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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TV중계방송차! 그 중계방송차는 우리 기술진에 의해서 제작되었고 우리나라 TV방송역사와 거의 때를 같이한다. 비록 지금에 와서 보면 보잘것 없는 시설일지라도 그 시절에는 옮겨다니는 TV방송차로 10년가까운 세월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때의 그 얘기, 그때 그 일을 수행했던 춘하추동방송과 함께 하시는 살아있는 방송역사, 오승룡선생님의 생생한 기록으로 남긴다. 아울러 오승룡선생님이 춘하추동방송에 남기신 여러 글들을 이 장에서 보실 수 있도록 연결했다.
최초의 TV중게방송차와 중계방송 그때 그 얘기 오승룡
우리 기술진이 만든 최초의 중계방송차! KBS-TV가 1961년 12월 31일 개국한 다음 처음 중계방송을 시작한 것은 남산과 가시거리에 있는 명동에 건립한 국립극장 개관식 중계방송으로, 1962년 3월 21일 오후 7시 반부터 8시 45까지 1시간 15분 생방송한 것이 우리나라 TV 중계방송의 효시가 된다. 당시 중계방송에 사용된 카메라는 25m/m∼100m/m의 수동 줌 렌즈(Zoom Lens)가 부착된 중계용 비디콘(Vidicon) 카메라 (TK-15/35) 1대와 스튜디오에 설치되어 사용 중인 이미지 오디콘 (Image Orthicon) 카메라 (TK-12) 1대를 해체하여, 비디콘 카메라와 함께 버스에 임시 설치한 2대의 카메라로 중계방송을 했다.
실내 중계를 위해 카메라 헤드에 뱅크라이트(Bank Light, 20W x 2)를 부착하여 조명으로 사용했다. 또한 마이크로웨이브(Micro Wave) 송신기를 버스 위에 설치하여 남산 송신소로 신호를 전송 했으며, 이때 KBS-TV기술진이 총동원되어 생생한 개관식 실황을 시청자에게 전했다.
최초 TV중계방송-차 위 오승룡
개국 이후 방송이 차츰 안정되고 방송시간도 증가하여 감에 따라 각종 스포츠, 행사, 프로그램 제작 등 남산송신소 철탑이 보이는 곳이면 어디든 중계가 가능하여 1962년 3월 21일부터 10월 5일 까지 약 반년 동안 중계방송 회수는 55회에 연 112시간 9분 중계한 기록을 수립했다.
우리 기술진이 만든 최초의 중계차
중계방송의 중요성을 인식한 KBS-TV 기술진은 1962년 초 부터 TV 중계방송차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한편, 포항 이동 방송국이 1961년 6월22일 정식방송국 으로 승격되면서 방송관리국이 관리해 오던, 포항방송국의 이동방송차를 TV 기술진이 인수하여 2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TV중계차로 탄생시켰다. 라디오 이동 방송 차의 내부 구조를 TV 방송 중계차에 적합하도록 구조변경을 했는데, 설계와 골격 공사는 당시 TV 기술과 직원 백흥기가 맡았고, 장비 설치에서는 영상 기기는 KBS 기술본부장을 지낸 조찬길, 음향기기는 현재 방우회 이사인 정항구가 맡았다.
당시 TV 중계차에 설치된 주요 장비는 다음과 같다. ① 카메라 설비 이 중계차에 탑재한 TV 카메라는 촬상관으로 Vidicon Tube를 사용한 RCA 사 TK-15/35 1대로 25m/m-100m/m의 수동 줌렌즈(Zoom Lens) 를 사용했고, 카메라 받침(Pedestal)은 중계용인 점을 감안하여 설치가 쉽고 가벼운 Cradle Head와 Tripod TD-11A로 되어 있었다. 이어 다음 해인 1963년 7월 25일 같은 모델의 TV 카메라를 추가 도입하여 설 치 했으며 Auto Zoom Lens 300m/m를 부착하여 사용했다.
