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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치 : 한결아트홀은 3호선 거제역에서 가깝다. 걸어서 5분 이내의 거리이고 접근성이 괜찮은 편이다. 무대도 깨끗하고 단아하다. 기다리는 동안 팜플렛과 게시판을 보며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500원에 원두커피를 마실 수 있고 리필도 가능하며 테이블에서 앉아 책을 보며 쉴 수 있다.
2. 일시 : 2014년 4월 5일 토요일 19시.
3. 개관 : 연극 <존경하는 옐레나 선생님>에 대한 서울연극센터의 해설과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연극 해설 : 이 연극은 관객의 의식을 성숙시키고 감화시키는 한편 연극의 대사회적 발언으로서의 기능을 의식하여 치열한 현실인식의 깊이를 지닌 작품이다. 평면적인 내러티브에도 불구하고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형성되는 극적 갈등의 긴장감, 도덕적 가치에 대한 팽팽한 철학적 논쟁으로서의 대립, 그리고 마지막 반전이 노리는 충격적 여운이라는 자극적 기법이 단순한 내러티브에 입체성을 부여하고 한다. 오늘의 기성세대에게는 신세대의 현실적 가치에 대한 공감을, 그리고 신세대에게는 기성세대의 도덕적 이상주의의 숭고한 가치를 이해하게 하여, 신구세대의 갈등을 통합하고 조절하여 이상적인 비전을 마련할 수 있는 하나의 철학적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다.
줄거리 : 옐레나 선생님의 생일날,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선생님의 집을 방문한다.
샴페인, 폭죽, 떠들썩한 농담과 웃음들! 옐레나 선생님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만찬자리는 시간이 흐르며 점점 이상한 분위기로 변해가는데.... 충격적 결말에 심장이 얼어붙을 것이다.
5. 연극 속 이야기
(1) 신정론 : 빠샤는 신은 전선한데 왜 세상은 악이 넘치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지난 2,000년 동안 계속 되어온 것으로 기독교에서는 ‘신정론’이라고 한다. 야훼는 완전한 선이며 모든 것을 주관하는 자인데 선한 절대자로부터 어째서 악이 나온 것인지에 대해, 도대체 어디서부터 악이 시작된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기독교의 대답이 신정론이다. 빠샤가 이러한 질문을 연극 초입에 던지는 것은 앞으로 시작될 선과 악의 대립에 대한 하나의 복선이며 경고장치라고 할 수 있다.
(2) 토스토예프스키 : 이 연극에서는 토스토예프스키를 언급하는데 그가 쓴 ≪죄와 벌≫(1865), ≪백치≫(1869), ≪악령≫(1871), ≪카라마조프의 형제≫(1880) 등의 대작은 후세의 문학 · 종교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키에르케고르(S.A. Kierkegaard)와 함께 오늘날의 위기신학, 변증법신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데, 그의 종교체험의 중심은 약한 자, 비천한 자에게 신(神)의 자유로운 선물로서 주어지는 구원의 의식(意識)이다. 신에게 인간이 협력하는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고, 따라서 신으로부터 죄(罪)의 연대의식으로 맺어진 인간으로의 일방통행이 있을 따름이다. 그 결과 이성 · 의지 및 거기서 일어나는 도덕적 행위는 종교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갖지 않으며, 그의 작품의 주인공들은 한없는 비합리적 동정이라는 감정으로만 움직이고 있다. 그는 ≪카라마조프의 형제≫ 속의 대법관 이야기에서, 기성교회는 그리스도의 참 정신을 말살하는 것이라면서,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는 또 다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리라고까지 비난하고 있다. -가톨릭 대사전 인용-
원작가인 라즈몹스까야는 아마도 현실에 존재하는 선과 악, 부정부패한 사회, 고통받는 인간의 존재 등, 이러한 현실에 대해 토스토예프스키를 통해서 자신이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들을 더 명백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3) 철학과 수학 : 빠샤는 자신이 대학의 인문학부에 입학할 예정인데 필요도 없는 수학점수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망칠 수 없다고 한다. 지금의 교육현실에서 보면 일견 일리 있는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실은 철학 이전에 수학이 있었고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철학의 이해>는 2/3가 수학적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철학의 통섭력은 수학적 인지가 없이는 제대로 발휘되기 어렵다고 볼 때 빠샤의 인식은 철학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피타고라스는 수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수학자이며 철학자이고 교육자이며 심지어는 예수와 같은 능력을 가진 자로 추앙받기도 했다. 희랍의 철학자들이 수학에 혹은 수에 집착한 이유는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4) 안티고네 콤플렉스 : 안티고네 오이디푸스의 딸이자 여동생이다. 한 해씩 번갈아 가며 테베를 통치하기로 했던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서로 테베를 통치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서로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넣은 채로 죽게 된다. 왕이 죽자 크레온이 새로운 테베의 통치자로 등극한다. 크레온은 왕이 되자 테베를 지키려 했던 에테오클레스에게는 성대한 장례를 베풀어주되, 반역자인 폴리니케스의 시신은 매장과 애도를 금하며 광야에 버려 짐승들이 뜯어먹도록 한다는 칙령을 선포한다. 죽은 형제의 누이인 안티고네는 왕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오빠 폴리니케스의 시신을 매장하려다 잡혀오게 된다. 통치자인 크레온과 안티고네는 칙령이라는 인간의 법과 시신의 매장이라는 신의 법을 가지고 서로 대립하며, 둘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된다. -인터넷 자료 설명-
