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 연산군의 건강법
오늘도 장동민 한의사와
자세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전화연결 - 인사 나누기)
Q1. 오늘은 조선의 10대 임금인
연산군에 대해 살펴보겠는데요.
무엇보다 연산군하면
‘폭군의 대명사’로 잘 알려진 인물이죠?
네 맞습니다. 조선시대에 폭정으로 인해 왕위를 뺏긴 임금 중의 한명이지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에, 흥에 겨워 마음대로 즐기거나 돈이나 물건 따위를 마구 쓰는 모양을 일컬어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고 하는데, 원래 이 말의 유래는 연산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으며 심지어는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했었는데,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 조선 팔도에 채홍사(採紅使)와 채청사(採靑使), 즉 연산군 때 미인과 준마를 뽑기 위해 파견한 관리들을 말하는데요. 이 채홍사와 채청사를 전국에 파견해서 미인들을 뽑아 궁궐에 살게 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특히 용모가 빼어나고 노래 잘하는 여자를 '興淸(흥청)'이라고 불렀는데, 그 수가 무려 천 명 가까이까지 되었다고 하구요. 결국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는데, 이렇게 연산군이 흥청들과 놀다가 망했다고 해서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Q2. 그 정도였다면, 술도 무척 많이 마셨을 것 같은데요?
조선시대 왕들 중에서 자신의 술독, 즉 주독(酒毒)에 대해 대놓고 언급한 왕이 바로 연산군입니다. 연산 11년 7월 25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연산군이 대비와 함께 경회루의 연꽃을 구경하고, 시를 지어 바치게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승정원이 원중(院中)에 수정 포도(水精葡萄) 한 덩굴이 익었으므로 승지들이 따서 얼음 넣은 쟁반에 담아 왕에게 바치니, 왕이 스스로 시를 지어 내리기를, 다음과 같습니다. “얼음 채운 파랑 알이 달고 시원해 / 옛 그대로인 성심에 절로 기쁘네. / 몹시 취한 주독만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 병든 위(胃) 상한 간(肝)도 고쳐 주겠네.”
다시 말해 얼음 채워 시원한 포도를 먹으니, 숙취도 해소되고 위와 간에 생긴 병도 고쳐지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또한 연산 2년 2월 19일의 기록에는, 성절사(聖節使), 즉 조선시대 명나라 황제와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을 말하는데요. 이 성절사가 명나라를 갈 때 약재들을 사가지고 오게 했다고 하고요. 그 중에서도 콕 집어서 ‘주독(酒毒)을 푸는 빈랑(檳榔)’을 사가지고 오라는 주문을 했다고 합니다. (빈랑이 뭔지 간단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
Q3. 그만큼 연산군이 본인의 주독을 푸는데
관심을 가졌다는 뜻일텐데요.
한의학에서 주독을 없애는 방법으로는
또 어떤 게 있나요?
술독을 해소하는 방법은 시기나 장소별로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연산군이 언급한 포도나 빈랑 이외에도, 콩나물이나 미나리 북어국 등은 유명한 숙취해소 음식이지요. 하지만 사람의 체질이나 증상에 따라 그 효과는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꼭 집어 어느 것이 좋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 한의약에서 주독을 없애는 가장 기본 방법은 ‘발한(發汗) 이소변(利小便)’인데요. 말 그대로 땀을 많이 내고 소변을 잘 보게 해주는 치료법인데, 이를 통해 몸속에 있는 주독을 빨리 바깥으로 몰아내려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물을 많이 먹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긴 한데,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갈증이 난다고 해서 찬 물을 벌컥벌컥 마시게 되면, 위장기능이 약해질 뿐 만 아니라 여러 가지 질병이 꼬리를 물고 생기게 되므로, 가급적이면 미지근한 물을 마시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리고 땀을 내기 위해 사우나를 찾아가 한증탕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화나 열이 높아져 쓰러질 수도 있으며 기운이 탈진해 건강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음주 후 숙취해소에는 가벼운 운동을 통해 땀을 흘려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Q4. 이렇게 주색에 탐닉했으면,
보나마나 연산군의 건강이 좋지 않았을 것 같아요?
네 맞습니다. 일단 연산군은 고질적인 양기 부족 증상에 시달렸습니다.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연산군이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을 앓아서 아랫배를 따뜻하게 해주는 치료를 하자 증상이 호전되었다는 얘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래 아랫배가 차가우면서 소변줄기가 시원찮고 수시로 조금씩 자주 보게 되는 경우는 소위 양기(陽氣)가 부족해졌을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여기에 아랫배를 따뜻하게 덥혀주고 뜸을 떠서 온기를 불어넣어주니 증상이 호전되었다는 기록을 볼 때, 실제 연산군의 양기가 매우 부족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로 미루어 보았을 때, 양기가 매우 부족했을 것임은 당연히 짐작해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Q5. 연산군이 앓았던 병, 또 어떤 게 있나요?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연산군이 가려움증으로도 심하게 고통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산군 10년 3월 14일의 기록을 보면, 어서(御書)를 내리기를, “근일에 일을 보려고 하지만, 가려움증으로 괴로울 뿐만 아니라 설사가 잦아, 지금 약을 먹으므로, 나가지 못한다.”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물론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간지러워서 나랏일을 볼 수가 없다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원래 연산군은 아랫배를 따뜻하게 덥혀주고 뜸을 떠서 온기를 불어넣어주면 증상이 호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양기가 매우 부족했는데요. 이렇게 가려움증이 설사와 더불어 나타난 것을 보면, 역시 비뇨생식계통이 허약해져 허열(虛熱)이 떴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Q6.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연산군의 병증은
대부분 한의학에서 말하는 양기부족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더 있습니다. <왕조실록>을 보면, 연산군이 자신의 소변 자주 보는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축천원(縮泉元)’이라는 처방을 올리라고 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축천원이 어떤 건지 간단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 아마도 워낙 증상이 심하니, 스스로 처방을 내린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 증상이 생겨나게 된 원인이 재미있습니다. 신하와 임금 둘 다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왕이 차가운 곳에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병이 생긴 것으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소변이 자주 마려운 증상은 방광이나 기타 요로계의 괄약근 등이 약해져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아래가 차갑거나 하초(下焦)(어느 부위?)의 기능성이 약해져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원래 아랫배가 차가우면서 소변줄기가 시원찮고 수시로 조금씩 자주 보게 되는 경우는 소위 양기(陽氣)가 부족해졌을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Q7. 혹시 양기부족으로 인한 병증이 또 있었나요?