카메라 한 대 뿐이었을 때 는 스튜디오 카메라를 임시 설치 사용했다. ② 영상 설비 영상 절체용인 프로그램 스위처(Switcher)는 5입력형(5-Input)의 TS-5A, 영상 의 시제일치를 위한 동기신호발생기 (Sync Generator) TG-12, 영상분배용 증폭 기 (Video Distribution Amp) TA-3D가 각각 1개, 그 외 Power Supply 와 영 상 모니터 등이 설치되고 ③ 음향 설비 중계용 음향 조정반(Control Panel) BN-6B, 확성 증폭기(Audio Amplifier) Bogen, 마이크 BK-1A, BK-6B 기타 마이크 스탠드 등 ④ 연락장비 당시 연락 장비로 많이 사용된 미군용 FM송수신기 T-14, R-19
⑤ 마이크로웨이브 설비 남산 송신소로의 신호전송을 위한 송신 헤드 및 컨트롤 TVM-1B, 파라보라 안테나(Parabola Antenna) 및 삼각받침대(Tripod) ⑥ 전원 설비 전원 수전반(Control Pannel)은 한전 및 발전기 입력 절체 가능하고, 발전기(가 솔린용) 10KVA, 전압조정기 15KVA, 슬라이닥스 400W형 각각 1개 이고 발전 기는 견인용이고 당시 한국전기 사정으로 전압조정기가 필요하였다.
⑦ 냉방 설비와 기타 각종방송 장비의 완전한 동작을 위해 에어컨(2HP)이 설치되었으며, 중계차 뒤 면 하단에는 카메라, 전기, 마이크 케이블 감기대가 설치되었다. TV중계차를 완성한 후 첫 야외 중계방송은 1962년 4월 19일 4.19 두 돌의 기념행사로 라디오와 동시 중계방송을 했고, 연이어 국가 행사인 5.16 기념식, 광복절, 국군의 날, 개천절 등 중계차가 기념행사 현장이나, 운동장, 극장에서 그때그때 실황중계를 했다. 1962년 6월12일 TV 사상 첫 스포츠로 일본 명지대와 중소기업은행의 야구경기를 중계했고, 1962년 9월에는 전국민속예술경진대회의 가두 행진 실황을 중계했다.
1963년 2월에는 장충체육관 개관식 중계가 있었고, 이 해 9월에는 300m/m 오토 줌렌즈가 부착된 TK-15형 카메라 1대가 도입되어 실황 중계에 더욱 완벽을 기하게 되었다. 10월 15일의 대통령 선거, 11월 16일-17일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 등 개표실황을 중계 방송하는 등 국민들에게 역사적인 사건들을 생생하게 전달해 줌으로서 큰 관심을 모았다. 연말인 1963년 12월 12일 박정희 대통령 독일 방문 후 귀국하는 실황을 발전기 2대를 동원하고 각종 조명기구를 사용하며 중계방송을 했다.
1964년 9월 3-8일 인천에서 개최되는 제45회 전국체전 실황중계를 위해 동년 6월 19일부터 수차에 걸친 서울-인천 간 현지답사와 기술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라 인천공설운동장과 인천소방서 망루를 통해 남산 송신소 철탑 수신기 에서 신호 수신 가능하도록 2단 마이크로웨이브 회선을 구성했다. 이 체전 중계를 위해 기존 TV중계차와 스튜디오에서 사용하던 3인치 I.O. 카메라 3대를 동원하여 중계방송에 만전을 기했다. 대회기간중 개회식을 포함한 각종경기를 약 21시간 중계했고, 중계망의 안전을 위해 29시간 미리 운행시험을 하기도 했다.
2년 뒤인 1966년 10월 31일에는 미국 존슨대통령이 한국을 방문 했는데 한미관계상 대단히 중요한 행사로 정부에서 여러 가지 준비하는 가운데, 당시 대단히 무서운 사람으로 알려진 홍종철 공보부장관 주관 하에 관련자 회의가 공보부에서 열렸다. 방한 시 김포공항 환영행사와 광화문 네거리의 환영 인파의 실황중계가 문제가 되었는데 장관님 왈 “이 중계는 반드시 해야 하는데 문제가 무엇이냐” 고 물었다. 당시 KBS-TV 기술과 조정계장이었던 나의 소관 사항 이므로, 당일 오전 중 광화문 네거리에 방송대를 만들고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사용하는 TV 카메라를 비롯한 영상, 음향 장비를 철거한 후 운반하여 설치 할 수 있지만, 문제는 김포공항 환영식에 동원된 중계차위에 설치된 마이크로웨이브 송신기를 공항 환영 행사 중계가 끝 난후 다른 장비와 함께 철거해 차에 실고 한미대통령 차량행렬과 경호차들 , 그 뒤를 따르는 수많은 관용차량의 행렬을 뚫고 TV중계차가 광화문 네거리에 먼저 도착하여 마이크로웨이브를 설치하고 남산과 방향을 맞추어야 하는데 행사 차량이 꽉 막혀 어렵다고 했다. 잠시 후 장관님 말씀이 헌병차량이나 앰불런스를 배치하여 사이렌을 울리면서 달릴 수 있도록 해 줄 터이니 어떤가 하기에 그러면 가능합니다. 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당일 공항 행사는 끝나가고 행사 차량들은 경호차를 선두로 출발하여 서울로 가는데 헌병 차는 고사하고 앰뷸런스도 보이지 않아, 어디 물어 볼 데도 항의 해 볼 데도 없으니 이젠 죽었구나 생각하며, 기재는 대강대강 철수해 TV중계차 내부나 지붕위에 그대로 놓고, 행사 차량을 뒤 따라가는데 도로변의 환영인파의 환호와 대통령의 답례로 인해 차량 속도가 빠르게 또는 느리게 반복하며 앞으로 나가는데 길옆을 보니 건물들 사이로 약간 넓은 도로에 차가 별로 없어 그쪽으로 빠져 나가 달리다 보니 대통령 행사차량 보다 앞서게 되어 큰 공항도로로 다시 들어 서게 되었다.
