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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23일 풀무학교 강당에서 행한 개교51주년 기념강연입니다.
김교신 선생과 무교회 정신
풀무학교 개교기념일을 맞아 학교의 근본을 밝히는 의미로 김교신 선생의 신앙과 삶을 얘기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학교의 근본을 밝히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전적으로 동감했습니다. 그리고 김교신 선생 한 분만이 아니라 김교신 선생의 스승이신 우치무라 간조, 김교신 선생의 제자가 되는 노평구 선생, 이 세 분의 믿음과 사상, 삶의 모습을 함께 살피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4월은 김교신 선생의 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교신 선생은 1901년 4월 18일에 태어나셔서 45년 4월 25일 만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4자가 많이 들어있지요, 한국 사람은 4를 좀 싫어하죠? 그러나 이 ‘사’자는 그런 게 아닙니다. 사에는 ‘선비 사(士)’자도 있거든요. 김교신 선생에게는 ‘그리스도를 만난 선비’라는 별명이 있어요. 조선 선비 김교신 선생이 그리스도를 만나 기독교인 김교신의 삶과 믿음이 나왔다는 얘기죠. 풀무 개교기념일은 김교신 선생이 태어나고 돌아가신 두 날 사이에 끼어 있죠? 모쪼록 풀무 출신 중에도 김교신 선생 같은 ‘그리스도를 만난 선비’가 많이 나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축’(軸)이란 말을 아시지요? 자동차 바퀴와 바퀴 사이에 끼우는 기둥을 축이라고 합니다. 축이 없으면 차가 움직일 수 없죠. 그래서 ‘추축시대’(axial age)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 말은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라는 분이 한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류 역사의 근간이 되는 종교와 사상은 기원전 5세기경에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사야, 부처, 공자, 이 네 분이 추축시대를 만든 분입니다. 세계사의 위대한 종교와 철학이 공교롭게도 이 때 동시에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야스퍼스는 기원전 5세기를 추축시대라고 한 거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분들이 살던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훨씬 풍요롭지만 정신적, 영적, 도덕적으로 그 시대를 결코 따라잡지 못합니다.
그러면 ‘풀무의 추축’은 무엇인가요. 저는 김교신 선생으로 대표되는 무교회 기독교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추축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마땅하지, 왜 김교신이냐고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성경, 같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교회 사람들이 하는 행동에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요즘 어디 가서 예수 믿는다고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일반인들의 기독교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따갑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떤 문, 어떤 길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는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서양사를 전공했는데, 함께 서양사를 공부한 후배 가운데 목사가 셋이 있습니다. 교파도 다양해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이렇게 모두 제각각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장로교 목사 후배가 이런 얘길 하더군요. 김진홍 목사 아시죠? 요즘은 정신상태가 온전치 못하지요? 오래 전 그 분 정신이 멀쩡할 때 한국 기독교 역사 100년을 기념해서 고전이 될 만한 책 10권을 출간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자료를 수집했는데 그 첫 번째가 『김교신 전집』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결국 10권을 채울 수 없었답니다. 기독교 100년 역사에 길이 남을 고전이 10권도 안 됐다는 것이죠. 한국 기독교 역사가 자그마치 100년, 기독교 인구 1,000만인데 말입니다. 한심하지 않습니까? 일본 대형서점에 가면 우치무라 간조를 비롯한 무교회 신앙인들의 저서가 서점 한쪽 코너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의 문제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0년 세월에 고전 10권도 못 만드는 기독교입니다. 그래도 교회에 속한 분들 중 김진홍 목사는 이례적으로 김교신 선생 얘기를 자주 하는 편입니다. 언젠가 우연히 동영상 설교를 봤는데, 그분 말씀이 김교신 선생이 무교회가 아닌 교회 안에 계셨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더군요. 하지만 뭘 모르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만일 김교신 선생이 교회 안에 머물렀다면 <김교신 전집> 같은 저작도 못 나왔을 것이고, 그런 훌륭한 삶을 살지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교회라는 문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다가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보세요. 2009년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셨을 때, 천주교 신자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애도했습니다. 천주교는 전교 200년 만에 김 추기경이라는 인물을 열매로 배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대형 교회 목사님들 중 한 분이 타계했을 때 온 국민의 애도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교회 울타리 밖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기독교, 이것이 개신교의 문제 아닐까요? 김수환 추기경 같이 민족과 사회의 ‘어른 노릇’을 할 만한 사람을 개신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20세기 전반을 살다 가신 김교신 선생은 기독교인 중 드물게 그 시대의 ‘어른 노릇’을 한 분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삶과 신앙과 사상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김교신 선생의 삶과 신앙을 4가지로 정리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 무교회는 민족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죠? 김교신 선생에게 이웃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조국과 민족이었어요. 그분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늘 의식하며 사셨어요. 늘 겨레와 동포를 염두에 두고 사랑하셨습니다. 선생은 젊은 날 3․1만세운동 뒤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가는 배의 갑판을 발로 구르며 “아무래도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절규했습니다. 한국인일 수밖에 없다는 정체성을 절실히 자각했던 것입니다.
