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旺山) 허위(許蔿, 1855~1908)는 1855년(철종 6) 4월 2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현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아버지 허조와 어머니 진성이씨 사이의 네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맏형 허훈은 영남 유림의 종장으로 문장의 대가였으며, 진보로 이주하여 은거하던 중 1896년 창의하여 진보의진을 결성하였다. 둘째 형 허신은 문재(文才)가 출중하였으나 28세에 요절하여 뚜렷한 경륜을 세상에 남기지 못했다. 셋째 형 허겸은 동생 허위의 막하에서 의병에 참가한 이후 국내외에 걸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허위는 한말에 거유(巨儒)로 명망이 자자했던 맏형 허훈에게 학문을 배운 전통적인 유생이었다. 그러나 허위의 경륜과 포부는 성리학적 유생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관직에 나아간 허위는 망국으로 치닫는 사태에 저항하여 혁신 유림으로서 경세관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허위는 국권 회복에 투신한 의병장으로서 투쟁과 순국을 통해 드높은 애국 충절을 보여 주었다.
허위가 순국한 뒤 만주로 망명한 이들 일가는 국내외를 통해 조국 광복에 헌신하였다. 특히 허겸·허형·허필은 북만주 이역의 하늘 아래 뼈를 묻었고, 그들의 아들들은 만주와 노령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지금도 그 후손들은 이역만리의 하늘 아래 국제 미아로 살고 있다. 선산의 허위 가문은 대대로 쌓아 올린 명문의 전통과 영화를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민족을 위해 바쳤다. 누가 ‘집안의 슬픈 이야기’라고 한탄했던가. 청사(靑史)에 길이 남아 인구에 회자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