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시작말
지난 새해 칼럼에서 ‘교육 30년지대계’ 논의를 시작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30년이라고 잡은 이유는 병든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 새로운 시스템을 논의하고, 합의하며, 검증을 통해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30년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다. 병든 교육은 병든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병든 사회를 회복시키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어떤 학자는 “교육은 그 사회의 문화에 기반을 두고 정치적으로 관리된다(Education is based culturally and administered politically).”고 했다. 참 맞는 말이다. 한 사회의 가치관, 직업관, 신념, 삶의 관이 바뀌고 정치가 바뀌기 위해서 30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교육 30년지대계, 무엇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할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아래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문제를 제대로 정의할 수 있다면 이미 해답의 반은 찾은 것이나 다름없다.
“만일 나의 생명이나 삶이 걸린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첫 55분을 문제해결을 위한 질문의 구상에 쓰겠다. 적합한 질문만 도출할 수 있으면 나는 그 문제를 5분 내에 풀 수 있기 때문이다(아인슈타인).”
만약 아인슈타인이 살아있어 그에게 한국의 교육문제의 해법을 부탁한다면 그는 어떤 질문을 먼저 떠올릴까? 아마도 아래와 같은 질문부터 던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
“무엇을 위한 평가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잠시만 생각해보면 한국의 교육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금방 답이 나올 것 같다. 오늘의 칼럼 주제인 ‘학력(achievement, 學力)’도 두 번째 질문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에 관련된다.
한국의 공교육이 직면한 문제는 실타래처럼 얽힌 복잡계다. 그래서 문제의 진단도 이해당사자들마다 다르다. 현재 학교교육에는 수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 중에서 ‘학력’에 대한 정의 바로 세우기부터 시작했으면 한다. 학교교육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학력인가? 인성인가? 시민의식인가? 인성과 시민의식은 ‘학력’에 포함되지 않는가? ‘학력’이란 과연 어떤 의미인가?
아래 4가지 질문을 통해 한국의 학교교육이 지향해야 할 ‘학력’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다.
• 한국 사회에서 ‘학력’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나?
• 외국에서 ‘학력’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나?
• ‘학력’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 ‘학력’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는가?
2. 한국 사회에서 학력(achievement, 學力)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나?
네이버 지식백과에 의하면 ‘학력(achievement, 學力)’이란 ‘학교나 여타 교육기관에서 일정기간 특정 교과목을 학습해서 얻은 지식·기능의 양이나 정도를 말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학력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에 가깝다. 한국의 언론에서는 학력을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지 보자.
다음은 “혁신학교 1/3이 일반학교보다 학력 떨어져”란 주제에 대한 인터넷 댓글이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다양한 활동위주의 창의적 수업을 실시하면 굉장히 시간이 많이 소비됩니다. 일반학교의 진도는 절대 못 따라가죠. 결국 교육과정 중의 필수적인 부분만 선택적으로 수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면 결국 지필고사 중심의 학력 측정에선 뒤처질 수밖에요(블루노팀. 2014/06/15).”
“솔직히 ‘학력평가’라는 거에 목매는 게 우리 교육을 망친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잣까마귀님. 2014/6/15).”
“KEDI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초·중·고교에 걸쳐 혁신학교가 일반학교에 비해 학력이 떨어진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뉴데일리. 2014/04/04).”
“서울대에 지역균형선발 등의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이 초반에는 학업성취도가 낮은 편이지만 졸업 학점은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서울경제. 2013/10/27).”
이상의 예에서 보듯이 한국에서는 ‘학력’, ‘학업성취도’는 예외없이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일제고사)나 수능성적과 같은 표준화시험 성적을 가리키고 있다. 실천을 통해 민주주의를 배우고, 타인을 배려하면서 공동체 정신을 배우는 것, 삶의 기술(life skills)을 배우는 것, 다양한 비교과 활동을 통해 사회성·감성 지능을 높이는 것 등은 학력에 포함되지 않는다. 전통적인 학력은 사회인으로서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데 그 영향력이 1/3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회성, 감성 지능 지수를 높이고 공감능력을 키우는 것이 사회인으로 성공적으로 또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훨씬 더 중요하다. 어쩌다가 한국은 학교교육의 핵심 기능을 문제풀이 성적으로만 규정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는가?
