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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교회/낮-20210411
예수님 왜 갈릴리로 가셨나?
마 28:1-10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에 부활이 없으면 부도수표와 같은 아무런 가치도 능력도 없는 무의미한 종교에 불과합니다.
자기 자신이 흙을 뒤집어 쓰고 땅속에 묻혀있는 사람이 다른 인간들을 구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사도행전4장12절에. 인간을 구원할 사람은 오직 예수님 뿐이라는 얘깁니다. 예수님만이 천국 가는 길이요, 예수님 만이 진리요, 예수님 만이 부활이요 예수님 만이 생명인 줄 믿습니다.
로버트 풀검이라는 분이 쓴 <제 장래식에 놀러 오실래요?>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마샤 카터 할머니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유서를 남깁니다.
그 유서가 어떤 것이냐 하면 “내가 죽으면 상복을 입지 마라,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마라, 박수를 치며 나의 천국입성을 축하하는 승리의 노래를 불러 달라” 그렇게 썼다고 합니다. 마샤 할머니의 유언을 따라서 그분의 장례식은 음악회로 춤추며 박수치며 큰 잔치로 치루어졌습니다.
그의 유서 중 인사말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나는 이 땅에 살아가며 예수 안에서 참 행복한 인생, 행복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내가 이토록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성도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제 곁에 있었기에 나는 여러분을 섬기고 여러분은 나를 사랑해 주며 나는 참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내 숨이 끊어지는 날은 천사의 손을 붙들고 천성을 향하여 춤추며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천국문에 다다르면 여러분 한분 한분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히 계십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마샤.」
이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죽음도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천하장사 씨름대회 하는 것을 보면 씨름 선수들이 여러 가지 기술을 사용하여 씨름을 하는데. 여러 기술들 중에 뒤집기라는 기술을 써서 상대를 이기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씨름 선수에 비유하자면 뒤집기 선수였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이길 수 없는 그 무시무시한 죽음이라는 사람을 뒤집기로 이겨버렸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으니 예수님이야 말로 씨름 천하장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통나무 하나는 물결 속에 둥실둥실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피라미는 물결을 거슬러서 올라갑니다. 통나무는 죽어 있기 때문에 물살에 떠내려 가지만, 피라미는 살아있기 때문에 그 세찬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숨을 쉬지만 그 영혼이 죽은 사람은 시류에, 환경 속에 떠내려갑니다. 그러나 그 영혼, 생명이 살아있는 사람은 환경과 역사와 시류를 거슬러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당신의 인생을 꽁꽁 묶고 있는, 가두고 있는 돌무덤이 무엇입니까? 살아오며 실패의 상처를 안고 오신 분이 계십니까?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진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경제활동이 어려움을 겪으셨습니까? 건강의 문제가 생겼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그 안에서 위대한 교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신적인 교환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왔던 죄악의 짐을 가지고 나왔지만 그 안에서 용서가 선포되어 집니다. 상처와 질병을 가지고 오면 깨끗이 치료받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숨을 내쉬며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그랬습니다. 요한복음20장19절에.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랬습니다.
우리 모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우리 마음속에 평강이 충만하시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시는 축복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자 로마, 팔레스타인 전지역에 ‘예수님께서 처절하게 패배했다. 죽음의 영에게 패배했다’는 소식이 온 땅에 퍼져 있었습니다.
부활절 아침 무덤문이 굴러져서 로마와 온 세계에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죽음의 영을 KO패 시켰다. 악한 사탄을 KO패 시켰다.’ 이게 역전의 드라마입니다. 뒤집기의 드라마입니다.
이 세상에 역전의 드라마가 많고 많지만, 예수님의 죽음의 무덤문을 열고 부활하신 이 사건이야말로 역전 중에 역전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우편에 앉으시기를 바랍니다.
괌에 요꼬이 동굴이 있다고 합니다. 요꼬이는 사람이름인데. 세계 2차대전때 괌에 상륙해서 동굴을 파고 있었는데. 일본이 전쟁에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고, 28년 동안이나 그 동굴에 숨어 살았다고 합니다.
그에게 아무도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유인이 되었음에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동굴에 갇혀 살았던 거지요.
여인들이 예수님이 무덤에 갇혀 있을 때 향유라도 발라드려야 되겠다 생각하고 향유를 준비하여 동산에 올랐습니다. 근데 놀라운 것은 무덤 문이 열려있고, 그 안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대신에 한 남자가 빛난 얼굴을 하고 옆에 서 있었습니다. 여인들이 얘기합니다. “당신이 우리의 예수님을 어디로 옮기신 것입니까? 예수님의 시신을 어디로 감춘 것입니까? 예수님 못 보셨습니까?”
