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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추상은 가능한가
추상·추상주의·추상사진의 이론적·철학적·사진미학적·예술사적 검증과 비평
1. 결론부터 말하면
추상사진은 가능하며, 이미 20세기 초부터 독립된 사진적 실천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나 정확한 결론은 다음과 같이 제한해서 말해야 한다.
모든 사진은 현실을 일정하게 추상화하지만, 모든 사진이 추상사진인 것은 아니다. 추상사진이란 사진의 재현 기능보다 형태·색채·빛·시간·지각·감광물질·인화 과정·디지털 데이터 같은 사진적 조건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업이다.
따라서 “사진은 현실을 찍으므로 추상일 수 없다”는 주장은 틀리다. 반대로 “무엇을 찍었는지 알아볼 수 없으면 모두 추상사진이다”라는 주장도 지나치게 단순하다.
사진의 추상성은 세 층위로 나누어야 한다.
1. 모든 사진에 내재하는 일반적 추상화 작용
2. 대상을 형식적으로 변형하는 추상적 사진
3. 외부 대상의 재현을 거의 또는 완전히 포기하는 비대상적 사진
이 구분을 하지 않으면 추상사진은 단순한 클로즈업, 흔들림, 보정 효과와 혼동된다.
2. 추상, 추상주의, 추상사진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2.1 추상 Abstraction
‘추상’은 라틴어 abstrahere, 즉 ‘끌어내다’ 또는 ‘분리하다’에서 유래한다. 철학적으로 추상이란 구체적 사물에서 특정 성질이나 관계를 떼어내 사고하는 작용이다.
예를 들어 사과에서 색, 둥근 형태, 부피, 표면의 질감을 분리해 생각하는 것이 추상이다. 따라서 추상은 반드시 현실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특정 성질을 선택하고 다른 성질을 괄호 치는 행위이다.
사진에서도 마찬가지다. 건물 전체가 아니라 벽의 선과 그림자만 촬영하거나, 물체의 정체보다 빛의 운동을 강조하면 구체적 현실에서 시각적 관계를 추출하는 추상화가 일어난다.
2.2 추상주의 Abstractionism 또는 Abstract Art
‘추상주의’는 하나의 통일된 양식이나 단일 운동을 뜻하지 않는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프란티셰크 쿠프카(František Kupka),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등은 모두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분류되지만, 그들의 철학과 조형 원리는 서로 달랐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초기 추상을 어느 한 천재가 단독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 1910년대 유럽과 미국의 예술가들이 회화·사진·영화·음악·무용·시를 횡단하며 형성한 국제적 네트워크의 결과로 설명한다. 따라서 “칸딘스키가 추상미술을 혼자 발명했다”는 식의 서술은 정확하지 않다. (MoMA, Inventing Abstraction, 1910–1925)
미술사에서 추상미술은 일반적으로 시각적 현실을 정확히 모사하려는 목적을 약화하고 선·면·색·질감·리듬·구조 같은 조형 관계를 자율적인 요소로 다루는 예술을 가리킨다. 비대상미술(non-objective art)은 그중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외부 대상을 거의 전제하지 않는 더 좁은 범주이다. (Tate, “Abstract Art”, Tate, “Non-objective Art”)
2.3 추상사진 Abstract Photography
추상사진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추상사진은 외부 대상의 정보 전달과 재현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지 않고, 사진이 생산하는 형태·색채·명암·질감·빛·시간·운동·감광 흔적·인화 표면·픽셀·데이터 등의 관계를 주된 내용으로 삼는 사진적 실천이다.
그러나 추상사진은 초현실주의처럼 선언문과 조직을 갖춘 하나의 역사적 운동이 아니다. 모더니즘, 바우하우스(Bauhaus), 다다(Dada), 신시각(New Vision), 주관주의 사진(Subjective Photography),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개념미술, 카메라 없는 사진, 디지털 이미지 등 여러 흐름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한 사진적 경향을 가리킨다.
