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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읽기의 즐거움
Ⅰ. 들어가는 말
Ⅱ. 만화언어 분석
1. 그림과 글
① 도상적 성격의 그림
② 추상적 성격의 그림
③ 글
④ 글과 그림의 결합
2.틀
Ⅲ. 만화의 즐거움의 요소
1. 즐거움, 이중적 평가
2. 즐거움의 유지
3. 만화 읽기의 즐거움
① 형식의 파괴
② 만화에서의 동일시
③ 만화의 과장성
Ⅳ. 만화, 문화의 장(場)에서의 위치
1. 하위문화(subculture)로서의 만화
2. 상징 소구체로서의 만화
Ⅴ. 나오는 말
Ⅰ. 들어가는 말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기제 중 단연 돋보이는 것으로 만화가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선생님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대본소를 드나들며 탐독하던 만화는 이미 30대를 넘어버린 어른들에게도 지난 시절의 향수를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즉 사회에 고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어린 시절의 즐거움은 잊혀져 간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만화는 ‘어린이들’의 매체일 뿐이다. 어린아이들의 눈을 유혹하는 조잡한 그림과 저질의 내용들로 가득찬 만화는 교육상으로 절대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매체이다. 오히려 그것이 제공하는 즐거움이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따라서 어린이들은 만화를 공개적인 장소보다는 은밀한 장소에서 아무도 모르게 볼 수 밖에 없다.
80년대까지 만화가 일반 대중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본소라는 공간적 장소를 통하여서만 가능하였다. 이들 대본소는 영화 『장미빛 인생』에서 묘사된 것처럼, 쾌쾌하고 음울한 분위기를 우리들로 하여금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만화 역시 그런 이미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최근 한국만화산업에 있어서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만화의 침투와 만화산업 내외적 요소의 변화 등의 요인으로 인해 대본소용 단행본 중심의 유통구조가 서점용 단행본, 만화잡지 중심의 유통구조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만화가 더이상 대본소의 공간적 이미지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 매체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기회로 작용하였다.
최근 TV나 영화·비디오, 컴퓨터 등의 영상매체의 발달과 이들의 가정보급률의 증가로 더욱 다양한 영상 이미지들을 가정에서 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런 이미지들의 주된 소비층은 만화의 주된 소비층인 청소년과 맞물려 있다. 하지만 만화는 이들 매체와의 경쟁에서 아직까지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으며 오히려 독자층을 이전 만화세대인 20∼30대로 확장·세분화시켜 가고 있다.
이렇게 만화가 다른 인쇄매체들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면서 오히려 영화 등의 다른 매체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문에서는 이러한 만화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 요소, 만화가 제공하는 즐거움과 그 발생 이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화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고찰을 통해 만화가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재정립하고자 한다.
Ⅱ. 만화 언어 분석
1. 그림과 글
만화책을 펼쳤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칸 속에 들어있는 그림과 글이다. 이처럼 한 칸 속의 그림과 글은 만화의 어휘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만화의 그림과 글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만화에서의 그림과 글은 연속되어 있는 하나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분석의 출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우선 만화의 그림과 글을 분리하여 논의하기로 한다.
① 도상적 성격의 그림
만화에서의 그림은 크게 도상적 성격의 그림과 추상적 성격의 그림으로 분류할 수 있다. 만화 그림의 첫번째 유형인 도상적 성격의 그림이란 그것이 표현하는 실제 사물과 시각상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지는 성격의 그림을 지칭하는 것인데, 만화에서 사용되는 이러한 성격의 그림 중 대표적인 것으로 카툰, 사실주의적 표현, 동작선 등을 들 수 있다.
카툰은 단순하게 그려서 전달효과를 높인 그림 양식으로서 이 때의 단순성은 특정부분의 과장을 통해 달성된다. 바로 여기에서 만화 그림의 두가지 특징인 단순성과 과장이 나타나는데 단순화란 전형적으로 사람이나 사물의 개요를 강조하는 것이고 과장이란 인물의 실제 모습을 왜곡하는 것을 말한다. 결국 작가는 단순성과 과장성을 지닌 카툰을 통해 현실세계와 어느 정도 유사한, 그러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질서의 새로운 의사세계를 창조한다. 카툰은 단순히 그리는 기법을 넘어선, 우리가 세계를 보는 하나의 방식이며 독자는 이를 통해서 작가가 창조한 의사세계를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카툰을 사이에 두고 작가와 독자와의 공모가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작가와 독자의 공모의 원인으로 카툰 자체가 가지고 있는 기법·기술상의 기능도 무시할 수 없다. 예컨데 카툰에서 볼수 있는 어린아이와 비슷한 신체조건을 가진 인물은 독자에게 친근감을 부여한다. 카툰의 보편성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하나의 인물 사진은 하나의 인물만을 표현할 뿐이지만, 인물 카툰은 그것이 단순화될수록 더 많은 인물을 포괄할 수 있다. 또한 Scott McCloud는 그의 저서 『Understanding comics』에서 카툰식으로 표현된 인물이 우리가 느끼는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주장하는데, 그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말을 할 때 그 사람의 얼굴은 시각을 통해 생생하게 인지하지만 이야기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얼굴은 시각을 통해 인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는지 그 일반화된 모습은 마음 속으로 느낄 수 있는데 이러한 단순하고 기본적인 모습은 카툰식으로 표현된 인물과 유사하다. 이러한 까닭에 시각적으로 생생해 보이는 사실적인 그림을 우리는 객체로 느끼지만, 단순하고 기본적으로 그려진 카툰은 우리 자신처럼 느끼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카툰에 대한 독자의 몰입이 발생한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Scott McCloud는 앞의 논의를 더욱 발전시켜 비생명체에 대한 생명의 부여가 실제로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기도 한다. 앞에서 논의한 인간의 비시각적인 자기인식현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신체 전반에 걸쳐서도 나타나며, 자신이 사용하는 비생명체(예를 들어 안경, 전화기, 자동차 등)에게도 일체감을 연장(expansion)시킴으로써, 곧 비생명체를 자신의 신체의 일부로 생각함으로써(안경은 눈, 전화기는 귀, 자동차는 다리 등) 나타난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체 일부로 생각하는 비생명체에 대한 인식 또한 카툰과 비슷한 모습을 띄게 되고, 이러한 비생명체가 카툰으로 표현된 이상 하나의 주체가 되어도 어색하지가 않게 된다. 만화에서 주전자가 사람처럼 이야기를 해도 독자가 당황해 하지 않는 이유를 이러한 카툰의 특징에서 찾을 수도 있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한편 만화에서는 지금까지 논의한 카툰뿐만 아니라 매우 사실주의적 그림도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그림은 앞에서 이야기한 카툰과 상반되는 효과를 거두기 위해 사용된다. 카툰식으로 표현된 인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배경 속에 위치시켜 독자들이 인물 속에 더욱 몰입하게 하거나, 주인공 이외의 인물, 특히 악인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타인이라는 느낌을 강조하기도 한다. 결국 만화가는 카툰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그릴 수 있고 사실주의적 그림을 통해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외부세계를 모사(模寫)할 수 있다.
