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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글학교 선생님이다
김진아 (캐나다)
나는 빨강반 선생님으로 유명세를 조금 날리고, 지금은 노랑반 선생님이다. 온라인으로 하늘반을 가르치고, 성인반도 가르치는 나는 케이티쳐(K-Teacher)이다. 이 글은 캐나다에 살면서 일주일에 총 9시간이라는 적지 않은 시수의 한국어 수업을 맡은 대단했던 지난 학기에 대한 기록이다.
한국에서 큰 애가 세 살 되는 해에 캐나다에 이민을 왔다. 그리고 3년, 4년 터울로 아이들이 계속 태어났다. 타향살이 십여 년이 지났을 때, 우리 집에는 어른 두 명과 아이 네 명이 복닥거렸다. 이따금 가슴이 찢어지는 순간은 아무리 캐나다에 살고 있어도 내 아이들이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였다.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 한국어를 가르쳐야 한다.’ 캐나다에 사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한글을 꼭 가르쳐야 한다는 마음은 간절했다. 이사갈 때마다 가까운 곳의 한글학교를 찾아 등록하는 노력을 했다. 아이들은 처음엔 멋모르고 갔고, 두 번, 세 번은 엄마의 어르고 달램을 통해서 갔고, 한 번씩은 엄마도 한글학교 등록을 포기하고 아이들이 토요일 아침 원 없이 늦잠을 자게 두었다. 그렇게 매년 한글학교 등록 기간이면 실랑이했다. 위에 큰 아이들이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더 늦으면 한글 배우기를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이 엄습했다. 네 명의 아이들을 한꺼번에 등록하자니, 한글학교 일년 등록금이 적지 않았다. 이런저런 걱정과 염려 가운데 교사로 봉사하면 등록비를 깎아 주신다고 해서 덜컥 교사 지원을 했다.
2020년, 온 인류가 팬데믹으로 멈춰버린 시간이었다. 한글학교 문이 닫혔을 뿐만 아니라, 공립학교도 휴교하던 시기였는데, 교사 지원을 하자마자 한글학교가 휴교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던 그해 3월과 4월이 지나갔다. 두 손을 놓고 2개월의 시간을 암흑과 같이 떠나보냈다. 5월이 되자 교장 선생님이 긴급 온라인 회의를 열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도 못 가고 힘든 시간인데 한글학교를 온라인으로 열어서 교육의 길을 멈추지 말자!”라고 선언하셨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온라인 한글 교육의 길을 열어보자고 교사들은 의기투합하였다. 나는 한글학교 교사의 경험이 전무했지만, 아이 넷을 키운 엄마의 경험을 인정받아 가장 어린 3살~5살 유아반을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엔 한글을 가르친다기보다는 화면 앞에 앉아 있게 만드는 것 자체가 관건이었다. 우선은 20분짜리 수업을 구성했다. 우리 집 아이들의 장난감 상자에서 손 인형을 하나 꺼냈다. 한 손을 넣어서 인형 입을 움직이게 만들고, 복화술을 따라 해 보았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ㅇㅇㅇ, 그 이름 아름답구나!” 귀여운 인형과 함께 내 이름을 소개하는 노래를 부르자 세 살, 네 살 아기들이 집중하였다. 돌과 꽃과 나뭇가지로 ‘예쁜 한글 내 이름’을 만들어 사진 찍어 보내라고 숙제를 내주었다. 엄마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가능했다. 한국 슈퍼에서 구매한 한국 제품의 포장에서 한글을 오려 저금하게 만든 ‘한글 저금통’에 대한 반응도 뜨거웠다. 단체 채팅 공간을 활용하여 수시로 공지사항을 올리고 숙제도 공유하는 방법으로 학부모님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20분 수업이 가능해지자 조금씩 시간을 연장하여 결국엔 2시간 수업이 완성되었다. 동요와 만화 등의 인터넷상에 공개된 자료를 지루할 수 있는 학습 순서의 중간에 적당히 배치하였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직접 찍어 보낸 숙제 영상과 사진을 편집하여 교구로 활용했다. 자기 얼굴이 화면에 등장하자 집중과 흥미는 배가되었다. 아마도 내가 고안한 최고의 교재는 “내가 주인공 책”이었다. 각 아이의 얼굴만을 사진에서 오려서 열개 씩을 복사했다. 여러 한글교재에서 기초 동사와 형용사를 설명하는 삽화를 발췌하였다. 아이의 얼굴과 삽화의 몸통을 합성하여 교재의 모든 페이지에 주인공이 아이 스스로가 되는 문장을 큼직하게 넣었다. 예를 들면 “ㅇㅇㅇ가 밥을 먹어요.”, “ㅇㅇㅇ가 그림을 그려요.”처럼. 아이들은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한글책 읽기를 행복해 했다고 후기를 받았고, 너무 좋은 아이디어라는 찬사와 함께 각 가정에서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와 함께 “내가 주인공 책” 읽는 영상을 찍어서 보내주셨다.
