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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기 시집 <풍경> 해설
육화된 시, 삶의 이정표가 되다
박현솔(시인, 문학박사)
소통은 현실적인 실존의 필수조건으로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타인과 함께 나누려는 것을 의미한다. 소통에는 실리적인 목적의 현존재적 소통과 보편적인 의식 일반의 소통, 하나의 체계를 공유하는 정신의 소통이 있다. 이들 소통은 모두 불완전한 것들인데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인간이 진정한 본래적인 자기를 발견해 가는 소통을 진정한 실존적 소통이라고 보았다. 소통을 하는 상대에게 마음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고 불완전성을 극복하며 진정한 연대의식을 형성해 나가게 된다.
한편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얻은 정보들을 통일하는 능력을 지성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시에서 의미하는 지성은 미적 모더니티의 성격을 함축하는 인식능력이다. 그리고 실존주의에서 인간 조건을 이성주의 논리가 아닌 지성주의적 태도로 사유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전통 서정시파가 받아들인 지성은 이성 개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들은 시적 주체가 현대의 파편화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사상성과 완결성, 통일성을 견인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1950년대 지성주의는 전후의 정치적인 상황과 시의 미학적 추구를 분리시켜서 생각하지 않았기에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60년대는 문학의 현실참여 문제를 통해서 문학이 가진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다. 이 시기부터 산업화가 진행된 70년대, 정치적인 역동기인 80년대에도 서정시, 모더니즘시, 초현실주의시 등 세분화된 시적 경향이 현대시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흐름 속에서 지성주의는 정신주의로 변환되어 대부분의 시적 경향 속에 조금씩 녹아들어서 그 나름의 명맥을 유지해나갔다.
전후의 암담한 분위기와 4·19 혁명, 유신체제, 6월항쟁 등을 지켜보면서 성장한 60년대생 시인들 중에서 실존주의적 시의식과 지적인 탐구정신을 가진 시인으로 김광기 시인을 들 수가 있다. 김광기 시인은 1959년생으로 전후에 전쟁의 복구가 한참 이뤄지던 시기에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반산리에서 태어나서 석우리로 이주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때 집안의 할아버지로부터 한자를 배우고 그 과정을 통해서 사물의 본질과 만물의 이치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서 인식의 밑바탕을 다지고 더 넓은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산업화와 유신체제가 있었던 1970년대에는 <월간조선>, <신동아>, <월간문학>과 <문학사상> 등을 접하면서 시문학과 평론들을 처음 접하기 시작하였다. 군부 독재 시대에 접어든 1980년대 초에 김광기 시인은 대학 학보사 편집장을 맡아서 학교 신문을 만들었고 <탈 이야기> 같은 시들을 쓰면서 당대의 현실을 그려내곤 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 발전이 심화되던 1990년대에는 무역을 하면서도 시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는데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고이는 시를 퍼내는 작업을 이어갔다. 그리고 탈산업화로 인한 소비문화와 과학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한 1990년대는 문학 동인과 다층 편집동인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의 시기들을 표현한 시 「호루라기소리」에서 “60년대 호루라기소리에는 줄을 섰고/7, 80년대 호루라기소리에는 도망부터 했고/90년대 호루라기소리에는 멈칫멈칫하다가/세상이라도 망할 것 같았던 세기말을 한참 지난 요즘에서야/창밖의 호루라기소리가/찻길을 잡는 소리로 들리는 시간”과 같이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안정이 되지 않았던 그때의 심정을 뒤늦게 토로하고 있다.
