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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선도성찰나눔실천회 제1회 여름수련회
(09.08.14-16, 도피안사) 법문자료 요약
통찰과 나눔 II
* 통찰과 나눔 I 은 영하산방 ‘법문모음’ 참조
들어가는 말: 우리에게 잃어버릴 꿈은 있는가?
지난 주 서재를 정리하다 구매해 놓고 읽지 않고 있던 <잃어버린 꿈을 찾아서> (우봉규 지음, 김영장 그림)란 동화책이 눈에 띄어 다음날 출근길 전철 안에서 반쯤 그리고 연구실에 도착해 끝까지 읽어내려 갔다. 작가는 고교시절 서점에서 책으로 만났던, 이중섭을 모델 삼아, 가난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꿈을 가진 바닷가 소년의 이야기로 부모님의 반대로 자신의 꿈을 포기하려는 소년이지만, 결국에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꿈을 찾고 마침내 그 꿈을 실현한다는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읽어야할 동화책임을 절감했다. 한편 원고 청탁을 받은 시점에서 과연 우리에게 잃어버릴 꿈은 있는가? 하고 반문하게 하는, 최근 우리 주변에 전개되었던 몇 가지 일들을 함께 성찰 해 보고자 한다.
먼저 석가세존의 전생담 중에 칠경화(七莖花)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석가세존께서 선혜라는 선인(仙人)으로 보살행을 닦던 인행시(因行時)에 보광여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선혜 선인은 여래께 꽃을 공양하려고 꽃을 구하러 다녔으나 그 나라의 왕 역시 여래께 꽃을 공양하기 위해 나라 안의 꽃을 모두 사들였기 때문에 꽃이 동이 나서 살 수가 없었다. 선혜 선인은 수소문 끝에 구리 선녀에게 7송이의 꽃(七莖花)이 있다는 말을 듣고 꽃을 사자고 청했으나 팔수 없다고 거절을 했는데, 난감해진 선인은 여래에게 공양을 하려하니 제발 꽃을 팔라고 간곡하게 청을 하자, 그 정성에 감동해서 자기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꽃 5송이를 주고, 2송이는 자기 몫으로 여래에게 공양을 올려달라면서 그 7경화를 내 주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정반왕의 아들인 싯다르타 태자와 구리성주 선각왕의 딸로서 싯다르타의 외사촌인 야소다라 공주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라는 일화가 있다. 그리고 태자 19세에 아들 라훌라(훗날 10대 제자의 한 분이 됨)를 낳고, 석가세존이 성도하신 후 20여년 뒤에 이모 마하파자파티와 500 석가족의 여자들과 함께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 비구와 비구니 승가로 이루어진 초기불교 이부중(二部衆) 시대를 여는 주역들이 되었다.
지난 해 7월 중순 박사학위 최종 심사 도중 영국 옥스퍼드대 기숙사에서 돌연 죽음의 길을 선택했던, (“오늘날 불교도가 해야 할 일은 석가세존이 설하신 계율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불완전할 수 있으며, 그것의 개정을 통해 계율체계를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이전의 것보다 향상시킬 수 있다”라고 주장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차세대 한국불교학을 이끌어갈 인재로 촉망받던 한 불교학도의 1주기 기사. 자기 꿈에 도전을 해보지도 못한 채 안정된 직장을 갈구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는, 한 대학생의 인터뷰 기사: 그는 “특정대의 입학이 확정되자 가족들 사이에서 내가 사법고시를 보는 것도 자동 확정됐다.”며 “원래 꿈은 교사가 되는 것이었지만 내 인생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서민들까지도 부추기고 있는 아이 생일파티로 1천만 원을 쓰는 일부 부유층의 과시용 생일 문화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는 기사. 참고로 '자연과 함께 더불어'란 꿈을 실천하고 있는 호주 원주민 "참사람 부족"이 문명인들에게 전하는 <무탄트 메시지>(말로 모건 지음/ 류 시화 옮김)란 책에서 생일의 의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이는 누구나 먹는 것이 아닌가! 단지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 아니라 작년보다 올해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됐다(즉, 마음 工夫가 向上됐다)는 걸 축하하는 것이다.”
사실 필자가 학자로서의 삶 이외에 1990년 종달 이희익 노사 입적 이후 선도회를 맡아 지금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힘써 온 일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필자와 만나는,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의 희유한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분들께 잃어버린 꿈을 일깨워주거나, 꿈이 없는 분들에게는 꿈을 갖게 하는 일, 허황된 꿈은 버리게 하는 일 등 일인일몽(一人一夢) 갖기 운동이다. 그 가운데 가장 최근의 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선도회에서는 2009년 7월 25일 지난 3년 간 치열하게 간화선 입문과정을 마치고 ‘완묵(翫墨)’이란 대자호(大姉號)를 받은 여성분이 있었다. 이 분이 필자에게 보낸 인생지도(人生地圖)가 담긴 편지는 다음과 같다.
