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계천의 지천(정릉천)을 따라서(3)
◇ 홍릉 터(명성황후 민씨 능터) :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 57, 국립산림과학원 내
- 을미사변 때 시해된 명성황후 민씨의 능터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민씨가 1895년 8월 20일, 경복궁에서 일본 낭인(浪人)들에게 시해(弑害) 당하자, 광무 원년(1897) 10월 27 · 28일 양일간에 청량리 이곳의 명당을 골라 장례를 지내고, 홍릉(洪陵)이라고 불렀다.
그 후에 풍수가들이 이곳이 불길하다 하여 광무 4년(1900)에 다시 길지를 찾아 양주군 금곡면 금곡리(현 남양주시 금곡동)로 정하고, 천장(遷葬)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1905) 등 국가에 어려운 일이 생겨 천장을 하지 못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67세로 승하하자 이 해 3월 3일,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천장함에 따라 현재 국립 산림과학원(전일 홍릉 수목원) 경내에는 홍릉 터를 알리는 표석만이 남아 있다.
◇ 세종대왕기념관 : 동대문구 청량리동 산 1번지 157호
숭인원 북쪽 옆에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있다. 이 기념사업회는 1956년 10월 9일에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여 이를 길이 보존, 선양하여 민족문화창달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설립된 법인이다. 1968년 10월부터 이곳 청량리동에 자리 잡아 학술 · 문화연구 · 출판사업을 벌이는 외에 세종대왕기념관을 건립하여 학술강연, 세종대왕 관련 자료 전시, 한글날 기념행사 등을 주관하고 있다.
▼ 세종대왕 신도비 : 보물 제1805호
- 서초구 내곡동에서 이전해 온 조선왕조의 마지막 신도비
기념사업회 정문 입구에는 세종대왕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서초구 내곡동 산 13번지(현 국정원 자리), 전일의 영릉(英陵)에 세워졌던 것을 1974년 4월에 이전한 것이다.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가 합장된 능으로 내곡동에 위치하다가 조선초 예종 1년(1469) 3월에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으로 이장하였다.
세종대왕은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부왕 태종의 능인 헌릉(獻陵) 옆에 능 자리를 잡았다. 세종은 능 터가 불길하다는 상언을 듣고 웃으면서, “음양가(陰陽家)의 화복(禍福) 이야기는 근심할 바가 아니다. 부왕의 곁보다 더 좋은 능터가 어디 있겠느냐” 하고 영릉을 만들게 하였던 것이다. 그 뒤 세종대왕이 54세로 세상을 떠나자 소헌왕후와 함께 영릉에 합장하였다.
2년 뒤인 문종 2년(1452)에 능 앞에 대리석으로 신도비를 세웠는데 이로부터 조선말까지 역대 왕들은 신도비를 세우지 않고 표석(標石)만을 세웠으므로 국왕의 신도비로는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문종(文宗) 이후부터 능 앞에 신도비를 세우지 않고 표석만을 세우게 된 것은 국왕에 관한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하게 기록 보존되게 마련이므로 굳이 돌에 새기는 번거로움을 더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이 비석이 발견된 곳은 옛 영릉 터에서 약 1Km 떨어진 순조(純祖)의 인릉 근처였다. 비석이 이곳에서 나온 것은 여주로 천장(遷葬)할 때 옮기다가 이곳에 이르렀을 때에 묻어 버린 것 같다. 그러나 비석의 받침돌인 귀부(龜趺)는 현지에서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 옮겨와서는 받침돌을 자연석으로 받쳐 놓고 있다.
비석의 규모를 살펴보면, 총 높이는 507Cm로 비신(碑身)의 높이가 312cm, 폭은 155cm, 두께는 50cm이다. 비석의 머리 부분인 이수(螭首)는 두 마리의 용이 좌우에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며, 조각 솜씨는 매우 정교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작용으로 인하여 손상이 심하다.
총 4,886자의 글자가 새겨진 이 비석은 세종대왕의 어진 업적을 찬양하고 소헌왕후 · 빈(嬪) 및 그 소생들에 관한 약력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멸이 심하여 읽기가 어렵다. 이 비석의 앞면은 영의정을 지낸 정인지(鄭麟趾), 뒷면은 김조(金銚)가 글을 짓고, 글씨는 안평대군이 썼으니 모두 당대의 유명한 인물이었다.
