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석등 (實相寺 石燈)   보물 35호  지정일 : 1963. 1. 21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선종 9산의 하나로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이 석등은 실상사 보광명전 앞뜰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다.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경내(境內) 대광명전(大光明殿) 앞 원위치(原位置)를 고수(固守)한 이 석등(石燈)은 전형적(典型的)인 양식(樣式)에서 벗어난 고복형계(鼓腹形系)이다. 이는 전부재(全部材)를 완전히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등계(燈階)까지 구비(具備)하고 있다. 8각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폭좁은 기대석(基臺石)을 안치(安置)하고 각 측면에 안상(眼象)을 조식하였다.

귀꽃을 갖춘 하대연화석(下臺蓮華石)은 폭(幅)이 넓으며 판(瓣)안의 자엽(子葉)은 단형(短形)으로 선각(線刻)하였다. 고복형(鼓腹形) 간주석(竿柱石)의 중간고형(中間鼓形) 표면(表面) 중앙(中央)에는 3조(三條)의 대(帶)를 두르고 8곳에 4엽문장식(四葉紋裝飾)을 한 고견(鼓肩)에 16판(瓣)의 앙·복련(仰·覆蓮)을 장식하였다. 상·하(上·下) 양고(兩鼓)의 표면장식도 동일하다.

이 석등(石燈)에서 주목(注目)되는 것은 옥개석(屋蓋石)으로 귀에는 귀꽃을 구비하고 낙수면(落水面)에는 8엽단판연화(八葉單瓣蓮華)로 전면(全面)을 덮은 것이다. 정상(頂上)에는 복발형(覆鉢形)의 노반(露盤)이 놓이고 그 위에 고복형(鼓腹形)의 간(竿)과 8각의 보개(寶蓋)와 보주(寶珠)가 장식되었다.

이 석등은 보림사석등(寶林寺石燈)(국보 제44호)과 담양(潭陽) 개선사지석등(開仙寺址石燈)(보물 제11호)의 장단점(長短點)을 뽑아 절충한 양식이며 조성시기(造成時期)는 9세기말로 추정(推定)된다.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된 적이 있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칠성각

 

극락전

극락전의 옛이름은 부도전(扶道殿)으로 계오대사가 1684년(숙종 10)에 건물을 짓고 부도전(浮屠殿)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부도전이라 한 것은 근처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1751년(영조 27)에 포문비구(抱文比丘) 한심(漢諶)이 옛 연하당(蓮荷堂)과 금당(金堂)의 기와를 사용하여 요사채를 수리하고 부도전(扶道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788년(정조 12년)에 금파 관오대사가 대시주 이휘와 별좌 홍찬, 재민과 더불어 중수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의암대사가 기봉, 처윤과 함께 중건하여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극락전은 명면 3칸, 측면 2칸인 맞배지붕의 목조건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45호이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목조보살상이 있었으나 몇 년 전에 분실하였다.
극락전 요사채는 1932년에 남성법(南性法) 스님이 영원사(靈源寺)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지리산의 기운이 솟아오르는 명당으로 알려져 수행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실상사 극락전 (實相寺 極樂殿) 시도유형문화재 45호  지정일 : 1974. 9. 27 

지리산에 위치한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이 처음 지은 절이다.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홍척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하여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극락전은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다가 다시 지어졌다. 절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자료에 의하면 순조 31년(1831)에 지어졌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칸에는 세짝의 문을 달았고 양쪽은 한짝 씩의 문을 달았다. 건물 안은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뒤쪽 높은 기둥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불단 위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朝鮮時代) 말기(末期)의 규모가 작은 건축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공포(공包)를 기둥 위에만 짜 올린 주심포식(柱心包式)이나, 평방(平枋)이 있는 것은 원래 다포(多包)집인 이 전각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주간포작(柱間包作)을 생략한 것이라 여겨진다. 정면의 길이는 6.55m, 측면은 4.88m인데 정칸(正間)은 3.15m로서 세 장의 빗살창호를 달고, 좌우칸은 너비 1.7m로 외짝 빗살창호를 달았다. 내부는 중칸에 고주(高柱)를 세워 전후에 퇴보를 걸고, 내주(內柱)에 연하여 불단을 짜고 그 위쪽에 중종보(中宗樑)에 붙여 우물천장을 달았다. 이 건물은 사적기(事蹟記)에 조선 순조(純祖) 31년(1831)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비 (實相寺 證覺大師 凝蓼塔碑)   보물 39호  지정일 : 1963. 1. 21 

