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세아서의 연구 (논의 및 적용측면에서) - 작성자/ 윤철희
1. 내용설명
가. 역사적 배경
호세아는 같은 시대의 8세기(BC 800~BC701)에 활동한 선지자들 이사야, 미가, 아모스1)와 함께, 북 이스라엘 왕국 여로보암 II세의 말기(BC753년~746년)부터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된 BC 722년 이후까지 활동했던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였다.2) 북이스라엘의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는 막강한 힘을 가졌던 여로보암 II세가 죽고 나서 계속된 찬탈로 인해 급격히 나라가 기울고 있었던 시기이었다. 이제까지 하나님은 여러 차례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회개하고 돌아설 것을 경고했지만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더욱 패역해 가고만 있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별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패역한 타락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고(호 4:11-14)3), 그러자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최후의 경고 메시지를 선포하셨던 것이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호 1:9).
나. 전체 줄거리
호세아는 아모스와 같이 이스라엘이 계속되는 죄 가운데서 남아 있을 경우 앗시리아의 포로가 될 것임을 미리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정말로 살아서 그 비극적인 날을 보았다. 호세아 선지자의 삶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아주 실제적으로 투명 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야훼께서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한 매춘부와 결혼하라(1:2)고 하셨던 것이다. 말할것도 없이 그 신실한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였고, 그 후에 세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들의 이름은 모두 이스라엘과 집을 나간 부정한 아내 고멜(Gomer)의 죄를 암시했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그 불운한 호세아는 타인의 음부가 된 고멜을 보았다(3:1). 음부가 된 자신의 아내를 보고 혐오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시 사랑을 준 그 선한 남자는 다른 남자에게서 값을 치루고 그녀를 다시 사왔다.
호세아는 그러한 고통스런 경험을 하면서, 애굽의 속박에서 불런낼 만큼 자기의 신부인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상한 심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도 하나님은 손을 뻗어 그의 음부를 용서하고 깨끗하게 하실 준비를 갖추고 계시나 이 민족은 들으려 하지 않고 있다(6:1-3; 11:8; 14:1).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이스라엘은 애굽과 앗시리아 같은 다른 애인을 찾고 있어서 하나님의 큰 사랑은 짝사랑으로 그치고 말았다(7:11).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에게 돌아올 때가지(13:9-14) 징계할 자들에게 그의 백성을 넘겨 주었다(9:1-6).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이 그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는 그들을 자유롭게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14:4).4)
다. 전체장(障)의 구성
신약에 호세아서가 인용되어 횟수는 총 30회 정도이고, 호2:23절이 롬9:25, 벧전2:10절에 호6:6절이 마9:13,12:7절에, 호10:8절이 눅23:30절에, 호11:1절이 마2:15절, 호13:14절이 고전15:55절에 각각 인용되어 있다. 또한 히브리 성경 분류법에서의 호세아서의 위치는 선지서(prophets,네비딤) 8권의 책중, 성문서(the writing/케투빔 11권)의 오축(five scrolls;megilloth)과는 달리 12책(冊)의 한 두르마기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호세아서 1:1절의 내용은 발신이 여호와로 수신이 호세아, 브에리의 아들로써, 날짜는 웃시야의 때임을 말하고 있고, 북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는 선지서 곧 암모스서와 함께 호세아서는 유다 왕과 이스라엘 왕을 교차적으로 소개하되, 먼저 유다 왕을 그 다음으로 이스라엘 왕을 소개하고 있다. 아모스는 유다 왕을 웃시야 한 명으로만, 호세아는 유다 왕으로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4명을 거론함으로써, 이것은 8세기 선지서가 유대 왕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성격을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호세아는 묵시 또는 이상(하죤)으로서의 말씀 대신“말씀”그 자체만을 거론하고 있음을 유의하여 살펴보아야 한다.5) 다시 정리하면, 호세아 1:1절은 첫째, 시대의 배경으로서 유다 왕과 이스라엘 왕을 동시에 소개하고 있다는 점과 둘째, 호세아가 브에리의 아들이라 하여 역사성을 강조하며, 셋째, 이사야, 미가, 암모스의 각 표제어인 1:1절의 신탁의 수용에 관한 용어로“하자”(히,보다)를 사용하지 않고 다만,“하야”(임하다,이다,일어나다)만을 사용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하나님의 말씀을 호세아를 통하여 유기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세아서의 구성에 대하여 다양한 분류법이 있지만, 여기서는 Guenther의 이분법의 것으로 이러한 것을 압축개관과 반사형 구조 문학형식으로 소개한 B. K. Waltke 교수의“압축요약 - 확장재개법”(synoptic-summary/resumptive-expansive method)6) 에 의하여 소개하면서 기술하고자 한다. 이것의 가장 큰 장점은 성경을‘유기적 통일성’라는 관점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성경 계시에 대한 독자의 전체적인 안목을 어느 정도 넓혀줄 것으로 기대된다.