김광기 시인은 외면적으로는 활달하면서 재치있고 지적인 것에 대한 탐색이 왕성한 반면에 내면적으로는 사유적이고 관조적이며 삶을 통해서 육화된 것들 위주로 시를 쓰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그의 삶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시가 씨앗을 터트리는 것을 보게 된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제주에서의 생활이 담긴 사유들이 담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가 어디에 있든 사람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서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도약을 도모하려는 태도는 일찍 고향을 떠나서 느꼈던 상실의 정서를 사람들의 정으로 채우고자 하는 심리적 요인이 작용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식을 탐색하고 지성을 추구하는 것은 다양하고 체계적인 독서를 통해서 진리를 탐독하고 그것을 삶과 연결시켜서 자신만의 이상적인 세계를 완성하고자 하는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소통과 지적 사고의 추구는 세상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자기 내면을 향한 것이고 시적인 완성을 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문단 활동을 하면서 출간한 시집으로는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곱사춤, 호두껍질, 데칼코마니, 시계 이빨 등과 시론집 존재와 시간의 메타포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그리고 1998년에 <수원예술대상>, 2011년에 <한국시학상>, 2019년에 <수원시인상>을 수상하였고 아주대 강사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에는 문학과 사람 발행인으로 출판과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1. 꽃은 제 잎을 오므려 나를 흡수한다
시드는 태양빛을 내가 먼저 게우고 있다.
짙은 안개 속처럼 희미한 시간의 늪,
빛은 아직 투사되고 있지만 온기는
사라지고 편안하던 숨도 가빠온다.
마지막 시간의 틈을 메우는 데에 온 신경이 쏠려 있다.
모두 제(除)하고 다음 세상의 문을 열어야 한다.
선인들은 나무들이 시간을 정해 놓고
꽃을 피우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어느 시간의 꿀이 가장 단 것인지
격풍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금도 꿈속의 유언 같은 말을 전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불멸의 꽃을 통째로 가로채려 했다.
열매가 열리는 시간을 재면서
고치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시간의 크레바스 속으로 몸이 떨어지고
꽃은 제 잎을 오므려 나를 흡수한 것이다.
아마도 정신 줄부터 먼저 놓았을 것이다.
생존과 먹이의 등식이 수레바퀴처럼 시간을 밀듯
빛이 바닥으로 깔리며 문이 닫히고 있다.
- 「불멸의 꽃」 전문
지난 시집에 실려있는 이 시에서 화자는 “다음 세상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몽환적으로 “숨”이 가빠지고 “온 신경이 쏠려”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열매가 열리는 시간을 재면서”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시간의 꿀이 가장 단 것인지” “격풍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던 선인들의 조언은 화자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다만 스쳐갈 뿐이다. 화자는 근면 성실하게 최선의 노력을 다했겠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몽환적이나마 자신의 소망이 완성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렇게 “열매가 열리는 시간을 재면서” “고치처럼 거꾸로 매달려”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욕망의 완성체인 “불멸의 꽃을 통째로 가로채”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크레바스 속으로” 자신의 “몸이 떨어지고” “꽃은 제 잎을 오므려” 화자를 “흡수”하고 만다. 그렇게 “생존과 먹이의 등식”에 따라서 “문이 닫히고” 만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어떤 우주의 법칙에 의해서 정해진 대로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사람의 인생은 다양한 기회와 고난과 성취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세팅되어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운명 혹은 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운은 사람이 태생적으로 갖고 태어나기도 하지만 순간마다의 어떤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한다. 시인은 이러한 인간의 생에 관여하는 운의 모습들을 역설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운은 사람들에게 항상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찾아오는 것이고 일상적인 삶에 관여하는 것은 대부분이 자연의 순리나 이치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자연적인 순리를 따르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다 보면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운도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렇게 자연적인 순리와 운은 매우 희박한 확률로 서로 일치하여 행운을 기다리는 우리를 애태우기도 한다. 그리고 이 시에서는 “불멸의 꽃”으로 형상화된 최상의 결실은 운[天命]이 있어야만 완결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여운을 남긴다. 그 운을 관장하는 것은 우주의 섭리이고 그 너머에는 우리가 짐작할 수 없는 그 어떤 절대자의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화자 자신이 운을 결정하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운명 속에 자신을 던져넣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운명에 따라서 꽃의 형상성은 완결된다고 보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한자를 공부한 시인은 만물의 이치와 순리적인 삶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하였고 또 많은 책을 섭렵하면서 철학적인 인식과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일반적인 사고로는 쉽게 가닿을 수 없는 이러한 철학적인 시가 쓰일 수 있었던 것이다. 실존주의자이면서 현학적이고 지적인 사고를 심화시키고자 하는 시인의 성향이 여기에 오롯이 드러나고 있다.