실상사에 있는 증각대사의 탑비이다. 증각대사는 일명 홍척국사 ·남한조사로 불리며, 통일신라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흥덕왕 1년(826)에 귀국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파를 일으켜 세운 고승이다.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 하지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주는데,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는 비명칭을 새겨 두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의 신라 무열왕릉비와 같이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 대사의 묘탑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은 탑비의 뒤편 언덕에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신라(新羅)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開山祖) 홍척국사(洪陟國師)의 묘탑에 대한 석비(石碑)이다. 현재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이수(이首)와 귀부(龜跌)만 남아 있는데, 이수 정면 중앙에는 '응료탑비(凝蓼塔碑)'라고 전자(篆字)로 새겨져 있다. 이 비는 경주(慶州)의 신라(新羅) 무열왕릉비(武烈王陵碑)와 같이 그 양식에서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낸 9세기 비이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實相寺 秀澈和尙 楞伽寶月塔)  보물 33호  지정일 : 1963. 1. 21 

실상사 안에 있는 극락전을 향하여 그 오른쪽에 서 있는 탑으로,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셔 놓은 사리탑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화상’이라 하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 내리었다.

탑은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基壇)은 아래받침돌에 구름과 용무늬와 사자가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가 삼중으로 조각되어 둘러져 있다. 8각의 탑몸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문(門)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얇고 경사가 완만하며, 처마부분에는 엷은 곡선을 이루고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 경사면에는 기와골을 표시하였고, 그 끝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다. 꼭대기에는 몇 층의 단이 있고, 그 위에 원형이 작은 돌에 있을 뿐 모두 없어졌다.

탑 옆에는 탑비가 건립되어 있어서 이 부도의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관련된 내용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수철화상이 진성여왕 7년(893)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탑을 세운 시기를 이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다. 

팔각원당(八角圓堂)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부도탑(浮屠塔)이다. 높이는 3m로 특히 옥개석(屋蓋石)에서 목조건축(木造建築)의 세부 양식을 충실히 모각(模刻)하였으며, 탑신부(塔身部) 각 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양각(陽刻)되어 있다.

실상산문(實相山門)의 제2조사(祖師)인 수철화상(817∼893)은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893)에 입적(入寂)하였는데, 이 부도는 그 당시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 (實相寺 秀澈和尙 楞伽寶月塔碑)  보물 34호  지정일 : 1963. 1. 21 

실상사에 위치한 수철화상의 탑비이다. 수철화상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진성여왕 7년(893) 5월 77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는 달리 거북모양의 받침돌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얕게 새긴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두어 그 위로 비를 세웠다. 비를 꽂아두는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연꽃을 둘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용 두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면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꾸밈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비의 건립 연대는 효공왕(재위 897∼912)대로 추정되고,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를 따랐다. 

석비 상부의 이수(이首) 중앙에는 '능가보월탑기(楞伽普月塔記)'라 전자(篆字)로 새기고, 그 위에 쌍룡이 구슬을 다투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높이는 2.9m이다. 수철화상(817∼893)은 홍척국사(洪陟國師)의 제자로서 실상산문(實相山門)의 제2조사(祖師)이다.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893)에 입적(入寂)한 수철화상의 부도탑비(浮屠塔碑)로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出生), 수계(受戒), 득도(得道), 세속 교화, 입적, 조탑(造塔)에 이르는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 (實相寺 證覺大師 凝蓼塔)  보물 38호  지정일 : 1963. 1. 21 

홍척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는 ‘증각’이다.

탑은 기단(基壇)은 8각형의 석재를 여러층 쌓은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들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고 윗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낮은 편이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門)을 새겼다.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증각은 홍척국사(洪陟國師)의 시호(諡號)이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부도탑(浮屠塔)으로 높이가 2.4m이며 특히 옥개석(屋蓋石)에 목조건축(木造建築)의 각부를 모각하였으며 탑신(塔身)의 각 면에 신장상(神將像)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부도는 신라(新羅)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최초의 산문(山門)인 지리산(智異山)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開山祖) 홍척국사의 사리탑(舍利塔)으로 신라말인 9세기 후반의 우수한 조각수법(彫刻手法)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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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지리산 남원 실상사 - 2012.03.11
빛구름-혜운 추천 0 조회 130 12.03.15 22:4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천은사에서 나와 지리산길로 접어들어 산능선을 질주하다보니 시삼재요 성삼재다.