3. 사진은 본래 현실을 재현하는데, 어떻게 추상이 가능한가
이 문제는 사진의 ‘지표성’과 관련된다.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기호학에서 지표(index)는 대상과 물리적·인과적 관계를 갖는 기호이다. 연기가 불의 지표이고 발자국이 지나간 신체의 지표인 것처럼, 전통적인 사진은 대상으로부터 반사된 빛이 필름이나 센서에 작용해 생성되므로 대상의 흔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Peirce’s Theory of Signs”)
앙드레 바쟁(André Bazin),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진의 물리적 흔적, 과거 존재, 지표적 관계를 중요하게 다뤘다. 바르트의 『밝은 방』(Camera Lucida, 1980)에서 사진의 핵심은 “그것이 거기에 있었음”이라는 과거 존재의 증언과 연결된다. 크라우스는 「지표에 관한 노트」(“Notes on the Index”, 1977)에서 사진적 흔적을 1970년대 미술의 중요한 모델로 확장했다. (MIT Press, October: The First Decade)
이 이론만 단순 적용하면 사진은 언제나 어떤 현실의 흔적이므로 완전한 추상에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 대상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대상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포토그램은 물체와 빛의 직접적인 접촉 흔적이지만, 결과 영상은 비대상적인 선·면·농담으로 나타날 수 있다.
둘째, 추상은 반드시 원인이나 현실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추상은 현실의 재현적 정체성을 약화하고, 그 현실에서 형식·과정·관계를 추출하는 행위일 수 있다.
따라서 지표성과 추상성은 논리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
사진은 대상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그 흔적을 비재현적 형식으로 조직할 수 있다.
4. “모든 사진은 이미 추상이다”라는 명제의 검증
이 명제는 약한 의미에서는 옳고, 강한 의미에서는 틀리다.
4.1 약한 의미에서는 옳다
사진은 현실 전체를 그대로 복제하지 않는다. 사진은 다음과 같은 변환을 수행한다.
* 연속적인 시간에서 한순간 또는 제한된 노출시간을 선택한다.
* 무한한 시야에서 프레임 내부만 분리한다.
* 삼차원 공간을 평면 영상으로 변환한다.
* 크기와 거리를 축척으로 바꾼다.
* 색채를 필름·센서·색공간의 체계로 번역한다.
* 초점, 심도, 셔터속도, 렌즈 왜곡, 노출로 가시성을 재구성한다.
* 사물의 촉각·냄새·소리·무게를 제거한다.
* 특정 관점과 순간을 전체 현실처럼 제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진은 현실의 복제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선택적·광학적 추상화이다. 사진은 현실의 일부 성질만 보존하고 나머지를 제거한다.
4.2 강한 의미에서는 틀리다
그러나 이 때문에 모든 사진을 미술사적 의미의 ‘추상사진’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여권사진, 보도사진, 가족사진도 프레임과 평면화라는 추상화 과정을 거치지만, 그 주요 기능은 여전히 사람·사건·장소를 식별하고 재현하는 데 있다.
모든 사진이 추상사진이라면 ‘추상사진’이라는 장르적·비평적 개념은 아무것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해야 한다.
모든 사진에는 추상화 작용이 있다. 그러나 그 추상화 작용 자체를 작품의 주요 문제로 전면화한 경우에만 추상사진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5. 추상사진은 어느 정도까지 추상적일 수 있는가
추상사진은 ‘추상인가 아닌가’라는 이분법보다 정도와 방식의 연속체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비대상적 사진도 아무 원인 없이 생성되는 것은 아니다. 외부 사물의 모습은 없을 수 있지만 빛, 화학물질, 감광지, 열, 압력, 스캐너, 센서 노이즈 같은 물질적·기술적 원인은 남는다.
따라서 ‘대상이 없다’는 말은 엄밀히 다음처럼 고쳐야 한다.
재현되는 식별 가능한 외부 대상은 없지만, 이미지를 발생시킨 물질적·광학적·계산적 조건은 존재한다.
6. 추상사진의 예술사
6.1 19세기: 카메라 없는 사진의 선행 형식
윌리엄 헨리 폭스 탤벗(William Henry Fox Talbot)과 애나 앳킨스(Anna Atkins)의 포토제닉 드로잉과 시아노타입은 식물이나 물체를 감광면에 직접 접촉시켜 만들었다. 이 작업들의 목적은 식물 표본의 기록과 과학적 분류였지만, 대상이 실루엣과 명암 구조로 환원된다는 점에서 이후 추상사진의 중요한 기술적 선례가 되었다.
