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김수환 추기경-강원용 목사
종교간 대화와 교류 큰 ‘발걸음’ 재조명
“먼저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의 뜻에 감사드립니다.”
3일 오후 4시 서울 신촌 연세대 백양관에서 이런 인사를 올릴 인물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법정 스님의 조카뻘인 현장 스님이다. 개신교 교수들의 모임인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회장·이정배 감신대 교수)가 여는 이날 콘퍼런스엔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등 각기 다른 종교의 세 인물이 등장한다. 콘퍼런스 주제가 ‘세 명의 거인들이 바라본 이웃종교의 같음과 다름’이다.
전남 순천 송광사 뒤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의 시자로 승려 생활을 시작한 현장 스님이 법정 스님을, 김수환 추기경의 종교 화합 뜻을 받들어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사무총장 등으로 활약한 변진흥 ‘가톨릭대 김수환추기경연구소 부소장’이 김 추기경을, 강원용 목사가 일군 경동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잇고 있는 박종화 목사가 강 목사를 각각 조명한다.
현장 스님이 ‘주님의 뜻에 감사’하는 것으로 발표를 시작하기로 한 것도 법정 스님이 기독교 쪽의 초청에 응할 때마다 했던 것을 본뜬 것이다. 미리 엿본 이들 세명의 원고를 토대로 세 거인의 삶과 철학을 재구성해본다.
불일암에 성모상 모셔두고 촛불공양
강원용 목사는 자기 종교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배우는 겸손의 자세를 강조했다. 생명과 평화를 위해 함께함을 중시했던 강 목사는 다종교인 한국 사회에서 ‘종교간 이해와 화해’의 시대를 연 선구자였다.
젊은 시절 강 목사와 함께 종교간 대화의 물꼬를 튼 이후 법정 스님은 1974년 불일암 은둔에 들어갔지만 그리스도인들과의 친분은 계속됐다. 법정 스님이 김 추기경뿐 아니라 이해인 수녀를 비롯한 많은 가톨릭 수도자들과 친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웃종교인을 불자에 비해 전혀 차별하지 않을 만큼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법정 스님은 상(相)에 얽매이지 않은 불교수행자답게 관세음보살과 성모 마리아의 차별을 넘어섰다. 이미 1970년대 초 서울 강남 봉은사 다래헌과 조계산 불일암에 머물 때 서가 한편에 성모상을 모셔두고 촛불 공양을 올리곤 했고, 길상사의 관음보살상을 가톨릭미술가협회 회장이던 최종태 서울대 교수에게 조각하도록 요청해 조성했다.
이 관음상은 이마 위에 보관을 쓰고 왼손에 감로보병을 든 전형적인 관음상이면서도 깊은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분위기를 물씬 풍겨 ‘마리아 관음상’이란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법정 스님은 ‘부처님오신날’의 연등 수익금 10%를 서울가톨릭복지회에서 운영하는 ‘성가정 입양원’의 후원기금으로 기탁했다.
법정 스님의 다비식장에 나타난 한 가톨릭신자 교수의 고백은 법정 스님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문현철 초당대 교수는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잇기 어렵던 대학시절 법정스님으로부터 남모른 도움을 받았는데, 가톨릭 영세를 받던 날 큰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법정 스님에게
‘하느님이 어떻게 영세받은 날 교통사고를 나게 할 수 있느냐’고 불평하며 개종의 뜻을 밝혔을 때 “천주님은 그런 만화 같은 일을 하는 분이 아니고, 이런 아픔을 통해 더욱 성숙해지도록 힘을 주는 것”이라며 가톨릭 신앙을 지키도록 해주었다는 일화를 들려줬다.
심산 묘소 참배하며 유교식으로 큰절
김수환 추기경은 1956~63년 독일 유학시절 이웃종교에 닫힌 창문을 활짝 열었던 교황청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지켜보고 귀국해 가톨릭의 변화를 이끌었다. 김 추기경은 2000년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을 연구하는 심산사상연구회로부터 심산상을 받은 이후 심산의 묘소에 참배하면서 유교식으로 큰절을 올려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김 추기경은 “천주교 성직자이지만 한국인이기에 제 몸 안에도 어딘가 유교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유교나 천주교나 모두 ‘효의 종교’이지만,
그리스도교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큰효도를 바탕으로 부모께 대한 효를 하려는 하향적이고, 신본(神本)적이고 미래적인 성향인데 비해 유교는 부모에 대한 효를 통해 천(天)에 대한 큰효도로 올라가는 상향적이고 인본(人本)적이고 현재적 성향이 강해 상호 보완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심산상 수상 강연 말미에서 “유교의 인(仁)사상, 불교의 대자대비사상, 그리스도교의 사랑 정신이 함께 손을 잡고 대자연의 생명을 해치고 동족 분단의 아픔을 겪는 이 땅에서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변화시켜 갈 때 한국 민족은 환태평양시대에 명실상부한 ‘동방의 빛’으로 인류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나이도 믿음도 달랐지만 마음 열고 친분
해방 공간에서부터 미래의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강원용 목사(1917~2006)는 1959년 크리스천아카데미를 창설하고, 1965년 종교간 대화를 주도한 인물로 1960~70년대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의 손을 잡고, 종교간 이해와 협력의 시대를 연 촉매였다.
김 추기경(1922~2009)은 강 목사보다 10살이 적지만, 불과 42살에 주교가 되고, 45살에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어 65년 종교지도자 모임에 참여해 강 목사와 함께했고, 15살이 적은 법정 스님(1932~2010)도 30대 초반부터 불교계에선 유일하게 당시 개신교인들이 주도한 민주화운동에 합류해 이들과 교류했다. 법정 스님은 강 목사의 크리스천 아카데미에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활동했다.
김 추기경과 법정 스님은 서로 종교가 다르고 나이 차이도 열살이나 됨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나 다름없었다. 김 추기경은 서울 혜화동에 있던 자기 방 입구에 법정 스님과 합장으로 인사를 나누는 대형 사진을 늘 놓아두고 있었다.
김 추기경은 1997년 겨울 서울 성북동 길상사 개원법회 때 법당을 찾아와 축사를 하면서 유머로 종교 간 벽과 거리를 허물어버렸고, ‘부처님 오신 날’엔 아무 연락도 없이 길상사 마당으로 찾아와 법정 스님과 나란히 앉아 연등 아래서 산사음악회를 즐기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에 대해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추천할 만큼 법정 스님의 팬이었다. 이런 김 추기경의 초대로 1998년엔 법정 스님이 명동성당 제대 앞에 서서 가톨릭 신자들을 상대로 설법을 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한겨레신문 조현 종교전문기자
첫댓글 소중한 글 소중하게 잘 읽고 감사한 마음으로 댓글을 올리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