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또는 한국의 천주교회는 조선 중엽에서 말기 사이에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통해 ‘서학’이라는 학문으로서 전래되었으며, 이후 점차 신도가 늘어 외부의 선교 활동 없이 자치 교회를 세우는 데에 이르렀다. 조선 정부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전통적인 유교 문화를 파괴하는 것으로 여겨 개항 이전까지 로마 가톨릭교회를 탄압했지만,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성장해 왔다.
역사 [편집]조선과 대한제국 [편집]천주교 전래 [편집]한반도에 천주교가 최초로 뿌리내린 시기는 명확하지는 않다. 그 시기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따라온 선교사에 의해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설에서부터, 소현세자가 1645년 청나라에서 돌아오면서 독일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 신부에게 로마 가톨릭 교회 서적와 여지구 등을 선물로 받아 가져와 전래되었다는 설[1]까지 거의 100년에 가까운 차이를 보이는 추측이 존재한다. 연대가 가장 명확한 천주교 전래에 관한 기사는 1631년 정두원이 명나라에서 서양의 문물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가져왔다는 내용이다.[2] 실학자 홍대용(1731년-1783년)이 쓴 《담헌연기》(湛軒戀記)에도 중국을 오가던 조선 사신일행에 의해 천주교가 소개되었음을 변증하는 내용이 있다.[1]
조선 사신들이 서양 선교사들에게 받은 선물 중에는 과학서적 외에도 마테오 리치 신부가 1603년 북경에서 발행한 기독교 변증서 《천주실의》 등의 천주교 서적들이 있었는데, 천주실의는 조선 사람들이 천주교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주었다.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종교로서 받아들여지기 전에는 천주교를 '서학(西學)'이라 부르면서 하나의 학문으로 취급했다. 18세기에는 사대부의 서가에 《도덕경》과 불경과 같이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꽂혀 있었다고 한다.
본격적으로 천주교가 종교로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으로, 1779년 겨울에 경기도 광주에 있는 천진암에서 권철신의 제자인 이벽,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권일신 등을 중심으로 천주교 서적 강학회가 열린 게 그 시초로, 이벽이 《천주공경가》를, 정약전이 《십계명가》를 짓는 등 천주교의 교리를 체화하는 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벽으로, 그는 1783년(정조 8년) 이승훈이 북경으로 갈 때 십자가 등 천주교 신앙의 상징물과 천주교 서적 등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승훈은 북경 북천주당에서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1784년 돌아왔는데, 조선에 돌아오면서 십자고상, 교리서, 묵주 등의 성물들과 천주교회 문서들을 갖고 귀국하였다. 그는 이벽, 정약전, 정약용 등에게 대세(大洗)[3]를 하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초기 천주교회의 포교 활동이 이루어졌다. 당시 조선 천주교회에는 성직자가 없었으므로 이승훈은 자신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 정약전 등 10명에게 사제직을 수행하게 하였다.