성삼재는 예전 산악회에서 성삼재 - 만복대 - 정령치코스로 산행하던 초입이라  반갑다. 옛생각도 나고

시삼재에서 바라본 지리산 첩첩산중

시삼재 휴게소

성삼재에서 실상사 방향 뱀사골로 내려오다 바라본 천왕봉 - 산정에는 흰눈이 쌓여있다.

실상사에서 바라본 천왕봉

 

 

실상사 입구의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 3기(15호)는 중요 민속자료(제 15호)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 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 홍수때 떠내려 가고 없다. 잡귀를 막기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두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이며 "대장군(大將軍)"은 뒤에 만들어진 듯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실상사가 자리한 곳은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듯 평화롭고 풍요로운 고을 남원시 산내면에 천년 고찰 실상사(實相寺)가 있다.
지리산의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마천방면으로 가다 보면 만수천(萬壽川)변에 호국사찰로 천 년의 세월을 버티고 지내온 실상사가 나타난다.
만수천과 뱀사골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 산내면 면소재지, 즉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가다 보면 나타나는 삼거리 부근이다. 이 삼거리에서 동쪽을 향해보면 천왕봉이 손에 닿을 듯 눈 앞에 선하다. 그 발 아래 산내면 입석리 들판이 넓게 펼쳐지는데 그 곳에 실상사가 자리잡고 있다.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천왕봉과 마주하면서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 사찰 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이 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채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 구실을 하고 있다.

실상사의 역사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선광(太子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세조때(1468)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송대사가 세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건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훗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최근의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있는 오늘날 한일관계를 두고 볼 때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는 일본에 대한 호국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 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기도 하다. 실상사의 문화유적은 보물급에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 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석등(35호, 개산당시), 부도(36호, 고려), 삼층쌍탑(37호, 887년), 증각대사응료탑(38호, 861년 이후), 증각대사응료탑비(39호), 백장암석등(40호, 9세기 중엽), 철제여래좌상(41호, 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420호, 1584년), 약수암목조탱화(421호, 1782년)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45호,1684년), 위토개량성책(88호, 토지대장), 보광전범종(138호, 1694년), 백장암보살좌상(166호,고려), 백장암범종(211호, 1743년)등 5점이다.

실상사에는 이렇듯 호국의 정신이 흐르며 찬란한 신라불교문화의 숱한 문화재가 잘 보존돼 있는 천년고찰이다.

 

 

 

 

 

 

 

실상사 삼층석탑 (實相寺 三層石塔)  보물 37호  지정일 : 1963. 1. 21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탑이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 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곳에는 3층 석탑 이외에도 석등, 묘탑, 탑비, 부도, 철조여래좌상 등이 있어 유명하다.

탑은 2층으로 된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정도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쌍탑은 신라(新羅) 흥덕왕(興德王) 3년(828) 실상사를 창건할 때 조성된 탑으로 높이가 8.4m이다.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통일신라(統一新羅) 정형탑(定型塔)이다. 옥개석의 추녀 밑은 수평(水平)이며 전체의 조형이 경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특히 상륜부(相輪部)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통일신라 정형탑의 원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쌍탑중 동탑의 상륜부에는 찰주(擦柱)를 중심으로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륜(寶輪), 보개(寶蓋), 수연(水煙), 용차(龍車), 보주(寶珠)가 모두 있으나, 서탑은 수연이 없어졌다.

 

 

 

 

실상사 석등 (實相寺 石燈)   보물 35호  지정일 : 1963. 1. 21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洪陟)이 선종 9산의 하나로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이 석등은 실상사 보광명전 앞뜰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다.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경내(境內) 대광명전(大光明殿) 앞 원위치(原位置)를 고수(固守)한 이 석등(石燈)은 전형적(典型的)인 양식(樣式)에서 벗어난 고복형계(鼓腹形系)이다. 이는 전부재(全部材)를 완전히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등계(燈階)까지 구비(具備)하고 있다. 8각의 지대석(地臺石) 위에 폭좁은 기대석(基臺石)을 안치(安置)하고 각 측면에 안상(眼象)을 조식하였다.