2-1. 삶의 연(緣)을 느끼는 것은
태백산 꼭대기쯤에서 주목(朱木)은 자란다.
살아서 천년을 살고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나무,
높고 깊은 산 속에서 오로지 하늘만 보고 살며
나날이 붉은 노을을 몸속에 재어놓은 주목의
그 붉은 뿌리를 낯선 집 거실에서 만난다.
아직도 살아있는 듯 나무는 매끄럽고 단단하여
집안의 탁자, 의자로 쓰이고 있는데도 범상치 않다.
나무를 깔고 앉아 천년의 가치를 얘기하는
주인장의 넉살은 백 년의 꿈조차 채 꾸지 못하는
범부의 삶을 더욱 초라하게 하고 있다.
괜한 삶이 미안하다. 주목을 어루만지기만 한다.
여름도 겨울 같았을 태백산 깊은 숲에서
나무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바람소리 잔잔히 들리고
웅성거림이 잠시 감지되는 듯도 하였지만
그뿐이지, 어찌 그 기운을 알 수 있을까.
천년의 역사 살피며 삶의 연(緣)을 느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것도 같지만 천년의 앞은
마음만으로도 도저히 가닿지 못할 꿈같은 길이다.
주목에게 묻지만, 살아서는 하늘만 보던 나무가
생각을 단단하게 굳힌 채 바닥만 보고 있다.
- 「천년의 연」 전문
2-2. 바퀴는 죽어 있어야 바퀴다
질기고 질긴 역동성에 숨이 차 있다.
한여름 뜨거운 목숨, 질겨 보이는 타이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길가에 자빠져 있지만
바퀴는 죽어 있어야 바퀴다.
혼자 굴러가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함께 혼을 살라 비로소 둥근 생명을 굴리지만
저것이 움직일 때 바퀴는 바퀴가 아니다.
제 몸이 빠져 있어야 바퀴는 바퀴가 된다.
돈도 둥글고 세상사도 둥글고
둥글둥글 굴리는 바퀴
바퀴들의 세상, 굴러가야 바퀴가 되는 것처럼
질긴 목숨 다하여 세상을 굴린다.
바퀴를 잊을 수는 있지만
욕망을 싣고 달리는 바퀴를 없앨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퀴는 지쳐서, 죽어 있어야 바퀴이다.
- 「바퀴」 전문
<2-1>에서 살아서 천년을 고고하게 살다가 죽어서 천년을 “탁자”로 살게 된 “주목”에 대한 사유가 펼쳐지고 있다. “천년”의 시간은 화자에게 매우 의미 있는 시간으로 인식되는데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천년의 의미가 많이 언급되었고 시인들도 천년에 대한 시적 사유를 많이 해온 이유에서일 것이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오랜 세월을 버티고 살아남을 가능성을 점쳐보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늘 좋은 작품을 쓰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실제로 주목으로 만든 탁자의 범상치 않음에 주인도 그 기운을 감지하고 있는 듯하지만 비싼 값을 치른 탁자를 소유하고 있음에 더 만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주목으로 만든 탁자를 화자가 보게 되었고 주인은 짐작할 수 없었던 천년의 의미를 되새겨주니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진다. 여기에서 탁자가 된 주목은 생과 사의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 보인다. “천년”의 세월을 높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무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화자는 궁금해진다. 그러나 우주의 섭리를 엿보고 싶은 화자의 물음에도 주목은 그런 건 알아서 뭐할 거냐는 듯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 세상에서 주목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은 화자의 욕망을 알아차린 것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연(緣)”은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얽히고설켜 있기에 인간으로서 이생에서의 삶에 충실하고 모든 욕망과 사념을 내려놓으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2-2>는 “바퀴는 죽어 있어야 바퀴다”라는 역설적인 명제를 우리에게 던져주는 재미있는 시다. 