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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십이연기 각 지분을 통해 본 핵심 수행법
이상에서처럼 우리는 괴로움이 왜 생겨났는지를 순차적으로 살펴봄으로써 그 원인이 열 두가지 연결고리의 지분에서 기인함을 알았다. 결론적으로 십이연기의 어느 한 지분을 소멸시킨다면 그 다음의 지분이 연이어 소멸되고, 결국 노사와 우비고뇌라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될 것이다. 즉 십이연기의 각각의 지분들은 그것 자체로써 소멸해야 할 괴로움의 원인이며, 그 지분 가운데 어느 한 가지 지분을 소멸시키더라도 결론은 노사라는 궁극적 괴로움의 소멸로 이어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불교를 공부하다보면 불교교리와 실천수행이 너무 방대하고, 복잡하며, 모두 다 핵심 가르침이라고 하니 도대체 어떤 것이 진짜 핵심 가르침이고 실천인지를 잘 모르겠다고 말하곤 한다. 어떤 경전에서는 무명을 타파하는 것이 불교의 요체라고 하고, 또 다른 경전에서는 집착만 버리면 열반에 이른다고 하고, 또 어떤 스님들은 애욕이야말로 끊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며, 또 어떤 가르침에서는 업장만 소멸하면 열반에 이른다고 말한다. 또한 분별심만 타파하면 된다고도 하고, 느낌을 잘 관찰하기만 해도 된다고도 하며, 육근관찰을 통해 육근이 청정해지면 그것이 바로 궁극의 경지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불교는 핵심이 많은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진짜 핵심일까? 왜 이렇게 경전마다, 스님들마다 다 중요하다고 하는 내용이 다른 것일까? 더욱이 실천적인 부분에서는 더욱 헷갈린다. 악업을 닦거나, 업장 소멸이 가장 중요한지, 분별심의 타파가 더 중요한지, 육근관찰이 중요한지, 수념처라는 느낌관찰이 중요한지, 애욕의 타파가 중요한지, 무집착의 실천이 중요한지 그 누구도 이것 하나만이 최고다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 십이연기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에 의하면, 십이연기의 각 지분을 소멸하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특정한 지분만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지분을 소멸하게 될지라도 결국에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각각의 지분이 모두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로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이것이 소멸되면 저것도 소멸되는 연기적인 상의상관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교에서는 ‘이것만이 최고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수행을 해도 좋고, 저 수행을 해도 좋다고 말한다. 그 모든 다양한 수행법이 모두 다 고통의 소멸과 열반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고의 소멸이라는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12연기의 각 지분에서 말하고 있는 ‘고의 소멸’을 위한 실천수행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 ‘무명’의 지분에서는 어리석음을 타파하고 지혜를 드러내는 것이 핵심이다. 아마도 많은 불자들이라면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명을 타파하고 지혜를 드러내는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무명의 타파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대승경전의 시초인 반야경에서는 반야지혜를 닦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의 핵심임을 설하고 있다. 반야바라밀다, 즉 지혜의 완성이야말로 반야경의 최고의 목적인 것이다. 불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무명을 타파하여 ‘명(明)’ 즉 밝은 지혜를 드러내는데 있다. 부처님오신날이 되면 연등을 달고, 인등을 켜며, 불전에 촛불을 밝히는 모든 행위가 무명을 타파하고 밝은 지혜의 등불을 켠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무명의 타파야말로 모든 수행의 핵심이 된다.
두 번째 ‘행’의 지분에서 중요한 실천은 업의 정화와 업장소멸, 선업의 증장과 악업의 소멸에 있다. 업이 완전히 소멸되면 그것이 곧 열반이다. 더 이상 태어날 원인이 없어진 것이다. 많은 스님들은 설법할 때 ‘업장소멸’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금강경]에도 능정업장분에서, 능히 업장을 깨끗이 맑히는 것에 대해 설하고 있으며, 진언수행에도 관세음보살 멸업장진언과 지장보살 멸정업다라니가 있다. 그만큼 불교의 실천에서 업장소멸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업의 소멸이 곧 모든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십이연기의 행의 지분에 기인한다. 초기불교의 중요한 수행법의 모음인 삼십칠조도품 중에는 사정근이 있다. 사정근은 모든 악업을 끊어 없애고 모든 선업을 키우기 위해 정진하는 수행을 의미한다. 사정근의 첫째는 율의단으로 아직 생기지 않은 악업을 끊기 위해 힘쓰는 것이며, 단단은 이미 생긴 악업을 끊기 위해 힘쓰는 것이고, 수호단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선을 드러내기 위해 힘쓰는 것이며, 수단은 이미 생긴 선업을 잘 키우기 위해 힘쓰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정근은 곧 업을 잘 다스리기 위한 수행법인 것이다.
