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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임신캘린더
이세은
남자의 기분은 아침부터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남자는 협탁에서 체온계를 꺼냈다. 아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내의 기상 시간까지는 삼십분이 남았다. 남자는 스마트폰의 임신캘린더 어플을 실행하고 그 동안 기록해둔 기초체온 그래프를 신중하게 살펴보았다. 아내의 체온은 며칠 동안 36.4도 근처를 맴돌았다. 남자는 일주일간의 체온 기록을 하나하나 터치했다. 화면 위로 남자가 정리한 아내의 상태가 떠올랐다. 일주일 전 아내의 질 분비물은 탁하고 끈끈한 덩어리에서 맑고 투명한 실처럼 변했다. 아내의 자궁은 3개월 동안 완벽한 28주 주기로 내벽이 두꺼워지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했다. 지금까지의 점액관찰법과 기초체온법 기록이 빚나간 적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내의 배란은 하루 뒤에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전부 열었다. 남자가 일어날 무렵 새파랗게 밝아오던 하늘은 어느새 완연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두꺼운 암막커튼에 가려졌던 빛이 창문을 넘어 침대 머리맡을 타고 내려와 아내의 얼굴을 비추었다. 아내는 어느새 알람시계 없이 규칙적으로 여섯시 반에 일어나게 되었다. 이제 막 잠에서 깬 아내는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내는 혀 아래 놓인 체온계를 물고 기지개를 폈다. 오 분 후에 알림소리와 함께 아내의 체온이 나타났다. 남자는 그래프에 아내의 체온 36.3도를 입력하고 확인을 눌렀다. 배란예정일이라는 빨간동그라미가 하루 뒤 날짜에 표시되었다.
일 년간 아내의 몸은 규칙적인 생리 주기를 만들기 위해 존재했다. 원채 계획적으로 살아온 아내였으므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아내의 체중은 5키로가 늘었다. 27인치 허리가 28인치가 되었다. 하의를 전부 바꿔야 했지만 피부는 물오른 이십대처럼 매끈해졌다. 아내는 남자의 스마트폰에 기록된 기초체온을 자신의 스마트폰에 옮겨 적었다. 남자의 기록과 달리 하루의 식단과 몇 줄의 메모가 추가되어 있었다. 남자는 아내가 아침을 준비하는 사이 그 메모를 읽었다. 회식자리에서 소주 한 잔. 바로 물 한 컵. 남자가 아내의 생리주기를 바로잡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이런 일에 어쩌면 그렇게 무책임할 수 있냐며 화를 냈다. 그리고 이런 예기치 못한 일에도 무너지지 않을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평균 육 개월이 걸린다는 일을 일 년이나 잡았다. 아내의 몸은 점점 좋아져 늦은 시간까지 회식자리에 있어도, 술 한 잔 정도를 마셔도 건강한 밸런스를 유지하게 되었다.
남자는 오늘 아내의 아침 식단으로 레몬즙과 엑스트라버진 올리브 오일을 뿌린 어린새싹 샐러드와 무지방 요거트를 정해주었다. 아내가 자신의 몫인 아침을 먹기 시작했을 때 남자는 믹스커피를 하나 뜯었다. 아내의 입안으로 오일에 버무려진 어린새싹들이 청량감 있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요거트를 뜨기 시작한 아내가 남자에게 물었다.
당신은 꼭 그것만 마시더라.
남자는 휴지통에 믹스커피 껍질을 버리며 대답했다.
이렇게 완벽하게 균형 잡힌 음식은 흔치 않거든. 그래서 맛있지.
남자는 커피를 마시며 건조대에서 도시락통을 꺼냈다. 그리고 전날 택배로 받은 반찬들을 담았다. 삶은 브로콜리, 당근감자볶음, 취나물, 콩자반등 저염식단으로 유명한 반찬가게에서 주문한 것이었다. 아내는 남자에게 오늘도 아침은 커피뿐이냐고 물었다.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아침을 먹지 않았다. 아내는 화장실로 들어가는 남자의 등을 향해 중얼거렸다. 무지방 요거트는 안 먹었으면 좋겠어. 너무 맛이 없어. 남자는 무지방 요거트의 영양성분을 대신할 음식을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진 않았다. 그렇다고 잼을 넣어 먹기엔 잼에 들어가는 성분이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잼에 들어가는 백설탕은 지나치게 많이 가공된 식품이기 때문이었다. 일본 오키나와 지역에서 생산한다는 흑당(黑糖)을 넣으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음 주 식단부터 무지방요거트는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남자는 아내에게 참고 먹으라고 말했다.