▼ 구영릉 석물(石物): 서울시 유형문화재 42호
- 내곡동의 영릉(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에 세워졌던 석물
구영릉은 세종과 그의 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능으로 오늘날의 서초구 내곡동 산 13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예종 원년(1469) 영릉이 여주로 이장되면서 구영릉에 세워졌던 석물은 운반상의 어려움 때문에 땅에 묻혔다.
1973∼1974년에 이곳이 발굴되면서 지금의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세종대왕 신도비를 비롯하여 구영릉 석물 12기가 2002년 3월 15일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서울 청계천 수표(水標): 보물 제838호
- 청계천 수표교에 수위를 측정하던 돌기둥
세종대왕기념관 동쪽 앞에는 보물로 지정된 청계천 수표(水標)가 세워져 있다.
조선초 세종 23년(1441)에 강우량을 축정하기 위해 측우기를 만들고, 이 기구로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 수표이다. 한강변과 청계천 2곳에 설치하였는데 한강변의 세운 것은 바윗돌에 직접 눈금을 새겼고, 청계천의 세운 것은 낮은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였다. 그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청계천의 마전교(현 수표교)에 세웠던 수표는 조선초 성종(재위 1469~1494) 때 제작한 것을 개량한 것이다.
높이 3m, 폭 20㎝의 화강암 사각기둥의 수표에는 양면에 한 자(1尺)에서 열 자(10尺)까지의 눈금이 새겨져 있다. 3. 6. 9척에는 ‘0’표시를 하여 각각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라고 표시하였다. 6척 안팎의 물이 흐를 때가 보통 수위이고, 9척이 넘으면 위험 수위로 보아 한성부에서 하천의 범람을 미리 예고하였다.
이 당시에 청계천을 관리하는 준천사(濬川司)를 새로 설치하였는데 이 관아는 장마철이면 청계천의 물이 불어나는 상태를 시시각각 기록하여 호조(戶曹)를 통해 국왕에게 보고하는 동시에 당시 서울시장인 한성판윤에게도 알렸다.
광복 후 1959년에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수표교와 함께 수표는 장충단공원으로 일시 옮겨졌다.
그런데 수표는 세종대왕 때 처음 세워진 것이므로 장충단공원에 두는 것보다는 이곳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 옮기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여 1973년 10월에 현재 자리로 옮겼다.
전일의 마전교는 수표가 세워지면서 수표교로 다리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나무로 세운 수표는 오래가지 못했으므로 어느 시기에 돌기둥으로 바꾸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수표는 받침돌에 「경진지평(庚辰地平)」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으므로 경진년, 영조 36년(1760)에 청계천을 준설하고 세운 것이다.
◇ 고려대학교 박물관 : 서울 성북구 안암로 145
- 국내 최초의 대학 박물관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세워진 국내 최초의 대학 박물관이다. 고려대학교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한쪽에 민속품을 전시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세워진 1934년은 국내 문화재나 민속품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낮을 때였다.
이 시기에 일제는 수많은 문화재를 강탈해 갔다. 그러나 국내에서 문화재 수호에 나선 사람은 간송 전형필(1906-1962) 선생이 유일했다. 그는 전 재산을 털어 수집한 문화재로 1938년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을 세워 문화재를 보호한 인물이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이 시기에 민속품과 문화재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전형필(全鎣弼, 1906~1962) 선생의 성북동의 보화각보다 4년이나 빨리 개관하였다. 개관 초기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은 안함평(1879-1973) 여사였다. 전북 고창에서 주막을 운영했던 그녀는 1936년 전 재산인 논 1만 6,000평과 밭 9,600여 평을 보성전문학교에 기증했다.
고려대학교 측은 이 재산을 토대로 박물관에 전시할 민속품 수집에 나섰다. 1988년 고려대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던 안 여사의 무덤을 발견하고, 천안공원묘지로 이장한 뒤 사은비를 세우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1962년에 박물관 건물을 준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