“(장녀로서 꿈은 있었지만 가정형편으로 인해 간직만 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 앞으로 선 공부를 통해 지혜가 담긴 어린이 그림책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화작업을 했던 경험으로 그림과 글로 쉽게 전달하는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또 하지 못한 미술 공부에 대한 아쉬움으로 순수 회화적인 창작 작업도 꾸준히 할 계획입니다. 72세에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80세에 첫 개인전을 열었음에도 세상 떠나는 101살 동안 1,600점에 달하는 따뜻한 감동을 주는 작품을 남기신 미국화가 그랜마 모제스처럼, 일상에서 선 공부를 통한 지혜로 제가 가진 작은 재능을 살리고 싶습니다. 지금의 저는 참선공부를 할 수 있음이 그 어떤 재력과 학벌을 가진 것보다도 소중합니다. 언제나 성실한 자세로 공부해서 저 또한 필요한 분들에게 나누어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법사님의 법은에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편지에 대해 필자가 보낸 답글은 다음과 같다. “보내주신 인생지도 잘 읽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삶의 여정의 대자님으로 하여금 다른 이들보다 더 깊이 삶을 성찰하게 한 것 같습니다. 앞으로 지금처럼 수행과 더불어 그림 작가로서의 꿈을 키워가는 남은 삶의 여정을, 하루하루 신바람 나게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그랜마 모제스 이상으로 누구에게나 감동을 주는 명작을 세상에 드러낼 때가 올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래서 무심(無心)히 먹(墨)을 가지고 신바람 나게[翫] 그리다 보면 어느 때인가 불후의 명작이 탄생되리라는 확신 속에 ‘완묵(翫墨)’으로 대자호를 지었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선수행을 통해 체득한 통찰 체험을 바탕으로 함께 나누며 일과 수행이 둘이 아닌 삶을 꾸준히 이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 금강신문 ‘불교시론’ (2009.08.07)의 수정 보완본
1. 통찰자료:
가) 간화선 수행시 참구하는 화두 가운데
부유함과 가난함을 다룬 청세고빈淸稅孤貧(<無門關> 第10則)
本則: 曹山和尙 因僧問 淸稅孤貧 乞師賑濟 山云 稅闍梨 稅應諾
山曰 靑原白家酒三盞喫了 猶道未沾脣.
評唱: 無門曰 淸稅輸機 是何心行 曹山具眼 深辨來機
然雖如是 且道 那裏是稅闍梨喫酒處.
頌: 頌曰 貧似范丹 氣如項羽 活計雖無 敢與鬪富.
요처(要處):
이 공안의 핵심은 진리에 대한 빈부(貧富)의 이원적 분별에서 자유로워지는것이다. 이에 대해 바른 견해가 섰다면 만일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을 때, 제1관문은
청세 대신 맨 처음 조산 화상을 대면했을 때 어떻게 응대했었어야 했는지 이고, 제2관문은
조산 화상께서 “청원의 백가주를 석 잔이나 들이키고도 아직 입술도 젖지 않았다고 하느냐?”
했을 때 어떻게 응대했었어야 했는 지이다.
청세고빈 해석
본칙: 조산 선사에게 한 승려가 와서 말하였다.
“저, 청세는 외롭고 가난합니다. 스님께서 좀 가르침을 베풀어 주십시오.” 조산 선사가 그 승려를 불렀다. “세사리야!” 그 승려가 대답하였다. “네.” 조산 선사가 말하였다. “청원의 백가주를 석 잔이나 들이키고도 아직 입술도 젖지 않았다고 하느냐?”
평창: 청세는 어쩌자고 시비를 걸었나. 조산의 안목이 건너오는 수작을 벌써 간파했다네. 그렇더라도 어디 말해보라. 대체 어디가 청세가 청원의 백가주를 석 잔이나 들이킨 자리인가?
송: 게송으로 가로되,
가난하기는 범단과 같고 기개는 항우와 같네.
가진 것도 없으면서 감히 부를 다투는구나.