바퀴가 자동차의 일부일 때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면 차는 산으로 가거나 사고를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차의 일부로서 존재할 때 바퀴의 기능을 온전히 다 할 수가 있다. 즉 차에서 바퀴는 그 일부로써 존재할 뿐이고 그 소명을 다하고 죽어있을 때라야 진정한 바퀴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가 있다. 그리고 “돈도 둥글고 세상사도 둥글고”가 전환적인 부분인데 이 세상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살면서 모든 것이 함께 굴러가야 둥글게 살아갈 수가 있다. 자신만의 고집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바퀴는 굴러갈 수가 없는 것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유연하게 굴러갈 수 있고 세상과 더불어서 살아갈 수가 있다. 나아가 죽어서야 그 의미가 증폭되는 바퀴의 의미는 아이러니를 드러내면서 깊은 깨달음을 주고 있다. 살아서 열심히 세상을 달리고 죽어서는 등산로에 납작 엎드려있는 그 위대한 쓸모 앞에서 왠지 마음이 숙연해진다. 교만하지 않고 세상을 통찰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어떤 사물에게서도 배움을 얻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3. 무수히 꽃과 마음을 나누었을 당신
꽃의 절정을 꺾어 말리고 덖고 우려
입이 데일까 싶어 입안이 뜨거울까 싶어
혹시는 꽃의 화기에 몸이 데지는 않을까 싶어
후후 불면서 차를 마신다.
꽃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마시고 있다.
가끔씩 꽃차의 효능에 대해 듣고 있을 때는
채 발화하지 못한 일그러진 꽃의 형상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형상 너머의 것을 보는 듯
더 아름답게 환생한 꽃을 내어놓듯
제 몸을 우려 내어준 꽃에 경배하듯
이렇게 귀한 시간에 그렇게 구하기 어렵다는 차를 대접하며
당신은 누누이 꽃차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당신의 환한 모습이 꽃차보다
그 이전의 꽃보다 더 아름다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따라주는 대로 얼른 꽃차를 비우지만
당신은 고상하고 품위 있게 차를 마시고 있다.
꽃차의 의미보다 솔솔 피우는 꽃차 향보다
차를 마시고 있는 그 모습에 취한다.
꽃을 거두면서 꽃잎을 말리고 덖고
오늘 이 시간을 위해 하나하나 담아두면서
무수히 꽃과 마음을 나누었을
당신의 지난 시간은 더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어떤 꽃의 소멸은
이 시간의 기슭에서 만난
우리 만남을 더 삶답게 우려내고 있다.
- 「꽃차를 마시다」 전문
시적 화자는 “꽃차”를 만들어서 대접하고 있는 “당신”의 호의와 꽃차에 대해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다. “꽃을 거두면서 꽃잎을 말리고 덖고” “무수히 꽃과 마음을 나누었을” “당신의 지난 시간”을 떠올리는 꽃차의 의미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꽃이 피기 시작했을 때의 시간과 꽃이 절정에 피었을 때의 시간과 꽃이 일그러져서 차가 되는 그 시간까지 모두 인간에게 바치는 “꽃차”는 그것을 마시는 사람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그로 인해서 위안을 얻게 한다. 그러니까 지금 화자는 꽃차를 마시면서 꽃과 소통을 하기도 하고, 귀한 차를 대접하는 상대방의 마음과 소통을 하기도 한다. 꽃차를 앞에 두고 눈으로 한 번 마시고, 향기를 맡으면서 후각으로 들이마시고, 마지막으로 혀끝으로 느끼는 은은한 꽃차를 황홀하게 즐기고 있다. 꽃의 전 생애와 그것을 흔쾌히 자신에게 내어주는 당신의 그 귀한 마음을 받고서 화자는 가슴이 뭉클해진다. “꽃의 소멸”은 새로운 만남을 위한 계기가 되고 그로 인해 새로운 인연을 이어가게도 하기에 모든 생명의 헌신은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김광기 시인은 어려운 여건과 상황 속에서 삶을 꾸려왔기에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서 마음과 정성을 쏟는 것에 남들보다 더 깊은 인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대접하고 소통하는 일에 자신도 정성을 다하게 되었을 것이다.