빨강반은 대유행이 끝나고 맡은 첫 대면반이었다. 엄마와 떨어질 때 분리불안으로 우는 아이부터 잠시도 자리에 앉지 못하는 아이, 수업 중간에 울기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한쪽 무릎에 올려놓고 어르면서 수업을 진행한 적도 있었다. 세 살에서 다섯 살 취학 전 아동이 대상이었지만, 첫아기 낳았을 때 직접 지은 돌당의를 가져가서 전시했고, 한국에 여행갔다 오시는 분에서 부탁하여 공수해 온 조각보로 세모, 네모 모양과 한국의 오방색을 가르쳤다. 한국에 살 때는 몰랐다. 무용가의 딸로 태어나 무용학원에서 평생 자란 나는 캐나다에 이민을 온 후에 한국의 전통을 이렇게나 그리워하고, 그렇게나 뼛속까지 한.국.사람임을 뿜어내고 있었다.
빨강반 학생들이 대부분 재등록하는 것으로 수업의 인기를 증명하고 살짝 말귀를 더 알아듣는 연령대인 노랑반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교장선생님께서 한 통의 문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 “주변에 한글학교가 없어서 온라인으로 한글 수업을 해주실 수 없나요?”라는 문의 전화였다. 비씨(British Columbia)주 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가정의 한 어머니가 한글 교육에 대해 고민하다가 우리 학교에 상담 문의한 것이었다. 교장선생님은 “한국인 이민자 가운데 대도시가 아닌 외곽지역으로 들어가 고생하는 가정의 자녀들이 한글학교도 없이 한국어 교육을 하기 힘든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라며 상담의 내용을 나누시면서 온라인 수업 구성에 열성적이었던 나에게 수업을 맡을 의사가 있는 지 물으셨다. 나는 진취적인 교장선생님의 취지가 너무 좋았고, 해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온라인 기초 한글 수업은 등록 학생 한 명에서 시작하여 점점 입소문이 나고, 사촌까지 함께 등록하기도 하여 학년말에는 아홉 명으로 늘어났다.
온라인 수업에 들어 온 학생들은 만 4살에서 14살까지의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되었으며, 학생들의 거주지역은 가깝게는 학교에서 6km 거리에 사는 친구에서부터 멀게는 1,164km 떨어진 곳에 사는 친구까지 다양했다. 그러니까 시차가 한 시간 차이 나는 지역까지 이어졌다. 나는 아홉 명 학생의 등록원서를 보고 한 명 한 명의 집 주소를 지도에서 검색해 보았다. 아이들이 얼마나 먼 곳에서 한글학교를 다니는지 궁금했다.
