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 브리너 [Yul Brynn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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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 1915. 7. 7 ~ 1985. 10.10
출신지 : 러시아 연방 블라디보스토크
신 장 : 178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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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이 면도된 대머리와 이국적인 용모로 유명한 대배우.
아버지 쥴리어스 이바노비치 브리너는 대한제국 말기에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규모의 수출입상사를
하고 있다가, 한국의 약 2백만에이커의 광활한 목재벌채권을 얻어낸 사람이라고 한다. 스위스 성인 브리너는
몽고인계의 피가 섞인 사람으로 러시아에 귀화해 살았던 것이다. 그후 거부를 상속받은 브리너의 아버지는
집시 여인과 결혼하였으니 율 브리너는 유럽인의 피, 몽고인의 피, 집시의 피가 혼혈, 그야말로 개성있는 용모는
당연할 수 밖에 없다.
일제때 만주 하얼삔에서 살았던 율 브리너 일가는 2차대전 후 블라디보스토크인근에서 반년동안 억류 생활을 했다.
호주방송협회의 선전부에서 일하고 있는 누이 캐더린 브리너의 회고록에 의하면 할아버지가 압록강 목재벌채권을
미하이로비치 대공에게 팔아 거부를 챙겼기에 종전때까지만 해도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의 어머니가 모스크바예술극장의 일류 여배우였다는 두가지 이유 때문에 스위스로 빠져나가려는
출국 비자를 거부받았으며, 이에 비자없이 탈출하려다가 잡힌 바람에 억류 생활을 하게됐다고.
그후 스위스 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어 이미 10대에 파리에 유학, 배우로 활약하고 있던 율 브리너와
합류하게 된다. 명성을 얻기까지는 유복했던 상속재산의 뒷받침이 컸다고 한다.
1920년 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난 브린너는 생전에 자신의 프로필에 관한 한 자세한 언급을 피했었지만,
1989년 그의 아들이 출간한 자서전에 의해 비로소 모든 과거가 알려졌다. 브린너 스스로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반은 스위스, 반은 일본인이며 본명은 테제 칸이라고 주장했었지만 거짓이었음이 확인된 것이다.
어머니와 함께 중국, 파리 등 세계 곳곳을 떠돌아 다닌 탓에 정상적인 학업을 하지 못한 브린너는 자퇴 후
러시아인 집시들과 어울려 다니며 나이트 클럽에서 공연을 하곤 했다. 서커스 공중 그네 곡예사 등 각종 직업을
떠돌던 중 미국에 여행을 간 것이 계기가 되어 뉴욕에 눌러 앉아 브로드웨이 무대, TV 시리즈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몇 년 후, 브린너는 브로드웨이에서 알게 된 배우 메리 마틴의 추천으로 해머슈타인의 뮤지컬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에게 일생일대의 부와 영광을 안겨 준 이 작품이 바로 <왕과 나>(1956)이다. 서양인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지는 태국의 황제를 연기한 브린너는 곧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영화화된 동명의 작품으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이 후 <십계>(1956), <대장 블리바>(1962), <나레르바 전투>(1969)
등에서 특유한 매력을 선보인 율 브리너는 세계적인 스타가 된 이후에도 자신의 연기 영역을 넓히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이집트 파라오에서부터 서부 총잡이까지 섭렵하였고, 사망할 때까지 대머리와 특이한 발음을 고수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왕과 나>의 세계 순회공연에 열중하였고, 폐암으로 쇠약해져 가는 중에도
금연 캠페인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다.
배우인 버지니아 길모어, 도리스 클라이너, 재클린 드 크로셋의 전남편이었으며, 사망 당시의 부인은 캐시 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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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러시아블라디보스톡에서 출생하였다. 배우가 되기 전 서커스단의 곡예사로도 활동하였던 그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던 중 미국에서 정착하게 된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하고 TV시리즈에도 출연하는 등 조연으로서 활동을 하던 그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인 <왕과 나>에서 서양인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지는 태국의 황제로 출연하며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토니상을 수상하였다. 이 후 영화화 된 이 작품에서 데보라 카와 함께 출연하여 오스카 남주주연상을 수상했다.