카툰과 사실주의적 그림뿐만 아니라 움직임과 동작을 표현하는 선 또한 만화에 있어서 도상적 성격의 기호에 속한다. 하나의 칸 속에 위치에 있는 그림들은 정적이다. 그러나 동작선이라 불리우는 선을 통해 움직임의 자취를 선으로 표시함으로써 작가는 정적인 그림 속에서 동작을 묘사할 수 있다. 달리는 사람의 모습이나 담배연기 등의 표현이 대표적인 것으로 이러한 동작선은 눈에 보이는 움직임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그 기원은 카툰으로 볼 수 있으나 그 묘사 방식이 점점 세련되고 도식화된 까닭에 더욱 더 상징성을 띄고 있는 추세이다.
② 추상적 성격의 그림
만화 그림의 두번째 유형인 추상적 성격의 그림은 그것이 표현하는 실제 사물의 모습과는 시각상 유사성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쉽게 이러한 그림을 이해하는 이유는 초보적인 형상적 상징체계에서 따라 다른 모습으로 치환된 하나의 시각 직유 혹은 은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상적 성격의 그림에는 감정 표현 그림과 기호화된 그림 그리고 말풍선 등이 있다.
인간의 감정은 시각적으로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는 이러한 감정을 표현하는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실험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선으로 표현, 시각화하는 방식은 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이는 사람들이 특정한 그림에 대해 느끼는 감정 또한 비슷하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현상을 바탕으로 시각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표현파식 기법이 만화에서는 발달해 왔다. 우선 배경에 추상적인 선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는데, 선의 굵기와 길이, 굴곡에 따라 경악, 분노, 당황 등의 감정을 표현할 수가 있다. 또한 갈망을 나타내는 침방울, 혼란스러움을 나타내는 나선형 모양의 눈 등도 또한 선에서 더욱 추상화된 감정 표현 방식이다. 한편 만화의 몇몇 그림들은 기호화하여 시각 외의 감각, 즉,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표현하기도 하고, 초보적 수준의 개념을 시각화하기도 한다. 냄새를 나타내는 선, 기발한 착상을 의미하는 전구 등이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예이다.
또한 만화에서 사용되는 추상적 성격의 그림 중 가장 관습적이고 유형화된 것이 바로 말풍선이다. 일반적으로 말풍선은 둥근 단선으로 되어 있으며 그 끝은 캐릭터의 입을 향해 돌출하여 말하는 주체를 나타낸다. 돌출 부분이 일련의 작은 원으로 캐릭터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에는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말풍선은 단순히 캐릭터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앞에서 언급한 동작선과 더불어 말풍선은 만화 캐릭터에 생명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작선을 통해 정적인 캐릭터가 움직일 수 있게 만들고 말풍선을 통해 캐릭터가 생각하고 말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독자들은 말풍선을 통해 캐릭터가 실제로 말을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또한 말풍선은 캐릭터의 감정 표현에도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데, 말풍선의 모양을 톱니 모양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시킴으로써 격양, 열광 등의 감정을 표현할 수가 있다. 이러한 말풍선은 그 속의 위치한 언어의 시니피에를 미리 상기시키는 사전적인 신호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단순한 관습적인 요소 이상으로, 즉 메타 언어적 요소로서도 파악할 수 있다.
③ 글
만화에서의 그림과 글은 배타적으로 논의되기 쉽다. 그러나 앞에서 논의한 추상적 성격의 그림 중 기호화된 그림에서부터 출발한다면 그림과 글의 연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 기호화, 추상화된 그림이 바로 언어의 기원이기 때문이다.
만화에서의 글은 말풍선 안팎에 위치하면서 일반적으로 줄거리를 설명하고, 인물의 말과 생각을 표현하며,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힘든 인물의 감각과 감정을 완벽하게 전달한다. 뿐만 아니라 만화에서는 다른 매체와 달리 글의 그래픽적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주로 의성어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글자의 형태를 다양화함으로써 소리의 본질을 시각화하려는 시도는 추상적인 글이 도상화하려는 의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만화적 세계에서만 가능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은 그림과는 달리 감정을 자극하는데 있어서 명확하긴 하지만 다소 느린 특징을 갖는데 그래픽화된 글의 경우에는 감정 혹은 개념의 명확하고 즉각적인 전달이 가능하게 된다.
④ 글과 그림의 결합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 만화에서의 글과 그림은 연속선상에 위치하여 그 명확한 경계선이 애매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림이 너무나 사실적인 영상을 추구하고 글이 너무나 관념적인 내용을 추구하는 경우 만화라기 보다는 오히려 영화의 성격에 가까와 질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만화에서 글과 그림은 상보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이로 인해 이 둘이 어느 정도 독립성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생생하고 명료한 묘사를 이루어 낼 수 있다. 그러고 이러한 글과 그림의 결합은 만화 고유의 관습체계에서 그 의미를 부여받으며 만화의 어휘 중 기본적 단위로서 기능한다.