다만 앳킨스의 식물 이미지를 곧바로 ‘추상주의 사진’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 작품은 추상미술의 역사적 형성보다 앞서 있었고, 본래의 기능 역시 식물학적 기록에 가까웠다. 후대의 추상적 시각으로 재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6.2 1910년대: 의식적인 사진적 추상
폴 스트랜드(Paul Strand)의 《추상, 현관의 그림자, 코네티컷》(1916)은 실제 현관과 그림자를 촬영했지만, 대상을 검은 삼각형과 흰 면의 관계로 평면화했다. 시카고미술관은 이 작업을 스트랜드가 입체주의적 추상을 사진적으로 실험한 결과로 설명한다. (Art Institute of Chicago, Porch Shadows, MoMA, Abstraction, Porch Shadows, Connecticut)
앨빈 랭던 코번(Alvin Langdon Coburn)은 1916~1917년경 세 개의 거울을 렌즈 앞에 부착한 ‘보토스코프’(Vortoscope)를 사용하여 《보토그래프》(Vortograph)를 제작했다. 반사와 굴절로 대상을 기하학적 파편으로 해체한 이 작품들은 흔히 최초의 의도적인 순수 추상사진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다만 “최초”라는 표현은 정의와 기준에 따라 달라지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MoMA, Vortograph, 1916–17, Museum of Fine Arts Houston, Vortograph)
6.3 다다, 바우하우스, 포토그램
크리스티안 샤트(Christian Schad)는 1918년경 잡동사니와 종이 조각을 감광지 위에 놓아 ‘샤도그래프’(Schadograph)를 제작했다. 그는 20세기 모더니즘에서 포토그램을 예술적 형식으로 다시 사용한 초기 작가로 평가된다. (Art Institute of Chicago, Schadograph, MoMA, Schadograph, 1918)
만 레이(Man Ray)는 이를 ‘레이오그래프’(Rayograph)라고 불렀고, 라슬로 모호이너지(László Moholy-Nagy)는 포토그램을 사물의 재현보다 빛을 직접 구성하는 매체로 발전시켰다. 포토그램은 사물을 감광지 위에 놓고 빛에 노출하여 만드는 카메라 없는 사진이다. (Tate, “Photogram”, MoMA, Moholy-Nagy, Untitled, 1925, MoMA, Man Ray, Rayograph, 1922)
여기서 중요한 변화는 사진이 “무엇을 찍었는가”보다 “빛이 어떻게 흔적을 만들었는가”를 묻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6.4 신시각 New Vision
1920~1930년대 신시각 사진은 급격한 앙각과 부감, 사선 구도, 확대, 네거티브 반전, 솔라리제이션, 다중노출을 활용했다. 이는 일상적 지각을 낯설게 하고 기계적 시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려는 모더니즘적 실험이었다.
그러나 신시각의 모든 사진이 추상사진은 아니다. 건축이나 인물을 명확히 보여주는 작품도 많다. 신시각은 추상사진과 겹치지만 추상사진보다 넓은 범주이다. (Tate, “A–Z of Modernist Photography”)
6.5 전후 추상사진과 주관주의 사진
아론 시스킨드(Aaron Siskind)는 벽의 균열, 벗겨진 페인트, 낙서, 밧줄, 돌 같은 현실의 표면을 촬영하여 추상표현주의 회화에 가까운 화면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사진은 회화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도시 표면에 이미 존재하는 흔적을 선택하고 분리한 것이다. (National Gallery of Art, Aaron Siskind, NGA, Chicago 56)
독일의 오토 슈타이너트(Otto Steinert)가 1951년 주도한 ‘주관주의 사진’(Subjektive Fotografie)은 객관적 기록보다 사진가의 선택과 형식적 창조를 강조했다. 슈타이너트는 포토그램, 엄격한 흑백 환원, 크로핑, 장노출, 명암 반전, 다중노출을 사용했으며, 사진이 현실 묘사를 넘어 독자적인 화면 현실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Museum Folkwang, “Otto Steinert: Absolute Creation”, Tate, “Subjective Photography”)
그러나 주관주의 사진과 추상사진은 동일하지 않다. 주관주의 사진에는 인물·풍경·보도적 장면도 포함되며, 추상은 그 가능한 형식 중 하나이다.