3. 외국에서는 ‘학력’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나?
외국의 경우 ‘학력’ 혹은 ‘학업성취도’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1) 위키피디아에서 ‘학력(academic achievement)’이란 항목을 검색해 보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학력 혹은 학업성취는 교육의 결과를 말하며 학교 교육의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는가를 나타낸다. 학업성취도는 시험이나 지속적 형성평가를 통해 측정하며, 기능과 같은 절차적 지식(procedural knowledge)과 사실적인 선언적 지식(declarative knowledge)이 대표적인 예며, 이들을 각각 어떻게 평가하고 어떤 측면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합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키피디아의 학력의 정의는 한국의 그것과 다른 점들이 있다. 우선 학력을 ‘학교교육의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학력’이란 것을 시험성적 정도로 좁게 정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지식의 활용이나 내재화를 말하는 ‘절차적 지식’은 한국의 학교교육에서는 매우 제한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지속적인 형성평가를 통해 측정’이란 요소도 매우 중요하지만 한국의 학교교육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2) 학업성취도
다음은 미국 학교교육을 중심으로 한 ‘학업성취도’에 대한 정의다.
“교육과정이나 교육개혁운동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교육의 목표는 학생들의 성취도를 높이고, 개인의 지식수준을 높이며 미래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주나 연방정부의 책무성 관리 제도는 성취도 관리를 위해 표준화시험의 의존도를 높였다. 주나 연방 수준에서의 평가는 흔히 핵심 교과목의 학업성취도를 측정한다.”
http://toolbox.gpee.org/fileadmin/files/images/Tool_Box_Images/Toolbox_Research/Student_Achievement_pdf_formatted.pdf
‘학업성취도’에 대한 위의 정의는 전통적인 학업성취도와 함께 미래 사회인으로 살아갈 때 필요한 준비를 학교교육의 역할로 명시하고 있다. 미국 사회에서의 학력은 핵심 교과목의 학업성취도이고 국가의 책무성 관리를 위한 수단화되고 있다는 점은 한국과 빼닮았다. 학교교육의 목표를 ‘개인의 지식수준을 높이며 미래 사회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점에서는 오직 입시교육에만 매몰되어 있는 한국의 현실보다 건강하다고 생각된다.
3) 영국의 초등학교가 지향하는 ‘학력’ (국가 교육과정상의 교과, 2009)
영국의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핵심교과와 기초교과 총 13개의 교과로 구성된다.
(출처: 한국 공교육 미래방향 제안, 교육을바꾸는사람들 발행. 2013. 91쪽)
시민성(citizenship), 개인적‧사회적‧건강교육(PSHE) 등은 영국 학교의 독특한 교과로 보인다. 범교과적 학습영역에는 역량은 물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교육까지 규정하고 있어 학력의 정의가 매우 바람직해 보인다.
4) 일본의 ‘신학력’
2010년에 재개정된 지도요록에 의하면 일본은 교육의 목표를 아래와 같이 전통적인 지식의 이해와 기능을 넘어 정의적 영역(관심·의욕·태도)과 사고력·판단력·표현력을 강조하고 있다.
‘관심·의욕·태도’
‘사고·판단·표현’
‘기능’
‘지식·이해’
(다나카 코오지, 2013)
블룸의 교육목표 분류표를 연상시키며, 매우 바람직해 보이지만 ‘지식·이해’ 이외의 영역의 측정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OECD DeSeCo 프로젝트가 제시하는 ‘역량’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많은 나라들은 전통적인 지식 중심의 학력 혹은 학업성취도 정의에서 역량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성공적인 직장생활, 사회생활, 민주적 절차 이행을 위해서 즉 평생학습 차원에서’ 필요한 역량을 정의·선정하고, 평가 전략을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한 OECD DeSeCo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예다.
‘세상은 세계화와 현대화로 인해 점점 더 다양해지고 상호연결이 강화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고, 세상이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개인은 변화하는 기술을 익히고, 대량의 정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또 그들은 경제성장과 환경적 지속가능성이, 또 번영과 사회적 형평성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할 집단적 도전을 마주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개인이 필요로 하는 역량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좁게 정의된 기능(skills) 몇 가지를 터득하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DeSeCo 연구 요약, 2005)
OECD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성공적인 삶, 제대로 기능을 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역량으로 3가지 영역에서 9가지를 추출하였다.