세 번째 ‘식’의 지분에서 중요한 실천은 ‘분별심의 타파’에 있다. 식은 ‘알음알이’, ‘분별심’을 의미한다. 스님들의 설법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바로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 ‘분별심을 내지 말라’는 설법이다. 사찰에 가면 일주문에 ‘입차문래 막존지해(入此門來 莫存知解)’라고 하여 ‘이 문 안으로 들어오는 자는 알음알이를 일으키지 말라’고 쓰여 있다. 이는 [전등록]의 평전보안 선사의 법문으로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등 많은 스님들의 가르침에서 인용되고 있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처럼 식의 타파, 즉 분별심을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불법수행의 중요한 가르침이 되어 오고 있다. 승찬대사는 [신심명]에서 ‘지도무난 유혐간택 단막증애 통연명백’이라고 하여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으니 분별 간택만 하지 않으면 된다. 좋다거나 싫다는 분별심만 일으키지 않으면 통연히 명백해질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분별심을 여의는 것이야말로 곧 깨달음의 길임을 설하고 있다. 또한 유식사상에서도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하여, 우리의 사량 분별심인 식을 지혜로 바꾸는 것을 중요한 실천으로 삼고 있다.
네 번째 ‘명색’의 지분에서 중요한 실천은 ‘이름과 형색’, 혹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데 있다. 명색은 인식의 대상을 뜻하니, 인식의 대상에, 특히 바깥 대상에 끄달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안에 중심을 세우고, 바깥 대상에 끄달리지 말라는 가르침이야말로 불교의 오랜 법문이다. 명색은 곧 오온이며 육경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오온이 실체가 아니며 무아인 줄 알고, 바깥 경계인 육경이 곧 육진으로 티끌 같은 것인 줄 안다면 명색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이름과 개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형색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행인에게 중요한 실천수행이다. [금강경]에서는 ‘여래는 세계가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라고 설한다’거나, ‘가히 삼십이상으로 여래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삼십이상은 곧 삼십이상이 아니며 그 이름이 삼십이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혹은 ‘실상은 곧 실상이 아니므로 실상이라고 여래는 설하셨다’,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고 설하나니 다만 이름이 중생인 것이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름과 형색이라는 것은 다만 이름 지은 것일 뿐 실체가 아님을 무수히 설하고 계신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가르침 또한 색이라는 것이 곧 공임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명색이란 이름이 명색일 뿐 실체가 아님을 깨달을 때 명색의 지분이 소멸되어 곧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다섯 번째 ‘육입’의 지분에서 중요한 실천은 육근청정과 육근관찰에 있다. 앞서 육근에서 설명한 것처럼 육근청정은 육근을 잘 조복받고, 수호하며, 잘 지켜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육근으로 육경을 접촉할 때 분별이 개입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육근이 청정하면 눈으로 대상을 보더라도 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며, 귀로 어떤 소리를 듣더라도 좋고 싫은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듣게 되기 때문에 보고 들리는 경계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근을 잘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눈귀코혀몸뜻을 잘 관찰함으로써 육근이라는 감각기관으로 어떤 것들이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다.
여섯 번째 ‘촉’은 단순한 육근과 육경, 육식의 접촉이 아니라, 이 세 가지 계역이 합쳐져 접촉함으로써 ‘무언가가 있다는 의식’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즉 우리가 이 세상 모든 것을 실질적이고도 실체적으로 ‘있다’고 여기는 실체론이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 촉의 지분은 이러한 실체론을 타파할 것을 설하고 있다. 촉의 지분이 소멸하게 되면, 우리는 촉을 통해 생겨나는 ‘무언가가 있다’라는 실체론을 타파하게 된다. 모든 존재의 비실체성과, 오온무아, 공과 연기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오온이라는 존재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십팔계가 인연따라 촉함에 따라 일어난 연기적인 것일 뿐이며, 그렇기에 무아이고, 비실체적인 공성임을 의미한다. 이 촉의 지분으로 인해 실체론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 모든 쟁론들이 타파되고 있다. 부처님께서 운명론이나 우연론, 신의설 등을 삼종외도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이 모든 존재에 대한 설들이 ‘있다’라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십이연기의 촉의 지분은 모든 실체론적 사유방식을 타파하고, 연기무아적 비실체성을 드러내 주고 있다.