이 남자가 얘기합니다. 그 분은 천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모든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 달라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28:5-7)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려주지 않으면, 예수님이 부활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요꼬이처럼 말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까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고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라고.
「부활하신 예수님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첫째는 갈릴리는 절망이 있는 곳
첫 번째, 그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절망가운데 빠져있기에.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낙심하고 있기에. 그를 믿고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혀 있길래 갈릴리로 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믿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렇게 능력 많으신 분이 로마를 하루 아침에 물리치고 자기 나라에 독립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든 꿈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왕이 되시면 제자들은 장관이 되고 총리가 되고 오른편 왼편에 앉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3년동안 따라 다녔던 제자들은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배고픈 민초들은 도시락 하나로 오천명을 먹이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저 분이 왕이 되시면 우리 가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저들은 얼마나 실망을 했던가요?
갈릴리는 한숨 소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기쁜 희망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 갈릴리로 가셨던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기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 어디에도 희망이 없어 보일 때 오직 예수만이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 막다른 골목에 인생 종착점에 도달했을 때, 사랑했던 사람도 그 누구도 내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죄의 짐, 죽음의 짐, 구원의 짐을 모두 다 맡아 주실 것입니다.
전세계를 아무리 둘러 보아도 예수를 버린 나라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국가들은 모두 다 망했습니다. 선교사를 쫓아내고 성경책을 불태웠던 나라들은 모두 다 저주를 받았습니다. 동남아 어디를 가보더라도 교회를 핍박한 나라 치고 잘되는 나라가 없습니다.
50년전까지만 해도 북한 땅은 우리보다 참 잘 살던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땅은 세계적인 선진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북한은 전세계에서 가장 불쌍한 나라가 되어져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한 것이 무엇입니까? 땅이 넓습니까? 지하자원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 민족을 살려달라고. 그리고 예수를 잘 믿은 것, 하나님을 소중히 높여 드린 것, 성경 말씀을 소중히 여긴 것 이것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민족 이 백성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두번 째는 첫사랑이 있는 곳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신 것은 그곳에 첫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첫사랑이 나뉘어져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셨던 자리가 갈릴리였습니다.
복음의 산에 올라 복된 소식, 천국에 관한 귀한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천국에서 보았던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장소가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그곳에서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배고픈 자들을 먹이셨습니다. 풍랑 위를 걸어오시며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곳이 바로 갈릴리였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11:28) 이 세상에 지친 사람들을 다 불러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 갈릴리로 가신 것입니다.
주님과 만났던 첫사랑의 장소가 어디입니까? 심장을 열어 보이며 주님 앞에 사랑을 고백했던 자리, 내 생명 드리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던 자리, 주님을 만나서 울부짖던 행복한 자리가 어디입니까?
그 신앙을 잃어버리고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감사하고 찬송했던 입술 속에 불평과 원망과 불신앙의 언어가 내 입술에 가득차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 찾아오시면 여러분의 첫 사랑이 회복되어질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구원해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살인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미디안으로 혼자 숨어듭니다. 그곳에서 남의 양을 치는 양치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름진 얼굴 흰머리를 바람에 나부끼며 새끼 양을 품에 안고 어미 양을 치는 목동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힘을 내라. 나는 너와 함께 한다. 너를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네가 너희 민족을 구원하려고 하는 그 꿈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가서 애굽에 노예로 신음하고 있는 이 백성을 구원하라. 모세는 다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배 밑창에 깊은 잠에 빠져있다가 발각이 나서 바다에 집어던져 집니다. 무슨 물고기인지 모르지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육지에 가서 요나를 토해냅니다. 요나가 다시 부름을 받았습니다.
모세를 들어 쓰신 하나님. 요나를 쓰신 하나님. 한번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은 절대로 폐기처분 하지 않습니다. 한번 사명으로 이끈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은 결코 버리시지 않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떠 던졌던 베드로, 주님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주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통곡하고 가슴을 쥐어뜯어 보았지만 그 죄책감을 이길 수 없어서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고도 다시 갈릴리 바다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이슬 찬바람 헤치며 그곳까지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의 배에 오르시더니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시오. 밤새도록 잡히지 않던 고기가 만선이 될 만큼 고기가 잡혔습니다. 처음 예수님의 부름을 받을 때 그 추억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야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폐기처분하고 버림받아 마땅한 나를 또 찾아 오셨군요.’ 주님 앞에 다시 부름을 받고 초대교회를 세우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여러분의 실수는 덮여지고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싸늘했던 여러분의 마음이 다시 불같은 사랑으로 회복되어지게 될 것입니다. 첫사랑을 회복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세 번 째는 회개가 있는 곳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제자들의 잃어버린 사명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은 실수하지만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용서해 놓고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너희가 회개하면 용서 하마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이곳으로 불러주셨다는 것은 이미 여러분을 용서해 놓고 여러분을 기다리셨습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한국 천주교 지도자 가운데 윤 모 신부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천주교의 연옥교리를 변증하는 글에 개신교 교인 서창제라는 신도와 대화를 나누었던 내용이 나옵니다.