2. 틀
만화에서의 글과 그림은 칸이라 불리우는 하나의 틀 속에 위치하는데, 이러한 틀은 시간과 공간을 배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공간의 크기와 시간의 길이는 칸 자체보다 틀 안의 내용에 의해 규정된다. 특히 시간의 경우 칸 안의 글이 설명인지 소리인지에 따라 그 시간의 길이가 달라지며, 칸 안의 그림에 동작선이 표현된 경우에는 동작에 필요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칸은 자신의 모양과 크기를 변형시킴으로써 독자가 지각하는 시간과 공간의 느낌에 영향을 줄 수가 있다. 짧은 칸 사이에 긴 칸이 위치하는 경우 독자들은 긴 칸에서 걸린 시간이 짧은 칸에서 걸린 시간보다 길다고 느낀다. 또한 틀의 크기를 종이끝까지 확대시킴으로써 공간의 무한한 확장을 통한 시간의 정지를 느끼게 할 수도 있다.
각각의 틀은 자체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틀마다의 독립된 내러티브를 연결하여야 만화의 진행이 원할하게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생산자의 그림의 배치뿐만 아니라 수용자의 틀간의 참여 또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Ⅲ. 만화의 즐거움의 요소
지금까지 만화의 구성요소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이러한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진 만화가 어떻게 즐거움을 발생시키는지, 그리고 그러한 즐거움에 대해 어떤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1. 즐거움, 이중적 평가
사람들의 즐거움에 대한 평가는 이중적인데, 일상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즐거움이 아닌, 대중매체를 통한 문화상품에 의해 보급되는 인위적인 즐거움일수록 이러한 이중적 평가는 더욱 극단화 된다. 만화의 경우에는 이러한 즐거움의 요소가 아무런 교육적인 내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된 수용자층이 청소년, 20대층인 까닭에 이들의 교육여건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저질의 나쁜 매체로 인식된다. 최근 정부에서는 학교를 중심으로 200m내에 만화대본소를 없애는 등 강력하게 만화에 대해 제재를 가하고 있다.
만화 뿐 아니라 대부분의 문화상품은 즐거움이란 요소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화에 대한 평가에서 또한 즐거움이라는 것은, 오락, 재미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즐거움에 대한 평가는 좌·우익을 포함하여 다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리비스 F. R. Leavis 는 대중소설이 ‘보상’과 ‘오락’의 중독인 형태를 제공한다고 언급하면서 이런 보상의 형태는 현실에 대한 직면을 습관적으로 거부하고 아예 연약한 도피를 하게 조장함으로써, 수용자에게 삶의 집착을 강화시키고 새롭게 하기보다는 더욱 부적절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재창조와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이들에게서 즐거움이라는 것은 그 당시 산업혁명으로 인해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던 노동에서의 소외를 잊어버리게 하고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양산하는 기제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교육을 통해 이런 대량문화의 중독성을 극복해야 하며, 소수문화로부터의 지적 자극을 바탕으로 한 감각적 즐거움만이 참된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학생들이 있는 대부분의 가정은 이들이 소위 노래방이나 만화대본소 등을 드나들 때 이들의 교육에 대해 가장 많이 걱정을 하게 된다. 이런 대량문화의 향유가 이들이 지금 필요로 하는 교육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즐거움, 재미라는 것은 한순간의 즐거움을 주는 저질문화의 부산물로서, 사회의 새로운 일꾼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아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해악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량문화가 양산하는 즐거움은 사회에 대한 학생들의 적응력을 떨어뜨려 그들의 갖고 있는 노동의 질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노동의 질적 저하는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노동이 질적인 면에서 충족되지 못하도록 만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화에서 주는 즐거움을 단지 보다 높은 정신적인 고매함을 방해하는 저질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반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문화가 주는 즐거움을 이데올로기차원에서 파악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량문화의 생산물과 생산과정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이들에게서 문화라는 것은 상부구조에 속하는 것으로 토대로부터 자유로운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문화가 어떤 생산양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문화의 효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현재의 문화에 있어서 토대역할을 하는 것은 자본주의 상품경제이다. 따라서 문화 역시 문화자체보다는 상품으로서의 역할이 더욱 중요시된다. 대중문화는 그 자체가 충족감을 바탕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표준화를 통해 규격화된 대중문화의 향유는 사람들이 긴장감을 가지고 그것에 몰두하게 만들기보다는, 같은 문화의 반복으로 인한 표준화된 수동적인 반응을 사람들로부터 도출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수용자는 이미 경험했던 것을 재경험함으로써 안도감을 획득할 수 있고 이로 인해 현실에서의 긴장감을 해소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안도감과 충족감은 문화가 주는 허위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대중문화 수용자들은 현실의 고도로 분업화된 노동으로 인해 긴장과 권태로 가득찬 날들을 보낸다. 따라서 여가 시간의 문화향유에서 그들이 찾는 것은 문화의 긴장감에서 오는 지적 즐거움이 아니라 단순화되고 반복적인 즐거움이다. 대중문화의 즐거움은 이제 문화에 대한 수용자들의 수동적인 노출을 통해 획득되며, 이렇게 획득된 즐거움은 다음날의 노동을 위한 충전제 역할을 하게 된다.
대중문화는 이제 수용자들의 여가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수용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것에 대한 경험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것에 대한 수동적인 충족감을 추구하도록 한다. 수용자들은 대중문화를 통해 현실에 안주하려 하며 현실부정적인 정치의식은 사라지게 된다. 또한 대중문화는 문화 상품이라는 이름으로 상업화함으로써 여가시간 내내 수용자들의 호주머니를 탐하는 역할까지 하게 된다.
2. 즐거움의 유지
현대 사회에서의 규격화라는 것은 이중적으로 작용한다. 규격화는 어떤 제품의 질량, 크기, 모양들을 정해진 규격에 따라 만드는 것으로 이는 서로 간의 교환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규격화된 제품들의 사용을 통해 서로 교환되지 않는데서 오는 자원의 낭비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보다 쉽게 제품의 구성품들을 교환, 수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규격화라는 것은 규격화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배재의 기준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회가 정한 각 제품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들은 이전의 제품들보다 뛰어난 효율성을 보유하여 그것이 오히려 새로운 사회의 기준으로 제시되지 않는 한, 소비자가 사용하지도 못한 채 사라지게 된다. 규격화는 원래 보다 효율적인 제품의 생산을 위해 이루어졌으나 이제는 새롭게 만들어 지는 것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사람이 무리를 짓고 사회를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규칙과 규범이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규칙과 규범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권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초기의 권위라는 것은 그것이 참이고 진리라는 이데올로기와 함께 유지되었다. 따라서 산업화이전의 단계에서의 권위라는 것은 신의 소리라는 이름으로 행하여졌다. 신은 언제나 영원하며 모든 자연을 창조하신 인간의 아버지로서 위치를 차지하기에, 그의 권위를 의심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항상 옳은 것으로 취급되던 신의 소리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에게로 그 권위가 투영되었다.
