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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둘레길 20구간 왕실묘역길 사천목씨 시조는 고려 때 낭장(郞將)을 지낸 목효기(睦孝基)이다. 고려시대에는 목충(睦忠)·목인길(睦仁吉)·목자안(睦子安) 등이 왜구를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다. 조선 중종 때의 학자 목세칭(睦世秤)과 그 자손들이 목씨를 중흥시켰다. 아들 목첨(睦詹)은 선조 때 도승지를 역임하였고, 목첨의 아들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첫째인 목서흠(睦敍欽)은 예조참판과 중추부동지사를 지냈고, 둘째인 목장흠(睦長欽)은 인조반정 후 호조참판과 도승지를 지냈으며, 셋째인 목대흠(睦大欽)은 예조참의를 거쳐 강릉부사를 지냈다. 다른 후손으로 숙종 때 남인의 중진으로서 파란을 겪은 목내선(睦來善)과 부제학 및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갑술옥사에 연루된 목창명(睦昌明)이 있다. 목씨는 갑술옥사를 고비로 남인의 몰락과 함께 세력이 약화되고 희성이 되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일대에 사천 목씨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가장 선대(先代)인 목진공(睦進恭)의 묘를 현재의 위치에 쓰고 목진공의 6세손인 목서흠과 그 이하 여러 후손들의 묘를 쓰면서 지금과 같은 묘역이 조성되었다. 목진공 묘표의 ‘선덕 병오 사월 일(宣德丙午四月日)’ 명문으로 보아 1426년(세종 8)경부터 방학동 지역에 묘를 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두 손자 목임기·목임일, 목임일의 아들 목천현 등의 묘가 있다. 묘역 서쪽으로는 사천 목씨 영단(靈壇)이 마련되어 6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묘역의 인근에 사천 목씨의 재실(齋室)인 모현재(慕賢齋)가 있다. 묘가 모두 북한 지역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좌측부터 요무장군 신호위 정용낭장(耀武將軍神號衛精勇郎將) 목손검(睦孫儉)과 의인(宜人) 창원 박씨, 중현대부 흥위위 대장군(中顯大夫興威衛大將軍) 목군경(睦君慶)과 숙인(淑人) 영월 신씨, 금자광록대부 영주수 합문지후(金紫光祿大夫靈州守閤門祗侯) 목덕창(睦德昌), 요무장군 낭장 동정(耀武將軍郎將同正) 목효기, 정순대부 보문각 직제학(正順大夫寶文閣直提學) 목준평(睦俊平)과 숙인 복흥 송씨, 성균관 진사 목충달(睦忠達)과 유인(孺人) 김해 김씨의 단이 세워져 있다 정의공주 본관은 전주(全州). 조선의 제4대 왕 세종의 둘째 딸로, 어머니는 소현 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이다. 조선의 제5대 왕 문종의 누이동생이자 제7대 왕 세조의 누나가 된다. 고려 말 조선 초 명문 출신으로 함흥 부윤을 역임한 안망지(安望之)의 아들 안맹담(安孟聃)과 혼인하여 4남 2녀를 낳았다. 안맹담은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다. 세종은 정의 공주와 안맹담의 집에 수차례 이어(移御)하였을 정도로 이들 부부를 아꼈는데, 여기에는 정의 공주의 뛰어난 재주가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의 공주의 뛰어난 재주와 관련하여서 『죽산 안씨 대동보』에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 변음토착(變音吐着)을 완전히 궁구하지 못하여서 각 대군들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는데, 정의 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가 곧 풀어 바쳐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 명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동생 안평 대군(安平大君)이 계유정난으로 죽음을 당한 것에 반해 정의 공주의 남편 안맹담은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1등에 녹훈된 바 있다. 1462년(세조 8) 안맹담이 세상을 떠난 후 명복을 빌기 위해 1469년(예종 1) 정의 공주는 『지장보살 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보물 966호]을 간행하였다. 안맹담 또한 불교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1477년 사망하여 남편 안맹담을 장사지낸 양주 도봉산 해촌동(海村洞) 묘원에 묻혔다. 고갯길이 나오기 직전 도로 우측에 죽산 안씨 묘역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중 동쪽 묘역에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이 위치해 있다. 묘는 쌍분 형태로 묘표·상석·향로석·문인석·장명등 등을 갖추고 있다. 우측의 것이 정의 공주의 묘로 묘표 비신 전면에 ‘정의 공주지묘(貞懿公主之墓)’, 후면에 ‘성화 십삼년 이월 십일일 졸 삼월 초 오일장(成化十三年二月十一日卒三月初五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1982년 11월 13일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이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묘역 입구에는 안맹담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문은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것으로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도 수록되었다.