서창제 성도에게 신부님이 묻습니다. 당신이 천주교로 개종한 후에 개신교 교리와 천주교 교리의 다른점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당신에게 가장 감동을 준 교리가 무엇입니까?
“내게 가장 큰 위안을 준 것은 연옥교리입니다. 내가 개신교에 있을 때에 조용히 눈을 감고 양심의 소리를 들어보니 내가 죽으면 천당갈 수 있는가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지옥갈 죄를 지었나 생각해 보니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생각해 보면 내 눈앞이 캄캄해져만 왔습니다. 천주교에 와서 보니 천당은 못가지만 지옥은 안가고 중간지대인 연옥에 가서 거기서 덕을 쌓아 천당 간다는 소리를 듣고 제가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진리와는, 성경에 있는 약속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눈을 감고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눈을 부릅뜨고 하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내면의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가?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종교입니다.
내가 지옥갈 죄를 지은 것 같지는 않다. 얼마나 비성경적인 말입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 인간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도 공로도 덕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성경은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천당 갈 자신이 없다고요? 여러분. 천국은 내 자신감에 의해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는 사라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구원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오늘이라도 마음의 문을 여시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구원 얻고 싶습니다. 내 힘으로 내 공로로 선행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없사오니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이 시간에 진정으로 고백하면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여러분의 신분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지옥의 호적등본은 사라집니다. 천국 생명책에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네 번 째는 사명이 있는 곳
부활하신 예수님,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제자들에게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제자를 삼으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땅끝까지 나가서 복음을 전하여 이 땅에 구원 얻은 백성들을 모두 다 살려내라.세상을 구원해라. 사람들을 사랑해라. 내가 너희들에게 권세를 주노니 아픈자 마음 상한 자 깨어진 가정을 회복시켜라. 천국을 건설해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제자들은 이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이 있습니다. 이 땅에 좀 더 살아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건강하게 잘 살아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 잃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비극은 갈릴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이 예배가 여러분 인생에 갈릴리가 되어져 삶의 목적이, 비전이, 꿈이, 희망이 삶의 이유를 회복하시고 그 목적에 부합(符合-사물이나 현상이 꼭 들어 맞음)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초대교회 목사님 가운데 크리소스톰이 있었습니다. 황제가 그를 죽이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그래서 설득을 합니다.
“네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면 내 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황제의 회유의 말을 듣지 않자. “내가 너의 전 재산을 빼앗을 수 있다.”
“황제여 내 재산은 이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작은 것을 빼앗기면 어마어마하게 큰 것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너희 가족을 너와 함께 죽일 수 있다.” “황제여 이 땅에서 우리 가족이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고 우리는 영원한 나라에서 함께 만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너를 이 나라에서 추방해 버릴 수 있다.” “황제여 이 나라도 내 나라가 있지만 영원한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내 나라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까?”
“너는 목숨이 아깝지도 않느냐?” “황제여 나의 영원한 목숨이 저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십니까?” “당신은 내게서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내 삶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당당함. 이게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음이 두렵지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부활하여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영생이 있고, 천국이 있기 때문에, 부활이 있기 때문에, 세상 가치에 매여 두려워 떨며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도 갈릴리로 가십시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그 즉시로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처럼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의 모든 여정을 내려놓고 다시 한번 인생의 갈릴리로 가셔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시고,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시고 실패와 염려와 걱정 절망이 사라지고, 살아온 인생에 주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했던 일과 주님을 만나지 못하여 살아온 인생을 회개하며 용서를 받는 갈릴 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주님 만났던 그 첫사랑이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회복되고, 내가 좀 더 건강하게 살아야 될 이유, 이 땅에 좀 더 잘 살아야 되는 이유, 좀 더 이 세상에서 멋지게 살아야 할 이유, 삶의 목적과 이유를 오늘 발견하고,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절망이 가득한 세상에서 참된 소망이 되어 주시고 삶의 목적이 되어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감격을 노래할 수 있게 해 주신 은혜와 사랑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약속하신 대로 갈릴리로 가셔서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리는 실패와 절망과 상처가 있는 곳이고,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주님은 그곳에서 다시금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다시 살아야 할 이유와 사명을 주시기 위하여 갈릴리로 가셨고, 또 제자들이 갈릴리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실패의 자리에서 주님을 부인한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고 소망을 가지고 주신 사명 감당할 능력을 회복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시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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