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귀 일기
여왕의 문 앞에서 지귀는 잠들었다
그대 얼굴 한번만 더 바라볼 수 있다면
내 진정 죽어도 좋으리.
팔지를 내려놓고 여왕은 떠났다.
지귀야 지귀야 불쌍한 지귀야.
문밖은 발목 빠지는 백설로 가득하다. 여름 덧문이 하릴없이 바람에 덜컹이고 나는 죄 없는 나뭇가지를 툭 꺾었다. 나무는 살아서 파릇한 속을 내 보인다―그대는 어디 있는가.
눈이 감춘 세상과 세상이 감추었던 눈이 복잡한 얼개를 드밀고, 얼핏 눈 돌리면 살았다가 무너지는 나무들의 차가운 입김. 벼랑 끝으로 나는 나아간다. 몸 던져도 드러나지 않을 그대에게로 가는 비좁은 통로, 그대 하늘의 선명함 어디쯤 나는 있는가.
지귀야 지귀야 불쌍한 지귀야.
피맺힌 그리움을 구원하는 팔지 하나, 속에 가득한 블랙홀, 억만년의 빛. 스치는 그대 옷깃 한 자락만으로도 내 삶은 폭발할 것이거늘 뛰어내릴 듯 아스라한 깊이에서 나는 몸을 떨며 응시한다. 피보다 선명한 연옥煉獄―날개도 추락도 없이 붙박힌 진동의 어느 틈에 나는 있는가.
첫댓글 통일신라 설화에 나오는 지귀는 서라벌에 나왔다가 지나가는 선덕여왕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 어느 날 여왕이 절에 불공드리러 갔다가 지귀가 자신을 사모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귀를 불렀다. 여왕이 절 안에서 불공을 그리는 동안 지귀는 바깥 탑 아래에서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 불공을 마치고 나온 여왕은 지귀의 잠자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금팔찌를 빼어 자고 있는 지귀의 가슴 위에 놓고 갔다.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발견하고 너무도 기쁘고 아쉬운 나머지 사모의 정이 타올라 몸 불이 붙어 불귀신으로 변해버렸다. 지귀가 불귀신이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니자 여왕이 주문을 지어 대문에 붙이게 하니 그 뒤 백성들은 화재를 당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