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의 시간
정 성 천
10년 전 전원주택을 짓고 이사하면서 어렵사리 마련했던 앉은뱅이 소나무 원목 다탁이 나의 서실에 하나 놓여 있었다. 하지만 3년 전 4인용 식탁과 의자를 거실에 장만한 후로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모든 다반사는 의자에 앉아 식탁 위에서 벌어지기에 방바닥에 앉아야 사용할 수 있는 다탁은 자연적으로 등한시하게 되었다. 소득이 높아짐에 따라 우리 생활의 흐름도 방바닥 좌식 생활에서 의자 생활로 바뀌는 변화가 대세인 것 같다. 오죽하면 지자체 정부에서 방바닥 좌식을 의자식으로 바꾸는 식당은 경비를 지원해 줄까? 바닥에 앉아 차를 마시는 일이 의자 생활로 바뀌면서 앉은뱅이 다탁은 제 기능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물건을 얹어 두는 한낱 받침대로 사용되기 일쑤다.
애물단지가 되어 버린 나의 서실 다탁은 길이가 3m로 보통의 다탁보다 다소 길다. 이렇게 긴 다탁을 들어 올리고 의자 4개를 양쪽에 배치하려니 때로는 서실에서 잠도 자야 하는데 공간이 너무 좁아져 사용하기에 불편할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차에 서울 딸네 집에서 디자인 잡지를 보다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 다탁을 들어 올려 한쪽 면을 포기하고 의자 두 개만 놓고 바깥을 바라보도록 창문 쪽으로 배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식탁 높이인 75cm로 들어 올리는 일이 말로는 쉬운 것 같으나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탁의 무게도 무게지만 그 원목의 품격으로 봐서 아무렇게나 다리를 만들어 고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래서 10년 전 다탁을 구매했던 문경의 업소를 찾아갔다. 업소 장인이 말하기를 다탁의 넓이가 50cm이니 지름 50cm의 소나무 통나무로 다리를 만들어야만 제격에 어울린다고 한다. 안동의 제재소를 하나 소개해 주고 다탁의 두께가 20cm이니 55cm 길이로 정확하고도 반듯하게 잘라 오면 껍질 벗겨 다듬는 일은 자기가 해 주겠다고 한다. 안동까지 가서 통나무 2개를 사 와서 맡겼었다. 지난달에 모든 공정을 끝내고 업소 장인이 직접 두 개의 통나무 다리를 트럭에 실어 우리 집으로 갖고 왔다. 하지만 다탁이 너무 무거워 장인과 나의 힘만으로는 모자라 이웃 젊은 사내까지 불러와서야 간신히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다탁을 들어 올리고 창문 쪽으로 두었더니 3m 길이의 창문에 마치 주문해서 맞춤 제작한 것처럼 딱 들어맞는다. 나무로 만든 참한 의자도 두 개 장만했다.
우리 집은 동네 제일 안쪽 산 아래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아서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동쪽 끝으로 멀리 솟아 난 금오산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다탁의 위치를 서실 창문 쪽으로 두고 밖을 바라볼 수 있게 배치했더니만 놀랄만한 변화가 나에게 왔다. 나의 일상에서 바라보는 일이 주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그냥 금오산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거나 시간만 나면 다탁 의자에 앉아 밖을 바라본다. 다탁이 없을 때도 창가에 앉거나 서서 밖을 바라보곤 했으나 다탁을 놓으니 횟수도 훨씬 더 많아지고 바라보는 시간도 더 길어진다. 때로는 장끼와 까투리 한 쌍이 자두나무 아래에서 밀회 데이트하는 장면도 엿보기도 하고 도둑고양이들이 영역 다툼으로 암팡지게 싸우는 것을 바라보기도 했다. 올봄에는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 만개한 자두꽃이 마치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환하게 펼쳐지는 꿈속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호사도 누렸다.
바라보는 일이 이렇게 마음에 담담한 휴식을 주는 좋은 일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바라보는 행위는 대상을 구속하지 않은 채 대상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이다. 간섭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벌어지는 그대로를 지켜보는 일이다. 이런 의미의 적당한 말을 찾아보니 관조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에 나오는 일반적인 관조의 의미는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봄.”이고 예술적인 의미는 “미(美)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일.”이라고 쓰여있다.