2008년부터 전 세계가 경제위기라고들 야단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엔 이런 위기를 미리 간파하고 경고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외국의 훌륭한 대학에서 박사학위 받은 경제학 교수들이 우리나라에 수백 명인데, 왜 그럴까요? 그들 대부분은 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싣는답니다. 국내 학술지 아닌 미국 학술지에 논문을 실으면 점수를 몇 배나 더 받거든요. 그런데 미국 학술지는 편집위원이 모두 미국 학자겠죠? 그러니 미국 편집위원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미국 경제)로 그들의 성향에 맞는 논문을 써야 한국 대학에서 점수를 많이 받아서 교수로서의 업적을 인정받고 승진하고 출세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한국 경제에는 관심이 없고, 미국 학술지 편집위원들이 좋아하는 주제를 택해 연구해서 그들 눈에 들 생각만 합니다. 참 희한하지요? 한국 대학에서 한국 학생 가르치면서 월급 받아가며 살지만 한국 경제와 한국 현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굳이 그런 연구 안 해도 교수 생활 하는데 지장 없습니다. 아니 그럴수록 더 인정을 받습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런 것들이 한국이 안고 있는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 그리스 신화에서 헤라클레스가 적들을 여러 명 맞아 싸워 이기는 얘기 알죠? 헤라클레스의 적 가운데 안타이오스라는 거인이 있습니다. 안타이오스의 어머니가 지신(地神) 테라입니다. 테라가 어머니이기 때문에 발을 땅에 딛고 있으면 누구와 싸워도 이기지요. 그러나 결국 누가 이겨요? 헤라클레스가 안타이오스를 번쩍 들어 올려 목을 졸라 죽였어요. 안타이오스는 발을 땅에 딛고 있을 때만 힘을 쓸 수 있어요. 헤라클레스는 그 약점을 알았던 거지요. 저는 이 이야기를 참 좋아하는데요, 안타이오스가 발을 굳게 땅에 딛는 것, 그게 바로 정체성의 확립입니다.
김교신 선생은 철저히 우리 현실에 발을 딛고 산 분이었습니다. 요즘 경제학 교수들과는 많이 다르지요. 그래서 일제의 극한적 압제 아래에서도 끝까지 친일을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1940년대 일제의 단말마적 억압으로 당시 거의 모든 민족 지도자들이 친일의 길을 걸었던 바로 그 때, 김교신, 함석헌, 장기려, 유달영 이런 분들이 <성서조선> 사건에 연루되어 만 일 년 동안 옥고를 치렀습니다. 가장 악랄한 억압이 있던 그때에 민족에 대한 충절과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당시 일본 경찰은 김교신 선생과 동지들에게 “너희 놈들은 가장 악질적인 부류다.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 민족의 혼을 심어서 백년, 오백년 후에라도 독립될 터전을 마련하려는 고약한 놈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연세대 신학과 서정민 교수는 교회사 전공을 한 분인데, <성서조선>을 일컬어 ‘이 시기에 이만한 민족적 신앙 양심을 지키며 나온 간행물을 달리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민족과 조국에 대한 정절과 지조를 끝까지 지켜낸 김교신 선생의 신앙은 바로 정체성 확립을 바탕에 깔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무교회 기독교는 주체적 기독교입니다.
두 번째, 무교회는 우주교회입니다. 온 우주가 다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실, 논밭, 직장 이 모든 곳이 교회이고 기도하는 곳입니다. 여러분, 안타까운 말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교회 장로님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대통령 후보였을 때 그분의 소속 정당 내부에서조차 우려할 정도로 축재 과정에서 갖가지 탈법과 비리를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도덕적인 면에서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존경할 만한 대통령이 없는 우리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다니던 소망교회에서 일요일마다 ‘헌신적으로’ 주차장 안내 봉사를 해서 장로가 되었다고 하네요. 교회 울타리 안에서는 지극정성으로 봉사해서 ‘성도(聖徒)’ 소리 들어가며 인정을 받지만, 교회 밖으로 나오면 안면을 싹 바꿔서 탈세, 불법, 비리를 저지르며 사는 것이 교회 신앙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평소의 삶이야 어떻든 교회 출석만 잘 하면 만사형통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따로국밥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런 양두구육(羊頭狗肉) 신앙을 견딜 수 없어서 등장한 것이 무교회 정신, 무교회 신앙입니다.