호세아서는 크게 1장~3장까지의 1부와 4장~14장까지 2부로 구분할 수 있는데, 2부는 1부의 확장 재개하는 방식으로 반사형 또는 가위형 구조(Chiastic Structure)를 취하고 있다. 다시 이것의 2부(4장~14장)에 대하여 압축요약 확장 재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즉 4장1~3절이 4장4절부터 14장 8절까지를 압축요약하며, 4장4절부터 14장8절이 확장 재개하는 방식을 나타내고 있다. 좀 더 본문을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확장재개시 반사형, 가윗형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데, 1장4절~5절의 이스르엘이 진실(4:1)로, 로루하마의 1장6~7절이 4장1절의 인애(헤세드)로. 1장8절~11절이 마찬가지로 4장1절의 지식으로 반사형, 가위형 구조로 확장 재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시 2부에 가서는 이것의 지식(4:4~6:3)과 인애(6:4~11:11)와 진실(11:12~14:8)이 풀어 헤치는 것으로 동일하게 확장 재개시 반사형, 가위구조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진실->인애->지식이 지식->인애->진실의 형식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1부인 호세아 1~3장까지의 위치가 4~14장에 대한 압축 요약으로 호세아와 고멜과의 언약관계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언약관계를 과거(언약파괴, 결혼과 가정), 현재(심판, 이혼), 미래(회복, 재혼)를 비추어서 저자는 소개하고 있으며, 2부의 각 부분(A', B', C')은 이하 1부의 내용과 같이 비난, 심판, 회복의 세 국면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첨언하면, 장르 및 연설의 양식에 있어서 호세아서 1~3장의 신탁들을 개관하는 일은 호세아서 4~14장의 신탁들을 개관하는 일보다 더 쉽다고 한다. 예를 들면, 호세아서 1:2~9절은 심판의 연설이며, 1:10~2:1절은 구원의 연설이다 라는 것이다. 인용하면, 호세아서 4~14장에서는 구원에 관한 내용을 심판에 관한 내용으로부터 그 어조에 따라 구원해 내는 일은 비교적 쉽다는 것이다.7)
라. 각 이름의 성격
‘호세아’(Hoshaiah) 라는 이름은 여호와는‘구원’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신망형(信望形)의 이름을 가진 다른 선지자들, 엘리야, 이사야 등의, 즉 “엘”,“야”로 끝나는 선지자들과는 달리‘호세아’는 구원이라는 폭넓은 의미의‘예수’,‘여호수아’와 같은 명칭의 뜻을 함유하고 있다. 호세아가 비록 빵 만드는 자(호7:4~7)나, 농부의 삶(호6:11)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단지 선지자라는 것 외에는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모른다.8)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신망형(信望形) 명사로“God sows”(하나님의 씨)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여기서는 고유명사로 사마리아와 갈리리 고지대 사이에 펼쳐지는 계곡, 광야를 일컫는 지역명이요, 또 하나는 사울이 전사한 길보아 근처의 성읍이다. 호세아서에서 쓰어진 의미는 호세아 1:1~9절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이 그 핵심이기 때문에 위의 길보아의 갈리리 지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6절의 로루하마, 9절의 로암미의 불길한 예조(豫早)9)와 그 궤를 같이 한다 할 것이고, 호세아에게 있어서 마치 이름을 히로시마, 아우스비츠, 삼풍(백화점) 이라는 말로 지으라는 제안을 받은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4절의 이스르엘이 로루하마, 로암미와 같은 부정적 의미로 쓰어야 함에도 후자의 둘이 각각 루하마, 암미로 개명되어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언약의 사랑에서 기인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10)
그렇다면‘로루하마’와‘로암미’라는 이름에 담긴 하나님의 애절하고 안타까운 심정을 헤아리기 전에 지역적 고유명사로서‘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이 갖는 주요한 의의가 무엇인가를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다. 구약성경에서 이 지명은 사마리아와 갈리리 고지대를 연결하는 이스르엘 평야를 말하는 것으로 “빵 광주리”라 불리만큼 비옥하고 방대한 곡물을 산출하는 경제적 요충지이었다. 요시야 왕이 므깃도에서 전사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남북을 잇는 요로에 있었기에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남쪽의 애굽과 북쪽을 앗수르 등은 이를 점령하기 자주 공격하였던 곳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이와 같은 사건을 반증하고 있는데, 1) 오므리 왕조 때 사마리아 외의 제2왕궁 터(왕상18:45~46:21, 왕하8:29), 2) 아합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강탈한 곳(왕상21:8~14), 3) 예후가 오므리 왕조 마지막 왕 요람을 죽여 오므리 왕조를 폐한 곳이다(왕하9:24~26) 4) 예후에 의해 이세벨의 시체가 거름같이 취급받던 곳(왕하9:30~37), 5) 예후가 아합 추종자들, 친구, 제사장들을 죽인 곳(왕하10:11)이다.