<십계>, <아나스타샤>, <나레르바 전투>, <황야의 7인> 등의 작품에 출연하며, 특유의 발음과 헤어스타일을 트레이드 마크로 한 독특한 매력을 선보였던 그는 1985년 10월 10일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율 브리너 (Yul Brynner, 1915 ~ 1985)
1956년 '왕과 나'라는 뮤지컬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빡빡깎은 대머리로 주인공인 샴왕역을 맡은 배우는 대뜸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습니다. 바로 율 브리너라는 배우가 이렇게 탄생하였죠.
이 왕과나는 사실상 율 브리너의 '데뷔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공식적인 그의 데뷔작은 1949년도 작품인 '뉴욕항(Port of New York)'입니다.
하지만 '조연'으로 등장한 이 영화 이후 그는 무려 7년만에 '왕과 나'라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고, 여기서부터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연극배우이자 TV에도 여러번 출연했던 그는 무대에서 맡았던 역할을 영화로
만들어지는 작품에서도 동일하게 맡게 되었고, 뮤지컬로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대스타 여배우인 데보라 커와 함께 공연하였고, 멋진 중후한 음성을 자랑하며
좋은 연기를 보였고, 빡빡깎은 대머리의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보여주죠.
다소 '우스꽝스럽고 코믹한 모습'으로 출연한 이 왕과 나로 아카데미상을 받은
배우 대열에 이름을 끼워 넣은 그는 같은 해 세편의 대단한 영화가 개봉되는
활약을 합니다. 역사상 몇 손가락에 꼽을 대작인 '십계'에서 모세의 연적인
'라메시스왕'역을 맡아서 왕과나 와는 다른 '강렬하고 날카로운'역할로 진지한
연기를 보여주죠. 한 해에 왕 역을 두편이나 맡는 진기록을 세운 셈입니다.
그리고 '잉그리드 버그만'과 공연한 '추상(Anastasia)'이라는 영화에서도 등장합니다.
대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헐리웃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이 영화에서도 그는
'중후한 바리톤 음성'으로 멋지게 노래를 부르죠.
1956년에 개봉된 율 브리너의 영화 세편은 이렇듯 모두가 화제작이었습니다.
왕과나와 십계는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르며 굉장한 흥행을 기록하였고,
추상은 잉그리드 버그만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합니다. 1년간 이렇게 큰 활약을
'데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배우가 해내는 것도 보기 드문 일이죠.
이렇게 무명에서 1년만에 스타가 된 율 브리너는 '대머리'라는 특징과 굉장히
날카롭고 부리부리한 눈매, 오똑한 콧날 등 확실하게 각인되는 외모를 바탕으로
탄탄대로를 달립니다. 50년대 그가 출연한 영화들은 '카라마조프의 형제'
'대해적' '여로'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같은 대작들이었죠.
특히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에서는 타이론 파워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대신 출연하는
행운을 누리게 됩니다.
그와 공연한 여배우들도 대단한 스타들이죠. 왕과나와 여로에서 공연한 데보라 커
추상의 잉그리드 버그만,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마리아 셀,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의
지나 롤로브리지다 등 쟁쟁한 이름이죠.
1960년 그는 한편의 영화로 '또 하나의 상징적 카리스마'를 얻게 됩니다.
바로 율 브리너의 영화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 '황야의 7인(The Magnificent Seven)'
입니다. 'O.K목장의 결투'와 '고스트타운의 결투'등 서부극에서 주인공의 이미지를
잘 살리는 감독으로 알려진 존 스타제스가 만든 야심적 서부극인 황야의 7인은
일본의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의 걸작 '7인의 사무라이'를 미국식으로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율 브리너를 위시한 7인의 배우가 등장하죠.
여기서 율 브리너는 특유의 '검은 복장'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 복장을 향후 그가
출연하는 서부극에서 '율 브리너 = 검은 복장'이라는 상징을 얻게 됩니다.
황야의 7인은 엘머 번스틴의 빠르고 힘찬 음악도 일품이지만, 율 브리너를 위시하여
스티브 맥퀸, 찰스 브론슨, 제임스 코반, 홀스트 부크홀츠, 로버트 본 등 60년대에
맹활약을 하게 되는 배우들의 '스타 등용문'이 된 영화였죠. 이렇듯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율 브리너는 주인공이자 리더인 총잡이역으로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댑니다.
60년대에 출연한 영화중 '대장 부리바' '태양의 제왕'은 대작 사극이었죠.