394km(차로 4시간 13분) 떨어진 곳에 사는 예인이는 일년내내 검정 레오타드를 입고 수업에 들어왔는데, 그 이유는 한글학교 수업하기 전에 체조 수업을 듣고 바로 오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팔이 부러져서 깁스하고 왔는데도 예인이 표정이 너무 밝고 천진난만해서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했다. 만 4살밖에 안 된 루리는 540km(차로 5시간 52분) 먼 곳에 살고 있었다. 한글만이 아니라 언어를 배우고 의사소통을 한 기간을 다 합해도 만 2년도 안 됐을 꼬꼬마가 매주 저녁 7시에서 9시까지 수업에 꼬박꼬박 들어왔다. 시차가 나는 곳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매주 화요일 밤 8시에 시작하여 밤 10시까지 2시간 수업을 참여했다. 캐나다 겨울의 밤은 빨리 오고 길어서 오후 4시부터 깜깜해진다. 종종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 한글을 공부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여간 애처롭고 기특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글 창제 원리를 가르치는 첫날의 수업은 환희 그 자체였다. 사람을 “ㅣ”로(하늘 아래, 땅을 밟고 서 있는 사람의 형상이다!), 땅을 “ㅡ”로(넓디넓은 땅을 단 한 획으로 정리했어!), 하늘을 “ㆍ” 으로(그 큰 하늘이 ‘점’이라니!) 지은 세종대왕의 놀랍고도 명료한 세상 이치를 사랑하는 백성을 위해 만든 문자에 담은 오묘한 한글(큰 글자)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나는 아이들의 커진 눈동자를 화면 너머로 모니터링하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온라인 한글기초반인 하늘반은 한국의 교육부와 국립국제교육원, 국제한국어교육재단에서 공동 발간한 <재외동포를 위한 한국어 1 영어권>이라는 “재외동포 어린이”를 대상으로 쓰인 교재를 사용했다. 나는 비록 4년 차, 여전히 배우는 초보 교사이기는 하지만 재외 한글학교에 대한 재외동포청(이전에 재외동포재단이었던)의 한글학교 지원 정책에 대해서 매우 감사하고 있다. 교사 인증제를 수강하면 교수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온라인 연수를 꾸준히 하여 한국어학과의 전공 학생 못지않은 체계적인 교육을 접할 수 있다. 매년 각 나라의 한글학교 교사를 초청하여 국내 최고의 교수진들과 화제의 강사진으로 매우 완성도 높은 강의를 만들어 인터넷으로 시청할 수 있는 점도 감사하다. 해외에 살면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 함양에 관심이 있고, 애국심에 고취된 한글 교사 지망자들을 여러 기관이 협력하여 개발한 한글 교재를 통해서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어서 감사하다. 인류가 겪은 팬데믹 이후 온라인 교육의 혁신과 함께 한글교육 영역에서도 큰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고 생각한다. <재외동포를 위한 한국어 1 영어권> 교재는 교재와 함께 구성한 ‘익힘책’이 있어 탄탄하게 수업을 받쳐준다. 왜냐하면 교재만 있던 기존의 방법에서는 부족한 활동지를 교사가 매번 재구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워크북(익힘책)이 있으니 학습지처럼 활용하면서 수업에 역동성이 만들어졌다. 게다가 교사를 위한 세밀한 지침서는 막히는 부분이 발생할 때마다 마치 보조 실력이 능수능란한 조교님과 같았다. 나의 최애(최고로 좋아하는) 부분은 목차 차례에 소개된 큐알코드(QR code:Quick Response Code)였다. 숨은 그림인 듯 작게 인쇄되어 있어서 전 세계적으로 이를 활용하는 선생님들이 얼마나 계실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큐알코드를 발견한 이상 호기심이 발동하여 휴대전화로 스캔을 해보았다. 결과는 신세계를 경험하였다. 정확한 발음으로 교재의 모든 본문이 녹음 저장된 링크였다. 매 수업에서 이 링크를 열어 본문 읽기에 활용하였다. 교사가 수업마다 본문을 읽는 수고를 아껴 주었고,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문장을 따라가는 훈련을 할 수 있었다. 온라인 수업의 단점이 될 수도 있었던 교사의 주입식 진행 부분을 보완하여 집중도를 높이는 효과까지 있었다. 학기 초에 교재를 각 가정에 우편으로 부쳐야 하는 수고는 하였지만, 교재를 기다리며 부모님과 주고받은 연락 때문에 학부모와 소통하는 계기가 되었다.