박해[편집]
천주교의 종교 활동이 처음으로 조선 조정에 노출된 것은1785년서울명례방에서의 집회 사건이다. 앞서 말한 정약용 형제, 이벽, 이승훈과 권일신 등이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교리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주위의 고발로 포졸이 들어와 그들을 잡아들였다. 이들은 1784년부터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미사를 집전하고 교리 공부 등을 했는데 이러한 행위가 최초로 드러난 것이다. 이 때는 아직 천주교회에서 조상 제사를 하지 않는 등의 조선의 유교적인 가치관에 어긋나는 행동이 드러나지 않았을 때였고, 김범우를 제외한 인물들이 양반들이었기 때문에, 사건은 김범우가 귀양을 가는 것으로 끝났다.당시 김범우는 귀양지에서 고문으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곧이어 일어난 신해교난 등의 사건은 조선 조정이 천주교회를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가치관에 반대하는 사학(邪學)으로 규정하여, 탄압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정조의 치세 동안에는 정학(正學, 유학)이 흥하면 사교(邪敎, 천주교)는 저절로 없어진다면서 천주교를 묵인한 정조의 정책에 따라 천주교회에 대한 탄압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 정조가 별세하고 1801년 사학(邪學)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해온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천주교는 탄압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를 신유박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김범우등이 가진 모임은 가성직(假聖職)체제라고 해서 교회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조선에 신앙생활을 지도할 천주교 신부가 입국하기를 바랐고, 이러한 요청에 따라중국인 천주교 사제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입국했는데, 주문모 신부는 1801년순교할 때까지 세례와 미사집전, 지방전도 등의 천주교회 선교사로서의 소임을 실천하였다. 하지만 그의 사망으로 조선 천주교회에는 공백이 생겼고, 이러한 공백은 장기화되었다.[4]
하지만 교황 레오 12세가 조선에서의 전교를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에 맡기기로 하면서, 조선 천주교회에 선교사가 파송될 가능성이 생긴다. 이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바르텔르미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고 나서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9월 9일 천주교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를 초대 대목구장 즉, 조선 천주교회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서의 전교를 전담하고 싶어하는 중국 천주교회 유방제 신부의 욕심때문에 입국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1835년 병으로 별세했으며, 대신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가 정하상을 비롯한 교우들의 보호를 받으며 1836년 입국했다. 모방 신부는 유방제 신부를 중국으로 돌려보냈으며,조선인 신자인 김대건을 천주교 신부로 키울 생각을 했다. 당시 모방 신부는 청소년 신자들의 세례를 집전하기 위해 미리내 마을을 방문했는데, 김대건 집안이 순교자들이 나올 정도로 신앙이 깊고, 김대건 자신도 천주교 신부가 되고 싶어했기 때문에 성직자로 키울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때 같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여럿 입국했는데, 샤스탕 신부와 브뤼기에르 주교의 뒤를 이어 조선교구장으로 입국한 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주교였다.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조선인 성직자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고, 1836년 김대건·최양업·최방제를마카오신학교에 보내서 공부하도록 하였다.[5]
1866년에는 병인박해가 일어났다. 조선 천주교는 이전에도 신해교난(1791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등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았는데, 철종때 안동 김씨의 천주교 박해가 늦추어지면서 교인들이 많이 늘었다. 이러한 교인증가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 시대에도 마찬가지여서, 당시 조선 천주교회 교세는 교인수 23,000명,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12명에 달했다. 그래서 대원군은 자주 국경을 침범하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천주교 신자 남종삼, 홍봉주의 권유로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 주교를 만나려고 했다. 프랑스 천주교회 선교사들을 통해 영불동맹(英佛同盟)을 체결하고자 한 것이다.[6] 하지만 신유박해로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들과 신자들을 처형하는 강경책으로 대원군의 천주교에 대한 정책은 바뀌었다. 당시 사람들의 말로는 대원군이 십년을 기한으로 하여 천주교의 싹을 말려버리려 했다고 전해질만큼 병인박해는 조선 천주교회로서는 견디기 힘든 심각한 박해였다. 1866년에 시작되어 3년여에 걸쳐서 계속된 대원군의 박해를 통해서 조선에서 선교하던 프랑스 천주교회 선교사 9명을 비롯해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절두산(切頭山), 해미읍성등에서 순교되었다. 학살된 사람 가운데는 천주교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도 있었다. 이때에 희생된 신자들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대원군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회는 결코 죽지 않았다. 박해는 천주교를 더욱 확산시키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정치권력도 10년을 가지 못했다. 그는 고종 임금이 직접 정치를 맡게 된 이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자신의 며느리 명성황후 일가와도 치열한 권력투쟁을 했지만 참패당했다. 개항이후 한때 그가 정권을 다시 장악하기도 했지만, 곧 밀어닥친 근대화의 과정에서 그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그 후에도 그는 정치적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다. 심지어 그는 1895년 을미사변을 통해 명성황후의 제거에 개입했다가 철저히 실각하게 되었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그는 마포 공덕동 자택에서 거의 유폐생활을 해야 했다.