4-1. 지표에 굳게 박힐 미명이라는 것
뿌리가 흔들린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의 뿌리는 되지 못한다.
온 마음을 현실에 심고
몸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두말할 것도 없이
뿌리는 관념이다.
그냥 그랬으면 하는 허구일 뿐이다.
부표처럼 떠다니는
세상에서의 뿌리의 역학,
소실되는 것이지만
어쩌면 이미 무명을 얻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지표에 굳게 박힐 미명이라는 것을 믿으며
멀쩡하게
다시 가지가 되고 잎이 되고 싶은,
볼 수도 느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이 환상의 리듬들.
- 「뿌리의 역학」 전문
4-2. 그림 속 열정이 다시 살아나는
때 절은 소매가 푸른 나뭇잎을 스치며
태양 빛깔의 검붉은 열매를 따낸다.
쌉싸름한 아침 커피의 떫은 향내에서
이국소녀의 달착지근한 입내가 배어 나온다.
붉은 미소 속에서 옹알거리던 씨알을
뜨건 화로에서 볶아낸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한여름에도 커피는
뜨겁게 마셔야 제맛을 음미할 수가 있다.
몽상에 젖은 아침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다가
입안을 채우다가 옹알이처럼 구르고 있다.
오래전에 마셨던 다방커피도 그렇고
소소한 기억들을 재생시키고 소멸시키는 요즘의 아메리카노,
마시고 또 마셔도 욕망의 불기운을 다 삼킬 수는 없지만
고갱의 태양빛 그림 속 열정이 다시 살아나는
한순간 한순간을 펼쳐놓으며, 우리는
좋은 시간마다 만나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오래 만난 것 같은 사람, 맑은 영혼을 가진
당신의 웃음에서 커피향이 나고
함께 머문 시간 속에서 세상의 욕심들이 삭는다.
아메리카 신화가 된 이국소녀의 숨결이
탁자 사이를 오가며 혼을 사르고 있다.
- 「커피와 고갱과 나」 전문
<4-1>에서 화자가 느끼고 경험한 세상살이를 통해 “뿌리”의 “관념”에 접근하고 있다. 물체의 운동에 관한 법칙을 연구하는 “역학”을 시에 연결시킨 것은 세상 속을 떠돌며 살아온 화자의 삶이 뿌리가 없는 부초와 같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춘기 때 집을 나와서 떠돌며 살았던 시인은 다른 친구들이 튼실한 가정 속에,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데 자신만 뿌리도 없이 떠돌고 있는 것을 느끼며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세상의 뿌리는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뿌리”에 대한 갈망이 아무리 간절해도 그것은 “관념”이고 “허구”일 뿐이다. 그렇게 몸이 세상을 떠돌며 살아가지만 마음속으로는 뿌리를 넘어서 “가지가 되고 잎이 되고 싶은” 욕망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 속에서 다시 “볼 수도 느낄 수도/만질 수도 없는” “환상의 리듬”일 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화자가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 내재해 있지 않았다면 뿌리에 관한 사유를 처음부터 키우지 못했을 것이다. 생존이라는 현실적인 조건을 넘어서는 꿈이 있기에 뿌리의 욕망도 키울 수 있었고 “무명”으로 사라지는 존재가 아닌 세상에 나를 각인시키는 기회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4-2>는 “고갱” “이국소녀” “커피”로 이어지는 연상구조로 되어 있다. 시적 화자가 바라본 “고갱의 태양빛 그림 속”에는 피부가 그을린 소녀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 소녀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커피 열매를 따서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한다. 그렇게 각 나라로 퍼져나간 커피는 화자에게까지 오게 되고 이러한 삼각형의 연상구조 속에서 이 시는 구체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오래 만난 것 같은” “맑은 영혼을 가진” 누군가와 함께 카페에 앉아 그윽한 커피향기에 어울리는 담소를 나누고 있다. 커피를 매개로 두 사람은 깊은 소통을 나누고 그로 인해서 화자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고민이 해소가 되고 “세상의 욕심들이 삭는” 느낌을 받는다. 친구와의 진정한 소통을 통해서 힘든 세상살이의 위안을 얻고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갈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5. 빗속에서 날아오는 날갯짓의 운명 같은
당신은 나의 혼이었다 하지요.