무교회정신은 기독교에만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요즘 인문학의 위기란 말들 많이 하지요? 그런데 이게 사실은 인문학 ‘교수’들의 위기입니다. 교수들이 캠퍼스 안에서만 인문학을 하지, 바깥세상 사람들과는 소통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대학교수들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거든요. 여러분 인문학의 원조는 소크라테스지요? 아테네의 광장을 ‘아고라’라고 합니다. 평소엔 시장으로 사용하다가 필요하면 정치토론장이 돼요. 소크라테스는 아고라에 가서 시민들을 찾아다니면서 문답법, 산파술을 써서 진리를 스스로 깨닫도록 했어요. 시민들과의 소통을 위해 직접 찾아 나섰습니다. 인문학 교수들이 이 시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런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문학 교수들은 대학 울타리 안에서만 맴돕니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 신앙 생활하는 교회신앙과 똑같지 않습니까? 정당도 마찬가지죠. 나라 전체를 바라보지 않고 당리당략만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무교회 정신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학문 등 모든 분야에 공통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교회 운동은 우리가 서있는 모든 자리에서 바깥세상과 긴밀하게 소통하자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홍성이라는 지역사회와 소통을 긴밀하게 하고 있는 풀무는 아주 돋보입니다. 풀무는 이런 점에서 무교회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겁니다.
셋째, 무교회 신앙은 독립신앙입니다. 김교신 선생이 <성서조선>을 158호까지 내셨는데 무엇보다 경제적으로 독립해서 내셨다는 게 중요합니다. 독립신앙을 달리 말하면 ‘개인주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요즘 개인주의라고 하면 대개 좋지 않은 뜻으로 많이 쓰고 있지요? 과연 그럴까요? 우치무라 간조 선생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한다. 그러나 이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개인주의는 귀중하고 이기주의는 비천한 것이다. 개인주의는 존중받아야 하고 이기주의는 배척받아야 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존중하며 자기와 남을 함께 존중하는 마음이므로 그리스도인으로 가져야 할 바람직한 자세이다.” <우치무라 간조 전집>에 나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회 시간에 자유주의에 대해 배웠죠? 서양 정치사상사에서 자유주의의 철학적 토대가 바로 이 개인주의입니다. 그런데 서양역사에서 이 개인주의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등장했는지 아세요?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이랍니다. 종교개혁이 개인주의를 싹 틔우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순서를 따지자면 ‘종교개혁→개인주의→자유주의’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루터의 종교개혁은 만인사제주의를 주장하는 것이지요. 반대로 가톨릭 신앙은 사제의 기적적 권능을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사제와 평신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습니다. 가톨릭 교리에서 평신도는 사제를 거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요. 결국, 가톨릭에서 사제와 평신도는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그것을 루터가 깼습니다. 모든 평신도가 들판에서, 공부방에서,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사상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지상주의, 믿음지상주의, 만인사제주의를 종교개혁의 3대 원리라고 합니다. 종교개혁으로 모든 사람이 독립된 인격으로서 일대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신앙, 개개인이 존중받는 신앙이 등장한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종교개혁의 후예를 자처하는 한국의 개신교 목사 중 상당수가 가톨릭의 사제주의로 환원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사들도 등장하면서 가톨릭의 교황무오설(敎皇無誤說)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는 교황이 한 명뿐이지만 개신교는 교회마다 교황이 한 명씩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돌고 있어요. 소금이 제 맛을 잃어버린 거죠. 독립신앙을 엿 바꿔 먹고 가톨릭 흉내 내기 바쁜 한국 개신교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무교회 신앙은 독립신앙입니다.
넷째, 무교회 신앙은 학문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우치무라 선생의 글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전도의 정신>이라는 책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전도자는 세상에 대한 지식이 깊고 넓음에 따라 하나님에 대해 더욱 밝히 알게 된다, 전도자는 우주 만물의 비밀을 세상에 보여주는 직책에 있으므로 전도자가 몰라도 좋을 지식은 이 세상에 없다.” 우치무라 선생에 의하면 넓고 깊은 지식은 하나님을 깊고 밝게 알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누구보다 지식이 필요합니다. 우치무라 선생은 신앙만 아는 전도자는 신학생의 교사는 될 수 있지만, 목수, 미장이, 농민, 학자, 정치가의 지도자는 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치무라 선생은 특히 네 가지 영역의 지식을 강조합니다.