산업화 이후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합리성이다. 인간의 합리성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개인의 의견을 보다 존중하게 하기 위한 기제가 아니라 다수의 행복이 선이 되는 효율성을 바탕으로 한 기술적 장치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역시 인간의 물질적 충족감을 만족시키기보다는 자본의 자체 발전을 위한 자본의 합리성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개인의 행복은 다수라는 집단 앞에, 그리고 자본이라는 거대한 물질 앞에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규범과 규칙 속에서 규격화되지는 않았다. 규범에 의해 배제된 행동들이 허용되는 공식적인 시간이 우리에게는 주어진다. 중세시대의 카니발은 일년에 하루동안 신의 소리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일탈의 시간이다. 현대에서의 규격화된 시간 역시 주말이라는, 일상생활과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을 준다. 물론 이것이 새로운 노동력의 창출이라는 재생산의 의미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지만 일탈의 즐거움이 존재하는 그 순간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서 가치를 부여할 수가 있다.
즐거움은 자신들을 통제하는 권위에 대한 반발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권위는 어떤 대상에 대한 신성시를 유발하는데 즐거움은 그 신성시되는 대상을 비야냥거림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산업화 이전, 신성시되었던 대상은 그 사회에서 아직 개방되지 않은 영역 즉,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하고 낯선 공간 속에 위치했던 까닭에 그것에 대한 지식이 널리 유포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산업화 이전의 어떤 대상에 대한 신화화는 그 대상 자체의 특성 보다는 그 대상에 대한 일반적인 무지 때문에 발생되며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성시되는 대상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것의 궁극적인 의미보다는 발음상의 어감이나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상황 등에 더욱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성격의 신성시 현상은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심심치않게 발견된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그전에 신성시되던 대상들이 새로운 대상로 대체되었고 신성화하는 방법 또한 다양해지게 된다. 이전과는 달리 산업화 이후에는 신성시되는 대상들의 의미가 일반 대중들에게도 대부분 알려지게 된다. 그러므로 대상에 대한 절대적 무지를 통한 신성시는 그 가능성이 제한될 수밖에 없어졌다. 그러나 이전에 자신의 의미를 숨김으로써 자신을 신성화시키는 것과는 달리 보다 많은 다양한 의미들을 내포함으로써 궁극적인 의미를 애매하게 만드는 신성화 방식이 산업화 이후 등장하게 된다. 또한 상황에 따른 의미의 다양한 해석이 강조됨에 따라 궁극적인 의미보다는 그때그때 순간의 의미가 더욱 중요하게 된다. 더불어 대중의 참여 확대는 개인의 경험을 창조하고 각자의 의견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지금의 문화상품들은 집단이 아닌 ‘개인‘을 그들의 소구대상으로 만든다. 따라서 즐거움이라는 것은 집단적 저항의 형태가 아니라 개인의 일탈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3. 만화 읽기의 즐거움
만화에서의 즐거움이라는 것은 다른 문화상품과 마찬가지로 개인을 대상으로 소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문화상품들이 단순히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에 머물러 있는 것에 비해 만화그리기는 대상이 가진 형식에 대한 왜곡에서부터 시작하며 여기에서부터 만화의 즐거움 또한 시작된다. 더우기 대상이 가진 형식을 왜곡함으로써 느끼는 즐거움은 그 대상이 사회적 통념 아래 존재하는 기존의 방식에 대한 반발로부터 기인한다. 대상이 사회적 통념 아래 그 자체로서 존재하려는 것에 반발하는 만화는 그 대상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물론 권위마저도 부정하게 된다.
① 형식의 파괴
바르뜨는 관능적인 즐거움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육감적인 것은 바로 언어체계의 전복 그 자체이다. 텍스트 속에서는 두 개의 가장자리가 그려진다. 한 가장자리는 규정적이고, 코드화되었으며, 언어체계와 그의 질서를 존중하는 가장자리다. 다른 가장자리는 움직이며, 빗나가고, 변태적인 가장자리로 거기서는 받아들여진 언어적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따라서 이 두 가장자리들이 어느 것도 그 자체로서는 관능적이지 않다…. 텍스트의 육감성이 매장되어 있는 곳은 바로 그들을 분할하는 갈라진 틈이다.
만화는 여러가지 대상들을 풍자화한다. 특히 시사만화에서는 그날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만화로 그려냄으로서 그날의 주요 텍스트를 보조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텍스트에서 전달하지 못하는 감정들을 함께 표현해 낼 수 있다.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에서 보는 인물들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다르게 표현된다. 실물보다 훨씬 단순하면서도 인물을 특징지울 수 있는 요소들이 효과적으로 표현되도록 그려진다. 이는 다시 말해서 특정한 상황에서 인물의 인상이나 성격,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특징들만이 부각되며 나머지 것들은 생략되거나 단순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만화에 나온 인물들의 인상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만화 텍스트를 읽는 동안 인물의 의외적인 표정변화가 수용자의 눈에 들어오는 경우 수용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그 인물의 정형과 대립을 경험함으로써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또한 수용자가 일상 생활에서 간과하거나 볼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한 강조는 그들이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의미에 대한 권위를 깨어버리고 수용자로 하여금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가 만화를 보면서 웃는 것이 지금까지의 논의로서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단순히 그 사람의 특징만으로 그려진 그림은 단지 그 자체로서의 이미지로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만으로 만화의 즐거움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만화를 보고 웃을 수 있는 것은 인물이 표현되는 형태뿐만 아니라 사건이 진행되는 상황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만화의 단위는 틀이다. 각각의 틀 안에는 각각의 그림과 글로 표현되는 독자적인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여기서 독자적인 내러티브라는 것은 한 사건의 완결을 의미한다. 독자들은 틀 속의 글과 그림을 통해 나름대로 하나의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만화에서의 의미작용은 하나의 틀 안에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만화에는 틀들이 모여 만든 일련의 흐름이 존재한다. 나란히 놓인 틀을 읽어 나갈 때 이전의 틀에서 독자가 구성한 내러티브는 다음 틀의 글과 그림을 내러티브화 하는데 배경지식으로써 작용한다. 그리고 그 두 개의 틀이 가진 각각의 독립된 내러티브를 수용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직접 연결한다. 따라서 앞의 틀의 내러티브는 뒤따라 나오는 틀의 내러티브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만화 줄거리는 위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그 줄거리를 해치지 않는 한도에서 수용자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연결시키는 방식을 이용하여 내러티브의 극적 전개를 구성할 수도 있다. 일반적인 독자들은 이전에 전개되어 왔던 사건의 정황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서 다음 상황의 전개를 예측한다. 하지만 만화가는 수용자의 이러한 경험적 작용을 이용하여 일반적인 수용자의 경험에 반하는 의외의 상황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로 인해 수용자는 자신이 설정한 과정에서 벗어나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다.