반짝이는 영혼이 나비처럼 내게로 옵니다.
궂은비 내려 날개가 젖습니다.
프시케, 아픈 나의 사랑이 됩니다.
이 사랑을 그대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사랑의 무게가
그대에게 짐이 될까 두려워합니다.
비는 또 내리고 있습니다.
온 허공을 다 적시고 있습니다.
당신과 손을 잡고 그 빗속에 있습니다.
비는 슬픔이었다가 아픔이 됩니다.
다시는 비가 슬픔이 되지 않는 그런 날들 속에서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는 사랑이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우산 하나 속에서 포근한
그런 사랑이고 싶습니다.
빗속에서 날아오는 날갯짓의
운명 같은, 그런 우산 하나를 갖고 싶습니다.
비가 내려도 젖지 않는
마음 깊숙이 우산대를 세우고
고운 눈빛 하나하나에 우산살을 붙입니다.
당신의 미소처럼 맑은 천도 덮습니다.
든든한 지붕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이 사랑만 젖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반짝이는 당신의 날갯짓으로
온 세상이 다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 「프시케, 날갯짓」 전문
이 시는 프시케와 에로스의 사랑을 그린 그리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아 쓴 시다. “프시케”는 사랑의 신이면서 에로스의 아내인데 그리스어로 마음 혹은 정신 또는 나비를 뜻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나비”는 영혼을 의미하는데 시적 화자에게 날아온 나비는 “당신”을 가리킨다. 즉 자신의 사랑을 신화적 사랑으로 격상시키고자 하는 화자의 의도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가 있다. 세상의 풍파를 겪고 진정한 사랑을 만난 “당신”과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화자의 사랑이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서 프시케가 당한 여러 시련이 여기에서는 비 오는 상황으로 대체되고 있다. 그리고 “우산”은 그러한 시련을 극복하고 당신을 지켜내고자 하는 화자의 의지를 의미한다. 비 오는 날 우산 하나를 가지고 궂은 날씨를 견뎌야 하는 두 사람의 현실적 상황은 안타깝지만 그 사랑을 지켜내려는 화자의 의지는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그리고 화자에게로 나비처럼 날아온 사랑과 시련을 극복하면서 화자에게 이른 그 사랑의 집념은 그리스 신화 속 프시케와 유사성을 갖는다. 이렇듯 두 사람의 만남과 사랑은 현실의 시련을 넘어서 전생에서부터 이어져 온 인연으로서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것임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6. 텍스트 계단, 무수히 밟히는
숨구멍을 열고 오밀조밀 몰려있는 개미집 같고
곧은 씨알들이 촘촘히 박힌 해바라기 같기도 하지만
선험의 숨결이 응축된 기표와 기의의 횡단들,
무수한 기운들이 스멀스멀 피어나 세상으로 퍼진다.
소리로 키워내는 순간 의미는 분해되는 듯하지만
가슴에 다시 고여서 탄력을 갖는 패러다임,
읽을 때마다 의미는 달라진다. 뜻은 그대로이더라도
좌표는 달라진다. 삶의 경륜으로 읽히는 텍스트,
벽에 꽂힌 무수한 텍스트들, 갖가지의 무늬로 아침을 밝히고
때로는 깨알처럼 때로는 고딕폰트 문양 같은 높이로
시작을 알린다. 다시 텍스트만 있는 것 같다.