[표1] DeSeCo 프로젝트가 도출한 핵심역량
핵심역량 | 하위역량 |
1. 도구를 상호작용적으로 활용하는 능력(Use tools interactively) | ① 언어, 상징, 텍스트 등 다양한 소통 도구 활용 능력 ② 지식과 정보를 상호작용적으로 활용하는 능력 ③ 새로운 테크놀로지 활용 능력 |
2. 이질적인 집단 속에서의 사회적 상호작용 능력(Interact in heterogeneous groups) | ④ 협업/협동능력 ⑤ 인간관계 능력 ⑥ 갈등 관리 및 해결 능력 |
3. 자신의 삶을 자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능력(Act autonomously) | ⑦ 사회/경제적 규범 등 주변 큰 환경을 고려하면서 행동하고 판단하는 능력 ⑧ 자신의 인생계획, 프로젝트를 구상·실행하는 능력 ⑨ 자신의 권리, 필요 등을 옹호·주장하는 능력 |
(출처: http://www.oecd.org/pisa/35070367.pdf)
DeSeCo 프로젝트가 추출한 9가지 핵심역량은 주로 개인에 관계된 것이지만 아래 도표처럼 개인의 역량의 합은 공유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제도적 역량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표2] DeSeCo 프로젝트 역량 도출 배경
(출처: http://www.oecd.org/pisa/35070367.pdf)
민주적 절차, 사회적 통합, 공정, 생태학적 지속가능성 등과 같은 공동 목표에 기여할 수 있는 역량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한국의 학교교육도 이런 차원의 교육목표를 지향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4. ‘학력’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
학력에 대한 정의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주요과목의 학업성취도를 말하고, 다른 하나는 전인적 성장, 사회의 지속가능성 등을 두루 감안한 교육의 성과를 말한다. 이 둘은 어떤 하나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차원의 것이 아니다. 둘 다 중요하다. 한국의 경우 지나치게 전자에 머물고 있으며 그것조차 질이 매우 낮다는 것이 문제다.
한국의 경우 타국에 비해 학력에 대한 통념과 인식에 있어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가? 몇 가지 대표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잘못된 ‘학력관’이 형성되어 있고 이것이 한국 교육을 망치고 있다.
한국에서의 ‘학력’은 시험성적이다. 개인이든, 학교든 학력은 오직 대입에서 얼마나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가로 판정된다. 따라서 좋은 교육은 대입시에서 높은 성적을 얻는 일이고, 좋은 학교는 입시중심 교육을 잘 시키는 곳이다. ‘학력’을 이렇게 받아들이는 한 한국의 학교교육은 사교육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2) ‘학력’ 평가의 기능이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육을 본질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형성평가는 학습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이를 통해 학습자가 목표에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으며 피드백을 통해 학습자의 약점을 보완해 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는 학습의 과정으로서의 형성평가는 찾아보기 어렵고, 줄세우기 위한 상대평가 성격의 총괄평가만 강력하다.
타국의 경우, 표준화 시험을 통해 학력을 측정하더라도 논서술형이 포함되고 절대평가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한국은 객관식 위주의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교육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다. 평가가 교육의 질을 높이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망치는 데 기여하고 있다.
3) ‘학력’에 대해 2중 잣대를 사용한다.
학교의 성과나 제도의 장단점을 논할 때 학력의 기준이 매우 자의적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혁신학교를 비판할 때다. 혁신학교는 일반학교에 비해 ‘학력’이 떨어진다고 비난한다. 이때는 학교교육의 질을 시험성적으로만 평가한다. 하지만 이런 분들(혹은 언론)도 학교교육의 바람직한 방향을 논할 때는 전인적 교육을 적극 찬성한다. 빡세게 공부만 시키지 않고 문화예술 활동, 체험활동, 협동학습, 봉사활동을 하는 것을 적극 지지하다. 아울러 문제풀이 교육을 비난한다. 객관식 위주 시험문제만 푸는 교육보다는 논서술형 평가(혁신학교가 중요시하는 평가)를 지지한다. 정답이 하나뿐인 문제만 풀지 않고 정답이 여럿인 문제해결 활동을 좋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런 수업과 학습을 지향하는 혁신학교를 평가할 때 오직 표준화시험의 학과성적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것이다. 혁신학교가 전인적 성장을 추구하는 경우, 단기적으로는 일제고사 성적이 그렇지 않은 학교에 비해 낮을 수밖에 없다. 진정한 ‘학력’은 표준화시험 성적을 말하지 않는다. 누구도 ‘학력’에 대해 2중 잣대를 들이대는 자기모순을 범하지 말았으면 한다.