이에 따라,‘이스르엘’은“피의 성읍”이요“피의 골짜기”라고 할 것인데,‘이스르엘’은‘피흘림’과 동일시 된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반증하고 있는 것은“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4절)대한 히브리 원문의 뜻,“내가(하나님) 이스르엘의 피로 예후의 집에 방문할(파카드) 것이다”에서도 알 수 있다. 강조하면, 이스르엘의 피흘림은 예후 왕가도 그 악(惡)이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때가 이르렀음을 호세아가 예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호세아의 이러한 예언은 오래지 않아(주전752년) 예후 왕조의 마지막 왕 스가랴가 살해됨으로써 성취되었다.11)
6절의 ‘로루하마’의 뜻에 대해서 살펴보면, 히브리어로“그녀가 긍휼을 입은 바가 되지 않다”(she has not been shown compassion) 라는 히브리어 문법상 “푸알”완료형의 뜻으로 이름 자체에서 이미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예견되고 있다. 히브리어“로”는 부정의 의미로 “루하마”의“긍휼”“자궁”이라는 의미와 합성한 것으로 호세아는 출애굽기의 언약주 되시는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출34:6)12) 또한 로암미는 히브리어로“내 백성이 아니다”의 뜻으로 6절의“로루하마”와 같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2. 논점제시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심정이 정숙치 못한‘고멜’을 통하여 남편인 호세아가 경험하는 것과 유비적 관계로 표현하고 있다. 전적으로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관계인 결혼이라는 관계를 통하여 언약의 파기를 가져온 이스라엘의 백성들에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간절히 호소하는 그 지극한 사랑을 호세아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세아서의 주요한 논점이 하나님과 백성과 맺고 있는 언약에서의 측면과 호세아의 결혼과 함께 보여지고 있는 심판과 구원의 관계를 본 호세아서는 충분히 설명하고 있음에 따라, 이러한 각 주요한 논점(언약, 결혼, 심판과 구원)을 하나씩 간단하게나마 살펴보기로 하겠다.
가. 언약적 측면
모든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호세아서의 메시지의 배경에는 모세언약인 시내산 언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용하여“호세아서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은 시내산 언약을 이해하는 것에 달려 있다. 호세아서를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에게 선포되어진 일련의 축복과 저주들을 담고 있다. 이 각각의 축복과 저주는 각각 모세 율법의 축복과 저주에 근거하고 있다”라는 스트어트(Stuart 1987.6-7)13) 이말은 일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는데, 신명기 28:17~18, 32:24~28를 증거구절로 사용하여 호세아서 4:10~11a절14)까지를 언약의 파기로 인한“기근과 불임(不姙)”으로 해석하고 있다.
언약관계에서 유심히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호세아 스스로가 때때로 자신의 메시지에서 언약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명시함으로써,‘이스라엘은 언약을 깨뜨린 것 때문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호세아서 6장7절에서“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과 8장1절에서는“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 호세아의 결혼
호세아는 한 여인과 결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는데, 이러한 도구는 우리는 호세아서의 한 소재로써의 결혼이 언약의 증표로써 상징적으로, 또는 신학적으로 적극 사용됨을 알 수 있다.‘고멜’이라는 여인의 정숙치 못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인간의 결혼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관계는 서로 간에 아주 밀접하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통해서 유비적(analogical)으로 사용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호세아로부터 다른 선지서들까지도 예를들면, 예레미야서, 에스겔서에서도 신약으로 흘러들어가는 마지막 주제는 항상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이 인간의 결혼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결혼과 언약이라는 관계의 신학적 상응성(相應性)으로 고멜의 성적인 방탕과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방탕과는 같은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함은 바로 호세아서 전체의 메시지에 대한 요약이라 할 것이다.
