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
하노버왕조 제6대의 영국 여왕(1837∼1901).
조지 3세의 4남인 켄트공(公) 에드워드와
독일의 작센 코부르크 고타(영국명은 색스 코버그고타)
공가(公家)의 메리 루이자
빅토리아의 사이에서 독녀로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지 8개월 후에
아버지 켄트공은 죽었고,
그녀의 교육은 코부르크 출신 가정교사에게 맡겨졌고
또 나중에 벨기에 왕이 된
외삼촌 레오폴드도 영국에서 그녀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므로
소녀시절은 영국 왕가인
하노버가(家)의 사람들과 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백부들이 잇달아 죽었으므로
1837년 6월 18세의 나이로 영국여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노버가에서는
여자의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 시점에서 1714년 이후 계속되던
영국 하노버의 동군연합(同君聯合)은 없어졌습니다.
동군연합이란
각각 별개의 두 나라가
서로 독립을 침범하지 않고
동일한 군주를 추대하여 연합해 있는 것으로,
영국에서는 몇 번 있었습니다.
1840년 2월에
외사촌인 작센 코부르크
고타공가의 앨버트와 결혼하였습니다.
41년에는
황태자(나중의 에드워드 7세)가 태어났고,
또 몇몇 자녀를 얻었습니다.
여왕은 널리
국민의 존경을 얻은
현모양처로서 행동하였고,
떨어져 있던 왕가의 평판을 회복하였습니다.
남편인 앨버트는
공적인 면에서도 여왕의 좋은 협력자가 되어
정당제가 혼란하였던 1840∼50년대에 정치면에서
여왕을 보좌하는 한편으로
51년의 런던세계박람회를 성공시키는
등 과학기술과 예술의 진흥에도 힘썼습니다.
61년 앨버트가 병으로 죽자,
그 후 여왕은 공적인 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피했으나,
정치에는 강한 관심을 계속해서 가졌습니다.
자유당의
W.E.글래드스턴을 싫어하였고,
보수당의 B.디즈레일리를 총애하였습니다.
그리고 디즈레일리의 정책을
지지하여 76년에는 인도 여제(女帝)도 겸하였습니다.
97년 치세
60년의 기념식전을 계기로
영국제국의 식민지회의가 열렸고
1901년 1월 81세로 죽었으며,
여왕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7세부터
왕조명은 색스 코버그 고타왕조로 바뀌었습니다.
빅토리아여왕의 치세는
64년이나 계속되어 영국사상 가장 긴 치세였으며
이 시대는
영국의 최성기로서
산업혁명을 끝낸 영국이 세계를 이끌었습니다.
여왕은 그러한 영국의 영광의 상징이었고
국내에서는
중류계급이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서
의회제민주정치가 발달하였으며,
전통적인 지배계급인 지주귀족과 융합해나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도덕을 강조하고
체면을 존중하는
<신사의 나라 영국>에
어울리는 문화가 이룩되었습니다.
18살에
아버님이 하루저녁에 돌아 가셔서
그 다음날 바로
18살 난 빅토리아가 왕이 된
어린 딸은
하나님 앞에 기도 하고 말씀으로 무장 하여
64년동안
영국을 다스리면서
대영제국을 만들었읍니다.
♠ 시 32 편 15 절 ♠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My times are in your hands;
deliver me from my enemies and
from those who pursue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