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웬만한 거리는 차를 타고 다니지만,
사오동 시절 동부국민학교(광평 초교)는 걸어서 다녔고 진학을 하면 구미학교 까지 특히 여자는 걸어서 다녀야했다.
내가 진학할 때 사오동에서 여자는 네 명이 진학했는데 신늪의 나와. 샛뜸의 송자 장동의 점식이 매호의 태숙이였다.
학교 갈 때는 시계도 없었건만 용케도 비슷한 시간대에 출발해 모여서 얘기들을 하면서 가곤했다. 집으로 돌아 올 때는 술도가 까지 오면 두 갈래로 갈라져야했는데
동부학교와- 미륵집- 장동으로 해서- 신늪으로 오는길과
신평뒤- 쌍미뿔- 패기- 신늪 으로 오는 길,
샛뜸의 송자는
동부학교-걸깡-산 넘어-샛뜸으로 가기도했다.
그 때 동행인이나 상황 봐서 길을 택해 다녔는데
신평- 패기- 신늪으로 다닌 기억이 많이 난다.
술도가에서 신평으로가서 그 동네를 다 지나면 차돌백이가 나오는데 거기엔 하얀돌이 황토흙에 많이 박혀있었는데 그곳을 지날 때면 할아버지 생각을 했었다.
할아버지는 불(火) 이 필요하면 성냥대신 부싯돌에다가 명주실인가 목화솜인가를 조금 붙여서 다른 돌로 부싯돌을 치면 별 같은 불꽃이 번쩍하면서 솜에 불이 붙으면 대담배에 붙이기도 하시고 소죽 끓이는 가마솥 아궁이 불소시게에 붙이기도 하셨는데 그 사용된 돌이 차돌백이에 박혀있는 돌과 닮아서 그곳을 지날 때면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차돌백이를 지나 양쪽에 논을 끼고 오면 수리도랑에 큰 돌로 다리를 놓아 건너기 좋은 다리를 지나 한참오면 쌍미뿔을 5미터쯤 앞두고 길 밑에 수로가 하나있는데 겨울이면 과수원이있는 태숙이가 사과(국광)를 가져와 아침에 수로에 넣어 두었다가 집에 올 때 꺼내 나눠먹던 맛은 참으로 좋았다.
쌍미뿔을 지나고 패기를 지나 조금 오면 오른쪽에 할마이산을 지나 더 오면 공동묘지가 나오는데 거기서 태숙이와 헤어지고
공동묘지를 뒤로하고 국시나무를 왼쪽으로 바라보며 한참 오면 장동이 내려다보이고 거기서 점식이는 산을 가로질러 난 길을 따라 내려가고 나면 나 혼자 남는데
우리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뒷동산 능선위에서면
강 건너 멀리 반티산(천생산)과 유학산,
가을이면 금빛으로 출렁이던 들판을 바라보며
우리 마을 초가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누구네 집인지 다 아는 지붕위로 저녁 밥 하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구수한 밥 냄새가 나는 듯 한 마을을 향해 나는 넘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걸음으로 동사를 지나 패거나무까지 단숨에 내려간다. 이제 웃점빵 지나고 아래 점빵을 뒤로두고 산돌이네 집을 끼고 조금만 더 가면 샘이나오고 우리 집 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패거나무 아래 오면 늘 쳐다 보는 곳이 있다.
설날 새벽이면 어머니심부름으로 기름종지를 가지러왔는데 그믐날 밤에 불을 켜 가져다놓은 기름 종지 안은 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그것이 놓여 있던 자리를 나무 아래를 지날 때 마다 바라보게 되었다.
어머니 친구 분들이 모이면 간혹 하시는 말씀인데
아주 옛 날 패거나무에는 낙동강 배의 닺줄을 매었다고 한다.
낙동강물이 백년에 한 번씩 사오동 앞으로 왔다가 다시 강 건너 마을 쪽으로 가고를 반복하는데 사오동 앞까지 낙동강이 왔을 때 패거나무에 배의 줄을 매었다는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오실 수 있다면
그 옛날에는 낙동강의 물길이
어디쯤 흐르고 있었는지를 묻고 싶다.
첫댓글 누님께서 잔잔히 고향에 관한 글은 옛날 고향의 향수가 물밀듯이 밀려옵니다. 패거나무에서 차돌배기 그리고 타임머신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