* 동산양개(807-869)-조산본적(840-901)
운거도응( ? -902)…굉지정각(1091-1157)
월주건봉( ? - ? )
* 참고: 시산柴山 노사老師 제창提唱
‘고빈孤貧’하면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전에 영국에 한 신사가 운수 시절의 사형, 화산대의(華山大義, 종달 노사의 스승) 노사 밑에 선 수행하러 온 적이 있었다. 대의 노사는 이 신사에게,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리라.”라고 말하는 기독교 성경에 쓰인 말을 공안(즉, “내 앞에 가난한 마음을 즉시 내 놔 보시요!”)으로 주었다. 기독교에 서 이 말이 전통적으로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대의 노사가 이것을 선적(禪的) 입장에서 공안으로서 활용했다는 것을 정말로 흥미로운 일이라 생각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청세가 말하는 ‘고빈’이란, 반드시 말 그대로의 뜻은 아니다. “나에게는 깨달음도 없고, 방황함도 없고, 지옥도 없고, 극락도 없고, ‘자(自)’도 없고 ‘타(他)’도 없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함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도저히 구제불능인 이 빈자(貧者)를 당신이라면 어떻게 구해주실 수 있으십니까?”라는 날카로운 물음으로, 이 승려는 조산 선사의 응대(應對)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조산 선사는 자유로운 선적 역량을 갖춘 대선장大禪匠이어서, 이와 같은 일문(一問)에 동요할 정도의 선승은 아니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청세야!”하고 불렀다. 청세가 “네!”하고 대답하자마자 “당신은 청원백가의 명주(名酒)를 석 잔이나 마셨으면서도 한 모금도 안 마셨다할 수 있겠느냐?”라고 꾸짖었다. 도대체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 것일까? 눈에 가득, 귀에 가득, 갈려고 하면 갈 수 있고, 앉으려 생각하면 앉을 수 있다. 고빈은커녕 대부호(大富豪)가 아니냐? 물음과 대답이 한결 같이 잘 융화된 멋진 답화(答話)이다. 그것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이고 셋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조동선(曹洞禪)의 묘지(妙旨)를 엿볼 수 있다.
은원(隱元) 선사에게 ‘안빈(安貧)’이란 시가 있다.
등불을 켜지 말게. 집에는 기름이 없네.
등불을 원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
나에게는 가난을 안심安心시킬 비책秘策이 있네.
그대! 이제 슬슬 벽을 더듬어 가게나.
특히 끝의 두 구[二句]에는 깊은 맛이 있다. 조산의 담화와 함께 깊게 맛보는 것이 좋겠다. 가난하면 가난을 한탄하고, 부자라면 부가 걱정스럽다. 이것이 속세의 상식이다. 빈부(貧富), 시비(是非)를 넘을 때, 거기에 참된 자유가 있고, 안심이 있다.
나) 조주趙州 선사의 십이시가十二時歌
닭 우는 축시 (오전 1시부터 3시까지),
문득 잠에서 깨어나 너절한 모습 근심스레 바라보네.
두를 옷, 소매옷 하나 없고
가사는 겨우 모양만 남았네.
잠방이는 허리가 없고 바지도 주둥아리가 없네.
머리에는 비듬이 서너 말
도 닦아서 중생제도 하는 이 되려고 했는데
누가 알았으랴! 이 모양 이 꼴이 될 줄을!
이른 아침 인시 (오전 3시부터 5시까지),
촌 동네 다 쓰러져가는 절, 참으로 형언키 어렵고
아침 죽 속에는 쌀 한 톨 없네.
그저 창틈 사이로 먼지만 우두커니 바라볼 뿐
참새 지저귀는 소리뿐, 인적도 없고
외로이 앉아 이따금씩 떨어지는 낙엽소릴 듣네.
누가 말했던가, 출가자는 애증을 끊는다고
생각할수록 무심결에 눈물이 손수건을 적시네.
해 뜨는 묘시 (오전 5시부터 7시까지),
청정함이 오히려 번뇌가 되나니
애써지은 공덕은 세상 티끌에 묻히고
무한한 (마음)밭은 일찍이 빗질 한 번 한 적 없네.
눈살 찌푸릴 일은 많고 마음에 드는 일은 하나도 없는데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은 동쪽 마을의 황 씨 늙은이
공양 한번 가져온 일이란 아예 없고
도리어 우리 절 앞에다 노새를 놓아 풀을 뜯어 먹이네.
아침 공양 때의 진시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동네 이웃들의 밥 짓는 연기만 부질없이 바라볼 뿐.
만두와 찐 떡은 작년에 이별하였는데
지금 생각을 떠올리니 공연히 군침만 도네.
생각도 잠깐이고 탄식만 하고 있나니
백여 호戶나 되는 동네에 착한 이 하나 없네.
찾아오는 이는 그저 마실 차나 찾는데
차를 대접하지 않으면 발끈 화를 내며 돌아가네.
해 높아지는 사시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머리 깎고 이 지경이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어쩌다가 청을 받아 시골 중이 되고 보니
굴욕과 굶주림에 죽을 지경이네.
오랑캐 장 씨와 얼굴 검은 이씨는
나를 공경하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고
이따금 불쑥 문 앞에 와서 고작 한다는 말은
차를 꿔 달라, 종이를 꿔 달라 하며 귀찮게 하네.
해가 남쪽을 향하는 오시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차와 밥을 탁발하며 도는 데는 일정한 순서가 없나니
남쪽 집에 갔다가 북쪽 집에 들렀더니
쓰디쓴 소금덩이에 쉰 보리밥,
수수밥에 상추를 내어주고 하는 말이
공양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며
스님이라면 모름지기 도심이 견고해야 한다고 말하네.