브레히트는 그의 연극에 ‘낯설게 하기‘효과를 고안하면서 상품 소비자처럼 예술의 생산으로부터 배제된 채 다만 일방적인 소비자로 전락한 예술 수용자의 위치를 근본적으로 뒤집고 예술의 소비자를 예술 생산자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것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생산자 예술‘이라는 미학적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이런 낯설게 하기의 효과는 만화에서도 등장한다. 풍자만화의 상황설정을 보고 그것에 대해 당황한다는 것은 수용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변형되어 나타날 때 발생한다. 앞의 틀에서 제시되는 상황에 미루어 봐서 뒤따라 나와야 할 것들이 계속해서 등장하지 않을 경우 수용자는 수용자 자신의 사고체계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는 기존에 수용자가 가지고 있는 담론과는 다른 형태의 담론이 사고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더구나 자신의 상식에 기반한 지식체계에서 벗어나,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담론과는 다른 의미를 만들고 이를 해독함으로써 수용자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
② 만화에서의 동일시
영화에서 나타나는 동일시 효과는 영화의 관음증적인 효과를 이용한다. 영화는 영화관이라는 공공장소를 통해 일반대중에게 다가간다. 이때 영화관은 하나의 커다란 방과 같은 역할을 한다. 불을 끈 방안에서 창을 통해 밖의 동정을 살피듯이 영화관에서는 껌껌한 곳에서 의자에 앉아 스크린이라는 창을 통해 영화를 들여다보게 된다. 스크린은 항상 빛이 나며 다른 것들은 극장 안이 어두움으로 인해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항상 그것에 고정된다. 스크린으로의 시선 고정은 스크린 너머의 상황에 대한 관음증적인 느낌을 가지게 하고, 영화에서 나타나는 관음의 대상은 따라서 스크린속에 비친 인물들의 행동이 된다. 더우기 이런 관음증적 현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영화 속의 인물들은 화면에 눈을 정면으로 맞추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그들을 지켜보는 우월한 위치에서 그들을 대상으로써 관찰한다.
하지만 만화에서는 이와같은 관음증적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만화는 자신의 틀을 종이 위에 그대로 펼침으로써 자신의 형식적인 모든 것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영화에서는 프레임(frame)이라고 일컬어지는 하나의 컷(cut)이 연속해서 영사됨으로 인해 그것들간의 구분이 없는 동영상이 나타나지만(눈의 잔상효과를 이용), 만화에서는 하나하나의 틀에 정지된 동작들이 구분되게 그려지며 그들간의 시간적 공간적 이질감 또한 그대로 드러난다. 따라서 만화에서 일어나는 동일시를 설명하기에는 창을 통해 아무도 모르게 다른 사람을 쳐다보는 관음증적인 효과로서는 충분하지 않다.
영화에서의 관음증적 현상은 동일시효과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영사기에서 나온 한 줄기의 빛은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스크린에 고정시킨다. 영사기에서 나온 빛은 따라서 관객들의 눈이 되며 더 나아가 그 스크린에 등장하는 인물들과의 동일시가 가능하도록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관객들이 동일시하는 방식에서의 수동적인 위치이다. 비록 관객들은 자신이 스크린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관찰자적 입장에서 그들과의 동일시가 일어난다고 생각하더라도 동일시가 이루어지는 대상은 그들이 직접 바라보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카메라에 의해 만들어진 영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관객들은 카메라에 영상을 담는 생산자의 입장을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이게 되며 아무런 여과과정을 거치지 않게 된다. 더우기 영화에서는 일방적인 동일시, 즉 화면을 바라봄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대상의 행동에 대한 지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는 순간순간의 화면들을 연속해서 내보냄으로써 이미 지나간 화면과 현재 스크린에 비친 화면, 그리고 나중에 나올 화면을 관객이 재구성할 시간을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언제나 지금 스크린에 비친 화면을 관객은 바로 자신의 현재의 시간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비록 화면에 대해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화면이 스크린에 비칠 동안일 뿐이며 이 또한 이미 생산자에 의해 만들어져 있는 것일 뿐이다.
이와는 달리 만화에서는 각각의 틀 안에 존재하는 각각의 내러티브들이 종이 위에 연속적으로 제시된다. 만화에서의 내러티브는 각각의 틀 속에 있는 그림과 글에 의해 그 틀 내부에서 만들어진다. 각각의 틀 안에는 항상 인물과 그의 행동으로 인한 사건의 진행이 일어나 그것으로 한 문장을 만들 수 있다. 각각의 틀에 등장하는 인물이 주어가 되고 그의 행동이 술어가 되며 사건의 진행이 공간과 시간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만화는 영화에서와 같이 연속적이지 않을 지라도 이같은 각각의 내러티브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화의 전체 줄거리는 이들 간의 연결을 통해 만들어지게 된다. 따라서 만화는 이들 각각의 틀 간에 연결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때 만화에서 각각의 틀과 틀사이의 관계를 맺는 것은 서로 다른 주어를 가진 문장들을 연결시키는 것과 같다.
영화가 연속적인 화면을 제공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만화는 틀과 틀 사이를 수용자가 자의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한다. 한 지면 위에 펼쳐져 있는 틀 간의 흐름은 비록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수용자는 이들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계속적인 흐름으로 이어나간다.