4) 한국의 ‘학력’은 정의적 영역과 역량을 포함하지 않는다.
정의적 영역과 역량은 일반 지식의 습득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의 표준화시험은 이를 평가하지 못한다. 미국의 차세대 평가, PISA 2015 등에서는 역량을 평가할 수 있는 평가도구를 개발했지만 한국은 이런 투자를 하고 있지 않다.
5) 한국의 ‘학력’은 민주주의의 실천을 배우고, 책임있는 시민의식을 키우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입시위주의 교육에서는 이런 교육이 발을 붙일 여지가 없다. 이런 상황을 그대로 두고 최근 ‘시민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것도 한심한 말장난에 불과하다.
6) 한국의 ‘학력’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가르치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상대평가를 통해 현재와 같이 끊임없이 동료와 경쟁해야 하며 동료를 이겨야 내가 산다는 식의 교육으로는 건강한 민주시민을 키우고 더불어 사는 삶을 가르칠 수 없다.
7) 한국의 ‘학력’은 고등사고능력을 키우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수업에서 교사가 중심이 되는 교육으로는 사고력을 키울 수 없다. 정답이 하나뿐인 문제로 정답만 찾게 하는 교육으로는 창의력과 문제해결력을 키울 수 없다. 교사가 씹어서 넣어주는 교육, 스스로 사고하고 실패하면서 실패로부터 배우게 하지 않는 교육은 죽은 교육이다. Teaching이란 용어를 당분간 추방해야 한다. 학습자를 Learning의 주체로 세워야 한다. 이런 변화만이 ‘학력’을 담보할 수 있다.
8) 한국의 ‘학력’ 신장은 소수만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매우 야만적이다.
한국의 학교교육은 매우 야만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특히 중고교가 그렇다. 출발선이 불리하거나 다른 이유로 기초를 잃은 아동들은 방치하고 일찍이 선행 사교육을 받아서 학교 진도빼기 수업을 따라올 수 있는 아동들 위주로 수업이 진행된다. 학교가 불리한 출발선을 고르게 해서 모두가 결승점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는 버리고 강자만 끌고 가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방과 조기개입, 그리고 질높은 보편적 학습설계(UDL)를 도입해서 이런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
또 기초학력보장 정책을 통해 학습부진을 겪고 있는 아동들에게 문제풀이를 반복적으로 강요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이를 강요하기 전에 그런 행위가 아동의 미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숙고해봐야 한다. 아인슈타인에게 부탁하면 그는 “누구를 위한 평가인가?;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란 질문을 떠올릴 것 같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이 질문 속의 ‘누구’는 학습자가 아니라 ‘정부’와 ‘교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5. ‘학력’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는가?
학력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이 교육과정이 추구하는 인재상과 학교급별 교육목표를 제대로 실천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공교육 정상화의 본질이기도 하다.
2009 개정 교육과정은 추구하는 인간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추구하는 인간상>
가. 전인적 성장의 기반 위에 개성의 발달과 진로를 개척하는 사람
나. 기초 능력의 바탕 위에 새로운 발상과 도전으로 창의성을 발휘하는 사람
다. 문화적 소양과 다원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품격 있는 삶을 영위하는 사람
라. 세계와 소통하는 시민으로서 배려와 나눔의 정신으로 공동체 발전에 참여하는 사람
교육과정의 인재상인지라 다소 추상적이고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평생학습능력, 비판적 사고력, 정보통신기술 사용 소양, 문제해결능력, 사회성·감성 능력, 적응능력, 삶의 기술(life skills) 등 21세기를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기능이나 역량 등이 좀 더 명시적으로 표현될 필요는 있으나 크게 손색은 없다고 생각된다.
