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의 삼성각에는 산신, 독성, 칠성님을 모십니다. 산신 숭배는 자연존중사상입니다.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산신사상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칠성 사상은 예전부터 자식을 못 낳으면 칠성전에 불공을 올리면 자식을 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칠성은 북두칠성으로 길을 잃었을 때 하늘의 좌표가 되는 별들로, 이 또한 하늘에 대한 존중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독성은 신선 등 불법을 통하지는 않더라도 다양한 방법으로 홀로 깨친 수행자를 의미합니다. 불교에서는 전래과정에서 전법의 방편으로 불교를 수호하는 신으로 받아들여 차차 사람들에게 부처님을 알게 했습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우리가 이 삼성을 모시는 것을 폄하하여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옛 어른들은 정수를 떠놓고 칠성님께 ‘비나이다, 비나이다.’하고 기도를 했지요. 이것은 좋을까요, 나쁠까요. 미신일까요? 그렇게 한다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을까요?
저는 칠성사상, 산신사상을 비롯한 아름다운 정서들을 안타깝게도 현대의 과학문명이 너무 몰살시키는 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불법을 모르더라도 아침에 목욕재계를 하고 정안수를 떠서 간절히 기도하는 그 모습은 단순히 미신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수행에 대한 개념을 정립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가 꼭 아이가 태어나거나 자식들이 대학에 들어가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칠성전에 올린 그 간절한 기도는 수행적으로 봤을 때 큰 의미가 있지요. 참선하고, 경전 읽고, 108배하는 것을 우리는 수행이라 합니다. 그 수행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불교는 수행의 종교로, 불자로서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불자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수행이란 신구의 삼업을 청정히 하는 것입니다. 수행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일심(一心)입니다. 한마음, 즉 간절하고 깨끗한 마음이 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염불을 하는 것과 할머니와 어머니들이 정안수를 놓고 ‘비나이다.’하고 기도하는 그 간절함은 똑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옛 어른들이 하셨던 그 기도는 바로 신구의 삼업을 청정히 하는 수행의 한 형태인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시는 분들의 마음에는 번뇌망상이 없습니다. 오롯이 자식을 위해 기도를 하신거죠. 일심이 통하면, 정말 간절하면 그 일들이 성취가 됩니다. 간절한 마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산신이나 칠성 같은 것은 미신 아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은 불자로서 잘 해석해줘야 합니다. 불교사상은 모두를 존중하는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연기법을 통해 이 세상이 나하나 만이 아닌 모두와 연결되어져 있는 것임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넓은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혹자가 “불교는 옛 것을 따르고 너무 구태의연해 보인다.”고 해도 이러한 깊은 뜻을 이해한다면 불교적 사상기반을 그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불교가 멋진지, 내 속에 하늘, 산과 강이 있는 사상이 바로 우리 불교이며 때문에 우리는 모두를 존중한다는 것을 타인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불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도 삼성각에 갔을 때 정말 소원을 이루어줄까, 미신일까 하는 마음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배하시면 됩니다. 자연 그리고 불자가 아니더라도 어느 곳에서든 어떠한 형태로라도 마음을 닦는 수행자분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 우리는 이렇게 삼성각에서 예경을 올리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