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토 엣세이>
다시 읽는 정연휘 시인의 심층취재 엣세이
혈죽열녀血竹烈女,도끼에 죽순竹筍이 솟다
1) 서언·실화
"기적이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자연적인 사실이다" G·산타야나의 저서『프리노자 윤리학 입문』에서 한 어록이다. G·산타야나의 어록처럼 기적은 있었고, 기적은 있고, 기적은 있을 것이다. 여기 [혈죽열녀血竹烈女, 도끼에 죽순이 솟다] 이야기도 있었던 기적이다. 설화도, 전설도, 소설도 아닌 실화實話이다.달나라에 사람이 다녀 온지도 옛날처럼 여겨지는 세상에, 과학적으로 증명자료가 있어야 믿을 것이다.
바로 증명자료 세가지를 제시한다. 그 하나는 1920년 2월 23일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이다. 그 둘은 매일신보에서 촬영한 이야기의 주인공 박씨부인의 손가락 절단이 보이는 얼굴과 도끼에 죽순竹筍 두 개가 선명히 클로즈 업 된 사진이다. 그 셋은 성균관 유림향약본부儒林鄕約本部에서 1943년 정월달에 올린 표창완의문表彰完議文이다.1920년 2월23일자의 신문기사 사본을, 1920년 그해의 사진을, 1943년 성균관 표창완의문表彰完議文 문서를 증빙자룔로 실으니 믿을 것이다.
인류역사가 있은 이래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일이다. 신문에 뽑은 제목이 ‘烈婦의 熱烈한 血의 精’이라 하고, 더 큰 제목으로 ‘斧刄에 竹筍이 발생’이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박씨부인의 남편이 음력 정월 사흘에 유행성 감기에 걸려 중병을 앓다가 동월 초파일에 부인의 지극한 헌신에도 불구하고 하느님편으로 가셨다. 부인은 남편을 살리기 위해 도끼로 왼손 무명지를 잘라 거기서 솟는 피를 남편의 입에 넣었더니 하느님이 감동하여 남편을 기사회생 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은 부드러워진 입으로 말은 못하고 눈을 뜨고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는 아주 영영 갔었다. 그런후 장례를 치루고 상막을 만들려고 감춰둔 도끼를 오양간 천정에서 꺼냈더니 그 도끼의 피묻은 자리에 두 개의 죽순竹筍이 솟아 있었다는 것이다.
▲朴基成 (31세,1920년) 血竹烈女와 도끼에 솟은 죽순竹筍 2개
2) 발굴동기
삼척향문연三陟鄕文硏에서는 한시번역을 3년째 하고 있다. 90년 11월 두 번째 일요일에 연지서실에서 연구위원 김일기 진인탁 교수, 박재문 선생, 김규영 홍태의 한학자, 정연휘 박종화 시인, 서예가 김명숙이 테불에 둘어 앉아 시작하기전 환담을 나뉘는 시간이다. 김규영 선생이 ‘혈죽열녀 표창완의문’ 이야기를 꺼냈다.표창완의문 주인공 박기성 부인의 아들 김경태씨가 왜정 때 삼척군청 과장으로 재직했고,박대통령 시절 문교부장관에게 '혈죽열녀 이야기'를 얘기하여, 초등학교 교과서에 채택키로 하였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무산되고, 그 분도 늙어 추진력이 없다며 향교 교지에 실으라며 이 완의문 복사본을 내게 주었다" 라고 말했다.
엄청난 이야기, 기적의 이야기를 김규영 선생에게서 처음 듣고 놀라워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을 했다.그래서 완의문과 신문기사 복사본을 읽으면서 믿을 수 없는 것을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있게 깨닭았다.
그 완의문完議文이 행·초로 쓰여저 식별이 어려워 홍태의 선생에게 해서로 정필을,김규영 선생에게는 번역을, 서울에 있는 김익하 소설가로 부터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인 매일신보 기사 복사분을 받았다.그리고 대충 원고를 정리하니 뭔가 하나가 빠져 미진했다.자손들의 구술이 실리어야 겠기에 김규영 선생에게 물어 보았으나 며느님과 손자는 미국에 눌러 살고, 어느 학교인가 손녀 딸이 선생을 하고 있다는데 이름을 몰라 찾아 볼 길이 막연함에 진전이 없었다.