이 두편의 영화를 통해서 율 브리너는 역시 '리더'나 '왕'같은 역할이 딱 어울리는
배우라는 인식을 더욱 확실하게 심어주게 됩니다.
소련의 사할린에서 1915년에 출생한 그는 41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왕과 나로 스타덤에
들어섰고, 이후 약 10여년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데, 동서양을 혼합한 듯한 독특한
외모와 강한 카리스마, 중후하고 멋진 음성 등을 장점으로 강하고 힘찬 역할을 주로
맡게 되죠.
60년대에 출연한 영화중에는 '더블맨' '트리플 크로스' '건파이터의 초대' '속 황야의 7인'
'대장 부리바'등이 그의 대표작 반열에 오를만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아쉬운점은
이 작품들이 50년대에 그가 출연한 '왕과나' '십계' '카라마조프의 형제'같은 영화에는
다소 뒤진다는 점이죠. 60년대 후반이후 율 브리너가 출연한 영화들은 그다지 두드러진
걸작이 없다는 점이 비교적 '짧은 전성기'를 누린 배우라는 인식을 주게 하는 것이죠.
그나마 1973년에 출연한 '에스피오나지(Le Serpent)'라는 영화 정도가 괜찮은 작품이었고,
'네레트바 전쟁' '판초빌라' '캐틀로우' '아디오스 사바타'등의 영화는 그의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다소 실망스런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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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그는 'SF영화'에서 비록 나이는 들고 배는 나왔지만 '황야의 7인'에서의 모습과 같은
카리스마를 한번 연출합니다. 이미 '속 황야의 7인' '건파이터의 초대'등에서도 입고 나왔던
서부극 특유의 '검은 복장'으로 등장한 '웨스트월드(Westworld)'라는 영화에서 그는 마치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왈체네거를 연상하듯, 무뚝뚝하고 징그럽게 쫒아다니는 '로보트'
역할을 합니다. 나오는 장면은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죽지 않고 계속 질릴 정도로 결투를
신청하는 무시무시한 로보트 역할로 보여준 카리스마는 그의 '마지막 열연'이 된 셈이죠.
이후 이 영화의 속편격인 '퓨처월드(Futrueworld 76년)'를 마지막 출연작으로 그의 영화인생은
끝이났죠.
그는 영화뿐만 아니라 무대배우로서도 끊임없이 활동하였는데 1985년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계속 연극 '왕과나'에 출연하여 총 4천회가 넘는 공연기록을 세웠습니다. 30대에서 60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왕과 나에 출연한 셈이죠.
'아이언 맨'이라는 별명을 지닐 정도로 '강한 남자'의 표본같은 율 브리너의 이미지였지만
그도 '담배'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는지, 그의 폐암소식이 알려지자 세계 영화팬들의 충격은
컸죠. 정말 나이와 세월 앞에서 장사는 없듯이, 영화속에서 누구보다도 강인한 왕이었던
그는 무려 하루에 100여개피를 필 정도의 애연가였던 자신의 몸이 담배로 인하여 썩어들어가
70세의 나이로 폐암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죠. 말년에 그는 금연에 대한 홍보를 할
정도로 담배에 찌든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흡연의 해로움을 알리기 위한 호소하는데 바쳤습니다.
실제 영화속에서 율 브리너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쉽게 발견합니다. 정말 끊임없이 담배와
같이 살았던 것이 그의 인생이었죠. 그는 '담배'와 '음악'을 사랑한 배우였습니다. 영화속에서
그가 중후한 음성으로 노래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작품이 몇편이 됩니다.
왕으로서, 장군으로서, 서부극 총잡이로서의 위용을 과시하면서 스크린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율 브리너의 약 20여년간의 영화속 삶은 아주 길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매우 짧지도 않았던,
매력적인 영화속 삶이었습니다. 황야의 7인, 왕과나, 십계, 대장 부리바 등에서 보여준 그의
강렬한 인상과 연기는 오래도록 영화팬들속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ps : 요즘 흘러간 고전들이 무수히 DVD로 싼 가격으로 쏟아져 나와서 고전팬들을 기쁘게 하는데
유독 '율 브리너'의 영화들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출연한 '대해적' '카라마조프의 형제'
'여로' '태양의 제왕' '더블맨' '에스피오나지' 등의 작품이 출시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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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의 영화는 대장 부리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