또한 수용자가 만화를 볼 때 자신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하나의 틀은 현재 시간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가 눈을 다른 틀로 옮기면 다른 틀에 있는 그림과 글이 현재로 나타나게 된다. 그 결과 비록 자신이 이미 읽고 넘어가 버린 틀 역시 언제라도 수용자의 의지에 따라 현재로 환원될 수 있다. 이처럼 만화는 수용자들의 매체에 대한 참여의 방식을 가장 잘 구성할 수 있는 매체이다.
만화를 보는 수용자는 이제 펼쳐진 대상을 단지 바라보는 수동적인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그 의미를 자신이 직접 연결시키는 능동적인 관객으로서의 위상을 점유한다. 이러한 능동적인 작업을 통해 수용자는 만화의 주인공과 상호작용을 하며 자신을 만화에 투영시킨다. 하지만 만화는 이미 자신이 거짓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장치를 수용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만화의 기본 단위라 할 수 있는 틀을 화면에 직접 드러내는 까닭에 그 틀 속으로의 완벽한 관음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만화는 수용자들이 언제 그 꿈속에서 깨어날 지 모르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만화는 많은 수용자들을 사로 잡을 수 있는 매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는가?
③ 만화의 과장성
만화에서의 과장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형식에서 드러나는 과장이며 다른 하나는 내용에서 드러나는 과장이다.
만화가가 어떤 대상을 그림으로 그릴 때에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모든 특징을 동등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만화가는 그 중에서 가장 자신의 의도에 맞는 대상을 찾아, 혹은 그 대상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특징을 찾아내어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박재동의 만화에서 김영삼은 항상 큰 이마에 비해 코와 눈이 작게 묘사되고 김종필은 그의 뻐드렁니가 그의 얼굴의 반이상을 차지하는 이유가 바로 이와 같은 만화가들의 표현 방식 때문이다. 형식에서의 과장이라는 것은 대상의 주된 특징을 확대하고 다른 것들을 단순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만화가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캐릭터의 성격에 부합하는 종류의 과장기법을 사용하고 이를 수용자들이 해독하도록 한다. 이러한 과장에 대한 해독을 통해 수용자들은 만화가가 그리는 캐릭터의 이미지를 파악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만화의 상황이나 사건의 배경, 진행 등을 보다 쉽게 해독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틀 사이에는 고정된 시간적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는 시간적인 왜곡이 일어난다. 즉 현실의 시간처럼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의 생략과 비약, 정지 등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또한 동일한 시간에 나타나는 현상을 다양한 공간적 관점에서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시·공간의 비약은 물론 현대의 뮤직 비디오를 중심으로 한 영상매체에서도 나타나지만 만화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런 방법들이 도입되어 상용되었다.
두번째로 내용의 과장은 만화 이외에 다른 매체에서도 가능한 방법이다. 특히 영화는 컴퓨터그래픽의 발달로 인해 실재 대상의 촬영을 통하지 않고도 가상적인 화면을 만들어 낼 수 있어 실재하지 않는 대상도 창조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가상 화면이 그 기술적인 한계 내에서 가능하다면 만화는 이와 똑같은 장면을 보다 쉽게, 만화가의 그림실력에 따라 마음대로 그릴 수 있다. 만화는 종이와 펜 하나로 만화가의 생각을 마음대로 나타낼 수 있는 매체다. 따라서 상황변화에 따른 장대한 화면을 보다 쉽게 제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세밀한 부분들까지도 화면에 옮겨 준다. 또한 만화에서의 캐릭터는 사람에서부터 동물에 이르기까지 자유롭다. 사람이 만화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동물일 경우에도 사람과 같은 생각, 말, 감정표현을 할 수 있다. 심지어 동물이 사람의 역할을 대신 할 때도 있다. 이와 같이 만화는 모든 물체에게 인간과 같은 특징을 부여할 수 있다.
Ⅳ. 만화, 문화의 장(場)에서의 위치
만화를 둘러싸고 있는 힘들은 무엇이며 그것들은 어떠한 효과를 발생시키는가? 그리고 만화에 대한 지배적인 인식이 있다면 그를 가능케 하는 권력은 무엇일까? 아니면 그러한 인지 방식은 어떤 배제 전략을 갖추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이 이 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이다.
우선 문화를 어느 최종심급으로 환원불가한 하나의(singular) ‘장’으로, 더불어 그 공간은 나름의 게임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만화 또한 그 문화의 ‘장’ 내에 자신의 좌표를 갖고 있는 ‘무언가’일 것이다. 그것의 가치는, 전제가 되는 경제적-사회적 조건을 매개로 하여 사회공간에서 그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지위에 따라 부단히 유동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구성물이다. 다시 말해, ‘만화’라는 기표에 정박하게 되는 기의는 만화를 엮고 있는 의미망의 역관계에 따라 계속해서 새로이 부여된다는 뜻이다.
현재 만화는 다양한 방면에 활용되면서 여러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와 함께 대중의 평가 또한 스펙트럼처럼 다양한 수준에서 이루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지배 담론은 만화를 저질문화나 어린이문화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이 짙으며, 그것의 시각적 유용성을 인정하여 그 형식을 차용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고급·대중의 선긋기를 통한 배제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어떤 문화에 대한 취향이나 기호는 구성집단의 사회적 성격을 표출하는 기능을 한다. 이것을 만화에 적용한다면, 만화를 소비하고 이용하는 집단을 고찰함으로써 그 집단들의 성격을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한 문화를 주로 수용하는 층을 통해 역으로 그 문화생산품이 되먹임을 받으면서 자리잡고 있는 위치를 가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 하위문화(subculture)로서의 만화
만화가 처한 문화 권력장에서의 지점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우리나라에서의 만화 소비현상을 살펴보자. 손쉽게 우리나라의 만화 소비층은 30대 이하의 연령 중심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그 내부에서도 뚜렷한 분화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소비성향은 20대와 30대 어른 중심의, 90년대 이전까지 만화산업을 이끌었던 ‘대본소’ 문화와 어린이와 청소년 층이 점차 적응해 가고 있는 ‘서점 판매 방식’으로 나뉜다. 이런 두 흐름은 각자 인쇄매체만화의 산업적 변화에 영향받은 바 크다. 전자가 대본소-만화공장 체계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서점용 단행본과 만화잡지-작가-일본만화 판촉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 하겠다.