6.6 후기 모더니즘과 동시대 사진
바버라 캐스턴(Barbara Kasten)은 거울, 유리, 금속판, 색광, 조각적 구조물을 스튜디오에 설치한 뒤 촬영한다. 그녀의 사진은 실제 대상을 기록하지만, 최종 화면에서는 회화·조각·건축·사진의 경계가 겹친다. 추상은 사후 효과가 아니라 촬영 이전의 공간 구성에서 이미 만들어진다. (Tate, “Through the Lens of Abstraction”, MoMA, Barbara Kasten)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lmans)는 카메라로 촬영한 추상사진과 카메라 없이 빛·화학물질·인화지를 직접 조작한 작품을 함께 제작한다. 이는 추상사진이 촬영된 대상뿐 아니라 사진 인화물 자체의 색, 표면, 접힘, 우연한 화학반응을 내용으로 삼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Tate, Wolfgang Tillmans: 2017 전시 안내)
우타 바르트(Uta Barth)는 초점을 비껴가게 하거나 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연속적으로 촬영하여 무엇을 보는가보다 ‘본다는 행위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탐구한다. 게티미술관은 그의 작업을 시각, 빛, 시간, 카메라의 번역 작용에 관한 연구로 설명한다. (Getty Museum, Uta Barth: Peripheral Vision)
이 사례는 추상사진이 반드시 대상을 완전히 없애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대상이 남아 있어도 관람의 중심이 대상의 정체에서 지각 작용으로 이동하면 추상적 사진이 성립한다.
7. 추상사진과 회화적 추상의 차이
추상사진을 단순히 “추상회화처럼 보이는 사진”이라고 정의하면 사진의 고유성이 사라진다.
추상회화에서 색과 형태는 붓질, 안료, 신체적 제스처를 통해 구성된다. 반면 추상사진은 다음의 사진적 조건을 이용한다.
* 빛의 실제 노출
* 렌즈의 초점과 왜곡
* 셔터에 의한 시간의 누적
* 감광재료의 화학적 반응
* 네거티브와 포지티브의 전환
* 프레임에 의한 공간 절단
* 센서의 신호와 노이즈
* 픽셀, 압축, 색공간, 스캔
* 인화지의 표면과 설치 방식
따라서 좋은 추상사진은 회화를 닮은 사진이 아니라, 회화로는 동일하게 만들 수 없는 사진적 발생 과정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클레먼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모더니즘 형식주의처럼 매체의 자율성과 ‘순수성’을 강조하는 관점은 추상사진을 빛·평면·사진재료의 자율적 구성으로 평가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사진은 회화보다 복제, 기록, 기술, 사회적 사용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순수한 시각 형식’만으로 환원하기 어렵다.
추상사진은 사진의 현실적 연결을 없애기보다는 그 연결을 불확실하게 만들거나, 흔적 자체를 형식으로 전환한다.
8. 철학적 논쟁
8.1 사진의 자동성과 작가의 의도
로저 스크러턴(Roger Scruton)은 사진의 영상이 대상과 인과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회화처럼 작가의 생각을 직접 형상화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 논리는 극단적으로 적용하면 사진의 예술 가능성 자체를 제한한다. (Roger Scruton, “Photography and Representation”)
그러나 추상사진의 역사는 이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례가 된다. 사진가는 다음을 선택한다.
* 무엇을 빛에 노출할 것인가
* 어느 부분을 프레임 안에 넣을 것인가
* 얼마나 오래 노출할 것인가
* 어떤 렌즈와 감광재료를 사용할 것인가
* 우연과 통제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 인화물의 크기와 표면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 단일 이미지와 연작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가
자동적인 광학·화학 과정은 작가의 의도를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가는 자동성과 우연을 작품의 재료로 조직한다.
8.2 사진의 투명성
켄들 월턴(Kendall L. Walton)은 사진을 볼 때 사진이라는 물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 과거의 대상을 실제로 본다는 ‘투명성’ 논제를 제시했다. (Kendall Walton, “Transparent Pictures”)
추상사진은 이 투명성을 약화한다. 관람자는 이미지 뒤의 대상보다 사진의 표면, 입자, 빛, 색, 노출 흔적을 의식한다. 즉 사진은 투명한 창에서 불투명한 물질적 이미지로 바뀐다.