그런 중에 지난 8월 26일 14시에 홍태의 선생이 자영하는 삼문사에 미리 약속대로 완의문 정필 뒷부분에 가필이 필요해 찾아 뵈었는데, 김규영 선생도 와 계셨다. 혈죽열녀 며느님과 손녀딸에 대해 다시 말씀을 드렸더니, 근덕농고에 조선생인가 있는데 울진사람으로 손녀딸의 남편이 있을 거라고 하였다. 그 말을 막바로 받아 홍태의 선생이 진승환 선생을 내가 잘 아는데, 조선생에 대해 물어 보겠다며 즉시 통화를 하였다. 옆에서 가슴 조이며 듣자니 저쪽에서 이야기를 길게 끄는 것이 뭔가 낌새가 있었다. 홍선생께서 다시 김규영 선생께로 수화기가 넘어가 통화가 한참인데 내용에 밝은 빛이 보였다. 김규영 선생이 수화기를 놓으며 조선생이 아니고 지금 전화한 진선생이 열녀부인의 손녀사위라고 말을 하였다.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찾고 찾던 혈손을 만날 수 있구나 였다. 더욱 놀란 것은 미국에 계시는 진선생의 장모님, 열녀부인의 며느리 되시는 분이 삼척에 와 있다는 사실에 더욱 감격이였다. 또 더 더욱 놀란 것은 신문에 실린 사진 원본을 그분이 갔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뭔가 참 잘 풀려가는구나 했다.
▲혈죽열녀의 며느리 박언년 (朴彦年 73세,1991년) 여사
3) 사실확인, 열녀의 며느리 만남
박기성(朴基成 31세,1920년) 열녀부인의 며느리 박언년(朴彦年 73세,1991년) 여사를 그 이튿날 1991년 8월27일 19시 삼척시 남양동 백조맨션1차 302호 진승환 선생댁에서 만남이 이뤄 젖다. 일가가 되고 표창완의문表彰完議文을 번역한 김규영 선생, 정필을 하고 진승환 선생을 연결한 홍태의 선생, 그리고 사진촬영을 위해 연지서실의 김명숙 원장과 함께 였다.
박언년 여사의 첫 대면은 아주 맑고 곱게 늙으셨구나 이다. 만남은 의외성이였고 갑자기 이뤄진 값진 것이다. 혈죽열녀의 며느리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이 도와 준 것이다. 바로 자손들의 이야기를 오늘에 기록으로 남긴다는 보람도 있지만, 자료로 그리고 후손들의 이야기를 보충한다는 것은 완벽 그것이 아닌가.영영 만날수 없을 것 같은 만남이 아뤄짐도 기적은 아닐까.
박언년 여사의 말씀을 간추리면 이러하다.
"시집와서, 그것도 내 나이 스물 한 살때 시집와서 보니, 시어머니 왼손 무명지가 없기에 궁금하여 물었더니, 그냥 다쳐서 그랬다라고 하셨다. 나중에 큰시어머니와 남편한테 들어서 알았지만, 시어머니의 단지와 도끼날에 자란 죽순으로 사람들이 소문에 소문으로 구름처럼 몰려왔다고 했다. 그 사건은 내 결혼 13년전의 일이였다. 남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오양간 천정에 손을 뻗쳐 도끼를 집어 당기는데 ‘찍-’ 하는 소리가 나서 도끼를 보니 단지 때 혈흔 자리에 죽순이 솟아 자라다 당기는 바람에 ‘찍-’ 소리와 함께 넘어저 있더란 것이다"
가계家系를 보면, 박기성 혈죽열녀의 남편은 김기선金基宣이고 시아버지는 김조혁金朝赫으로 인근에 소문난 한의사였다. 혈죽열녀 박씨부인의 아들, 즉 박언년 할머니의 남편은 김경태(金景泰, 집에서는 景執)이다.그 집 부근에 살았던 토박이 김규영 선생에 의하면, 김경태는 수재로 춘천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삼척금융조합에 근무하다가 다시 삼척군에 과장으로 근무자리를 옮겼는데, 이는 부친의 간곡한 부탁으로 군청을 그만두고 다시 근덕중학교 창설 맴버로 교직으로 옮겼다. 그때만 해도 삼척과 근덕까지 거리는 보도로 다니는 엄청 먼 거리였다. 5?16때에 정년퇴임을 하고 삼척군농협 감사로 10년 재임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인품이 곧고 청렴결백 하였다는 주변의 이야기였다. 언행은 말할 것도 없고 걸음거리도 흐트러짐이 없는 선비였다고 한다.