안맹담 안맹담(安孟聃)[1415~1462]은 1428년(세종 10) 세종의 둘째 딸인 정의공주와 혼인하여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지고 숭정대부 품계를 받았다. 1432년(세종 14)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으며, 숭록대부(崇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1444년(세종 26) 다시 광덕대부(光德大夫)가 되었다. 1450년 임금의 사위에 대한 호칭이 군(君)에서 위(尉)로 바뀌면서 연창위(延昌尉)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성록대부(成祿大夫), 1457년(세조 3) 수록대부(綬祿大夫)에 올랐다. 그해 8월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안맹담은 초서(草書)를 잘 써서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고 말을 잘 타고, 음률(音律)에 통달하였으며, 약물(藥物)과 차(茶)에 대해서도 박식했다고 한다.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안맹담 신도비 안맹담(安孟聃)[1415~1462]의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자는 덕수(德壽)이며 시호는 양효(良孝)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명문 출신으로, 1428년(세종 10) 세종의 둘째 딸 정의 공주(貞懿公主)와 혼인,
1450년(문종 즉위년) 종실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 부마를 위(尉)라 개칭하기로 하였으므로 이후 연창위(延昌尉)라 불리었다. 1462년(세조 8)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양효공 안맹담 신도비는 귀부 이수형의 일면 비이다. 귀부는 화강암으로 높이 190㎝, 너비 170㎝, 두께 280㎝, 비신은 대리석으로 높이 190㎝, 너비 90㎝, 두께 26㎝이다.
글씨와 전액(篆額)은 안맹담의 넷째 아들 안빈세(安貧世)가 썼다. 비제는 ‘유명 조선국 부마 수록대부 □창위 시양효공 □□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駙馬綏祿大夫□昌尉諡良孝公□□神道碑銘幷序)’라 되어 있다. 안맹담의 가계와 행적을 약술한 후 공덕을 칭송하였다. 비문은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도 수록되었다.
1982년 11월 13일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 공주 묘역이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약간의 파손에도 불구하고 정교한 조각과 글씨가 잘 남아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왕실 묘역길은 우이동 우이령길 입구에서 방학 3동 정의 공주 묘로 이어지는 길로, 거리는 1.6㎞이고, 소요 시간은 약 45분, 난이도는 ‘하’이다. 왕실 묘역길의 이름은 성종(成宗)의 맏아들로 중종반정 때 폐왕된 연산군(燕山君)의 묘와 세종의 둘째딸로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크게 기여한 정의 공주(貞懿公主)의 묘가 있어 지어졌다. 귀중한 역사 자료인 왕실 묘역뿐 아니라 600년 전부터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어 온 원당샘과 서울시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나무로 수령 550년에 달하는 방학동 은행나무, 연산군 묘 재실 등이 있다.
[서울특별시 보호수 제1호] 방학동 은행나무 서울특별시 보호수 제1호로 지정[1968년 2월 26일]된 은행나무가 그것이다. 서북쪽으로 원당 샘이라는 유서 깊은 샘물을 낀 채, 북쪽의 서울 연산군 묘로부터 남쪽의 신동아 아파트 단지까지 그윽이 굽어보면서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노거수(老巨樹)이다. 나무 높이 25m, 가슴 높이 둘레 10.7m에 달하는 장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가지의 자람도 아주 좋아서 수형(樹形)이 아름답고 분위기가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조선을 거쳐 일제 강점기, 해방, 6·25 전쟁과 개발 경제 시대의 구호 소리를 거쳐 지금에 이르는 역사,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 본 증인이자 파수꾼이다. 방학동 은행나무 앞에 서면 그래서 숙연해진다.