그러나 모든 추상사진이 완전히 불투명한 것은 아니다. 시스킨드의 벽 사진에서는 추상적 화면과 실제 벽의 흔적이 동시에 보인다. 이 이중성이 사진적 추상의 핵심적인 미학이다.
8.3 지표성은 진실을 보증하지 않는다
톰 거닝(Tom Gunning)은 사진의 지표적 관계와 사진의 진실성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필름이나 센서가 실제 빛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이미지의 의미나 서술이 진실이라는 것을 자동으로 보증하지 않는다. 렌즈, 노출, 현상, 인화, 편집은 언제나 매개로 개입한다. (Tom Gunning, “What’s the Point of an Index? or, Faking Photographs”)
이 논의는 추상사진에도 중요하다. 추상사진은 현실과의 연결을 숨길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사진이 애초부터 투명한 현실 복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폭로할 수도 있다.
9. 추상사진과 초현실사진의 차이
추상사진과 초현실사진은 낯설고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자주 혼동된다. 그러나 원리는 다르다.
만 레이의 레이오그래프처럼 두 범주가 겹치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추상사진을 초현실주의라고 부르거나, 알아볼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초현실사진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10. 추상사진과 심상사진의 차이
추상사진이 감정과 심상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심상사진은 아니다.
‘심상사진’이 작가의 기억, 감정, 상상, 내적 이미지가 작품 구성의 중심이라는 비평적 표현이라면, 추상사진은 이미지의 형식적·물질적·지각적 조직을 가리킨다.
* 흐릿한 사진이 내면적 분위기를 만든다고 해서 자동으로 추상사진은 아니다.
* 추상적인 형태를 가졌다고 해서 작가의 내면을 직접 표현하는 것도 아니다.
* 감정적 제목이 붙었다고 해서 형식적 임의성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 비대상적 이미지는 심리의 표현일 수도 있지만 빛, 장치, 재료, 우연에 관한 분석일 수도 있다.
따라서 작품의 외관이 아니라 제작 의도, 방법, 연작 구조, 전시 맥락을 함께 보아야 한다.
11. 추상사진에 관한 일반적인 오해
오해 1.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으면 추상사진이다
식별 불가능성은 추상사진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초점 실패, 노출 오류, 지나친 확대, 우연한 흔들림도 대상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이 작품이 되려면 왜 식별을 방해했는지, 그 방식이 어떤 지각적·매체적 문제를 만드는지 설명되어야 한다.
오해 2. 클로즈업은 모두 추상사진이다
클로즈업은 추상화의 방법일 뿐이다. 꽃잎을 확대했더라도 작품의 목적이 꽃의 아름다움이나 생태적 정보라면 추상사진이라 부르기 어렵다. 반면 확대를 통해 크기와 공간 감각을 붕괴시키고 색면과 표면의 문제를 전면화한다면 추상적 작업이 될 수 있다.
오해 3. 흔들거나 흐리게 찍으면 추상이다
흐림은 하나의 기술이다. 우타 바르트처럼 흐림이 초점, 주변시, 시간, 지각의 습관을 탐구한다면 개념적 필연성을 갖는다. 그러나 단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습관적으로 흐림 효과를 반복한다면 장식적 스타일에 머물 수 있다.
오해 4. 흑백사진은 더 추상적이다
흑백은 색 정보를 제거하므로 추상화 효과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흑백 보도사진과 인물사진은 여전히 강한 재현적 기능을 가진다. 흑백 자체가 추상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오해 5. 포토샵 효과가 많으면 추상사진이다
후처리의 양이 추상성의 기준은 아니다. 효과가 작품의 문제의식과 연결되지 않으면 시각적 장식에 불과하다. 반대로 거의 보정하지 않은 사진도 프레이밍과 시점만으로 강한 추상을 만들 수 있다.
오해 6. 추상사진에는 내용이 없다
형식은 내용의 부재가 아니다. 사진의 지각 방식, 시간, 물질, 기술, 우연, 신체, 산업적 이미지 환경 자체가 내용이 될 수 있다. 다만 “무의미”나 “자유로운 해석”이라는 말만으로 개념의 빈곤을 감출 수는 없다.
