각 화재사건은 너무나 큰 재앙이었기에 후유증도 오래 갔다. 희생당한 시신을 가까운 대학병원에 안치했는데 몇 가지 미해결의 문제로 오랫동안 대학병원 영안실에 머물렀다. 두 분 스님은 도량석을 대학병원 영안실까지 연장하여 매일 병원 영안실에서 금강경 독경을 끝으로 도량석을 마쳤다. 이렇게 새벽 도량석을 마치고 대각사에 돌아오면 아침공양 시간(7시)이 되었다. 그러니까 서울 시내를 돌며 새벽 도량석을 장장 네 시간 동안이나 했던 것이다.
흥교 사숙은 그 후 석 달 동안 도량석을 하다가 일이 생겨 중도에 그만두게 되었지만 스님은 원래 계획대로 일 년 동안 계속했다. 그야말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울을 청정도량으로 만들기 위한 특별새벽기도, 그 용맹정진을 묵묵히 계속했다.
나는 시종 꿇어앉아 흥교 사숙의 설법을 경청하면서 스님의 새벽 도량석에 대한 참뜻을 분명 다시 보았고 다시 깨달았다. 다시 깨닫고 보니 스님의 도량석은 바로 부처님의 대비구세였고 소천선사의 구국구세를 새로 얻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마음청정 국토청정 세계청정’이 구국구세였던 것이다.
모두가 희망을 잃고 슬픔과 실의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어두운 밤, 청정의 횃불을 높이 들고 마(魔)의 어둠을 쫓았던 스님, 분명 이 시대의 횃불이었다. 바로 어둠 덮힌 광야에 홀연히 나타난 초인, 그는 구국구세의 횃불이었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3 구국구세의 횃불. 글 송암지원. 도서출판 도피안사
첫댓글 무어라 저의 짧은 말로 표현이 어렵습니다. 새벽도량석을 장장 네 시간이나 돌면서 서울의 어두운 기운을 밝은 기운으로 만들기 위해 도량석을 도신 스님의 구국구세의 마음! 이 시대의 자비행, 보살행을 실천하신 큰 스님!!! 요즘같은 어두운 기운에도 누가 감히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마음청정 국토청정 세계청정... 시절이 큰스님을 더욱 그립게 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보현행원으로 불국토 이루리' 라는 말씀이 가슴 가득 찡하게 들어 옵니다. 온 국토를 청정도량으로 가꾸시려는 원력 앞에 머리 숙여 찬탄의 예를 올립니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오늘도 밝은 마음으로.........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스스로를 태우지 않으면, 세상은 결코 밝아지지 않습니다. 남 보고 타올라라 할 필요, 전혀 없어요 우리가 타오르면, 그래서 스스로 길을 밝히면, 다른 분들도 당연히 타 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밝히고자 하는 분들은, 스스로 타오르실 일입니다. 결코 남 보고 타오르라 하지 마십시다.
'이라는 가르침을 깊히 새기시기를. 자비로운 분들은 진실하십니다. 우리 생명 자체가 진실하기 때문인데, 자비를 말하면서 진실하지 못한 분들은 필히 반성하실 일입지요...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그리고 큰스님의 말씀, '자비는 진실 생명의 체온
스스로 밝히지 못하면서 남을 기대한 잘못 참회합니다. 스스로 타오르려고 노력하겠습니다. 크 신 가르침 고맙습니다. _()()()_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감사의 염이 자꾸 올라옵니다. 큰스님 감사합니다...란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군요.
무엇이 본래자리인가? 큰스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의문이 무색해집니다. _()()()_
광덕스님 대단하신 분이였군요...부처요 성인이라 할 밖에요...나무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마하반야바라밀_()()()_
어떠한 표현도 큰스님께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_()()().
고맙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 나무 마하반야 바라밀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