해 기우는 미시 (오후 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이제는 굳이 밥 빌러 다닐 필요가 없네.
한번 배부르면 지난번 굶주린 일을 잊는다더니
오늘 이 노승의 신세가 바로 그러하네.
좌선坐禪도 하지 않고 경經도 읽지 않나니
해어진 자리 깔고 햇볕 쬐며 낮잠을 즐기네.
생각해보니 저 하늘의 도솔천일지라도
이처럼 등 따스하게 해주는 햇볕 없으리.
해 저무는 신시 (오후 3시부터 오후 5시까지),
그래도 향 사르고 예불하는 이 있네.
다섯 할멈 가운데 혹부리가 셋이고
나머지 두 사람의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
참깨와 차를 공양 올리다니! 참으로 이 얼마만인가!
금강역사여, 팔뚝에 너무 힘주지 말게나.
내년에 누에 오르고 보리 익으면
나도 나한전에 공양(돈 한 푼) 좀 올리려 하네.
해지는 유시 (오후 5시부터 오후 7시까지),
쓸쓸함을 제외하고 나면 달리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눈 푸른 운수납자는 눈에 안 띈 지 오래인데
절을 거쳐 가는 사미승은 언제나 있네.
출격出格의 활구活句는 단 한 마디도 없이
그저 얼치기로 석가세존의 뒤를 이어가고 있네.
한 자루 든든한 이 가시나무 주장자는
산에 오를 때는 지팡이요 때때로 개도 후려 쫓네.
황혼녘 술시 (오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캄캄한 빈방에 홀로 앉아 있나니
가물거리는 호롱불 켜본지는 이미 오래 전 일이고
눈앞은 온통 깜깜한 칠흑뿐이네.
종소리도 듣지 못한 채 그럭저럭 하루해가 저무나니
들리는 것은 늙은 쥐의 찍찍거리는 소리뿐
어디다가 다시 마음을 붙여 볼까나
생각다 못해 바라밀을 한 차례 떠올려보네.
잠자리에 드는 해시 (오후 9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문 앞의 휘영청 밝은 달, 사랑하는 이 누구인가?
집안에서는 오직 잠자리에 들 때가 걱정이러니
옷 한 벌 없으니 무엇을 덮고 자겠는가?
절 살림 맡은 원주 유 씨와 신도 조씨는
입으로는 걱정 말라고 하나 그 말 믿을 수 없네.
내 호주머니 이렇게 텅 비어 있는데도
물어보면 그저 무조건 모른다고만 하네.
한밤중의 자시 (오후 11시부터 오전 1시까지),
생각이 잠시라도 그칠 때 있었던가?
생각해 보니 천하의 출가승 가운데에
나 같은 주지가 몇이나 되리.
맨흙바닥에 낡은 깔 자리,
늙은 느릅나무 목침에 이불은 한 채도 없네.
불전 앞에 사를 향조차 없으니
그저 잿더미 속의 쇠똥 타는 냄새만 맡을 뿐이네.
- <선시감상사전> (석지현 지음) 참조
十二時歌
雞鳴丑 愁見起來還漏逗 裙子褊衫箇也無 袈裟形相些些有 褌無腰袴褲無口 頭上靑灰三五斗 比望修行利濟人 誰知變作不喞溜
平旦寅 荒村破院實難論 解齋粥米全無粒 空對閑窓與隙塵 唯雀噪勿人親 獨坐時聞落葉頻 誰道出家憎愛斷 思量不覺淚沾巾
日出卯 淸淨却翻爲煩惱 有爲功德被塵埋 無限田地未曾掃 攢眉多稱心少 尀耐東村黑黃老 供利不曾將得來 放驢喫我堂前草
食時辰 煙火徒勞望四鄰 饅頭䭔子前年別 今日思量空嚥津 持念少嗟歎頻 一百家中無善人 來者祇道覓茶喫 不得茶噇去又嗔
禺中巳 削髮誰知到如此 無端被請作村僧 屈辱飢悽受欲死 胡張三黑李四 恭敬不曾生些子 適來忽爾到門頭 唯道借茶兼借紙
日南午 茶飯輪還無定度 行却南家到北家 果至北家不推註 苦沙鹽大麥醋 蜀黍米飯虀萵苣 唯稱供養不等閑 和尙道心須堅固
日昳未 者回不踐光陰地 曾聞一飽忘百飢 今日老僧身便是 不習禪不論義 鋪箇破蓆日裡睡 想料上方兜率天 也無如此日炙背
晡時申 也有燒香禮拜人 五箇老婆三箇癭 一雙面子黑皴皴 油麻茶實是珍 金剛不用苦張筋 願我來年蠶麥熟 羅喉羅兒與一文
日入酉 除却荒涼更何守 雲水高流定委無 歷寺沙彌鎭常有 出格言不到口 枉續牟尼子孫後 一條拄杖麤楋藜 不但登山兼打狗
黃昏戌 獨坐一間空暗室 陽燄燈光永不逢 眼前純是金州漆 鐘不聞虛度日 唯聞老鼠鬧啾喞 憑何更得有心情 思量念箇波羅蜜
人定亥 門前明月誰人愛 向裏唯愁臥去時 勿箇衣裳著甚蓋 劉維那趙五戒 口頭說善甚奇怪 任儞山僧囊罄空 問著都緣總不會
半夜子 心境何曾得暫止 思量天下出家人 似我住持能有幾 土榻床破蘆䉬 老楡木枕全無被 尊像不燒安息香 灰裏唯聞牛糞氣
다) 거지 왕초의 후계자 선정
거지들은 동정을 최대한 얻어내기 위해 대중들에게 자신의 가난과 빈곤을 드러내야 했다. 늘 그렇듯이 거지들은 잠재적인 기부자들에게 자신들의 곤궁과 궁핍함을 최대한 보여주려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거지가 된 걸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사실 가난을 효과적으로 선전하는 능력은 거지들의 지도자가 갖춰야 할 필수 덕목이었다.