오해 7. 순수한 추상은 사회적·정치적 맥락에서 자유롭다
색과 형태도 특정 역사와 제도 안에서 읽힌다. 추상은 유토피아, 산업화, 기술 낙관주의, 냉전기의 개인주의, 시장의 장식성, 디지털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왔다.
또한 낡은 벽이나 폐허의 표면을 아름다운 패턴으로만 촬영할 경우, 그 장소가 가진 빈곤·노동·전쟁·도시개발의 맥락을 지워버릴 수 있다. 추상화는 현실을 새롭게 보게 하지만 현실의 구체적 관계를 미학적으로 소거할 위험도 있다.
오해 8. 카메라가 없으면 사진이 아니다
포토그램, 루미노그램, 케미그램은 렌즈와 카메라 없이 만들어지지만 빛과 감광재료를 사용한다. 미술사와 주요 미술관은 이를 ‘카메라 없는 사진’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사진을 카메라 사용 여부로만 정의하는 것은 지나치게 협소하다.
오해 9. AI로 만든 포토리얼한 추상 이미지는 곧 추상사진이다
텍스트 프롬프트만으로 생성된 이미지는 특정 장면에서 반사된 빛이 렌즈와 센서에 기록된 결과가 아니다. 따라서 전통적 의미에서는 사진보다 합성 이미지 또는 생성 이미지에 가깝다.
다만 촬영 이미지, 데이터셋, 스캔, 생성 모델, 출력물과 전시 과정을 결합한 작품은 확장된 사진예술의 맥락에서 다룰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사진처럼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사진이라고 부르기보다 이미지의 생성 계보를 밝혀야 한다. 디지털 예술의 미학 역시 작품을 올바르게 평가하려면 그 이미지가 어떤 계산적 과정으로 생산되고 제시되는지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The Philosophy of Digital Art”)
12. 동시대 예술에서 추상사진이 갖는 의미
12.1 사진을 창문에서 물체로 바꾼다
전통적인 사진은 현실을 들여다보는 창으로 이해되었다. 동시대 추상사진은 인화지의 표면, 광택, 크기, 접힘, 안료, 설치 구조를 강조하여 사진을 하나의 물질적 물체로 만든다.
12.2 지나친 정보성에 저항한다
온라인 이미지는 대개 무엇을 보여주는지 즉시 식별되고 분류되며 검색되어야 한다. 추상사진은 이러한 즉각적인 식별을 지연시킨다. 관람자는 이미지에서 곧바로 정보를 얻지 못하고 더 오래 보게 된다.
그러나 ‘식별 불가능성’ 자체를 저항이라고 낭만화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추상 이미지는 광고, 배경화면, 인테리어, 브랜드 디자인에도 쉽게 흡수된다.
12.3 인간의 시각과 기계의 시각을 비교한다
초점, 노이즈, 압축 오류, 픽셀, 센서의 색 해석을 다루는 작업은 인간이 본 세계와 장치가 계산한 세계의 차이를 드러낸다. 추상사진은 사진이 자연적인 눈의 연장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구성된 시각 체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12.4 실패와 오류를 재료로 전환한다
빛샘, 현상 얼룩, 센서 노이즈, 색수차, 데이터 손상, 압축 오류는 통상 제거해야 할 결함이다. 추상사진은 이를 작품의 형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우연한 오류를 그대로 제시한다고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류가 사진의 기술적 규범이나 이미지의 신뢰성에 어떤 질문을 제기하는지가 중요하다.
12.5 추상의 보편성을 비판한다
모더니즘 추상은 종종 선과 색의 언어가 문화적 차이를 넘어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동시대 비평은 이러한 보편성이 실제로는 서구 모더니즘, 미술관 제도, 자본시장, 특정 교육 체계의 산물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추상사진을 평가할 때 “순수한 형식”이라는 표현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순수해 보이는 형식도 역사적·기술적 조건에서 생산된다.
13. 추상사진을 평가하는 객관적인 기준
추상사진의 완성도는 단지 아름다운 색이나 신기한 형태로 평가할 수 없다. 다음 질문들이 필요하다.