귀꽃을 갖춘 하대연화석(下臺蓮華石)은 폭(幅)이 넓으며 판(瓣)안의 자엽(子葉)은 단형(短形)으로 선각(線刻)하였다. 고복형(鼓腹形) 간주석(竿柱石)의 중간고형(中間鼓形) 표면(表面) 중앙(中央)에는 3조(三條)의 대(帶)를 두르고 8곳에 4엽문장식(四葉紋裝飾)을 한 고견(鼓肩)에 16판(瓣)의 앙·복련(仰·覆蓮)을 장식하였다. 상·하(上·下) 양고(兩鼓)의 표면장식도 동일하다.

이 석등(石燈)에서 주목(注目)되는 것은 옥개석(屋蓋石)으로 귀에는 귀꽃을 구비하고 낙수면(落水面)에는 8엽단판연화(八葉單瓣蓮華)로 전면(全面)을 덮은 것이다. 정상(頂上)에는 복발형(覆鉢形)의 노반(露盤)이 놓이고 그 위에 고복형(鼓腹形)의 간(竿)과 8각의 보개(寶蓋)와 보주(寶珠)가 장식되었다.

이 석등은 보림사석등(寶林寺石燈)(국보 제44호)과 담양(潭陽) 개선사지석등(開仙寺址石燈)(보물 제11호)의 장단점(長短點)을 뽑아 절충한 양식이며 조성시기(造成時期)는 9세기말로 추정(推定)된다.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된 적이 있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칠성각

 

극락전

극락전의 옛이름은 부도전(扶道殿)으로 계오대사가 1684년(숙종 10)에 건물을 짓고 부도전(浮屠殿)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부도전이라 한 것은 근처에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기 때문이다. 1751년(영조 27)에 포문비구(抱文比丘) 한심(漢諶)이 옛 연하당(蓮荷堂)과 금당(金堂)의 기와를 사용하여 요사채를 수리하고 부도전(扶道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788년(정조 12년)에 금파 관오대사가 대시주 이휘와 별좌 홍찬, 재민과 더불어 중수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의암대사가 기봉, 처윤과 함께 중건하여 극락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극락전은 명면 3칸, 측면 2칸인 맞배지붕의 목조건물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45호이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목조보살상이 있었으나 몇 년 전에 분실하였다.
극락전 요사채는 1932년에 남성법(南性法) 스님이 영원사(靈源寺)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지리산의 기운이 솟아오르는 명당으로 알려져 수행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실상사 극락전 (實相寺 極樂殿) 시도유형문화재 45호  지정일 : 1974. 9. 27 

지리산에 위치한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이 처음 지은 절이다.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홍척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하여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극락전은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다가 다시 지어졌다. 절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자료에 의하면 순조 31년(1831)에 지어졌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칸에는 세짝의 문을 달았고 양쪽은 한짝 씩의 문을 달았다. 건물 안은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뒤쪽 높은 기둥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불단 위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이 건물은 조선시대(朝鮮時代) 말기(末期)의 규모가 작은 건축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공포(공包)를 기둥 위에만 짜 올린 주심포식(柱心包式)이나, 평방(平枋)이 있는 것은 원래 다포(多包)집인 이 전각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주간포작(柱間包作)을 생략한 것이라 여겨진다. 정면의 길이는 6.55m, 측면은 4.88m인데 정칸(正間)은 3.15m로서 세 장의 빗살창호를 달고, 좌우칸은 너비 1.7m로 외짝 빗살창호를 달았다. 내부는 중칸에 고주(高柱)를 세워 전후에 퇴보를 걸고, 내주(內柱)에 연하여 불단을 짜고 그 위쪽에 중종보(中宗樑)에 붙여 우물천장을 달았다. 이 건물은 사적기(事蹟記)에 조선 순조(純祖) 31년(1831)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비 (實相寺 證覺大師 凝蓼塔碑)   보물 39호  지정일 : 1963. 1. 21 