▲중간의 혈죽열녀의 며느리 박언년(73)여사와 왼쪽 사위 진승환(55) 선생,오른쪽 딸 김수연(51) 선생
▲박기성 혈죽열녀의 가계도 ▲1920,2,23. 보도된 每日申報
박기성 열녀의 손자 손녀는 다시 말하면 김경태 박언년 부부 슬하에 3남 4녀의 자손이 있다.손녀딸 김수연(金秀娟 51세,1991년)은 말한다. "혈죽열녀 할머니는 첫 손녀딸인 나를 제일 사랑했다. 아버지 말씀이 원래 도끼에 생긴 죽순은 3개였는데, 사진 촬영때인가 오양간 천정에서 내릴 때인가, 둘중 하나에서 죽순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고 하셨다. 사진을 찍은 후 죽순 2개를 알콜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는데 6?25 때 피난갔다 오니 모든 것이 없어졌는데, 신사임당 친필 병풍과 같이 넣어 둔 '혈죽열녀 표창완의문' 책자만이 남아있었다. 그것도 지금 생각하면 조화로운 일이다. 지금도 병풍은 근덕 큰댁에서 간직하고 있다" 라고 말 하였다.
손녀 사위 진승환(陳承煥 55세,1991년)선생은 말 했다. "살아 생전 장인 어른은 본인의 자랑이라던가 뭔가를 나타내 보이려 하지 않는 어른이였다. 그런 본인의 맥락에서 자신의 어머니이신 혈죽열녀의 실화가 신문에 보도된 이후 수십년간 여러곳에서 발표하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실 처 할머니는 자랑스러운 분이셨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위고 87세로 돌아 가시기 까지 정절을 지키고 수절하였다는 것은 우리들 현대 시각에서 볼 때 엄청난 인고의 세월이였을 것이고, 또 오늘날 우리들이 본받을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라고 말을 했다.
일가인 김규영 선생은 "혈죽열녀의 현대적 의미는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듯이 지극한 사랑 앞에 하늘이 감동하여 그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듣고 사진을 보고 자랐기에 조금의 의심도 한적이 없다. 개성 선죽교의 충신 정몽주의 피는 씻어지지 않는 기적과 같은 맥락이 아닌가. 오늘날 동방예의지국으로 충효의 미덕으로 귀감이 되는 좋은 일이다" 라고 말을 했다.
필자도 처음에는 믿음 반이였으나 여러 가지를 볼 때 사실이고 기적이란 걸 믿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도끼날에, 하늘의 감동으로, 열녀의 열열한 사랑으로, 죽순竹筍이 시퍼런 도끼날의 혈흔에 솟았고, 그걸 사진으로 촬영하였고, 알콜에 보관까지 하였다는 기적은 내 뇌리에서 쉽사리 떠나지 않는다.
▲동행취재/진승환 선생,박언년 여사,김수연 선생,김규영 한학자,홍태의 한학자,정연휘 시인 1991,8,27.