13.1 형식적 필연성
왜 이 구도, 색, 흐림, 노출시간, 크로핑이 필요한가. 다른 효과로 대체해도 내용이 같다면 형식적 필연성이 약하다.
13.2 사진 매체의 특수성
이 작업이 빛, 렌즈, 시간, 감광재료, 센서, 인화, 복제 같은 사진적 조건을 실제로 탐구하는가. 아니면 회화적 디자인을 사진으로 흉내 낸 것에 그치는가.
13.3 대상과 형식의 긴장
대상이 완전히 사라졌는가, 부분적으로 남았는가, 제목을 통해 다시 돌아오는가. 그 긴장이 관람 경험에 의미를 만드는가.
13.4 우연과 통제의 관계
우연한 효과를 발견한 것인지, 반복 가능한 방법을 구축한 것인지, 통제할 수 없는 과정 자체를 개념적으로 사용한 것인지 검토해야 한다.
13.5 연작의 구조
단일 이미지의 신기함이 아니라 여러 이미지가 차이·반복·시간·변형의 논리를 형성하는지 보아야 한다.
13.6 물질과 전시
작품의 크기, 인화지, 표면, 액자, 빛, 설치 위치가 의미와 연결되는가. 추상사진은 화면뿐 아니라 사진 물체의 물질성이 중요할 수 있다.
13.7 역사적 자각
포토그램, 신시각, 추상표현주의적 표면 사진, 주관주의 사진 등 기존 계보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발견인 것처럼 주장하지 않는가.
13.8 개념과 감각의 균형
설명문을 읽지 않아도 시각적 경험이 작동하는가. 반대로 아름다운 효과만 있고 비평적·개념적 구조가 비어 있지는 않은가.
14. 종합 판정
“사진에서 추상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는 다음처럼 답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첫째, 사진은 현실의 일부를 프레임으로 분리하고 시간과 공간을 평면으로 바꾸므로 본래 추상화 작용을 포함한다.
둘째, 사진이 현실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은 추상을 불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추상은 현실과의 관계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의 식별 가능한 모습을 약화하고 형식·관계·과정·지각을 전면화한다는 뜻이다.
셋째, 포토그램이나 직접 노광처럼 렌즈 앞의 외부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비대상적 사진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빛, 재료, 장치, 데이터라는 발생 조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넷째, 추상사진은 단일한 ‘추상주의 사진운동’이 아니다. 다다, 바우하우스, 신시각, 주관주의 사진, 전후 형식주의, 개념사진, 카메라 없는 사진, 디지털 예술을 횡단하는 복수의 실천이다.
다섯째, 낯설고 흐리며 대상을 알아보기 어렵다는 외관만으로는 추상사진이 성립하지 않는다. 추상화의 방법이 작품의 개념, 사진적 과정, 지각 경험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추상사진은 현실을 단순히 지우는 사진이 아니라, 현실이 사진으로 변환되는 조건을 가시화하는 예술이다. 그것은 대상을 제거할 수도 있고 남겨둘 수도 있지만, 대상의 명칭보다 빛·형태·시간·표면·지각·장치의 관계를 우선한다.
따라서 추상사진은 가능하다. 다만 그 핵심은 “무엇인지 모르게 찍는 것”이 아니라, 사진의 재현적 투명성을 흔들고 사진이 어떻게 하나의 이미지를 생산하는지를 작품의 중심 문제로 삼는 데 있다.
주요 참고문헌 및 자료
*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기호와 지표 이론: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1980.
*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Notes on the Index: Seventies Art in America,” October, 1977.
* 로저 스크러턴(Roger Scruton), “Photography and Representation,” 1981
* 켄들 L. 월턴(Kendall L. Walton), “Transparent Pictures: On the Nature of Photographic Realism,” 1984
* 톰 거닝(Tom Gunning), “What’s the Point of an Index? or, Faking Photographs”
* MoMA, Inventing Abstraction, 1910–1925
* Tate Modern, Shape of Light: 100 Years of Photography and Abstract Art
* Tate, “Photogram”
* Museum Folkwang, Otto Steinert: Absolute Creation
* Getty Museum, Uta Barth: Peripheral Visio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