일곱 번째 ‘수’의 지분에서 중요한 실천은 ‘느낌’과 ‘감정’을 관찰하는 사념처 수행의 두 번째 ‘수념처’ 수행에 있다. 느낌에 끄달리고, 집착하게 되면 그 느낌은 곧바로 애욕과 집착으로 나아가지만, 느낌이 일어날 때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판단 없이 관찰하게 된다면 그 느낌은 더 이상 애욕과 집착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느낌과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을 다룸으로써, 그 느낌의 비실체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수의 지분에서 중요한 수행은 이처럼 느낌관찰, 즉 수념처에 있다.
여덟 번째 ‘애’의 지분에서 중요한 실천은 애욕과 욕망, 갈애의 소멸에 있다. 앞서 12연기의 지분에서 설명한 것처럼 괴로움의 원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애욕이며, 모든 괴로움은 애욕이 근본이 된다. 말할 것도 없이 애욕과 갈애를 소멸시키는 것이야말로 불교수행의 핵심이다. 수행자들의 계율에 그토록 애욕과 갈애를 즐기지 말 것을 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분율]에는 ‘애욕은 착한 가르침을 태워버리는 불꽃과 같아서 모든 공덕을 없애 버린다. 애욕은 늪과 같고, 꽁꽁 묶인 밧줄과 같고, 시퍼런 칼날과 같다. 애욕은 험한 가시덤불에 들어가는 것과 같고, 성난 독사를 건드리는 것과 같고, 더러운 시궁창과 같다.’고 했다. 또한 [법구경]에서는 ‘애욕은 마치 횃불을 잡고서 바람을 거슬러 달리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손을 태울 염려가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애욕으로 얽어매어 피안으로 건너가지 못하게 한다. 애욕은 남도 해치고 자기 자신도 해친다.’라고 함으로써 애욕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애욕과 갈애를 소멸시키는 것이야말로 불교수행의 핵심이다.
아홉 번째 ‘취’의 지분에서는 당연히 ‘무집착’, ‘방하착’, ‘무소유’ 즉 집착하거나 취하지 않는 수행의 실천을 설하고 있다. 법정스님께서 무소유를 설하신 것도, 불교에서 그토록 ‘집착을 놓으라’고 하는 이유도, 선가에서 ‘방하착’을 설하는 이유도 모두 십이연기의 취의 지분에 대한 소멸을 설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경전에서도 취착의 위험을 설하고 있다. 먼저 [잡아함경]에서는 ‘자기 마음에 드는 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탐심을 끊어버리기 위함이다. 자기 마음에 거슬리는 것에 성내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진심을 없애기 위함이다. 어리석은 말에 집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은 치심을 끊기 위함이다. 수행은 집착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는 지혜의 연마이다.’라고 했고, 『열반경』에서는 ‘집착하는 까닭에 탐욕이 생기고, 탐욕이 생기는 까닭에 얽매이게 되며, 얽매이는 까닭에 생로병사와 근심, 슬픔, 괴로움과 같은 갖가지 번뇌가 뒤따르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화엄경』에서는 ‘내 것이라고 집착하는 마음이 갖가지 괴로움을 일으키는 근본이 된다. 온갖 것에 대해 취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훗날 마음이 편안하여 마침내 근심이 없어진다.’라고 했다. 또한 『금강경』에서는 ‘마땅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하기를 ‘너희 비구는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 했으니,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님에 있어서이겠는가.‘라고 함으로써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도 집착해서는 안 됨을 설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집착까지도 경계하고 있을 정도로 무집착에 대한 가르침을 중요한 실천으로 여긴다.