① 경제학, 사회과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전도자는 사회의 지도자여야 하기 때문에 경제학, 사회과학을 연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로 이끌어가는 직책이기 때문에 그 원리를 밝혀주는 사회과학을 몰라서는 전도자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지요.
② 자연과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어요. 과학은 물질의 원리와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법칙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자연계, 물질세계, 우주를 창조한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 창조의 원리를 알려면 자연과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③ 역사공부를 강조했습니다. 역사는 인류 발달의 기록이고 하나님의 섭리를 밝히 보여주는 학문입니다. 관용의 정신을 갖게 합니다. 역사를 배우다 보면 다른 나라, 다른 시대의 다양한 사고방식을 배웁니다. 풍토의 다양성,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많은 점에서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하고 우리의 사고방식만이 옳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미덕입니다. 인류 전체의 발전은 한 국가의 발전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국수주의적인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인류 전체 발전을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 역사입니다. 역사는 인류가 하나라고 하는 시야를 갖게 해줍니다. 역사는 전 인류, 전 세계를 보는 눈을 열어주기에 전도자는 그걸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④ 넷째, 훌륭한 전도자가 되려면 원어를 비롯한 성서 연구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서 연구 없이 전도에 나서는 것은 수학 지식 없이 천문학을 연구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요약하면,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인간을 알기 위해 사회과학과 역사학을, 자연계를 알기 위해 자연과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알아야 할 것,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제 경험을 얘기하자면,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기독교도 몰랐고 공부를 왜 하는지도 몰라서 허송세월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대학에 가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전혀 모르던 사람이 대학 시절 성경을 처음 접하고 나서 강한 '문화 충격'을 받았어요. 너무도 당혹스러웠어요. 그리고 지적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서양사를 전공하게 된 것도 전적으로 기독교적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무교회라는 문을 통해 기독교에 들어간 것을 일생일대의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2006년에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책을 썼어요. 그걸 보고 제가 운영하는 카페에 어떤 분이 댓글을 다셨어요. 제가 장로교 같은 기성교단 소속이었으면 좋았을 걸 하시더군요. 그런데 그분은 거꾸로 아신 겁니다. 제가 무교회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을 쓸 수 있었거든요. 만일 교회에 속했더라면 그런 책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무교회이니까 가능했던 거지요. 저는 무교회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만난 덕분에 진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제가 공부를 하겠다고 작정을 한 것도 전적으로 기독교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 알고 싶은 것,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더군요. 그래서 저는 기독교 믿는다면서 책도 안 읽고, 학문도 등한시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저는 대학생 시절 노평구 선생께 성경을 배웠습니다. 노 선생께서는 “인간을 모르고 어찌 신을 알 수 있는가?”라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특유의 말투로 “대학생들은 공부를 하되, 자기 분야에서 최소한 박사까지는 해라, 그리고 그 다음에 성경공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박사라고 하니까 무슨 껍데기 학위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박사학위란 혼자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말하는 것이니까요. 세속의 현실 속에서 자기만의 전공 영역을 갖고, 그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지식을 쌓은 다음 성경공부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상식을 초월하지만, 그렇다고 상식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신앙에 앞서, 인간을 바로알기 위한, 상식을 깨우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개신교회에서 이런 상식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데, 매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여러 해 전 제가 운영하는 무교회 카페에서 알게 된 한 대학생에게서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 말이 놀랍습니다. 다니던 교회에서 기독교인의 학문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말했더니 목사님, 전도사님이 그런 건 지적 교만이라면서 경계를 하더라는 군요. 그 얘길 읽고 정말 놀랐습니다. 아니 예수 믿는 대학생은 공부 않고 무식해도 좋다는 건가요? 무식할 특권이라도 있는 건가요? 무식하려면 저 혼자 무식하고 말 일이지 향학열에 불타는 청년의 학구열에 찬물을 끼얹을 이유가 뭐란 말입니까? 이건 앞 못 보는 장님이 두 눈 멀쩡한 사람을 인도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입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이 바로 공부입니다. 노평구 선생께서는 평소 “사회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하지 못하는 신앙은 쓸 데 없는 신앙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리 이웃, 우리 사회를 향상시키려면 어떤 공부와 준비를 해야 할 것인지를 개교 51주년이 되는 오늘, 깊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