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부 원년 갑오에 예부시랑 배 찬의 고시에서 단번에 급제하여 선주 율수 현위에 임명되었고, 치적의 고과를 통하여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이 되었으며, 자금어대를 받았다.
이 때 황 소가 반란을 일으켜, 고 병이 제도 행영 병마도통이 되어 이를 토벌하게 되었다. 그 때, 치원을 불러 종사로 삼아 서기의 임무를 맡겼는데, 그 표장과 서계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28세가 되자 귀국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희종이 그의 뜻을 알고 광계 원년에 그로 하여금 조서를 가지고 내빙케 하였다. 그는 본국에 머물며 시독 겸 한림학사병부시랑지서서감이 되었다.
치원은 스스로 서쪽으로 유학하여 얻은 바가 많다고 생각하여, 돌아온 뒤에 자기의 뜻을 실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말세를 당하여 의심과 시기가 많아 이러한 생각이 용납되지 못하고 외직으로 나가 대산군 태수가 되었다.
당 소종 경복 2년에 납정절사 병부시랑 김 처회가 바다에 빠져 죽었으므로 곧 추성군 태수 김 준을 고주사로 임명하였다. 이 때 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있다가 부름을 받아 하정사가 되었는데, 당 나라에 해마다 흉년이 들고, 이로 인하여 도적이 횡행하여 길이 막혔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하지는 못하였다. 그 뒤에도 치원은 당에 사신으로 간 일이 있었으나 그 시기는 알 수가 없다.
그가 당에 여러 번 갔기 때문에 그의 문집에는 태사 시중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는데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듣건대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명칭이 마한, 진한, 변한입니다.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요,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시에는 강한 군사가 1백 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 오, 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 연과 제, 노를 뒤흔들어 중국의 커다란 고민거리가 되었으며, 수 황제가 세력을 잃은 것도 요동 정벌에 기인한 것입니다.
정관 연간에 우리 당 태종 황제가 직접 6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벌을 집행하니, 고구려가 그 위엄을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하므로 문황이 항복을 받고 수레를 돌려 돌아갔습니다. 이 무렵 우리 무열대왕이 견마의 정성으로 한 쪽의 혼란을 당의 협조를 얻어 평정하고자 하였으니, 당 나라 조정에 들어가 배알하는 일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뒤에 고구려와 백제가 이전과 같이 흉악한 행위를 계속하므로, 무열왕이 당의 조정으로 들어가 향도가 될 것을 청하였습니다.
고종 황제 현경 5년에 이르러 소정방에게 칙령을 내려 10도의 강병과 누선 일만척을 이끌고 백제를 대파하고, 그 땅에 부여 도독부를 설치하여 유민을 모으고 한인 관리를 배치했는데, 생활양식이 서로 달라 자주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식이 들리자 마침내 그 사람들을 하남으로 옮겼습니다. 총장 원년에 영공 서 적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격파케 하고 안동 도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의봉 3년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과 농우로 옮겼습니다.
고구려의 잔민들이 서로 모여 북으로 태백산 아래 의지하여 국호를 발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개원 20년에 당 나라 조정에 원한을 품어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를 습격하여 자사 위 준을 죽였습니다. 이에 명 황제가 대노하여 내사 고 품, 하 행성과 태복경 김 사란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공격케 하고, 우리 임금 김 아무개에게 벼슬을 더하여 정대위 지절 충녕해 군사 계림주 대도독으로 삼았는데, 겨울이 깊어 눈이 많이 쌓인 바람에 번, 한 양군의 추위가 심했기 때문에 칙명을 내려 회군케 했습니다.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3백여 년 동안 이 지역이 무사하고 창해가 편안하니, 이는 곧 우리 무열대왕의 공로입니다.
지금 저는 유림의 말단 학자요, 해외의 평범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표장을 받들고 낙토에 내조하였으니, 모든 정성을 토로하는 것이 예에 맞을 것입니다. 제가 보건대 원화 12년에 본국의 왕자 김 장렴이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명주에 상륙하였을 때, 절동의 어떤 관리가 서울까지 보내 주었고, 중화 2년에는 입조사 김 직량이 반란군이 일어나 길이 막혔기에 마침내 초주에 상륙하여 헤매다가 양주에 이르러 황제의 행차가 촉으로 가신 것을 알았습니다. 고 태위가 도두 장 검을 보내 그를 감시압송하여 서천에 이르렀습니다. 이전의 사례가 이처럼 분명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태사 시중께서는 큰 은혜를 베푸시어 특별히 수륙의 권첩을 주시고, 저희들의 소재지에 선박, 식사 및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는 나귀와 말 그리고 사료를 공급하게 해주시고, 아울러 군장을 보내 어가 앞까지 호송하여 주소서.”
여기서 말한 태사 시중도 그 성명을 알 수 없다.
치원은 서쪽에서 대당을 섬길 때부터 동으로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항상 난세를 만나 처신하기가 어려웠고 곧잘 비난을 받기도 했기 때문에,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하고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기로 하였다. 그는 산림과 강해를 소요하며 누대와 정자를 지어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고 책 속에 묻혀서 풍월을 읊었다. 경주의 남산과 강주의 빙산과 협주의 청양사와 지리산의 쌍계사와 합포현의 별장이 모두 그가 놀았던 곳이다. 그는 최후에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하면서, 형인 승려 현준 및 정현스님과 도우를 맺고 한가로이 은거생활을 하다가 노년을 마쳤다.
그가 처음 서쪽으로 가서 유학할 때 강동 시인 나 은과 알게 되었다. 은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재주를 믿고 스스로 잘난 체하여 쉽사리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지 않았는데, 치원에게는 자기가 지은 시가 다섯 축을 보여 주었다.
또한 동년인 당 나라 사람 고 운과도 잘 사귀었는데, 치원이 돌아오려 할 때 고 운은 시를 지어 송별하였으니 이 시는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들었네, 바다 위에 세 마리 금자라 있어
머리 위에 높은 산을 이고 있다네.
산 위에 주궁, 패궐, 황금전이 있고
산 아래 천리 만리 넓은 파도 있다네.
그 곁에 점 하나 푸르른 계림 땅
자라산의 정기 어려 기특한 인재 났네.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그 문장이 중화국을 감동시켰네.
열 여덟 되던 해 전사원에 횡행하여
화살 한대 날려보내 금문책을 깨뜨렸네.
「신당서 예문지」에는 “최 치원의 「사륙집」 1권과 「계원필경」 20권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주에는 “최 치원은 고려인으로서 빈공과에 급제하여 고 병의 종사관이 되었다”고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이와 같이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 또한 문집 30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처음 우리 태조가 흥기하였을 때, 치원은 태조가 비상한 인물이므로 그가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임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는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문안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 “계림은 누른 잎이오, 곡령은 푸른 솔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그의 문인들 중에는 국초에 내조하여 높은 관직에 이른 자가 한 둘이 아니었다. 현종이 왕위에 있을 때 치원이 태조의 왕업을 은연히 협찬하였으니, 그의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교시를 내려 내사령을 추증했고, 14년 태평 2년 임술 5월에는 문창후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