매 한글학교 교사연수 때마다 새로운 정보를 얻게 되는데, 그중에 가장 좋았던 하나가 “두루책방”이었다. 타지에서는 한글책을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이제는 종이책을 읽는 것부터가 어려워진 디지털 세상이 되었다. 두루책방은 도서문화재단 ‘씨앗’과 에듀테크 스타트업 ‘에누마’가 함께 만든 교육 앱으로 124권의 한국어 책과 84권의 외국 번역책이 6단계 수준으로 업로드 되어 있다. 동물, 과학, 음식, 생활, 자연, 역사, 모험 등 다양한 주제를 담은 내용을 쉬운 단어와 짧은 문장으로 집필되어 있다. 깔끔하고 아름다운 일러스트도 기분 좋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책을 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고, 저작권 걱정 없이 자료 복사 및 재배포, 수정 및 가공이 가능하다. 나는 하늘반 친구들에게 1단계 책을 무조건 읽도록 소개했다. 온라인 한글기초반인 ‘하늘반’과 온라인 교육앱 ‘두루책방’은 찰떡궁합으로 맞았다. 아이들은 교재를 스스로 읽고, 자신의 흥미와 읽기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서 반복해서 읽을 수 있었고, 일년 학습의 성취도는 매우 고무적으로 나타났다.
학교에서 1,164km 거리에 살고 있는 희준이는 여권을 갱신하기 위해서 밴쿠버를 방문했다. 12시간 20분을 한 번도 쉬지 않고 운전해서 내려와야 하는 동네에 살고 있었던 희준이가 토요일 한글학교에 왔을 때가 잊히지 않는다. 희준이는 그동안 컴퓨터 화면 속에서 만난 선생님을 만나 반가워했고, 대면수업과 온라인 수업을 병행했던 친구인 재원이를 알아보고 그 옆에 앉았다. 재원이도 처음이라 어색할 희준이를 반겨 주었고, 수업 내내 살뜰하게 챙겨주는 것이었다. ‘하늘반’과 ‘노랑반’ 담임 선생님이 한 분이었기에 가능한 장면이 아니었나 싶었다. 두 친구는 인터넷 넘어 만나 이제 친구가 되었으니 둘에게 기억에 남을 하루가 되었다. 한글학교에 다녀간 희준이는 그날 이후 열심히 두루책방을 들락거려 1단계 책을 모조리 섭렵했고, 2단계, 3단계 책을 읽는 책벌레가 되었다.