2009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위에서 논의한 교육적 인간상을 구현하기 위해 초·중·고교 학교급별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2009 개정 교육과정의 고등학교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고등학교 교육목표>
고등학교 교육은 중학교 교육의 성과를 바탕으로, 학생의 적성과 소질에 맞는 진로 개척 능력과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는데 중점을 둔다.
(1) 성숙한 자아의식을 토대로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기능을 익혀 진로를 개척하며 평생학습의 기본 역량과 태도를 갖춘다.
(2) 학습과 생활에서 새로운 이해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과 태도를 익힌다.
(3) 우리의 문화를 향유하고 다양한 문화와 가치를 수용할 수 있는 자질과 태도를 갖춘다.
(4) 국가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며,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질과 태도를 기른다.
교육과정의 내용만 보면 나름 ‘학력’에 대한 정의가 제대로 정의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실천하지 않거나 작동되기 어려운 현실 여건이 문제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은 중앙정부가 문제풀이식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EBS 70% 연계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정부의 한심한 교육철학과 정책이 지속되는 한 한국의 교육과정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학력’에 대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을 깨고 진정한 학력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울러 ‘지식’에 대한 새로운 정의나 인식도 필요하다. 한국의 교육과정은 구성주의를 지향하면서도 실제 평가는 지식의 습득을 위주로 하는 인지주의식으로 한다. 이는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지식’에 대해서도 아래와 같은 새로운 정의를 받아들이고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지식에 대한 정의가 현재처럼 지식의 습득에 머문다면 진정한 ‘학력’도 공염불이 된다.
▷21세기 지식이란?
• 지식은 과정이며 독립된 것으로 존재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 지식은 학습자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또한 행하는 것이다.
• 지식은 전문가 개인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아니라 팀을 이루어 혹은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만들어 내는 것이다.
• 지식은 교과별로 명확한 경계를 갖는 학문으로 정리될 수 없다. 지식은 매일 새롭게 창조되고 끊임없이 융합하면서 확장되어 가기 때문이다.
• 지식은 필요한 순간 스스로 탐구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지 미래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배워두는 것이 아니다.
• 지식은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거나 재구축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저장해두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출처: http://www.galileo.org/initiatives/leaders/presentations/leaders.ppt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사회에서의 ‘학력’에 대한 왜곡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따라서 학력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학력’이 아닌 것을 ‘학력’이라 부르는 일부터 중단해야 한다. ‘학력=시험성적’의 공식을 깨야 한다. ‘시험성적=실력’의 인식도 버려야 한다. EBS 문제를 암기해서 얻은 ‘성적’을 어떻게 ‘실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학교에서 혹은 학원에서 시험문제 풀이요령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은 매우 비정상이다. 이를 정상으로 되돌려야 한다. 학교가 대입시 준비를 위해 시험문제 풀이를 하는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영국이나 프랑스도 고교과정에서 대입시 준비는 한다. 그러나 한국처럼 객관식 문제 풀이 기술을 익히는 것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들의 시험은 논서술형이 일반적이다. 한국의 정책결정자, 정치가, 교육자, 교사, 학부모, 언론 모두 나서서 문제풀이 훈련을 ‘교육’이라 부르고 시험성적을 ‘학력’이라 부르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교육적 가치가 작은 입시중심의 교육에만 매달리는 학교는 고발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를 방치하고 방조하는 교육부는 징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선 언론들부터 표준화시험 성적을 ‘학력’이라고 부르는 일을 중단했으면 한다. 그리고 학교를 그런 표준화시험 성적순으로 서열을 매겨 발표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도 학교교육의 질을 평가하거나 책무성을 관리할 때 시험성적으로 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의도치 않게 언론과 정부가 학력의 의미를 왜곡하고 이를 강화해 왔다는 점을 깊이 성찰하고 이의 중단을 선언해야 한다.
6. 맺음말
지난 1월 7일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중앙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심히 우려스럽다. 그는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교육이 필요한 만큼 인성교육과 직업교육을 강화하겠다.”