쓰촨[四川] 지방에서 거지 왕초 승계와 관련해 떠도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늙은 거지 왕초가 자신의 ‘자리’를 가장 뛰어난 세 제자들 가운데서 선발해 넘겨주려 했다. 그래서 세 제자를 불러 모아놓고 게송을 지어 바치게 했다.
“밥 한 그릇을 얻어먹을 때 (즉 거지 입장에서 볼 때) 핵심은 ‘가난’이다. 너희는 각자 가난에 대한 시를 한 수씩 지어보도록 해라. 현재 우리가 처한 가난한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한 사람에게 내 자리를 물려주마."
제일 나이 많은 수제자가 앞으로 나아가 먼저 졸렬한 시를 읊었다.
내 음식이라곤 뱃속의 것이 다고,
내 옷이라곤 지금 걸치고 있는 게 다라네.
‘다리를 지붕으로 삼은 저택’에서 살며(즉, 다리 아래에서 살며)
다리가 여덟 개인 침대에서 잔다네(즉, 긴 의자를 두 개 붙여놓고 잔다는 뜻).
늙은 왕초는 인상을 찌푸렸다.
“너는 음식과 옷이 있고, 집과 침대도 있으니 가난하지 않구나."
그러자 두 번째 제자가 나섰다. 그는 거지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내 옷의 일부는 이미 내 뱃속에 들어갔고(음식을 구하려고 옷을 팔았다는 뜻),
지금 나는 음식을 걸치고 있다네(가진 옷마저 먹을 것을 위해 팔 거라는 뜻).
내 옷이 깔 자리이고,
내 옷이 이부자리라네.
이번에도 늙은 거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옷은 다 어디서 났느냐? 그 정도면 옷가게도 차리겠다. 그것 역시 가난이 아니네."
이제 가장 나이 어린 제자의 차례였다. 임기응변이 뛰어난 그는 거지의 삶을 이렇게 읊었다.
나는 천여 호(戶)의 옷을 입고,
나는 만여 호의 곡식을 먹으며,
등뼈를 깔고,
뱃가죽을 덮고 잔다네.
거리의 빈자들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는 없었다. ‘천여 호(戶)’로 부터 빌어먹고 입으며 덮을 것 하나 없이 잠을 청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으랴? 결국 가장 나이 어린 거지가 왕초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 우화 같은 이야기는 거지의 전략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난할수록 좋다는 것이다. 가난을 세인들에게 팔면 팔수록, 연민을 자극하면 할수록 적선을 받을 기회는 더 많아진다.
그러나 중국의 거지들은 그보다는 더 철학적이었다. 오랫동안 그들은 단순한 구걸의 실용 전술을 뛰어넘는 도덕 논리를 개발했다. 그들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대중들에게 구걸할 ‘권리’를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혹은 사회과학적으로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 사회는 어째서 가난한 자들을 책임져야 하고 그들을 도울 의무가 있는가? 이 단순하고 평범한 질문 뒤에는 계급 계층 사회 불평등이라는 고전적인 논쟁이 숨어 있었다. 중국 거지들은 전체적으로 보면 교육도 받지 못했고, 현대에 들어서서도 사회 이론이나 공산주의에 크게 자극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마르크스주의의 계급과 계급 착취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했다.