(5) 선과 악 : 선과 악의 문제는 오래 전부터 인간의 숙제가 되어왔다. 마이클 셀던의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책이 얼마 전 이슈가 되었는데 ‘정의’의 개념처럼 ‘선악’ 역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보편성을 띠기도 하지만 특수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선악’은 지각하는 인간의 환경, 교육, 신념 등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구한말에 ‘단발령’이 내렸을 때 사람들은 단발을 마치 자신의 목을 자르는 것처럼 엄청난 일로 여기기도 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시험관아기’라든지 ‘줄기세포’에 대한 윤리적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종교성을 띠는 사람일수록 선악의 문제에 민감한데 이것은 대부분의 종교가 자신의 입장에서 선악을 정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 속에서 그 개념은 절대화 된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의 불행은 여기서 시작 된다. 누군가 믿는 신앙과 종교 속에서는 ‘절대’라고 여기는 그 ‘선과 악’은 다른 종교나 다른 사상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같은 종교 내에서도 그 개념이 무척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실은 여기서의 ‘선악’은 창조주의 가르침이나 어떤 신의 계시가 아닌 그 종교를 믿는 교파나 일단의 사람들의 자체 규약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자신들은 절대적인 도그마로 믿겠지만 말이다.
선과 악에 대한 다른 접근으로 요즘 사회의 이슈가 되었던 ‘세 모녀’과 ‘일당 5억 황제노역’ 사건을 대비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사건 속의 세 모녀는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사회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 했고 병고와 가난 그리고 외로움 속에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그런데 일당 5억을 감면받는 황제노역의 당사자는 지방의 향판과 기업 그리고 공무원들 및 권력자들과 친분을 쌓으며 자신의 부를 마음껏 축적했으며 사기로 많은 선한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리고 그 돈을 빼돌렸으며 자신은 황제 같은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 사실이 알려져 재판을 받으면서도 일반인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혜택을 누린 것이다. 이 두 사건은 21세기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회상의 일면을 그저 대표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회가 얼마나 일그러지고 부패하고 혼란스러운지 보여주는 지표와 같은 사건이다. 얼마 전 있었던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장면에서 옐레나 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의 타락과 범죄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세 모녀’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을 등지면서도 주인에게 마지막 월세와 함께 미안하다는 글을 남겼던 사람들... 정직하고 순박한 사람들은 가난과 병고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고 타인의 피눈물로 재산을 쌓고 해외로 빼돌리며 황제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이런 약자들을 비웃으며 오늘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잘 살아간다. 윤동주의 <서시>에 나오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이라는 구절처럼 순박하고 깨끗하며 정직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당시 러시아나 현재 우리나라 사회는 너무나 가혹한 세상이다.
아마도 연극의 원저자인 라즈몹스까야는 자신의 글을 통해 또 글 속의 토스토예프스키를 통해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와 같았던 러시아 사회의 부정부패와 왜곡 그리고 혼란을 고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의로운 사회도 부정부패하고 혼란한 사회도 결국 인간이 만드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무지, 사회에 대한 무지, 인간에 대한 무지는 필연적으로 어둡고 황량하고 부패한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디킨즈는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가난’과 ‘무지’라는 두 아이를 통해 인간 사회를 비꼬았다. 이 연극에서도 여학생인 ‘랄랴’는 가난 때문에 도덕과 윤리를 버리고 죄를 가까이 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 범죄하고 무지 때문에 알지도 못 하고 자신이 저지르는 죄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이 연극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 이 사회 속에서 라즈몹스까야가 그토록 말하고자 했던 정의와 선악에 대해 진지한 고민과 함께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써 나 자신과 타인이 같이 숨 쉬고 공유하며 살아가는 사회와 터전에 대한 배려와 사랑의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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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그님 안녕하세요 :)
알찬 관람평을 정성스럽게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더욱 재밌고 의미있는 공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