열 번째 ‘유’는 앞서 설한 행의 지분에서와 같이 업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업들이 쌓여 다음 생의 원동력이 되는 업유로 익어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이 유의 지분에서 소멸할 것은 단순한 하나하나의 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업이 모이고 쌓여 결국에 다음 생에 어떻게 태어날 것인지, 어떤 존재로 태어날 것인지를 결정지을 만큼 업의 세력이 강화되고 쌓인 업유를 소멸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에는 욕유, 색유, 무색유가 있지만, 욕계와 색계, 무색계는 그 각각의 세계 안에 무수히 많은 무량한 세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생의 종류로 곧 태어나게 될 업유들이 그만큼 무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마다 각자 지은 업들이 모여 다음 생에 어떤 존재로 태어날지가 결정되는 원인이 업유인 만큼, 이 유의 지분이야말로 생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십이연기에서 보듯이 유의 지분 또한 소멸해야 하는 것인 만큼 불교에서는 욕유, 색유, 무색유 또한 소멸되어야 할 것이며, 그 유를 원인으로 태어나게 되는 세계인 욕계, 색계, 무색계 또한 결국에서 소멸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이 말은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다는 것은 곧 욕계와 색계, 무색계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불교의 목적은 삼계와 육도 가운데 가장 좋은 하늘세계로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삼계와 육도를 넘어서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처음 태어나실 때 동서남북으로 일곱 발자국을 걸으심으로써 육도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생’을 소멸하는 것이다. 생의 지분을 소멸한다는 것은 육도윤회를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향사과라는 초기불교의 수행단계를 보면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을 설하고 있는데, 예류는 아직 7번을 더 천상과 인간계로 왕래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단계이며, 일래는 한 번만 더 태어남을 받으면 되고, 불환에서는 더 이상 생을 받아 되돌아 올 필요가 없는 깨달음의 단계를 의미한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으심으로써 더 이상 생을 받지 않는 완전한 열반에 이르셨다. 생을 소멸한다는 것은, 불생불멸이라는 이치 즉 본래 나고 죽음이 없는 이치를 깨닫는 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어리석은 의식 속에서는 이 몸과 마음이라는 오온을 보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며, 오온이 소멸될 때를 죽음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생사의 사고방식에 갇히고, 생사를 실체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본래 오온 또한 무아이며, 생사라는 것 또한 실체적인 생사가 아니라, 인연 따라 비실체적으로 허망하게 오고 가는 연기적인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은 ‘생’이라고 착각하고, 태어남을 실체적인 ‘생’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노병사의 실체적인 괴로움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괴로움’이라는 거대한 환상이 연기하는 것이다.
열 두 번째는 ‘노병사’의 소멸이다. 이는 곧 모든 괴로움의 소멸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고 하여 고통의 바다라고 말한다. 이는 한 번 태어난 존재는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음이라는 괴로움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본래 태어남이 없다는 불생불멸의 이치를 안다면, 죽음이 더 이상 고통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생이라는 것을 실체라고 생각하는 허망한 착각 때문에 노병사가 직접적인 고통으로 느껴지는 것일 뿐이다.
처음 부처님께서 출가할 때 출가하지 말라는 정반왕에게 ‘노병사를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면 출가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보통 우리는 부처님은 정각을 성취함으로써 생사를 벗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은 생사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하면서 왜 죽었느냐’고 질문한다. 이 십이연기를 보면 그 답이 보인다. 부처님께서는 십이연기를 깨달으심으로써 생도 멸하고, 노사도 멸하신 분이다. 즉 생이 본래 없고, 노병사가 본래 없으며, 이 모든 것은 서로 연기되어 일어난 비실체적 것일 뿐임을 분명히 보신 것이다. 무아임을 보신 것이다. 우리가 늙고 병들고 죽음을 괴로워하는 이유는, 나라는 실체적인 존재가 정말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실재로 있는 내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나라는 오온이 무아임을 깨닫고, 그렇기에 생과 노사가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이 모든 것이 꿈 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다르지 않은 환영임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생사에서 벗어남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이상에서와 같은 십이연기를 통해 생노병사 우비고뇌의 모든 괴로움을 소멸하셨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소멸하는 과정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탐구하셨고, 그 괴로움의 원인이 12가지 지분을 원인으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셨다. 그 열두 가지 지분 가운데 어느 하나의 지분이 소멸되면 다른 지분 또한 소멸될 것이며, 모든 괴로움은 소멸될 것임을 보셨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불교의 가르침이 2,500여 년을 이어져 오면서 수많은 경전과 수행자, 스님들은 십이연기의 각 지분을 소멸시키기 위한 다양한 수행법과 가르침을 실천해 오고 있다. 불교의 수행에 수많은 방편이 있고, 수많은 깨달음으로 가는 가르침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다음 장에서는 노사라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가르침인 사성제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붓다수업] 중에서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 ( ) ( )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감사합니다 _((()))_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