- <A Cultural History of Chinese Beggars: 중국거지의 문화사>,
한차오 루/김상훈 (성대출판부, 2009)
* 거지, 동냥의 역사
동냥은 인간사에서 가장 오래된 사회현상 가운데 하나다. 중국어로 ‘구걸’이라는 말은 기원전 18세기 초, 갑골문에 처음 나타났고 이후 청동기 시대의 문헌에도 계속해서 등장한다. 기원전 3세기 초의 문헌엔 공공연한 구걸 행위를 묘사하는 기록이 나오고, 현대 중국어로 ‘거지(乞丐)’를 뜻하는 용어가 처음 나타난 건 송나라 초기다. 시간이 흐를수록 거지들은 중국 사회에서 점점 더 뚜렷한 존재가 되었고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 시대가 되면 동냥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멸시를 받았지만 직업화되었다. 구걸의 편재화는 인민공화국이 건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20세기 초에 일어난 도시 개혁과 신해혁명도 동냥문화를 바꾸진 못했다.
* 거지 문화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
중국의 영웅 열전에서는 세 인물의 방랑 생활이 가장 유명한데 이들은 거지들에게서 널리 추앙받았다. 복수를 향한 끈질긴 일념으로 유명한 기원전 5세기의 책사 오자서(伍子胥), 한나라 최고의 장수였던 한신(韓信), 그리고 명나라를 개국한 황제 주원장이 그들이다.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주원장은 16세 때 고향을 떠나 3년 동안 7개 현을 떠돌며 구걸로 연명하다 끝내 황제가 되었고, 한신은 젊은 시절 유랑걸식하다 백정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굴욕을 당했지만 후에 한(漢) 왕조를 세우는 데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오자서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저잣거리에서 피리를 불며 구걸하는 등 역경을 딛고 마침내 복수에 성공했다.
근세로 와서 거지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만년에 거지생활로 모은 돈으로 학교를 세웠던 중국 거지계의 모범적이고 전설적인 인물로 우순이 있다.
(<중국거지의 문화사> 283쪽 참조)
2. 나눔 자료: 부자와 거지에 대하여
가) 부자 사례1: 최 부잣집 300년 지속된 부의 비밀
評: 그저 부자 명문가가 아닌, 가히 모범적인 재가수행공동체라 일컬을 수 있다.
특히, 신입 수행자인 갓 시집온 며느리들을 3년간 검소한 삶을 살게 한 규칙은
300년간 부를 이어오게 한 핵심 원동력이라 판단된다.
나) 미국 부자 사례 2: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 (Andrew Carnegie)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써라.’라는 속담을 제대로 실천한 기업가. 철강회사를 운영할 때는 노동자를 마른 수건처럼 쥐어짜는 ‘악덕 기업주’였지만 말년에는 천문학적인 재산을 사회에 나눠준 ‘사회사업가’였다.
“성공에는 어떤 속임수도 없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통장에 많은 돈을 남기고 죽는 것처럼 치욕적인 인생은 없다.”
그의 저서 <부의 복음>을 통해 한 말이다. 그는 부의 사회 환원이 부자들의 신성한 의무임을 몸소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화신이었다.
참고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높은 신분, 강력한 사회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지위에 걸맞도록 명예롭게, 친절하게, 너그럽게 행동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1835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가난한 직공의 아들로 태어난 카네기는 1848년 가족과 미국으로 이민해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의 슬럼가에 정착한다. 13세부터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1853년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취직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리게 된다. 남북전쟁 이후 철강 수요의 증대를 예견한 그는 철도회사를 사직한 뒤 철강 사업에 뛰어든다. 때마침 철도시대가 열리면서 철강 산업이 대호황을 누리기 시작했고, 그의 사업도 승승장구해 1892년에는 세계 최대의 철강 트러스트인 카네기 철강회사를 설립했다. 66세가 되던 1901년 카네기는 나중에 US스틸이 되는 자신의 철강회사를 JP모건에 5억 달러에 매각한 다음 1919년 8월11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18년간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뉴욕에 900만 달러를 기부해 공공도서관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전 세계에 2509개의 도서관을 지었다. 또 미국의 과학발전을 위해 카네기 멜론 대, 시카고 대학 등 12개 종합대학과 12개 단과대학을 지어 사회에 기증했으며 각종 문화예술 분야에 거액을 쾌척했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 90%가량에 이르는 3억500만 달러(2005년 가치 43억 달러)를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그는 “많은 유산은 의타심과 나약함을 유발하고, 비창조적인 삶을 살게 한다.” 는 이유에서 부의 대물림을 혐오해, 아들에게 돈을 물려주는 것은 저주나 다름없으며 부자로 죽는 것은 불명예스럽다고 여겼다. 참고로 84세로 사망했을 때 남은 재산은 2천500만 달러뿐이었다.
‘여기, 자기보다 우수한 사람을 거느렸던 사람이 누워 있노라’: 묘비에 새긴 글
카네기의 자선활동은 ‘천민자본주의’의 본산 격이던 20세기 초 미국사회를 성숙시키는 데 일조했다. 미국에서 5만6000여개의 자선재단이 활동하고, 빌 게이츠 등 기업가들이 재산의 대부분을 자선활동에 쓰는 등 ‘기부 자본주의’가 미국에서 꽃피게 되는데 카네기의 영향은 지대했다.