이처럼 두 가지 소비 형태가 다른 사회경제적 배경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관찰가능한 문화적 지반이 존재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만화산업의 성장에 있어 핵심적인 구실을 하는 층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라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10대부터 30대까지 각각 자신의 만화유통구조에 맞춰 유소년기를 지나왔으며 그것에 준해 이후의 수용 태도를 또한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만화산업에 있어 타겟은 항상 어린이와 청소년에 조준되어 왔다. 그 시기에 받게 되는 ‘만화로부터의 세례’는 문화를 수용하는 데 있어 도구 또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개인의 ‘신체’를 통하여 경험된다. 신체에 각인되는 “(문화적) 경험을 통해 의식이 영향을 받는다”라고 전제했을 때, 사회화될 하나의 주체는 어린이와 청소년기를 통과하면서 겪게 되는 학교와 가정의 문화적 경험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된다고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하위문화의 구체적 형태인 ‘또래집단’ 문화라고 불리는 것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그것이 발전하여 ‘정서적 동맹’의 단계에까지 이른다.
그리하여 특정한 문화 혹은 사회집단에의 소속감과 동일시의 메커니즘인 정서는 기존 질서와 다른 가치체계를 채택하도록 유도한다. 그런 정서구조는 학교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가정생활의 규범과 금기로부터의 ‘도피와 해소’의 전략적 차원에 자리하고 있다(비록 그것이 ‘상징적’ 수준에 머물고 대체로는 결국 ‘자발적 타협’에 이르고 소멸하는 것이 보통이긴 하지만. 학창시절 몰래 훔쳐보던 책상 서랍 속의 만화책의 즐거움을 상기해 보라!). 이것들은 거의가 학업-권위-아버지 등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권력과 배치되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한 경향성은 곧장은 아니더라도 반(反) 학교 문화로 이어지게 될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문화적 일탈을 이끎과 동시에 학생들을 유혹하는 통로로는 전자오락, 비디오, 만화, 대중음악 등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특히 ‘신체-감각’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매체들이 학교에서의 지배적 문화로부터의 일탈을 주도한다. 하지만 그 덕에, 그 매체 각각은 학교와 가정에서 그를 사이에 둔 ‘숨기는 자’와 ‘찾는 자’라는 관계를 형성시킨다.
이와 같이, 만화가 기대고 있는 사회적 맥락은 문화적 헤게모니를 다투는 세대 간의 전장과 다름 아니다. 그 맥락 속에서 만화라는 미디어의 사회적 의미는 구속될 소지가 많다. 그리하여 만화는 그림과 말로 이루어진 하나의 작품으로서 이해되기보다는 청소년 하위집단이 형성하고 있는 반학교문화의 문제거리로 취급된다. 그래서 만화에는 당연히 통제와 그에 따른 처벌이 따른다. 왜냐하면 청소년 시기라는 것이 감성의 발산을 최대한 제한하면서 동시에 주어진 문화체계에 맞는 인간형을 만들어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해당 시기가 시스템에 순응한 ‘주체 형성(엄밀히 말해 재생산)’에서 있어 각별한 기간이므로, 즉 사회적 차원에서 그들이 핵심 관리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런 하위문화에 대한 제재의 중요성은 한층 크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체제 재생산의 기초적인 이데올로기 국가장치(ISA)로서 가정과 학교의 역할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푸코의 계보학적 방법을 빌어 이상의 논의에 어떠한 타당성 부여의 계기가 있었는가를 살펴보자. 근대에 들어오면 다기다종한 담론형성체들은 폭력적이고 이벤트 형식의 배제 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문과학의 도움을 받아 자기정당화의 길을 걷는다. 이것을 근대 교육 담론에서의 그림 그리기에 대한 배제에 적용시켜 보아도, 그 과정은 흡사하다. 그런 전략 중 문자중심의 논리와 그것과 결부된 나이주의 ageism는 주요한 효과를 생산하는 ‘진리에의 의지’이자 게임의 ‘규칙’이다.
먼저, 나이주의 또는 나이계서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적 제도로서 자리잡은 핵가족에 부합하는 이데올로기이며 이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관리’대상으로 위치 지우기 위한 근대의 산물이다. 세대를 구별지으며 ‘어린이’와 ‘사춘기’라는 개념이 처음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 것도 이와 연관된 것이다. 그들은 그런 이름을 부여받아 기본적 욕망조차 억압당하는, 그래서 욕망이 거세된 ‘순진한’ 존재로 상정된다. 기본적으로 성(性) 문제에 있어서 그것의 입지는 두드러진다. 그 기간들에 발생될 수 있는 무수한 문제를 좀 더 합리적이고 마찰없이 제어하는 장치가 요청되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그것의 중심에 학교 즉, 대중교육체계가 놓이게 된다.
성과 관련해서 ‘성교육’이라는 기제가 새롭게 형성되는 것처럼, 만화나 그림과 관련해서는 글 위주의 교육정책과 그에 따른 교육과정이 나타난다. 이는 ‘글과 그림의 분리’라는 결과를 낳게 되고 결국 문자의 승리를 안겨 준다. 이와 동시에 그림 영역은 전문가들의 분야로 떨어져 나가면서 그림을 통한 의사표현의 대중적 가능성은 단절되게 된다. ‘그린다’는 인간 본성적이고 미술적 보편성은 무시된 채 미술교육이 행해짐에 따라 창의성과 감성 -“미술의 표현이란 개념화와 추상화라는 정신작용 이전의 감각적 차원이 더 중요한 기본 바탕이라는 것이다.”- 발달을 오히려 억제시키는 결과를 양산하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또 다른 인문학이 인용되는데 그것이 바로 ‘문자중심주의’이다. 이는 사람의 성장사를 볼 때, 인간의 인식능력과 표현능력이 그림이라는 단순한 형태에서 문자라는 복잡한 체계로 진전되어 나간다는 견해이다. 그 이면에는 문자 시스템이 더 진보적인 것이며 그래서 (근대) ‘이성’적 관찰과 표현에 더 적합하다는 것과 밀접히 결부하고 있다. 그림에 비해 의미를 싣는 심도가 더 깊을 뿐 아니라 세련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비추어 본다면, 만화가 갖는 독자성과 고유함은 그대로 사장되어 버릴 가능성이 많다.