다. 심판과 구원15)
심판과 구절에서의 측면에서 나오는 호세아서의 중요한 구절의 신약인용은 바울의 서신인 로마서 9장25절16)에서 그대로 인용되고 있으며, 베드로전서 2장10절17)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일부가 될 것임을 시사함에 따라, 호세아 선지자의 자녀들의 이름들을 각각 부정적인 용도에서 긍정적인 용도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불순종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미래의 구원에 대한 소망 등을 앞에서 언급한 결혼으로 상징된 언약이라는 기초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배교행위로 인하여 불순종에 대한 심판의 필연적 수반을 동반하게 되지만, 치료하시고 싸매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호세아6장1절18)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만, 말씀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말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참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을 떠나서 이방의 우상들로 대신하였다, 특히, 이스라엘이 길을 잃게 만든 것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당시 정치지도자들이었다.(호4:6,5:1,6:9,10:5) 그들의 패망의 원인이 하나님을 존재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을 바로 앎의 지식이 없음에서 그 원인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뢰감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자신들의 국가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자신들을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권자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 선호하는 것에서 적실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다.(호5:13,7:8,8:9)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엄하게 벌하시겠다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돌아오지 아니함으로 주전 722년에 북쪽의 앗수르인들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을 때 말씀의 언약이 성취되어졌으며, 그 다음으로 이어서 주전 586년에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완전히 항복되어 성전이 파괴되고 남은 생존자들이 유배를 당했을 때 그 신실한 언약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처럼 심판에 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호세아의 심판의 메시지는 또 다른 미래에 대한 소망을 말해주고 있다.(호11:8~9절)19)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심판과 포로생활 속에서 영원히 남아 있도록 버려두시지 않으실 것을 약속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결과로 오늘의 교회시대를 포함하여, 이중적인 메타포(meraphor)구조 형식으로써 역사상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출애굽을 경험하도록 하셨다.(호2:14~15)20) 이것은 심판과 회복이라는 그들의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생긴 상처들을 치료하시고 싸매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생생하게 목격하게끔 한다. 호세아서가 오늘날에도 바로 적용되는 것은 바로 호세아 2장16~20절에서 다음과 같이 오늘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3. 결론과 적용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대표자로서의 호세아 선지자는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처절한 인격(품성)을 동반한 비참한 삶을 통하여 그 시대 하나님의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다했다. 하나님의 대사로서 그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으로 긴밀한 관계에 의하여 하나님의 비밀하신 뜻을 알고,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을 대표하였다. 물론, 호세아 뿐 만 아니라, 사무엘, 엘리사, 예레미야, 아모스 등이 그러하였고, 신약에서 바울 사도 역시 고린도 교회에 대하여“우리들은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라 하여 복음 종사자들은 복음전파를 위한 단순한“매개체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복음의) 내용 그 자체”이라 하였다. 이것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육신으로 몸소 구현(具現)하셨듯이 이 선지자들은 자신을 첫째, 하나님과 둘째,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일체화시켰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보여 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십자가의 피흘림으로써 구속의 완성을 이루신 참 순종의 그것이다. 또한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님의 나아지심의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은유적 표현방식의 일환으로 사용 한 것처럼 특별히 눈여겨 볼 것은 신실한 종 호세아가 고멜과의 결혼함과 떠나버린 그녀를 다시 데려옴은 자기 백성의 배반에 따른 하나님의 심적 고통을 이스라엘로 깨닫게 하는 고도의 몸소 보여주시는 행동적 설교 말씀을 호세아 저자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려해도 나아갈 수 없는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 무능함과 하나님의 참담한 심정을 동시에 체험한 호세아는 그의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선지자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 자체는 바로 복음이었다. 나중에 고난 받는 종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의 무지함에 대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다. 하나님과, 그의 택하신 백성과, 그리고 메시지와 일체를 이루신 전형(前形)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유비(analogy)로서 호세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유형(type)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호세아에 대한 대형(anti-type)이며, 실체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이들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과(罪科)의 결정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호세아 4:6절에서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본문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무지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게 됐음을 기소형식(law-suit pattern)21)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율법이 사라졌다거나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불신앙의 상태에 처해 있다는 지적이 아니다. 외적으로 여전히 저들에게는 율법이 있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행위가 존재하고 있었다. 문제는 제반 구약의 종교행위가 율법의 본질과 본래의 정신으로부터 심히도 왜곡되었을 뿐 아니라 위선과 가식과 형식적으로 변질돼 버렸다는 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는 너무나도 부패해 버렸다는 지적이다(사1:11-14, 암4:4-5).
