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례 그렇듯 동네에는 싸움 잘 하는 형들이 많았고 학교엔 애들 잘 패는 선생들이 많았다. 개 중엔 뭔가를 억지로 외우게 한 인간들도 있었는데 (점심에 먹은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마당에) 맞으며 외운것들을 지금도 기억한다. 세상 쓰잘데기 없이 보이는 것도 지나고 보면 의외로 쓸데 있는 것이 있다. 중학교 한문선생은 갓 제대한 군인이었다. 한자문구들을 공책에 빽빽히 적어오는 것을 숙제로 내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그게 논어 구절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논어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대화를 엮은 책이다. 공자 화법의 특징은 이항대립(바이너리 오포지션)적이고 동일개념을 바꿔쓰기(패러프레이징)가 많다. 대표적으로 소인과 군자의 대비이다. 예를 들면 ‘군자는 남과 화합하지만 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뇌동은 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화이부동 동이불화: 자로편)는 ‘군자는 두루소통하면서 편당을 만들지 않지만 소인은 끼리 무리짓고 두루사귀지를 못한다’(주이불비 비이부주: 위정편)와 같은 말이다.
인류역사상 공자만큼 학식이 있는 사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철저하게 처세에 실패한 인간도, 없는 것 같다. 학이시습지로 시작하는 첫 구절은 유명하지만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에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이 군자의 미덕(인부지불온)이란 마지막 구절은 많이 인용되지 않는다. 인정을 받지 못해도 '덕불고 필유린'(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이웃이 있어 외롭지 않다)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듯 했다.
십 여년 전부터 유교라는 용어가 경멸적으로 쓰이고 있는 느낌이다. 성리학이 조선을 망쳤다면 수긍할 부분이 있지만 조선이 망한지 백년 후인 시점에 새삼스레 유교를 싸잡아 욕하는 이유는 아마도 사회병리학적관점에서 해석된다. 산업화세대의 꿀을 빨던 기성세대들을 향한 위화감과 박탈감을 ‘꼰대’에 가두어 브랜딩하며 소비하는 느낌이다.
제품에 유효기간이나 보증기간이 있듯이 이데올로기에도 유통기간이 있다. 유통기간이 지나면 사상은 교조화 된다. 나케아 공의회부터 기독교는 맛이 가기 시작했고 부파불표 말기에 마하야나(대승)가 파생되었고 모하메드가 죽은 지 삼십년도 되지 않아 수니와 시아는 앙숙이 되었다. 문제는 기독교를 욕하는 것이 예수와 상관이 없고, 스탈린독재가 맑스와 무관하듯이, 유교와 공자를 엮어 매도하는 것이 온당치 않아 보인다. 이들 정도의 급이면 주자가례나 레위서처럼 상을 삼년을 치를 지, 오 년을 치를 지, 굽이 있는 동물을 먹을 지, 제단을 몇 규빗으로 하는 게 뭣이 중헌디다. 그렇게 보면 사실 문제는, 유교를 탈레반이라 조롱하는 일베들보다 뭐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고 밑도 끝도 없이 따르는 부류가 더 큰 문제일 것 같다.
장년의 눈으로 바라보는 공자의 느낌은 조금 다르다. 어렸을 땐 공자가 자꾸 나더러 소인배라고 부르는 것 같아 껄끄러웠는데 다시 보면 공자가 말하는 소인이란, 그릇이 작아 써먹지 못할 인간이라기 보다 거쳐야 할 단계를 지칭하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자공이 '빈이무첨 부이무교('낮은 단계)라고 물으면 공자는 그것도 좋지, 하지만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높은단계)하는 식이다. 예수가 청년이면 붓다와 공자는 노인네들이다. 노인네들은 한 말 또하고, 또하고가 특징이 있다. 붓다가 삶의 이치와 원리를 수차례 반복한 것에 비해 공자는 (세상에 나 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보질 못했다고 하는 사람치고 이상하리만큼) 삶에 관해서는 이치의 설명을 아낀 것 같다. 왜 그래야 하는지 하는 설명 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반복하였다. ‘호학을 동력삼아 절차탁마’하라는 것이다.
삶의 이치를 아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 가끔 생각한다. 초월적 존재의 유무없이, 목적과 방향없이도, 삶은 살아가는 것만으로 큰 의미가 있다. 순수이성없이도 실천이성이 있을 수 있고, 하늘의 반짝이는 별이 없이도 내마음의 반짝이는 도덕률을 지니고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확신은 없다.
빈이무첨(가난해도 아첨하지 않는다)는 해 봤다. 나도 부이무교(부유하지만 교만하지 않는다)를 해보고 싶다.
첫댓글 아이디를 잃어버려서 오랬동안 접속을 못했습니다. 가끔 뭔가 끄적이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이제 다시 접속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다행이네. 이제는 많은 사람이 읽기 보다는 글 창고로 쓰고 있어. 우리 둘의 창고로 쓰면 되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