어느 봄날이었다. 허름한 옷차림을 한 젊은 여인이 초저녁 어스름에 은행나무 앞에서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치성을 드렸다. 여인은 근처 마을에 사는 아낙으로 세 번째 아이를 출산하였는데 젖이 잘 나오지 않자 이곳을 찾은 것이다. 다음 날 새벽이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아 어둑어둑한 은행나무 앞에 또 다른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은행나무 앞에 엎드려 몇 번인지 모를 만큼 수많은 절을 하면서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나무님, 은행나무님. 제게도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풍습으로 이 같은 치성은 대게 절을 찾아가 법당에 엎드려 비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 여인들은 왜 은행나무를 찾아와 빌었을까? 800을 헤아린다는 나이 외에도 이 방학동 은행나무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나무줄기에서 옆으로 살짝 뻗어 위로 올라간 큰 가지 아래로, 어찌 보면 여인의 젖꼭지 같기도 하고 남성의 성기 같기도 한 유주(乳柱)가 신기한 모양으로 돌출되어 있다. 유주를 단 방학동 은행나무에 치성을 드리면 산모는 젖이 잘 돌고 자식을 낳지 못한 여인은 아들딸을 낳을 수 있다고 대대로 믿어 왔다는 것이 마을 노인들의 전언이다. 그래서 소문을 들은 여인들이 무시로 찾아와 치성을 드리곤 하였다. 삼각산 자락 인근에 사는 여인은 혼인한 지 10여 년 동안 세 명의 딸을 낳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해 시어머니에게 모진 구박을 당하고 있었다. “삼대독자 집안에 시집왔으면 대를 이어야지 장차 이 일을 어찌할 것이냐. 만약 내년까지 아들을 낳지 못하면 보따리 싸 들고 친정으로 돌아가든지 씨받이를 보게 될 터이니 그리 알아라” 시어머니의 최후통첩이었다. 너무나 가혹하였지만 거역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여인은 결국 영험하다는 방학동 은행나무를 어두운 새벽마다 홀로 찾았다. 은행나무를 찾은 지 3개월째, 이날 새벽은 짙은 안개가 끼어 더욱 스산하였지만 여인은 절박한 마음으로 은행나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한참을 빌고 있을 때이었다. “정성이 참으로 갸륵하구나. 네 모습이 내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나. 아들을 낳도록 해 줄 터이니 이제 그만 일어나 돌아가거라.” 여인은 꿈결처럼 들려오는 굵은 남자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개를 뒤로 돌렸더니, 이게 웬일인가. 조금 뒤쪽 왕의 무덤이 있는 곳 앞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화려한 금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귀인(貴人)의 모습이었다. 여인은 놀랍고 반가워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다가 얼굴을 들어 귀인을 바라보았으나 그 귀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이었다. 여인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태기를 느꼈고, 열 달 후 여인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여인에 대한 소문은 곧 가까운 이웃 동네에까지 퍼졌다. 은행나무가 죽은 왕 무덤 옆에 있어 영험이 두 배로 강하다는 말도 덧붙었다. 여인의 소원을 들어 준 귀인은 혹 은행나무의 신령이 된 연산군은 아니었을까. [은행나무제(祭)] 예부터 나라에 큰 변이 있을 때마다 방학동 은행나무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났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 1년 전인 1978년에도 화재가 났다. 나무의 영험은 경외를 낳는다. 영물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방학동 은행나무의 영험한 힘을 믿고 기리며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나무에 제사를 지내 오고 있다. 이 원당골에 오래전부터 깃들어 살아온 파평 윤씨(坡平尹氏) 집안이 주축이 되어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산업화가 진행되고 더불어 새마을 운동이 옛것에 메스를 들이대면서 맥이 끊겼다. 이 제사 풍습은 1990년대 말이 되어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제는 영물에 대한 제사의 성격을 버리고 경로잔치를 겸한 동네잔치 성격으로 틀을 바꾸었다. 젖이 나오지 않으면 우유로 대신하고, 아들을 낳기 위해 치성을 드리기보다 산부인과를 찾는 오늘날의 세태에서 더 이상 은행나무는 영물로 대접받기 힘들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 옛날 원당골 터주대감으로 버티고 있으면서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던 신목답게 은행나무가 오늘날에도 방학동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역할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먼저 간 이 암나무까지를 일러 ‘부부 은행나무’라 불렀다. 