- 경향신문 서의동 기자 기사를 중심으로 작성
評: 재벌들뿐만 아니라 중산층까지도 포함해 불법적으로 부의 대물림을 관행으로 생각하는 우리 모두 깊이 성찰할 주제라 판단된다.
다) 영국 부자 사례 3: 윈스턴 처칠과 알렉산더 플레밍
영국의 한 부잣집 소년이 부모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한 시골에 갔습니다. 영국 소년이 거기서 수영을 하다가 익사할 위기에 처했을 때, 부근에서 일하던 시골 소년이 영국 소년을 물에 뛰어 들어서 구해냈습니다. 영국 소년이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그 시골 소년에게 가서 그 시골 소년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해라고 했습니다. 시골소년에게 가서 소원을 물었더니 시골 소년의 소원은 의학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소년의 아버지는 그 시골 소년이 의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후원을 해 주었습니다.
이 소년은 그 덕분에 의학공부에 매진하여 드디어 노벨의학상까지 받았는데, 이 사람이 페니실린을 발명한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 그리고 그 소년을 도와준 영국 부잣집 아들은 훗날 유명한 수상이 된 처칠 수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칠 수상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소련 스탈린과 회담을 하기 위하여 소련에 갔다가 폐렴이 걸려 심한 고통 속에 죽음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으나, 플레밍이 발명한 페니실린으로 완치가 되었습니다.
評: 이처럼 세상은 서로 도우며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
라) 한국 거지 사례: 최귀동(베드로) 할아버지
최할아버지가 40여 년 동안 무극천 다리 밑에서 40여 년 동안 남는 밥만 얻어먹다가 사랑을 실천하던 중 1976년 9월 10일 무극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오웅진 신부와 만나다. 어느 날 동네 사람들에 의해 다리 밑에서 쫓겨나 용담산 밑에 움막을 치고 생활하게 된다. 움막 안에는 얻어먹을 힘조차 없어 죽어가는 분들이 18명 살고 있었다. 이 움막 삶의 현장을 목격한 오 신부는 주머닛돈 1,300원을 몽땅 털어 시멘트 한 포대를 사서 손수 벽돌을 찍어 76년 10월 5일 교우들과 함께 기공식을 가진 후 76년 11월 15일 다섯 칸 부엌 다섯 칸의 건물에 이들을 입주시킨다.
가톨릭 대상 (사랑부문) 수상
무극에서 부잣집 귀한 아들로 태어나 날 때부터 귀동이라 불렸던 대장부가 일본 징용으로 끌려가 심한 고문 끝에 정신병을 얻어 고국에 돌아와 보니 그동안 부모님들은 아편 중독으로 돌아가시고 가정은 파산되어 갈 곳조차 없게 되어 무극다리 밑에 거처를 정하고 살면서 오갈 데 없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어 죽어가는 걸인들을 위하여 40여 년간 남는 밥만 얻어 그들에게 나눠주었고, 죽으면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 숭고한 사랑의 실천으로 86.2.15 가톨릭 대상(사랑부문)을 수상했으며, 부상으로 120만원을 받았다.
이에 따른 축하잔치가 2.16 무극성당에서 있었는데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 노건일도지사, 사단장, 교육감등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무극국교 어린이 고적대의 밴드에 맞추어 카퍼레이드 후 주민들과 함께 축하식을 가졌다.
축하식을 가지던 날.
"오 신부 : 할아버지 그 돈 뭐 하실래요?"
"최 할아버지 : 집 없는 사람 집 지어 줘야지 다른 것 할 것 있나?"
이렇게 하여 죽을 곳도 없는 가장 어려운 임종환자들에게 필요한 집을 지어 달라고 오 신부에게 그 돈을 맡기셨다. 86년 10월 15일 결핵요양원 준공식 날 행상에 참석한 5만여 명의 회원님들과 뜻을 모아 이 집을 짓기로 다짐하고 노인요양원 기공식을 가졌다. 1987년 10월 15일 최 할아버지의 마지막 소망인 노인요양원(1200평)이 준공식을 가졌다. 88년 5월 요양원이 개원되면서 할아버지는 당신 사랑으로 지어진 노인요양원에서 생활하시다 1990년 1월 4일 오후 1시 15분 평소 지병인 혈압이 재발하여 인곡자애병원에 모셔진 할아버지는 "인명은 하늘에 달려 있어" 이 한마디 조용히 남기고 떠나셨다. 또한 1984년 2월 28일자로 눈 못 보는 형제를 위해 사망 후 안구를 기증한다는 유서를 남겨 27세 된 젊은 청년이 눈을 보게 되었다. 장례식은 1월 8일 오후 2시 3,000여명의 꽃동네 회원과 꽃동네 가족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청와대 김옥숙 영부인이 보낸 조화와 국무위원, 충남북도지사, 군수님이 보낸 조화 속에 묻혀 명복을 비는 기도 소리를 들으며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라고 새겨진 바위 밑에 고이 인장되었다. 이제 최귀동 할아버지는 영원한 꽃동네 사람으로 모든 이의 가슴마다 남게 되었다. 1991년 1주기에는 그 분의 뜻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만들고 회원님들이 보내준 부의금으로 2.5m 높이의 동상을 만들어 제막식을 가졌다.