아이들이 행복감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들에게 먼저 물어봐야 한다. 그들은 인성교육을 원하지 않는다.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인성은 학교, 가정, 사회에서 어른들로부터 배웠다. 어른들이 좋은 인성의 모델이 되어 주지 못한 것이다. 아이들을 변화의 대상으로 삼는 인성교육은 실패하거나 효과가 매우 미미하다. 관련 연구나 미국의 시도가 실패한 것만 봐도 자명하다. 사회인의 인성, 정치가의 인성, 부모의 인성, 교사의 인성이 우선 변해야 한다. 어른이 인성 변화를 먼저 시작할 경우만 아이들의 인성도 변하고 인성교육도 받아들일 것이다.
직업교육 강화도 문제있는 발상이다. 직업교육을 강화하려는 방향은 맞지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학교의 모든 교육을 학습자 주도형으로 바꿔야 한다. 수동적인 교육으로는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또 좋아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10년 이상 떠먹여 주는 것에만 익숙한 아이들, 사고력이 멈추고 뇌가 잠 잔지 10년이 넘은 아이들, 모든 의욕도 멈춘지 오래된 아이들, 생각이 없는 아이들에게 직업교육을 강화하겠다는 생각은 왠지 공부 못한 책임을 몽땅 아동들에게 떠넘기고 “너희는 평생 블루칼라 노동자로 살아”란 말처럼 들린다.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 아이들을 기업은 반기지 않는다. 만약 입사를 해도 불과 몇 년 안에 폐기처분 당하기 쉽다. 현실이 이를 말해 준다. 교육부 장관은 인성교육과 직업교육 강화를 말하기 전에 현재 학교의 일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부터 파악했으면 한다. 직업교육의 강화가 학교교육의 실패를 호도하는 성격은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공부 못하는 아동들일수록 대학에 진학시키려고 하는데 이는 우리와 사뭇 대조적이다. 경제가 어려워 기업이 감원을 하면 가장 먼저 감원대상이 되는 것이 고졸이기에 그렇다.
진정한 학력, 행복한 학교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교육과정을 개발할 때 아이들의 목소리부터 들어야 한다. 현재의 교육과정 내용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지금의 교육내용, 지금의 교육방식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세상이 변했고 그래서 아동들의 뇌의 구조도 변했다. 공부 못하는 아동들을 양산하고 이들을 모두 직업교육으로 내몰려고 하지 말고 공부에 취미를 잃게 하는 현재의 교육시스템부터 고쳐야 한다. 21세기에는 고교 졸업 후 직업전선으로 나갈 학생들도 평생학습능력, 창의적 문제해결능력은 대학으로 바로 진학하는 아이들과 똑같이 필요하다.
또, 진정한 학력, 행복한 학교를 원한다면 교사들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 교사들이 행복하려면 교사들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율성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복잡성을 대폭 줄여주어야 한다. 학교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가정, 지역사회, 학교가 분담해야 할 영역을 늘려야 한다. 또 국가가 평가권을 교사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평가권을 국가가 쥐고 있는 한 붕어빵 교육은 불가피하고, 붕어빵 교육이 지속되는 한 수많은 아동들은 학습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피해자나 낙오자가 될 것이다.
국가의 통제에 길들여진 학교, 사회로는 학교교육이 나아지기 어렵다. 그리고 섬처럼 존재하는 무너진 교사 공동체부터 복원해야 한다. 그들이 각종 감정노동에 지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민원이 들어올 것을 걱정해 이상한 시험문제를 내게 해서는 안 된다. 또, 모든 아이들이 수업에 참가하게 할 여건(예: 개별화 맞춤학습과 소인수 학급운영)을 마련해서 무너진 교실에서 교사가 매일 매시간 자괴감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수업 중 아이들이 잠자지 않고, 떠들던 아이들도 수업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방안부터 찾아야 한다. 그런 선결조치 없이 인성교육, 직업교육 강화 운운하는 것은 모두 진정한 교육정상화의 길이 아니다.
왜곡된 학력관을 바로잡기 위한 범사회적 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현재와 같이 표준화시험 성적을 ‘학력’이라고 부르고 교육부와 언론 그리고 정치가들이 이를 강화하는 한 한국의 학교교육은 현재와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다. 교육 30년지대계의 첫 걸음으로 ‘학력’에 대한 그릇된 인식부터 고쳐나가서 한국 학교교육에 희망을 함께 만들어 갔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