두 나무는 몇 백 년을 서로 마주보며 사랑을 속삭여 왔다. 그렇게 정답던 암나무는 1990년대 초 인근의 신동아 아파트 건립 당시 벌목되고 말았다. 보존 가치보다 개발 가치를 더 높게 치던 어두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암나무가 쓰러지기 전 맺은 열매들은 이 땅 어딘가에서 멋진 아들딸 나무로 자라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암나무를 잃은 수나무는 1990년대 초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다. 홀로 남은 외로움 뿐만 아니라 나무의 왼편에 들어선 신동아 아파트와 오른편 빌라에 막혀 뿌리와 가지를 제대로 뻗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네 주민들이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1995년에 ‘은행나무의 주변 환경을 개선해 달라’는 민원을 제기하였다. 마을 근처에서 수백 년 이상 자라온 신물(神物)을 우리 대(代)에 망가뜨린다는 것은 수치가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2007년 도봉구에서는 약 40억 원을 들여 주변 빌라 한 동을 철거하여 은행나무의 최소한의 생육 공간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지지대를 만들어 힘없는 가지를 군데군데 받치는 한편, 병충해로 썩어 들어간 부분을 잘라 내는 외과 수술을 네 차례나 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생육 상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산림청에서는 나무의 생육 상태를 따져 ‘매우 양호, 양호, 보통, 불량, 매우 불량’의 5가지로 분류한다. 방학동 은행나무는 최고령 할아버지임에도 건강 상태가 좋은 편이어서 현재 ‘양호’ 등급을 부여받았다. 그 덕분에 시민들은 푸른 나무 그늘을 만들어 주는 은행나무 밑에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전설을 들으며 마음의 안녕을 얻고 있다.
방학동 은행나무의 추정 수령이 880년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하기 위하여 국립 산림 과학원의 과학적 수령 조사 방법을 적용한 결과 약 550년[±50]으로 측정되었다. 이 결과도 천연기념물 및 서울특별시 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수목과 비교하면 최고령 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서울특별시 소재 수목 중에서도 최고령에 해당하는 천연기념물 제59호 ‘서울 문묘 은행나무’[수령 702년] 다음으로 오래되었다. 이에 서울특별시는 2013년 3월 28일자로 방학동 은행나무를 서 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로 재지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서울특별시는 지정 이유에 대해 “이 은행나무는 조선 전기에 식재된 나무로 수령이 오래되어 지역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며, 수형 또한 아름다워 문화재적 가치가 크므로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보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수목의 생육 환경의 보호를 위해 보호 구역을 지정하여 보존하고자 한다”라고 발표하였다. 조선 제10대 왕. 재위 1494~1506년.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중종이 있었으나 중종이 태어나기 전에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폐위되었기 때문에 묘호와 능호없이 일개 왕자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왜인과 야인을 방어하기 위해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한 것이나 또는 변경지방으로 사민(徙民)을 독려한 것, <국조보감(國朝寶鑑)> <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수정 등 치적도 있지만, 즉위 4년 이후의 실정이 너무 컸다.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를 희생시켰다. 이 두 사화는 물론 당대 정치세력의 대립 속에서 일어난 것이기도 하지만, 연산군 개인의 성품도 많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겨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을 없애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했으며, 여론과 관련되는 모든 제도를 중단시켰다.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을 계기로 한글의 사용을 금하기도 했다.