評: 최 할아버지 같은 극빈자도 거동이 불편한 그 보다 더한 극빈자를 돕는 마당에 보통 사람들은 얼마나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은, 복 받은 사람들인지 각자의 현 위치를 다시 한 번 깊이 성찰해 볼 일이라 판단된다.
마) 최근 한국 부자의 기부 사례: 서전농원 김병호 회장
"아들아, 네게 줄 건 없다"
이쑤시개까지 아꼈으며 평생 모은 300억대 땅 KAIST에 발전기금 기부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서전농원 김병호(金炳鎬·68) 회장이 KAIST에 300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발전기금으로 기부키로 하고 12일 KAIST 대강당 세미나실에서 '발전기금 약정식'을 가졌다.
김 회장이 내놓기로 한 부동산은 평생 땀 흘려 모은 재산 가운데 대부분인 경기도 용인시 일원 임야·전답 등 26필지(9만4563㎡). KAIST는 김 회장과 협의해 발전기금 용처를 정할 방침이다. 또 김 회장 부부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신축될 IT융합센터 건물을 가칭 '김병호 IT융합센터'로 이름 붙이기로 했다.
김 회장은 "외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교육은 시켜주겠지만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말라'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해왔다."
김 회장은 "17세에 76원을 들고 상경해 서울에서 식당일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일하고 무섭게 절약했다"며 "무더운 여름날 1원을 아끼려고 남들이 다 사먹는 사카린 음료수조차 먹지 않았다"고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했다.
상경해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고 일에 매달렸고, 각고의 노력 끝에 1988년 경기도 용인에 농장 터를 구입해 20여 년 동안 농장을 운영해왔다.
이토록 어려운 환경에서도 김 회장의 형제간 우애와 교육에 대한 신념은 남달랐다. 7남매 중 장남으로 동생들 학업을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본인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적이 없었다. 1987년 부친상을 치르고 남은 부의금을 친척 자녀들의 등록금으로 내놓았다. 또 자신처럼 교육 혜택을 받지 못한 후학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고향인 전북 부안군 '나누미 근농 장학재단'에 2005년 10억 원의 장학금을 쾌척하기도 했다.
'부지런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다'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는 김 회장은 "'버는 것은 기술이요, 쓰는 것은 예술이다'라는 말을 좋아한다."며 "돈을 후학 양성에 보태는 것은 전혀 아깝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 모은 재산을 아무 연고도 없는 KAIST에 선뜻 기증하게 된 계기에 대해 "신문과 방송에서 학교 개혁에 앞장서고 자신의 강의료와 상금까지 학교에 기증하는 서남표 총장의 모습을 보고 '이 분에겐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김 회장의 아들 세윤 씨는 지금도 매달 일정액을 유니세프 등에 후원금으로 내고 있다.
* 참고: 우리나라 부자의 피상적 기준 (2009년 7월 현재)
우리 국민들이 ‘부자’라고 생각하는 재산 보유 기준이 지난해보다 5억 원 가량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한길리서치연구소는 지난 25∼26일 전국 19세 이상 성인 1000명을 상대로 전화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현금과 부동산, 주식 등을 합쳐 30억2400만원을 보유하면 ‘부자로 볼 수 있다’고 답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29일 밝혔다. 우리나라 부자 기준은 지난 2006년에는 20억3000만원, 2007년에는 27억6000만원, 2008년에는 35억870만원으로 해마다 높아지는 추세였으나 올해에는 5억 원 가량 떨어졌다. 한길리서치연구소는 “경제 위기로 인해 일반 국민이 생각하는 부자의 자산 기준이 낮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評: 부자를 단순히 돈으로만 계량화해 부자의 역할 강조가 아쉬운 기사라고 판단된다.
마무리하는 글
늘 말씀 드리지만 수레가 제 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수레바퀴 두 개가 조화를 이루며 제대로 작동해야만 가능하듯이 통찰과 나눔은 平常心是道인 진리 체득과 꿈의 실현을 위한 두 개의 법륜(法輪)이다. 향상다로(向上多路) 가운데 각자 기틀에 맞는 한 길[우열 없는 자기만의 향상일로向上一路, 즉, 간화선 수행을 바탕으로 각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치열한 삶]을 통해 무심히 함께 나누며 걷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이원적 분별에 의한 비교 대상이 아닌, 여러분 각자 자신만의 꿈이 실현되었음을 인득(認得)하는 때가 도래하리라!
선도(성찰나눔실천)회 지도법사 法境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