실상사에 있는 증각대사의 탑비이다. 증각대사는 일명 홍척국사 ·남한조사로 불리며, 통일신라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흥덕왕 1년(826)에 귀국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파를 일으켜 세운 고승이다.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 하지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주는데,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凝蓼塔碑)’라는 비명칭을 새겨 두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의 신라 무열왕릉비와 같이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 대사의 묘탑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은 탑비의 뒤편 언덕에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신라(新羅)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開山祖) 홍척국사(洪陟國師)의 묘탑에 대한 석비(石碑)이다. 현재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이수(이首)와 귀부(龜跌)만 남아 있는데, 이수 정면 중앙에는 '응료탑비(凝蓼塔碑)'라고 전자(篆字)로 새겨져 있다. 이 비는 경주(慶州)의 신라(新羅) 무열왕릉비(武烈王陵碑)와 같이 그 양식에서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낸 9세기 비이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實相寺 秀澈和尙 楞伽寶月塔)  보물 33호  지정일 : 1963. 1. 21 

실상사 안에 있는 극락전을 향하여 그 오른쪽에 서 있는 탑으로,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셔 놓은 사리탑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화상’이라 하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 내리었다.

탑은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基壇)은 아래받침돌에 구름과 용무늬와 사자가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가 삼중으로 조각되어 둘러져 있다. 8각의 탑몸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문(門)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얇고 경사가 완만하며, 처마부분에는 엷은 곡선을 이루고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 경사면에는 기와골을 표시하였고, 그 끝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다. 꼭대기에는 몇 층의 단이 있고, 그 위에 원형이 작은 돌에 있을 뿐 모두 없어졌다.

탑 옆에는 탑비가 건립되어 있어서 이 부도의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관련된 내용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수철화상이 진성여왕 7년(893)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탑을 세운 시기를 이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다. 

팔각원당(八角圓堂)을 기본형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부도탑(浮屠塔)이다. 높이는 3m로 특히 옥개석(屋蓋石)에서 목조건축(木造建築)의 세부 양식을 충실히 모각(模刻)하였으며, 탑신부(塔身部) 각 면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이 양각(陽刻)되어 있다.

실상산문(實相山門)의 제2조사(祖師)인 수철화상(817∼893)은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893)에 입적(入寂)하였는데, 이 부도는 그 당시에 건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 (實相寺 秀澈和尙 楞伽寶月塔碑)  보물 34호  지정일 : 1963. 1. 21 

실상사에 위치한 수철화상의 탑비이다. 수철화상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진성여왕 7년(893) 5월 77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는 달리 거북모양의 받침돌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얕게 새긴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두어 그 위로 비를 세웠다. 비를 꽂아두는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연꽃을 둘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용 두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면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꾸밈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비의 건립 연대는 효공왕(재위 897∼912)대로 추정되고,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를 따랐다. 

석비 상부의 이수(이首) 중앙에는 '능가보월탑기(楞伽普月塔記)'라 전자(篆字)로 새기고, 그 위에 쌍룡이 구슬을 다투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높이는 2.9m이다. 수철화상(817∼893)은 홍척국사(洪陟國師)의 제자로서 실상산문(實相山門)의 제2조사(祖師)이다.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893)에 입적(入寂)한 수철화상의 부도탑비(浮屠塔碑)로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出生), 수계(受戒), 득도(得道), 세속 교화, 입적, 조탑(造塔)에 이르는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 (實相寺 證覺大師 凝蓼塔)  보물 38호  지정일 : 1963. 1. 21 

홍척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는 ‘증각’이다.

탑은 기단(基壇)은 8각형의 석재를 여러층 쌓은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들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고 윗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낮은 편이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門)을 새겼다.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증각은 홍척국사(洪陟國師)의 시호(諡號)이다.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부도탑(浮屠塔)으로 높이가 2.4m이며 특히 옥개석(屋蓋石)에 목조건축(木造建築)의 각부를 모각하였으며 탑신(塔身)의 각 면에 신장상(神將像)이 조각되어 있다.

이 부도는 신라(新羅)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최초의 산문(山門)인 지리산(智異山) 실상산문(實相山門)의 개산조(開山祖) 홍척국사의 사리탑(舍利塔)으로 신라말인 9세기 후반의 우수한 조각수법(彫刻手法)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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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3.15 23:13

    첫댓글 혜운선생 함께했던 시간이 설명을 붙힌 사진으로 다가오니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12.03.16 16:06

    같이 한 시간을 정리하면서 흥겨웠습니다.
    모든것 탁 털어버리고 장단맞추면
    더 더욱 살맛날텐데요.
    인생이 바람잘날없고
    바다가 파도가 없으면
    어이 바다 일 수 있나 싶어서 그냥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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