인간의 두뇌는 좌뇌와 우뇌로 나누어져 있고 각기 서로 다른 능력을 행한다고 한다. 인간이 어떤 일을 처리할 때 물론 두 쪽의 뇌가 상호 보완 작용하며 일을 처리하겠지만 좌뇌가 주가 되어 할 수 있는 일과 우뇌가 주가 되어 할 수 있는 일로 나누어진다고 하는데 좌뇌는 주로 분석, 판별, 계산 등 이성적인 일을 처리하고 우뇌가 처리하는 일은 공간지각능력, 관찰력, 창의력 등 감성적인 일을 처리한다고 한다. 또는 이렇게도 말한다. 좌뇌는 인간이 태어난 후에 경험하여 입력된 정보로 일을 처리하고 우뇌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정보로 일을 처리한다고도 한다. 그래서 미래에 인공지능이 극도로 발달해도 인간의 좌뇌 능력은 대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우뇌의 능력에는 미치지 못한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인간 사회의 발달로 인해 생활이 복잡다단해짐에 따라 오늘날 대다수 사람의 좌뇌 기능은 활성화되고 우뇌 기능은 깊이 잠들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뇌를 깨우는 교육이 미래를 대비하는 좋은 교육이라고 지금 학교 현장에서는 감성교육을 중시하는 등 우뇌 활성화 교육에 노력을 많이 기울이고 있다. 또한 창의력 향상을 위해 직원들의 우뇌 활성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는 기업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감성교육을 받거나 우뇌 활성화를 위한 연수를 받는다고 우뇌가 그냥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먼저 우리는 좌뇌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알아야만 우뇌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좌뇌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좌뇌가 만드는 잡다한 생각들을 비움으로써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능력은 관조의 시간을 자주 가지면서 강화할 수 있다.
특히 나이가 많은 노인들은 관조의 시간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본다. TV 연속극을 바라보면 좌뇌를 움직이게 하지만 신록이 짙어가는 자연을 관조하면 고요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생활 가까이에서 자연을 느끼고 관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반려 식물이다. 노인들에게는 반려동물보다 반려 식물을 키우는 것이 관조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어 좋다. 그래서 40년간 취미로 모은 수석에 풍란을 붙인 풍란 석부작을 만들어 고교 동창 친구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고 단톡방을 만들어 소통하니 모두 좋아한다. 고도 절해의 바위섬 절벽에 자라는 풍란의 그 고고함과 천연 수석이 만들어 내는 자연미의 풍취는 노인들이 관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반려 식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바라보는 행위의 대상은 외부 사물로만 국한되어 있는 게 아니다. 눈을 안으로 돌려 자기의 마음을 바라볼 수도 있다. 자기 마음을 관조하는 행위를 우리는 명상이라고 부른다. 명상의 종류에는 많은 것들이 있으나 마음 바라보기를 가장 강조하는 명상이 ‘통찰 명상’ 혹은 ‘마음 챙김 명상(mindfulness meditation)’이다. 마음 챙김 명상은 절대자인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이른바 무신론자들이 믿는 서양 불교에서 수행하는 방법이다. 서양 불교는 내세와 윤회를 믿지 않고 ‘마음 챙김’이라는 수단을 통해‘지금, 여기’에 충실하며 행복해지려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종교이다. ‘마음 챙김’은 마음에 일어나는 온갖 불미스러운 생각, 감정, 느낌에 내 마음이 꺼들리지 않고 그냥 바라봄으로써 지나가게 한다. 그렇게 하면 마음을 평온하게 유지할 수 있고 또 그런 수련을 끊임없이 수행하면 궁극에 가서는 완전한 깨달음 즉 벗어남에 다다른다는 종교가 내가 아는 서양 불교이다.
사전에 나오는 관조의 불교적인 의미는 “지혜로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봄.”으로 나와 있다. 다탁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든지 풍란 석부작을 바라보든지 관조의 시간이 많아지다 보면 내 마음을 관조하는 힘도 길러지지 않을까? 그렇게 하다 보면 혹시 누가 알겠는가? 불교에서 말하는 사물의 참모습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를 비추어 보는 경지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다탁에 앉아 미풍에 살랑거리는 신록의 나뭇가지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