설날과 추석에는 한복을 입고 한글학교에 등교하는 것처럼 온라인 수업이지만 한복을 입고 화면 앞에 앉았다. 세배하는 영상을 보여주고 세배하는 영상을 찍는 숙제를 내주었고, 시중에 파는 간편한 사골국물로 떡국을 직접 끓여서 먹으라는 숙제도 내주었다. 학교에서 374km(3시간 52분) 떨어진 지역에 사는 믿음이는 엄마는 한국인이고 아빠는 캐나다인인 다문화 가정의 2세였다. 믿음이는 학년 초에는 특히나 발음이 매우 부족한 편이었지만, 숙제를 가장 열심히 제출하는 학생이었다. 주변에서 한글을 찾아서 사진으로 찍으라고 했더니, 마당의 수돗가를 찍어 보내왔다. 하루 종일 집안을 돌면서 찾은 글자임이 역력했다. 몸으로 한글을 만들어서 숙제 사진을 찍으라고 했더니, 늙은 호박이 주렁주렁 널린 호박밭에서 “ㅏ”, “ㅑ”, “ㅓ”, “ㅕ”를 만들었다. 호박밭에서 놀던 중 불현듯 한글학교 숙제를 기억해내서 엄마, 아빠에게 사진 찍어달라고 요청했을 것이 눈에 선했다. 수업 시간에 “김.진.아 슨생니임~” 라면서 스윗하게 선생님을 부르고, 손을 들어 질문하는 믿음이가 하루는 특유의 진심어린 숙제로 나를 울렸다. 떡국은 못 끓이고 김만 잘랐다는 어머니의 부연 설명과 함께 이마에는 반창고를 붙인 떡국 인증 사진으로 이미 내 마음은 녹아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또 다른 영상이 도착했다. 색동저고리와 바지를 차려 입고 의젓하게 새배를 한 후에 “새헤에 봉마니 바드세효! 김.진.아 슨생니임~”이라고 했다. 믿음이의 세배 영상 때문에 한참이나 눈물이 났다. 온라인으로 한국어 수업을 하는 것이 이렇게나 감격스러운 일이었단 말인가.
한국어 수업에 대한 도전과 여정은 계속 됐다. 성인 한국어 수강자 모집 포스터를 붙이겠노라 집을 나선 날, 하필이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밴쿠버 다운타운의 거리를 헤매던 내 손에는 성인 한국어 기초강좌의 수강생을 구하는 포스터가 들려 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유효 자격 인증 기간 100년을 자랑하는 “케이 티쳐(K Teacher)” 뱃지가 들려 있었다(전자 뱃지여서 실제로 손에 든 것은 아님). 케이 티쳐는 ‘국립국어원’에서 온라인 ‘한국어 교수 학습 샘터’를 통해 국외 한국어 교원(K-티처)을 대상으로 교육한 프로그램의 이름이었다. 나는 전세계 한국어 전파의 요새인 세종학당에서 언젠가는 파란 눈의 외국인들을 가르쳐 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기에 포스터가 비에 젖을까봐 외투 속에 감춰 달릴 때도 하나도 힘들 지 않았다. 캐나다는 한국기업의 진출을 꿈꾸는 세계 젊은이들이 대거 출석하는 아시아 지역의 세종학당에 인기에 비할 바는 못 되어도 몬트리올에 한 곳, 오타와 한국문화원에 한 곳이 있다. 언젠가 수요가 더 늘어 밴쿠버 지역에 세종학당이 세워지면 준비된 교사가 되리라 다짐했다. 포스터를 다운타운 한국식당에 들어가서 붙여도 되겠는지 묻고, 거절 받기를 반복하다가 포스터 붙일 만한 곳을 찾아서 돌고 돌고. 마침내 찾았을 때 한 장을 붙이고 기뻐했다. 요즘 세상에 포스터를 보고 누가 연락을 하겠는가 싶겠지만 식당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연락한 학생이 꽤 있었다.
캐나다에서 한글학교 선생님이 되어 한국어를 가르치는 연차가 쌓여가니 다문화 가정의 2세, 3세 자녀도 만나게 되었다. 한국인 배우자를 만나 새로운 문화와 언어 그 너머의 가정을 꾸린 그들에게도 한국어 교육은 필요해 보였다. 이곳에서도 한류를 통해 한국문화에 관심이 더욱더 확대되는 추세이기 때문에 한국어 열풍은 과연 시간문제였다. 나는 내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이가 들어서도 한국어 교사로서 내 역량을 쌓아가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세종학당재단은 국외 한국어 교육과 한국문화 보급 사업을 총괄하기 위해 세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재외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계승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을 하는 한글학교와는 다르다. 세계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알리고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관심을 증진하기 위해 설립했기에 그 취지가 분명히 다르다. 성인반 한글기초반의 시작은 캐나다에서 한국어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의지를 지니신 교장선생님과 자주 세계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보급을 할 수 있는 방안을 토론했던 것이 단초가 되었다.