이제는 횡렬에 따르지 않고 아래를 내려 밟는다.
그렇게 오르려고만 했던 계단을 내려가기만 할 때
중심을 지탱하던 관절의 삐걱거림을 느끼며
노쇠한 무릎 때문에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힘들다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지나온 삶이 아니면
도저히 따라 읽을 수 없는 시간에 한 걸음씩 내려가는
텍스트 계단, 무수히 밟히는 시니피앙 시니피에들.
- 「에피스테메, 텍스트 미학」 전문
여기에서 “텍스트”는 화자에게 단면적인 것이 아니라 입체적이고 철학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시니피앙”이 표면적이고 기호적인 것이라면 “시니피에”는 기호 너머의 의미적인 것을 지시한다. “에피스테메”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순수 이성에 의해 얻어지는 관념의 지식 영역으로서 형이상학의 경계를 만드는 체계를 의미한다. 시인은 어느 지면에 발표한 시가 초월적이라는 평가를 평론가로부터 듣고 그것에 대해 화답의 의미로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여기에서 시인은 자신이 이미 지식과 관념의 욕망을 초월한 것은 아니고 아직 그것들을 다스리거나 내려놓으려고 애쓰는 중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다른 시 「거미, 거미 망, 다시 거미」에서도 시니피앙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혹시 버그란 말을 아니? 버그라는 말 속에서 너는 단지 하나의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시니피앙이란 기호를 너도 알아야 할 거야, 2 ㅈ ㅣ ㄴ ㅂ ㅓ ㅂ 의 기호마저도 해체가 되는 기표적 기호의 정체 속에 넌 이미 하나의 ㅂ ㅓ ㄱ ㅡ 라는 기호로 등록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에서 네가 버그라는 기호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지식이나 지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래를 내려다보며 내려오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 “선험의 숨결”과 선험적 지식으로서 “어머니”가 등장하는 것은 매우 적절한 배치이다.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계단을 내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화자의 지식을 향한 욕망을 내려놓으려는 의지가 자연스럽게 대입되면서 “텍스트 미학”이 완성되고 있다.
김광기 시인은 외래어나 신화적인 용어, 철학적 용어 등을 시에 자연스럽게 끌고 들어온다. 그 이유는 우리말로 전달할 수 없는 개념들은 본래의 어원 그 자체로 써주어야 한다는 소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광기 시인이 국문학 외에도 심리학, 행정학, 법학 등을 공부하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고 그로써 습득된 현학적 사고를 통해서 시의 연역적 구조를 쌓으려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김광기 시인의 무의식의 기저에는 실존주의자로서 내면적인 고투를 통해서 인간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사고를 확장시켜서 자신만의 시세계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내재되어 있다.
또한 김광기 시인은 자신의 시에서 버려지고 소외된 사물을 통해서 재생의 의미와 새로운 역할을 깊이 있게 조명하거나 어렵게 정성을 들여 마련한 꽃차를 통해서 대상과 진정한 소통을 하고, 힘겹게 꿈을 키우면서 비로소 그 꿈에 가까워지는 우리의 인생사와 자신의 사랑을 신화적인 단계로 끌어올리는 의지를 갖기도 한다. 그리고 현학적 사고를 통해서 더 큰 의미의 세계로 나아가려 하는 등의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는 전통 서정시를 쓰면서도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지적 사고를 추구하면서도 삶에서 퍼올리는 시를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가장 근원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현학적이고 실험적인 것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지성과 감성을 모두 갖추고 있는 김광기 시인은 열림과 닫힘, 나아감과 멈춤, 쌓아 올리기와 허물기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시를 향한 열정으로 노력하고 꾸준히 연마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간관계에서 진정한 소통을 추구하면서 진심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마음과 삶으로 육화된 시를 써야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모습이 진정으로 믿음이 가는 시인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에 치열하게 몰두했다면 누구보다 많은 부와 명성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삶에 만족하고 자족하는 모습은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닌 어떤 무념무상의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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