이와 거의 흡사하게도 신약의 로마서 기자는 당시 유대교의 실체를 진단하면서“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義)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義)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해명하고 있다. 그렇다. 같은 맥락의 이 말씀은 오늘날의 우리 시대에 필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귓가에서 마음속 깊이 던져주는 (호세아가 그리 간절히 외쳤던 것처럼), 죄로부터의 돌이킴인 예언자적 선포의 복음,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제 우리의 삶과 예배는 저들과 같은 모양으로 자의적 숭배에 빠져버린 인애 없는 제사의 형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오로지 번제에 몰두하는 우리들의 현 모습을 반추(反追)해 보는 것이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을 이방신의 우상에게 처럼 이를 향한 종교적인 제사적 열심으로 알게 모르게 꾸준히 지켜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그 열심으로 주님의 뜻에 반하여 대적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 열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도 종교적 군화를 신은 상태에서 이러한 잘못되고 자기기만적 신앙의 모습을 치장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소수의 신실한 신앙인들을 ??으면서 당당히 서 있지 않은지 자신을 말씀 앞에 겸손히 점검할 뿐이다. 이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호세아서가 주는 메시지를 경청하였으면 한다. 호세아서 기자가 호소하고 있는 메시지를 주의 깊게 청취하면서 특별히 강조하여 거듭 말하지만, 그들의 신앙이 단지 하나님을 존재를 아는 데에서 출반된 자의적 열심에서의 신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열심이 불법과 불의와 불복종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죄 당한 것은 다름 아닌 말씀의 바른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인식하였으면 한다. 곧 그들의 신앙체계는 하나님께서 내신 진리의 체계(롬6:17절/교훈의 본)22)에 의존한 신앙적 삶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정리하여 보면, 북이스라엘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은 근본적인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부추기는 것으로 하여 이방인의 우상과 같이 하나님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는 것으로 섬기는 어리석움을 범했던 것이었다. 마침내 지금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것을‘고멜’이라는 간음한 여자로 통하여 선지자인 호세아가 그 하나님의 심정을 유비적으로 알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패역상을 고발하고, 간절하게 애타게 말씀으로 돌아오게끔 부성애적 인내의 사랑을 전한 구약의 어느 한 선지자의 생동적인 복음의 내용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진행은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의 패망 직전인 앗수르의 침공전을 배경으로 역사적인 사실상을 근거로 하여 이미 모세언약인, 율법의 본래적 정신에 위배된 자의적 신앙관에서 행하여진 이스라엘의 행음의 배역을 호세아서는 적나라하게 고발함으로써 만방에 거침없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호세아서에서 비록 하나님의 남은 구속의 경륜은 인간역사의 어떠한 사단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도도히 흘려갈 것이라는 계시의 안목에서의 또 다른 한면을 바라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근본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속사의 완성은 호세아서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삼위의 경륜가운데서 작정된 부성애적 사랑에 기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약을 파기한 이 이스라엘 백성이 패망하게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오늘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심판의 경고로써 다가오는 효과적인 적실성(的實性)을 더하여 준다 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다음과 똑같은 입장에서 진정 회개의 표현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성찰하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혹여나 과거 이스라엘백성과 같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 없음으로, 깨닫지 못하는 백성이 패망한 것과 같이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리의 의를 고집스럽게 내세움으로 그 결과, 자신들의 종교적 의를 세우는데 적극적으로 이바지함으로 종교적 자기만족과 도취감에 흠뻑 빠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돼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매도하는 대로 나아가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울 따름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점검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장5절) 오늘도 我死主生(갈2:20)을 생각하며....(*)
미주------------------------------
1) 아모스는 남유다 사람으로 북이스라엘에 활동했던 선지자이고, 이사야,미가는 유다 사람으로 남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이다.