촬영/김명숙 서예가
4) 매일신보 기사내용
정성이 지극하면 하나님도 감동하시는 것이다. 지난번에도 보도하였거니와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 교가리 1012번지에 사는 김조혁金朝赫의 장남 김기선金基宣의 아내 박기성朴基成, 금년 31세된 부인은 김씨 집으로 출가하여 온 이래로 십년을 하루와 같이 시부모에게 효성하며 지극히 살림에 부지런하였다. 조금도 변하는 기운도 없이 한결같이 정성을 다하여 오는 여자임으로 부근 일대에서는 현숙한 여자라고 일반의 칭송이 자자한 터이다.
올해 음력 정월 사흗날부터 그 남편이 유행성 감모(주:感冒(감기))로 병세가 점점 위독하여서 박씨 부인은 밤낮으로 그 앞을 떠나지 않고, 밤중이면 하늘을 부르짖어 그 남편의 회춘을 애원하였다. 그러나 정성과 약효는 효험을 보지 못하고 동월 초파일에 그만 세상을 떠났다.
박씨는 하늘이 무너진듯 기막혀 애통해 하면서 도끼를 집어 가지고 왼편손의 무명지를 찍어서 댓줄기 뿜듯하는 뜨거운 피를 길게 눈을 감은 남편의 입에 흘리어 넣었더니, 하늘이 그 여자의 정성을 감흥하심에 죽었던 남편은 얼마 아니하여 다시 살아나면서 눈을 떴다. 그 아내의 지극한 정성과 진정한 사랑에 희생하는 그 열열한 마음을 감사하는 듯이 부드러워진 입으로 말은 못하고 다만 마지막의 감사하는 한줄기 눈물을 흘리어 주고 약 이십분만에 저 세상으로 거두어 가셨다.
죽었던 남편 살아 난것에 기쁜 눈물이 가득하든 박씨는 또 다시 기막히는 최후를 당하여 한편의 무명지를 마저 자르려고 하는 것을 집안 사람이 억지로 만류하고 도끼를 뺏어 소를 먹이는 오양간에 감추어 두었다.
그 뒤에 박씨는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그 남편을 따라서 하종(下從=자결)하려 하였으나 워낙 집안 사람들의 감시가 한시도 옆을 떠나지 않으므로 남편을 따라 하종치 못하고 살아서,여이고 가슴 이 쓰리는 설움에 싸이여 단양하고 정결한 산에 안장한 후에 동월 십삼일 곧 장사지낸 이튿날에 남편의 영령을 만들려고 도끼를 찾아서 본즉, 참으로 기이도 하다 서슬 시퍼런 도끼날-피 묻은 곳에 죽순(대나무) 두 개가 솟아 낳음으로 하도 이상하여 그 시부에게 그런 말을 하였다. 즉시 명장에서 이런 사유를 말씀 드렸고, 면소로 부터는 군청으로 보고하고 또 주재소에도 통지하여 군수이하 직원과 주재소장과 면역소 일반은 박씨 집에 와서 사실대로 조사하고 일반은 하도 이상하고도 거짓말 같은 정말 사실이므로 일반 사진까지 박았다.
그 죽순의 대소는 1개는 굵기가 2푼이요 길이가 6푼이며, 또 하나는 굵기가 1푼이요 길이가 3푼이었다. 이와같이 기이한 일은 우리 인류 역사가 있은 이래 실로 전무후무한 일이라 하겠다.
성균관 유림향약본부儒林鄕約本部에서 1943년 정월달에 올린 표창완의문表彰完議文/제공 김규영
▒『悉直文化』제2집, 정연휘, 삼척문화원, 1991
첫댓글 자세히 자료를 올려 주셨군요 현 댓골칼국수 여사장님이 박언년여사의 딸입니다 혈죽열녀의 친 손녀이지요 그 분을 통해서 내용은 알고있었는데 다시 한번 상기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김수연 선생님의 동생 되시는 분인가 봅니다.
진승환 선생님 외 소식을 듣고 싶어서
한 번 '댓골칼국수'에 들리겠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박물관으로 퍼 갑니다^^
김관장님,좋은 시간,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