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면서 머리칼이 더디 자라기는 해도 역시 자라기에 뒷머리 꽁무니가 제비꼬리처럼 양 옆으로 갈라졌다. 이발소에-파란 구락부로 번역되어 셜록 홈즈의 모험 중 "붉은 머리 구락부"를 연상시키는 간판을 붙인 -곳에 가서 팔 천원 짜리 머리를 깎는다.
조발만 해달라고 부탁할 때마다 고교 영어시간에 공부한 유모어가 생각난다. 화자도 나처럼 저렴한 기본적 조발만 해달라고 한다. 이발사가 날카로운 가위로 머리칼을 손질하며 동네 친구와 대화한다. "자네 그 소문 들었나? 건너 마을 이발사 잭이 사고를 냈다는군. 장사는 전혀 안되지, 간혹 오는 손님마다 조발만 하라고 하지, 스트레스가 잔뜩 쌓였는데 어느 날 손님이 또 머리만 깎겠다고 하니깐 그만 머리가 획 돌아가지고 가위로 푹 찔렀다나 면도칼로 그었다나 그랬대. 쯧쯧! 손님, 정말 면도는 안하시겠어요?" 화자는 황급히 대답했다. "해야죠! 해주세요! 제발!"
그러나 오늘은 며칠 전에 본 추억의 명화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오드리 햅번 공주가 미장원에 들어가 긴 머리를 짧게 컷하는 장면이다. 차마 뭉텅 짜르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하고 요만큼요? 요만큼요? 하면서 조금씩 위로 집으며 올라가는 미용사의 섬세한 마음씀이 마음에 든다. 정작 어깨를 지나는 머리칼을 상고머리보다 짧게 짤라달라고 주문하는 공주 본인은 태연자약한데, 머리결에 가위를 들이대는 미용사는 마치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사내같은 표정이다.
그 미용사는 왜 그렇게 한 손님의 단발에 신경을 썼는가? 답은 손님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는 데 있다. 기자 그레고리 펙이 공주에게 준 돈은 미화로 2달러정도였으니까 아무리 당시 달러가치가 높았다고 해도 커트값이 대단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니 그 미용사는 돈이나 직업적 양심때문이 아니라 공주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그렇게 신경을 쓴 것이다. 아마 단골도 아닌 못생긴 아가씨가 긴 머리를 짤라 달라고 했으면 선뜩 단번에 길게 잘라 가발가게에 팔아버릴 생각을 했으리라. 참!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영원한 의문부호다.
내 머리를 깎는 여자 이발사는 그저 묵묵히 기계적으로 손을 놀린다. 만약 그레고리 펙같은 장년의 미남 신사가 머리를 빡빡 밀어달라고 주문을 하면 이발사는 놀라서 까닭을 묻고 주저할 터이다. 여러 스타일의 두발 카다로그를 보여주며 재고하라고 권유할 것이 틀림없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이 이발사에게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라고 주문을 하면 어찌 됄까? 아무 주저없이 기계로 밀어버릴 것이 확실하다. 나의 생김새가 아름다움의 언저리에도 가까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잠시 내 나이에 아름다운 남자라는 개념이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러리라고 내 자신을 위로하지만, 이내 늙어도 품위가 있고 원숙한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있음을 상기해내고 그런 분들이 머리를 밀어달라고 하면 이발사가 놀라리라고 짐작하게 되면서 얼굴을 가꾸지 못하고 살아온 내 인생이 후회되어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머리를 깎고 목욕하고 구두를 닦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샤워한 후 구두나 닦아 볼까? 행복해지는지(끝)
첫댓글 소생도 오늘 이발했습니다. 소생이 가는 이발소의 이발사는 50대 중반의 여자이발사인데 남편이 독일 Frankfurt 에 주재원으로 갈때 이발 기술을 배워 따라갔었다고 합니다.
오드리는 영화에서 공주 같은 겉 보기 와 달리, 어릴 때 아버지에게 버림 받고 전시에 굶주려 깡마르고, 영화에 출연 스타가 되었으나, 결혼에 실패하고, 말년에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굶주린 아동들에 봉사활동을 하다 인생의 보람을 찾았다는 인간승리의 모범을 보여 존경을 받았다니, 인생은 참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