“현대 예술은 일관되게 ‘인간적인’ 요소, 즉 변별적이고 탁월한 것과는 대립적인 생성적이며 통상적인 것, 즉 열정, 감정, 느낌 등 ‘보통’ 사람이 ‘보통’ 생활 속에서 느끼는 일반적 감정의 속성을 거부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라는 것이 비록 ‘글’에만 적용되는 사실이 아니겠지만, 글 중심의 교육체계가 낳을 수밖에 없는 절름발이 감성 표현이 우선 시정되어야, 고급과 저질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넘어선, 만화 매체가 가질 수 있는 문화공간 내 위치가 올바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2. 상징 소구체로서의 만화
대중교육 부분에서는 철저히 금기시되고 있다는 앞 절의 논의를 제외한다면, 만화라는 표현양식은 꾸준한 성장 기로에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만화라는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광범한 이용을 이루어 낸 것인가?
우리는 그 이유를 대중매체와 그 문화가 전사회적으로 확장됨에 따라, 사람들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이 실체가 보유하고 있다고 여겨졌던 총체성이라는 것보다 드러나는 이미지, 상징을 중심으로 대상의 인지와, 기억, 표현이 이루어진다는 견해가 득세하게 된 오늘날의 추세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이런 견해를 뒷받침하는 이론으로서 ‘기호학’을 들 수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포장을 쓰고 전면적으로 등장하는 문화사조에 의해 이러한 경향은 한층 강화된다. 이러한 경향을 “야금술적 사회에서 기호술적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다국적 또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우세종’이 바로 포스트모던 문화인데, 그것의 특징은 가상이 현실의 재현(리얼리즘)마저 제압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이데올로기 보다 이마올로그(imaologue=image + ideologue)가 더 사람들의 시야를 지배하고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한다.
대중에 의해 파악되는 현실이 더이상 합리적인 것이 아님이 밝혀짐에 따라, 상징투쟁이 새로운 경쟁의 장으로 부각된다. 그렇게 되면서, 만화 또는 간략한 그림(삽화)의 형식이 여러 분야로 차용되고 있다. 만화가 지닌 제작의 간편함과 대량 복제의 용이함은 이를 더 확산시키는데 기여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해를 쉽게 하려는 목적-명료한 메시지 전달- 에 적절한 매체적 특성 또한 만화의 확산에 한 몫을 하고 있다. 그만큼 홍보(broadcast의 효과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만화는 지면광고에 주로 차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상품의 광고뿐만 아니라 정치광고 등으로 그 영토를 넓히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생산물이 시각적 공정(이미지 변형) 과정을 거치는 사회이며 그래서 대량의 이미지화된 문화적 체계를 생산하는 체제이다. ‘광경의 사회’라고 표현이 가능한 지금의 사회에서는, 모든 상품들은 이미지화되어 광고되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데, 만화는 그런 공정의 한 매체로서 중핵의 역을 소화하고 있다. 게다가 만화연관산업 특히 만화 캐릭터를 하나의 브랜드로 정착시키는 사업은 더 노골적인 이용 사례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정치가 하나의 ‘쇼’로 의미가 변환되면서, 정치과정의 이미지 전략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만화 이용 영역이 되었다. 이것은 만화가 부드럽고 친근하며 다가가기 쉬운 심상을 창출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이용한 대표적 사례이다. 이는 정부 정책의 대국민 선전물의 대부분에 만화가 빠지지 않고 삽입되고 있으며 선거에서의 후보 이미지 만들기에도 이용되고 있는 것으로부터 입증된다.
그러나 이렇듯 상업적·정치적 광고의 분야에서 그 활용 폭과 빈도가 늘어나는 것, 즉 만화의 영토 확장은 실제적 효과 측면에서는 학습적인 내용을 담보한 만화들이 가져왔던 인식 변화보다도 미미한 영향을 끼쳤다. 왜냐하면, 만화가 겉(형식)만을 다른 분야로 빌려 주었을 뿐, 줄거리 만화(comic strips)가 갖는 사회적 위상의 제고에는 별다른 힘을 발휘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임계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만화는 문자 (혹은 이성) 중심의 지배적 담론에 의해 하위문화로 치부되어 왔으나 점차 확산되는 상징과 이미지 (혹은 비이성)의 현실적인 힘을 바탕으로 그 활용도가 높아 가면서 그에 대한 인지가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 그러나 그것의 영향력 증가와 무관하게 (한국이라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것이 처한 문화적 장에서의 자리는, ‘순수’ 또는 ‘예술’-문화자본의 지배적 입장- 이라는 사회적 통념의 판단에 근거해 볼 때 아직 수준 이하라는 위상을 벗어나지 못 한 상태인 것도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Ⅴ. 나오는 말
앞에서 만화가 주는 즐거움이 만화의 어떤 요소와 관계가 있는가와 그런 만화가 우리 사회의 문화체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에 대해 논의하였다. 먼저 만화읽기의 즐거움을 노동력의 재상산적 기능을 담당하는 문화상품의 특성에 기인한 것으로 간주하기보다는 그것이 제공하는 즐거움이 사회에 대한 일탈의 효과에서 비롯된다는 관점을 취했다. 이를 바탕으로 문화에서의 만화의 위치 또한 단지 유치한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유치한 문화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규정하는 다양한 담론 속에서 하위문화의 일부로 위치지워져 있다는 논의를 도출해 내었다.
하지만 만화에 대한 섯부른 기대는 오히려 그것이 가지는 한계를 간과할 수 있다. 만화에서의 즐거움이라는 것이 비록 사회로부터의 일탈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만화의 언어로 코드화되어 있으며 만화 또한 그들의 규칙을 만들어 나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화에서의 일탈이라는 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만 가능하게 된다.
영상매체의 홍수 속에서 만화가 어떤 식으로 변화·적응할 것인지는 아직 단언할 수 없다. 만화가 문화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