2)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호1:1)
3) (호 4:11)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호 4:12)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호 4:13)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롬1:28. (호 4:14) 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4) 「역사적 구약개요」 336P 인용 지은이 Eugene H.Merrill 김인환 역 총신대학교출판부
5) 호세야서와 다른 남 유다 출신의 세 선지자들의 표제어(사:1:1, 미1:1, 암1:1)에 따르면, 묵시/이상의 대상에 대한 언급이 따른다. 이것으로 보면, 남유다에서는 “하자”를 선호한 듯하다, 곧, 유다의 선지자들은 신탁에 대해 귀로 들음 외에 눈으로 봄을 당연시 한 듯 하다./ 구약개론 소선지 호세아서 연구 강의안 125P/ 총신대학교 학점은행제 지은이 장재 교수
6) 호세아서의 분류방법은 라솔 등 이분법에 의한, 또는 딜라드 롱맨, 알렌의 삼분법 및 해리슨과 같이 다분법에 의하여 분류할 수도 있겠으나, 창세기 1:1~2:3절에서 보여 주듯이 미국 웨스트민스터 구약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닥터 부르스 워키교수의 압축요약확장재개법이 본 호세아서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믿어, 필자는 이것을 소개 하겠다. 압축요약 확장재개법은 문학적 기법의 하나로 신문의 제목과 그에 따르는 기사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예를들면,“한국축구 석패하다”라는 타이틀은 그 이하의 기사에 대한 압축적으로 요약한 셈이다. 이하에 이어지는 기사 내용은 이 표제에 대하여 상세히 재개하는 표현양식이다. 마치 컴퓨터 윈도우상의 화면에 아이콘을 올려 놓고 이것을 압축한 폴더라면, 이 아이콘을 누르면,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것과 같은 이치로서 압축요약한 내용이 확장 재개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압축-확장의 방법은 정보 전달의 긴요한 방법으로 다양하게 쓰이는데, 성경 해석자도 이러한 시각에서 본문을 대할 때 많은 해석상의 유익이 있는 것이다.
7)「최신구약개론」 지은이 딜라드-롱맨 호세아서 549P 크리스챤출판사
8)「구약선지서 개론」호세야 111P 참조. 지은이 하젤 블록, 크리스챤출판사
9) 이러한 자녀들에 대한 명명(命名)으로 이사야서에서는 하나님의 명을 좇아 한 자녀의 이름을“마헬살랄하스바스”(노략이 급하게 이루어지며 먹이가 빨리 잡힌다)“라 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당할 일에 대한 ”징조와 예표“(8:18)의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호세아 역시 세 자녀의 이름을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로 지음으로 메시지를 전할 당대의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가를 알렸다. 그런데 이 세 이름은 호세아서 책 전체가 엮어지는 골격을 이룬다.
10)「총신대학교 학점은행제 지은이 장재 교수 구약개론」131P 참조.
11) Ibid.
12)“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13)「최신구약개론」지은이 딜라드-롱맨 호세아서 552P 크리스챤출판사
14) 그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15) 예언서 메시지의 두 기둥은 “심판과 구원(회복)”에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로루하마, 로암미를 하나님께선 결국 루하마, 암미로 바꾸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흔히 요나서가 선지서로 분류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지만, 이러한 질문은 선지자는 마땅히 말씀을 선포해야 하며, 선포된 신탁이 선지서의 주종을 이루어야 한다는 전제하여 비롯한 질문이다. 그러나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여부보다 말씀의 내용이“심판과 구원(회복)”이라는 국면을 포함하고 있는 가라는 전제에서 선지서를 이해한다면 요나서 역시 마땅히 선지서로 분류되는 것이다(최종태, 490-98).여하튼 선지자의 공통적 메시지의 핵심은 심판과 더불어 구원(회복)에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총신대학교 학점은행제 지은이 장재 교수 구약개론 137P 참조.
16)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17)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18)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19)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20)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21) “기소형식”이라함은 두 당사자 즉, 고발자와 피고발자간의 논쟁형식으로 당사자의 유형이 하나님;인간 또는 인간:인간 등의 관계에서 대화(히,리입)를 통하는 방식으로 죄의 인지와 정의의 실현을 표현하고 있으며, 언약에 근거하여 설득 또는 고발, 쟁변의 과정을 거친다. O.A.N.(화의신탁),소명기사,화(Woe~oracle)등이 있다.
22)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첫댓글 소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귀한 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