그래도 방송차량이라 경찰이나 헌병이 막지 않아 광화문 네거리에 먼저 도착하여 마이크로웨이브 송신기만 남산과 맞추고 임시 설치한 TV 카메라 및 영상, 음향 장비를 이용하여 곧 이어 다가오고 있는 행사 차량을 보며 중계방송을 차질 없이 마쳤다. 만약 실패 했더라면 나뿐 아니라 윗분들도 문책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식은땀이 흐르는 듯 했다. 1966년부터 녹화기(VTR- Video Tape Recorder)가 도입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전적으로 생방송 위주였던 프로그램 제작환경이 변하여, 스튜디오에서의 제작도 프로그램 별로 녹화하기 시작했고 생중계방송으로 남산 철탑과 가시거리 내만 맴돌았던 TV 중계방송차의 활동 범위도 녹화기 적재 차량과 함께 필요에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게 되었다.
1966년 3월 처음 Ampex 로부터 도입된 휴대용 2헤드 VR-660 Helical Type 녹화기는 편집 기능이 없어, 프로그램 녹화 중 NG가 나면 처음 부터 다시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도입 후 첫 녹화프로는 이남섭 연출의 쇼프로그램 「히트 파레이드」였는데 30분 프로그램 녹화에 NG 반복으로 한밤을 꼬박 새워야 했고, 당시 인기 절정이던 「실화극장」프로그램 방송도 NG로 인해 일부 녹화된 부분을 방영하면서 나머지는 생방송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다음 해인 1967년 6월과 12월에는 편집 가능한 VR-660B 2대가 추가 도입되어 본격적인 녹화방송이 시작되었으나, Helical 형 휴대용 녹화기로는 드라마, 쇼, 교양프로 등 많은 양의 프로그램 소화가 어려워 1969년 5월과 11월에는 표준형 녹화기 VR-1200A 2대가 도입 되었는데, 4헤드 방식으로 편집용의, 제작편리하고 안전성이 있어 녹화방송의 본격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되 었다. 계속하여 프로그램 수요의 급증에 따라 1970년 11월과 1971년 6월 추가로 VR-1200B 2대가 도입되어 송출과 제작에 부족함이 없이 활용하게 되었다.
이어 1972년 3월에는 Slow Motion VTR HS-100이 도입되어 스포츠 중계나 프로그램 중 특수 장면을 느린동작으로 제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디스크 형태로 최대 30초 까지 느린동작을 녹화할 수 있었다.
용문산 중계소 개소 축하 프로제작에 참여한 스탶과 원주방송국 간부들
녹화기의 도입은 스튜디오 내의 프로그램 제작의 변화 뿐 아니라 TV중계차도 전국 어디서나 필요에 따라 프로그램을 녹화 제작 할 수 있게 되었는데, 1967년 12월 21일 KBS 용문산 중계소가 개소되어 호출부호 HLAE, 출력 500W, Ch3으로 강원도 서부지역인 춘천과 원주 일대가 가 시청권이 됨에 따라 개소 기념 및 축하공연이 춘천과 원주 시내 극장에서 거행되어 프로그램을 녹화 제작했고 당시 지방중계 계원도 전계강도 측정을 위해 함께 갔다.