그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이미 1896년 10월에 조선교구 주교인 뮈텔 주교로부터 ‘마리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아 신자가 된 바 있다. 그렇지만 대원군 자신은 천주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7]
신앙의 자유 [편집]조선왕조는 19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 변화에 가속도를 붙여준 사건 가운데 하나가 서양 국가들과의 개항이었다. 개항으로 인해 조선은 근대사회로 전환되어 갔다. 그러나 개항이 곧바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개항 이후 조선이 외국과 맺은 여러 조약에서도 신앙의 자유에 관한 명백한 규정은 없었다. 극히 일부의 조약에 규정된 종교에 관한 조목은 어디까지나 조선에 나와 있는 외국인만을 대상으로 했지, 조선인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용인해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개항으로 인해 신앙의 자유에 대한 전망이 좀 더 분명해졌다. 시대변화를 감지한 지배층에서도 천주교회 문제를 더 이상 박해로만 일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들은 개항 이후 천주교회신앙이 조선에 더욱 널리 전파되어 있고,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등의 서양인 천주교회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정은 이들의 신앙실천을 짐짓 모른 체하면서, 그 활동을 묵인하는 입장을 취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한 사건으로, 조선 정부와 프랑스가 1886년에 맺은 《한불수호통상조약》을 들고 있다. 프랑스 측에서는 이 조약문에 천주교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의 요청에 따라 신앙의 자유 허용에 관한 항목을 삽입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조선 측의 반대로 인해 이를 직접 표현하는 대신에, 프랑스 사람이 조선 사람을‘가르칠 수 있다’(敎誨)라는 조문을 삽입시켰다. 천주교회 측에서는 이를 ‘전교의 자유’에 대한 인정으로 확대 해석했다. 물론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이와 같은 해석에 반대했지만, 블랑 주교를 비롯한 조선 천주교회와 프랑스 측은 이 구절이 전교의 자유에 대한 인정이라고 주장하여 그들의 해석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한편, 신앙의 자유 가운데 중요한 요소가 전교의 자유이므로, 오늘의 연구자들 가운데 일부는 한불조약이 체결된 1886년을 천주교회의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앙의 자유가 묵시적으로 용인된 때는 1882년이었다. 이 해에 천주교회는 인현서당(仁峴書堂, 韓漢學校)을 설립했다. 이 학교에는 신자가 아닌 일반인 학생들도 재학하고 있었다. 그 이후 천주교회는 서울과 경상도에 고아원을 세워 운영하기 시작했고, 부엉골에 신학교를 세워 조선인 성직자 양성에 착수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신앙의 자유에 대한 조정의 묵인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리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교회가 세워진 후 100년 만에 신앙의 자유를 묵인받을 수 있었다.
1895년 조선 조정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순교한 일부 신도들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다. 사면의 대상이 되었던 신도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이 사면령은 신앙의 자유를 공인하기 위한 사전 조처로 해석되었다. 또한 이 해에 천주교 조선교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8대 교구장이자 독일사람인 뮈텔 주교는 조선의 국왕 고종을 만났다. 이때 고종은 1866년의 병인박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며, 뮈텔 주교에게 친선을 제의했다. 국왕인 고종이 천주교를 인정하고, 종전의 박해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는 사실은 신앙의 자유를 공인했음을 뜻했다. 그러므로 뮈텔 주교 자신도 그날의 일기에서 조선에서 천주교회 박해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가 법적으로 확인된 것은 1899년에 조인된 「교민조약」(敎民條約)에서였다. 이 교민조약은 조선 조정의 관리와 뮈텔 주교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을 통하여 조선인천주교 신자들에게도 신앙의 자유가 성문법으로 보장되었고, 천주교 신자들도 일반인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음이 인정되었다. 이 「교민조약」은 1904년에 체결된 「선교조약」(宣敎條約)을 통해서 더욱 보완되었다. 이 「선교조약」에 의해 선교사들은 개항장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토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8] 일제 강점기 [편집]천주교가 한국 사회에 자리를 잡을 무렵, 일제는 한국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까지 말살하며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를 본격화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한국인들은 무력을 동원한 직접적인 독립투쟁을 전개하거나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제의 침략에 대응했다.
