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모체에 들어가 있는 아이의 생명,
즉 의식과 얘기를 하거나, 수호령과 상담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의 의식을 통해서,
육체를 지배하고 있는 그 수호령. 지도령의 성격이나 특징이
확실하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를 술꾼인 사람의 의식에게 지배하게 하면,
그 사람과 똑같이 비틀비틀 댄다.
병자의 의식에 의해, 우리의 육체를 지배하게 하면,
병자와 똑같은 곳에 현상이 나오며,
또 렌트겐보다 자세하게, 게다가 칼라로 나쁜 부분의 영시(靈視)를 할 수 있다.
전문의의 입회하에서도 확실하게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코 초능력자도 아닐뿐더러,
영매라고 칭하는 인간들도 아니다.
의식의 본체랑 분신에게 우리의 육체를 지배하게 하면,
그 본체랑 분신의 음식물의 기호까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단것을 좋아하는 수호령이 들어온 경우,
우리는 반대로 매운 것을 입에 넣어 본다
. 그러면 그 매움은, 우리 자신의 육체의 미각보다 훨씬 매움을 느낀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수호령에게, 단것을 입에 넣으면,
보통 때보다 훨씬 단맛을 더 느낀다고 하는 상태이다.
이와 같이 하여 우리는
여러 가지 실험의 결과에 의해 의문의 해명을 하여 왔다.
1970년 1년 동안에,
이미 70명 가까운 사람들이,
신리를 깨달아 영도(靈道)를 열어, 생활에 살려오고 있어,
그 사람들의 실험의 결과도 똑같이,
모두 영능력의 적중을 보고 있는 사실은 움직이기 힘든 증명으로 되고 있다.
우리는, 예수가, 나자렛의 언덕이나 요르단강에서 신리를 설법하고,
고타마가, 그리도락터에서 설법을 한 것처럼,
신전이나 불전 등은 하나도 모시지 않는다.
마음속에 대신전. 대불전을 갖고 있기 때문에 모실 필요도 없고,
어디에서라도 그 자리에서 영적 현상을 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상 숭배적인 장소등은 필요 없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종래의 신흥종교의 행사처럼,
경을 올리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하는 것은 필요 없다.
때문에 위엄이 있는 것을 상상하여서는 안 된다.
2570년 정도 전의 인도 시대,
고타마의 제자에 카샤파라고 하는 3명의 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불제자가 되기 전에는 배화교(拜火敎)라고 하여,
훌륭한 제단을 만들어, 불의 신에 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마음이 불꽃처럼 타올라 평안이 없어,
결국은 불법의 신리에 귀의했으며
그것에 의해 마음의 불꽃은 가라앉았다고 한다.
신리적인 결론은, 이 한 가지 일에 의해서도 명백하다.
여담이 되었지만, 마침내 아이들은 성장하여
안, 이, 비, 설, 신, 의의 육근(六根)이 작용하게 되면,
자아가 나와 여러 가지로 부모를 고생시킨다.
성장에 비례하여, 이때쯤부터 번뇌는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여 크게 되고,
자기 보존. 자아아욕의 상념을 만들어 간다.
이와 같은 번뇌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우리는 선악의 판단을 알고,
인간으로서의 바람직한 자세를 깨달아 가는 것이다.
아이들은, 환경이나 부모의 예의범절에 의해
여러 가지 정신적인 면도 발달해가는 것인데,
아직 번뇌의 움직임은 작다.
마침내 자기의식이 발달하여,
부모에게서 떨어지게 되면,
신불이나 감사의 마음조차 잊어 가는 청소년이 많아지고,
학교에서는 학문의 주입식교육방법,
지식만 발달하여 마음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전무한 환경에 놓여, 신의 자식으로서의 본성을 망각하고 만다.
적령기가 되면 연애, 결혼 그리고 가정, 아이, 이웃 등,
부조화한 요인은 점점 많아져 스스로 고통의 원인을 인생에서 만들게 된다.
그리고 에고이스틱(egoistic)한 삶의 방식을 많이 하게 되어,
결과에 대해 책임이 희박한 인간으로 변하여 간다.
그러한 인생 속에서,
정신적인 고민이나 생활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어떤 이는 형식적 종교로 자기도피를 하고,
어떤 자는 과격한 사상으로 내달린다.
광신. 맹신의 끝은 어느 쪽이나 자신의 의식을 자승자박 하고,
조직의 세포로 변하거나,
자신의 뇌세포까지도 미쳐버리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자신이 태어날 때,
저 세상에서 약속한 것 등은 뜬구름이 되고,
신불 등은 난센스라고 물질 경제만을 추구하게 되어가는 것이 인간이다.
번뇌의 우매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한 때의 자기만족의 꿈은 부서지고,
인생의 무상(無常)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어,
이 세상의 졸업식이 되고, 자신의 업에 덧칠을 하여,
다시 저 세상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현상계를 말법의 세상이라고 한다.
자신의 본래의 불성을 끝내 깨닫지 못하고,
이 세상만의 생명이라고 믿고 악업을 거듭한다.
하지만 사실은, 모든 결재는 자기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사 저 세상으로 돌아가도 자기자신이 해야 한다.
인간은, 생존하는 동안에, 그것을 엄격하게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명예, 지위, 돈이 무엇이겠는가?
대지주나 왕후(王候)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현세에서만 통하는 것,
죽어서 저 세상으로, 그것들을 갖고 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잘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사리사욕에 싸인,
어두운 상념의 광자체라고 하는 저 세상에서 탈 배와,
고통 번뇌를 만재한 자신의 혼(魂)뿐이다.
지옥에서 사는 것도 취미라고 하면 그것도 좋다.
하지만 기껏 7,80년의 인생에서의 실패가,
400년, 500년에 필적하는,
저 세상의 지옥계에서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과를 생각하게 되면,
역시 불꽃놀이와 비슷한 현상계에서의 생(生)이라고 해도,
헛되이 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생각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을 믿지 못하고,
자신을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실로 현대란,
현대인이란,
얼마나 말법의 말기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