연산군 1년 5월 8일의 <연산군일기 -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연산군이 이러한 발바닥 통증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연산군은 “경연(經筵)에는 내가 빨리 나가려 한다. 그러나 뜸 뜬 곳이 지금 짓무르고 또 발바닥이 아직도 아프니, 이것은 반드시 전일 여막(廬幕)에 거처할 때 풍증(風證)이 생겨서 그런 것이리라.” 라고 얘기하면서 발바닥통증이 풍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족저근막염은 풍증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또한 연산군이 오랫동안 서 있거나 걸었을 리도 없었기에 발바닥근막염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연산군의 발바닥 통증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그 대답은 우리나라의 전래 풍습 중에 결혼식 날 새신랑의 발바닥을 때리는 것에 있습니다. 발바닥에 있는 용천혈은 족소음신경의 대표적인 혈자리인데, 여기서 신(腎)은 비뇨생식계통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결혼식 날 새신랑의 발바닥을 때리는 것은 첫날밤을 잘 치르라는 격려의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간신이 허약해져 근육과 뼈가 약해지면, 연산군처럼 이유없이 발바닥에 통증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Q8. 이쯤 되면 연산군도
자신의 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입니다. 연산군 11년 10월 29일의 기록을 보면 ‘왕이 주색에 빠져서 속에서 번열증이 일어났다.’고 아주 똑똑하게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연산 9년 2월 8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왕이 전교하기를, “백마(白馬)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서 내수사(內需司)로 보내라.” 하였으니, 흰 말의 고기는 양기를 돕기 때문이었다고 정학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연산 11년 8월 7일에는 이렇게 양기를 돕고 담을 제거하는 한약을 만들어 아예 재상들에게 나누어주는 장면도 나옵니다.
이어서 중종 1년 10월 27일의 기록을 보면, 간원이 아뢰기를, “의원(醫員)들이 폐주[연산군]의 비위를 맞추어 풀벌레와 뱀을 진상하여, 그 양기를 도와 음욕(淫慾)을 방자하게 하였는데, 지금도 외방에서 그 물건을 공헌(貢獻)하느라고 소요스럽게 하였으니, 청컨대 죄를 다스리소서.”라고 말하는 기록이 나오는데요, 즉 어의들이 연산군의 비뇨생식 계통을 강화시키기 위해 양기를 돋우는 처방들을 사용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Q9. 그런가하면, 연산군이 얼굴에 생긴 피부질환으로도
고생을 했다고요?
네 그러겠습니다. 흔히 여드름은 ‘청춘의 꽃’이라는 말도 있지만, 실제 당사자는 무척 괴로워하는 질병입니다. 특히 한창 외모에 신경 쓸 십대 중고생들의 경우에는 심적인 고통이 매우 심할 수밖에 없는데요, 조선시대 왕 중에는 연산군이 그러한 고통을 겼었던 것 같습니다.
연산군은 왕이 되기 전인 세자시절부터 얼굴 피부 증상을 앓았었는데요. 성종 23년 10월 21일의 <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신하들이 “세자는 마땅히 학문에 근면하여 나아가 덕업을 닦아야 할 것인데, 요사이 강(講)을 폐한 날이 많으니, 심히 작은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 요사이 세자가 면창(面瘡)을 앓아 강을 멈추었다.”라고 말해서, 연산군이 어릴 때부터 얼굴의 피부질환으로 고생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연산군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는데요.
Q10.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 증상을 계속 앓았나요?
네. 연산군은 19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 증상으로 고통 받는 것이 계속 기록에 나옵니다. 연산군이 스무 살 때인 연산 1년 1월 8일의 기록에는 중국에서 돌아온 사신이 거기서 배워온 왕에게 면창의 치료법을 아뢰는 장면이 나오며, 이틀 후인 1월 10일에는 신하들이 면창의 원인을 추위로 보고 추위를 피하라고 아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어서 다음날인 11일에는 왕이 스스로 증세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말했지만, 얼굴에 붉은 기운이 있고 고름이 있으며 소변이 잦은 증상이 있기 때문에 치료를 받아야한다고 신하들이 아뢰는 장면이 나오지요.
열흘 후인 1월 20일에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치료법이 전해져 오는데요. ‘왕이 전부터 면창(面瘡)이 나서 의관(醫官)으로 하여금 중국에 가서 약을 구하여 오게 하였더니, 당시 피부질환을 치료할 때 쓰였던 웅황해독산(雄黃解毒散)과 선응고(善應膏)를 얻어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전에 사신이 보고한지 불과 열흘 만에 이번에는 의관이 중국에 갔다 와서 보고할 정도로, 애타게 치료법을 찾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동민 한의사와 함께
연산군의 건강법에 대해 살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