천주교의 경우, 대부분 서구권 출신 선교사이던 교계 지도자들은 대체로 일제의 침략 행위와 식민 정책에 침묵하고, 독립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천주교 지도자들의 일본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뮈텔 주교의 경우, 1904년부터 1906년까지 일어났던 중국의 남창교안에서 발생한 가톨릭 선교사들의 피살 소식을 전해듣고는 표면적으로는 중국인들이 일으킨 사건이었지만, 그 배후에 일본인들이 있다고 의심하였다.[9] 또한 일본 정부가 헤이그 밀사 사건을 악의적으로 조종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1920년대 일본인들이 교회와 한국인들 소유의 토지를 강탈해가는 것을 보고, 분개하며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냈다.[10]
그렇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교회의 사회 참여를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사업을 수행하는 교회의 임무와 배치되며, 따라서 인간의 영성적 생활을 저해하는 위험한 행위라 인식하고 있었고, 한국이나 일본의 정치 문제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는 철저한 정교분리 원칙을 견지하였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이후 한국인들의 독립 운동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우선 그들은 독립운동이 공연한 짓이며, 독립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러한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립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은 뮈텔 주교뿐 아니라 당시 한국에 와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독립운동을 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선교사들은 부정적 시각을 지녔다. 우선 그들의 눈에 비친 독립운동이 자발적이기보다는 강제적이거나 아니면 마시못해 참여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이 보기에 3·1운동 초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운동은 강제성을 띠게 되었으며, 다른 독립운동도 비슷한 양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또한, 간도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에 강제로 사람들을 동원하고 있으며, 이것을 거부하면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고 하여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선교사들에게는 독립운동 그 자체가 질서를 흐트러트리는 골치 아픈 행위인데다가 독립운동을 하지 않는 대다수 사람을 괴롭히는 좋지 않은 행동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선교사들에게 비친 독립운동의 부정적 측면 가운데 또 하나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배신행위를 하는 이들에 관한 것이었다. 일본군에 의해 학교가 불타고 수상한 사람들이 잡혀갔는데, 그 과정에서 배신행위를 한 사람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즉, 이전에는 독립군이었던 자들이 일본군의 통역자가 되고, 그 상황을 이용해서 자신들에게 과거에 저항했던 사람들을 무고로 연루시킨 일도 생겨났다. 선교사들의 눈에는 이러한 사람이 가장 비열한 사람으로 보였다.[11]
선교사들은 기본적으로 정치와 종교의 철저한 분리, 즉 종교의 이름으로 정치적인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천주교인이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막으면서, 한편으로 독립운동 자체에 대해서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독립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부정적인 모습으로 인해 자신들의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천주교가 반드시 그런 태도로만 일관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즉, 당시 천주교 평신도들은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고, 그 수나 비중에 있어서도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천주교도 독립운동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주장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1990년대 이후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것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편집]연표 [편집]
1928년 원산대목구 담당이었던 북간도에 연길지목구를 신설하였는데, 현재는 중국 천주교회의 심양관구에 속해 있다.
교구 [편집]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16개 교구와 북한의 3개교구로 구성되어 있다. 각 교구는 서울, 대구, 광주 등 3개의 관구 안에 소속되어 있으며, 한국 내 각 교구장의 협의회인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가 있다.
아직 실질적인 종교의 자유가 없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도 로마 교황청에서 승인한 평양교구, 함흥교구, 덕원자치수도원장구가 존재한다.
현재 한국의 교구 현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의 천주교 교구 관할도
대한민국의 로마가톨릭 관구 - 서울 관구 (관구장 : 정진석(니콜라오) 추기경)
교세 [편집]2010년 5월 24일에 발표된 “한국 천주교회 통계 2009”[13]에 따르면, 2009년 12월 31일 현재 대한민국의 한국인 천주교 신자의 현재 교세는 다음과 같다. 신자 수와 비율은 유효하게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로 한정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