성인반 한글기초반의 첫 번째 학기는 좌충우돌하며 교재와 수업 내용을 만들어 나갔다. 한국어학교의 설날 전통문화체험 학습에 성인반 학생들이 한복을 입어보고, 딱지치기, 제기차기, 윷놀이 등 전통 놀이를 놀았다. 떡국을 맛보고, 세배를 배우면서 한국인의 예절을 배우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첫 번째 학기를 마무리하면서 느낀 점은 실질적인 필요에 의해 한국어 학습을 하려는 동기가 부족한 경우, 학습에 대한 열정도 떨어지고 두 번째 학기로 이어가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결국, 중도 하차하는 학생들이 많이 발생했고 내 부족한 영어 실력과 교수법에 대한 자신감도 무너지는 고배를 맛보아야 했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무리의 학생들도 있어 2학기 성인반 수업은 명맥을 잇게 되었다. 교재를 만들어 나가는 오류와 실수를 보완한 것이 바로 세종학당 교재와 교육과정을 이용한 것이었다. 세종학당은 한국어교육·한국문화 보급을 위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온라인을 통해 한국어·한국문화를 배울 수 있는 홈페이지인 ‘누리-세종학당’에서 수많은 우수한 자료들을 무료 공개하고 있다.
토요일까지 일찍 일어나는 수고 아닌 수고를 멈추지 않은 것이 횟수로 4년째이다. 큰 아이는 2년간 중고등학생을 위한 온라인 한글학교 수업을 수강하면서 한국의 중학교 수준의 인문 사회 어휘를 습득하였고, 1년간 온라인 한국어 수업의 보조교사로도 봉사했다. 더불어 케이팝(K-Pop) 아이돌을 좋아하고 한국 드라마를 보며 익힌 어휘력은 일취월장하였다. 둘째 아이는 “캐나다에 태어난 내가 왜 한국말을 배워야하냐?”며 한글학교에 내어준 시간과 노력이 억울하다고 호소했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한글학교 등록 때문에 실랑이하지 않는다. 아이는 한글학교가 재밌다고 한다. 셋째 녀석은 가끔씩 심술을 부리기도 하지만 한글을 제법 읽게 되자 자기가 한국사람이어서 좋다고 한다. 왜냐하면 가장 친한 친구들이 모두 케이팝(K-Pop) 아이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박또박 한글로 적은 어버이날 손 카드는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막내인 넷째 아이는 한글학교 등교부터가 어려움이 있지만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 믿고 있다. 외국에서 나고 자라는 자녀에 대한 한글 교육은 전적으로 부모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 내가 교사가 되어서라도 가르치고 싶었던 한국어이고 한글이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한글학교, 너무너무 좋아요!”라며 응원가를 보내준 해맑은 희준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일주일에 한 번인 한글 수업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접속하여 들어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수업 때마다 번쩍번쩍 손을 들어 질문하는 초롱초롱한 눈빛들이 나를 붙들고 있다. 수많은 숙제 요청에도 꼬박꼬박 성심껏 지원해 주신 학부모님들의 수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매주 토요일 2시간 반, 대면 한글학교 수업이 끝나면 목소리가 안 나올 때도 있지만, 교감 선생님과 봉사해 주시는 선생님이 만들어 주시는 점심, 따뜻한 카레밥과 콩나물밥이 너무 맛있어서 행복하다. 사람들이 무슨 일 하세요? 하고 물을 때 “한글학교 선생님이에요.”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을 하기 위해 세월을 쌓는 내 가슴은 뛰고, 내 마음은 뿌듯하다.
(https://class.scau.ac.kr/language/)
*수상 기사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제15회 한국어교육자 체험수기 공모전’ 시상식 개최 - https://www.metroseoul.co.kr/article/20241118500747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93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