묘는 양주군 해동촌(지금의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데, 「연산군지묘」라는 석물 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연산군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뒤에 11대 왕이 된 중종이 있었다. 그러나 1483년(성종 14)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그의 무도함을 알면서도 세자로 삼았다고 한다. 1494년 12월연산군은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재위 12년 동안 무도한 짓을 많이 하여 폐위되었다. 이후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 해 11월에 죽었다.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폐주(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다. 따라서 『선원계보(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의 재위 기간의 실록도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 실록 첫머리에 있는 사평(史評)도 그의 일기에서는 “……만년에는 더욱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포락(炮烙: 단근질하기)·착흉(斮胸: 가슴 빠개기)·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瓢風: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있어서……”라고 되어 있을 만큼 그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폭군이었다. 같은 폐주라 하더라도 광해군에 대해서는 사고(史庫)의 정비라든가 성지(城池)·병고(兵庫)의 수리, 중국에 대한 현명한 외교정책 등을 들어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러한 긍정적 요소가 조금도 없었다. 왜인과 야인의 침입을 의식해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했다든가, 변경지방으로 사민(徙民)의 독려, 『국조보감(國朝寶鑑)』·『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수정 등 치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무도하기 이를 데 없던 폐정(弊政)에 비긴다면 보잘 것 없는 일인 것이다. 즉위 초에는 아직 전조(前朝)의 치평 기운이 남아 있고 또 인재와 사림이 성한 가운데 어느 정도 질서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4년째부터는 드디어 패악한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5∼6년 동안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士類)를 희생시키는 참극을 벌였다.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와 1504년의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이 두 사화는 당대 정계의 난맥상 속에서 생겨났지만, 여기에는 연산군 개인의 성품이 많이 작용하였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 편찬 때 그 사초 중에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됨으로써, 이에 관련된 사림학자들이 많이 참화를 입은 사건이다. 이 때 그렇게 많은 사류를 희생시킨 데는, 본래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산군의 성품을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 재상들이 교묘히 이용해 그들의 정쟁에 이용한 점도 있었다. 갑자사화도 결국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때문에 그토록 큰 옥사가 벌어졌다는 측면이 더 큰 비중을 가진다. 연산군은 방탕한 생활에서 오는 재정난을 메우려고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 했다. 훈구 재상들은 왕의 이러한 횡포를 억제하려 했고, 이에 또 한 번 사화가 벌어진 것이다. 이 사화의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생모 윤씨의 폐비사건으로 소급되겠지만, 이 역시 그의 포학한 성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두 사화의 결과는 참혹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당했다. 폐비 당시의 두 숙의(淑儀)는 타살당했다. 할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도 구타당해 죽었다. 그 밖에 윤필상(尹弼商)·김굉필(金宏弼) 등의 사형을 필두로, 한명회(韓明澮)·정여창(鄭汝昌)도 모두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가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한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은 사실에서 찾으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실록 『연산군일기』에는, 그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 능력도 없는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정계와 연산군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겨 사간원·홍문관 등을 없애 버렸다. 정언을 하는 언관도 혁파하거나 감원했다. 그 밖에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된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 버렸다. 당시로서는 가장 패륜으로 생각되던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도 마구간으로 바꾸었다.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을 계기로 한글 사용을 엄금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심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506년(연산군 12) 9월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 등의 주동으로 연산군 폐출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옹립되니 곧 중종반정이었다. 묘는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이 곳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는 석물 이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사적 제362호. 지정면적 1만4301㎡. 연산군은 실정(失政)이 극심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고 1506년(중종 1)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같 은해 9월 강화군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 그 해 11월 유배지에서 죽어 강화에 장사지냈다가 1512년 12월 폐비 신씨(愼氏)의 진언으로 그 이듬해 이 곳에 천장(遷葬 : 묘를 옮김)하였다.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愼氏)는 영의정 승선(承善)의 딸로 1488년(성종 19) 2월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1494년 왕비로 진봉(進封)되었다가 1506년 연산군과 함께 폐출되어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었으며 1537년에 죽었다. 분묘는 서편에 연산군, 동편에 부인의 묘가 쌍분(雙墳)으로 되어 있다. 묘역시설로는 대군(大君)의 예우(禮遇)로 장례하여 곡장(曲牆 : 무덤 뒤에 둘러싼 작은 담) ·묘비(墓碑)·혼유석(魂遊石)·장명등(長明燈)·향로석(香爐石) ·문인석(文人石)·제실(祭室) 등이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屛風石)·석마(石馬)·석양(石羊)· 사초지(莎草地 : 오래 되거나 허무러진 곳에 떼를 입히어 잘 다듬은 곳)는 설치되지 않았다. 연산군묘비 전면에 ‘燕山君之墓(연산군지묘)’, 후면에 ‘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 부인 신씨의 묘비 전면에 ‘居昌愼氏之墓(거창신씨지묘)’, 후면에 앞구절은 파손되었고 뒷구절에 ‘六月二十六日葬(유월이십육일장)’이라 새겨져 있다.
경전철 공사에다 우이령길 초입에는 우이동먹거리마을 조성 공사가 한창이라 어수선하고 어지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