진해항
또 1967년 12월 23일에 서울-부산간 최신부 마이크로웨이브 회선이 개통됨에 따라 다음 해인 1968년 4월 10일 부산 영도에 부산 TV 중계소가 개소되어 호출부호 HLAB, 출력 2KW, Ch5 였다. 개소 기념 및 축하공연은 40계단 근처 중앙극장에서 거행되었고 이어 진해군항제에 참석하고 경남지사 인터뷰도 녹화 했다. 1966-68년 어느 때인지는 확실 하지 않으나 원시 자연 그대로의 남이섬에 경춘관광이 처음 개장 하면서 기념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중계차, 녹화차, 발전기 모두가 군용 상륙정 비슷한 배에 실려 도강 했는데, 중계차는 너무 무거워 배에 실는 과정에 차의 밑바닥이 상륙정 앞 개폐문의 접합부에 걸려 어려움을 격기도 했다.
녹화차 남이섬으로
이 중계차는 1962년 처음 만들 때 TV카메라 한 대뿐인 미약한 시설로 시작해 1963년에는 오토 줌렌즈 300m/m 가 부착된 카메라가 추가되고 1966년 VTR이 도입 되면서 중계방송 이외의 프로그램 제작에도 관여하게 되었고 1972년 Slow Motion VTR 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어 보다 완벽한 프로그램 제작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미약한 시설로 고정된 장소에서 스포츠 중계, 행사중계, 프로그램 중계를 했으나, 민속예술 경진대회의 시가행진 중계, 존슨 대통령 방한시의 가두 중계, 그리고 인천 전국체전 중계와 같은 2단 중계 등을 했는데, 현시점에서 보면 장비나 중계기술 면에서 보잘 것 없는 수준이지만, 이 작은 기술 축적이 있었기에 오늘날 KBS-TV와 같은 프로그램이 방영될 수 있다고 생각해 주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백 년 전 허리 꼬부라진 할아버지가 갓 쓰고 좁다란 시골 길을 지팡이 집고 걸었으나, 지금 넥타이 매고 얼굴에 윤기가 흐르는 젊은이가 세단을 몰고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연상하면서, 오늘의 이 세대들이 과거도 돌아 볼 줄 알았으면 더욱 좋겠는데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글
직접 뵌적은 없지만, 사진으로 뵙다보니,
아래 세번째 사진에선 맨앞줄 오른쪽에 맨 끝에 앉으신 분,그리고 아래서 네번째 사진에서는 뒤줄 왼쪽에서 3번째 분이 오승룡 선생님이신걸 알겠어요. 맞는지요 요즘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옛시절엔 길가다가 방송국 중계차가 있는 곳에는 항상 인파가 몰렸었지요. 아마도 저같은 사람만 있다면, 세상 기계문명은 발전이 불가능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춘하추동방송과 긴 세월 함께 하시다보니 사진을 보시면 아실 수 있는 분들이지요. 고맙습니다.
박서림 선생님 글
이장춘 선생, 다채로운 내용 잘 보았습니다. 60년대에 기술진이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 줄 미처 몰랐 습니다. 오승룡씨도 부지런했 었군요. 놀랍습니다 .
송재극 선생님
기술은 방송의 뿌리입니다. 꽃과 나무는 잘 알려져도 뿌리는 표면에 잘 나타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승룡선생의 글과 이장춘선생이 기방송술에 직접 작성 해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방송역사 100년을 맞으면 필연코 방송역사 100년사가발간되어야 합니다. 춘하추동방송에 올라있는 글, 방송역사 100년사에 수록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힘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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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오승룡선생님의 체험기록으로 본 초기 TV방송 http://blog.daum.net/jc21th/17781606
88올림픽방송을 위한 오승룡님 3대 연구보고서(제14회 동계올림픽 외 2대경기) http://blog.daum.net/jc21th/17782351
살아있는 TV방송기술의 역사 오승룡선생님 방송사료를 모아 http://blog.daum.net/jc21th/17781279
방송인 오승룡 선생님 방송사료 사진 제 2집 http://blog.daum.net/jc21th/17781653
1960년 전, 후 방송의 기술, 드라마 미국인 고문관, 오승룡 http://blog.daum.net/jc21th/17780663
제14회 사라예보 동계 올림픽 1984년, 최초의 동구권대회 http://blog.daum.net/jc21th/17781755
남이섬에 중계방송차가 도착하면서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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