*
남자는 출근하자마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는 이제 막 지하철을 탔다며, 오늘 외주 물건이 들어오는 날이라 야근을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런 말 없었잖아. 남자의 말에 아내는 일이 다 그런 거 아니겠냐며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아내의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내가 겪는 사회 경험들은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남자의 자리에는 쥐 두 마리가 담긴 케이지가 놓여 있었다. 배란촉진제를 놓은 암컷과 피임약을 투여한 수컷은 일주일 동안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교미하고 있었지만 임신 증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는 보고서에 쓰인 수컷의 피임약 반응을 확인했다. 쥐들은 실험을 앞두고 불안 증세를 보였지만 남자가 공급해주는 먹이 앞에서 반나절 만에 얌전해졌다. 첫 번째 쥐는 스테로이드 과다로 쇼크사 했고 두 번째 쥐는 투약을 중단하자마자 암컷을 물어 죽였다. 세 번째 쥐는 괜찮은 듯 보였지만 교미를 할 때마다 혈압상승으로 발작을 일으켰다. 남자는 세 마리 쥐의 정소에서 숙성되지 못한 정자를 확인했다.
남성의 피임은 무정자증 환자에게서 착안된 방법이다. 인위적으로 정자의 생산을 차단하는 수단은 스테로이드 성분이 포함된 주사제를 맞는 것뿐이었으나 얼마 전 미국 콜롬비아 대학 연구소에서 스테로이드가 포함되지 않는 남성피임약 개발에 성공했다. 정자의 생산에 필요한 비타민 A의 흡수를 억제하는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주사제가 아닌 알약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비타민 A가 흡수되지 않고 그대로 배출되는 경우 시력에 이상현상이 올 수 있다는 점을 개선하고 피임확률을 98%까지 올릴 수 있게 될 경우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이상적인 피임방법이 될 것이었다.
연구소 소장은 남자에게 임상실험을 앞둔 알약 샘플을 건네주었다.
오후에 실험자 오면 바로 확인하고 보고서 올려.
소장은 상용화가 되지 않은데다 특허 만료기간이 한참 남은 남성피임보다 당장 임상실험을 할 수 있는 여성 피임약에 투자하자고 했다. 기존의 피임약은 매일 같은 시간에, 생리주기를 따져가며 복잡하게 복용해야만 피임 성공률이 높아지지만 신약은 일주일만 복용하면 성공률이 98%에 달하는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남자는 특허권이 만료되자마자 여기저기 생겨난 카피제품을 신약이라 부르는 소장을 비웃었다. 약은 형식적인 임상실험을 거치고 나면 대대적인 홍보를 거쳐 약국에 진열될 것이다. 마케팅팀은 매일 야근했고 소장은 다음날 아침에 마케팅팀의 보고서를 돌려보냈다.
남자는 손바닥에 놓인 자그마한 알약을 바라보았다. 이 작은 알약은 생리중인 여성의 체내에 들어가 호르몬을 불균형하게 만든다. 프로게스테론과 에스트로겐 수치를 높여 임신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기존의 피임약과 다를 것이 없지만 이 약은 프로게스테론 형성에 초점을 맞췄다. 난소는 성숙하지만 프로게스테론 덕분에 배란이 이루어지진 않는 것이다. 따라서 피임약의 주된 부작용인 구역질, 구토등의 위장장애나 부종이나 가려움등의 피부질환을 현저하게 줄였다.
남자는 소장이 오전에 돌려보냈다던 마케팅팀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카피제품은 원본을 분석해 대체할 수 있는 성분을 알아내 만들어진다. 홍보 문구 역시 원본 제품의 홍보를 비슷하게 베낀 것뿐이다. 남자는 후보로 올라온 사진 속의 모델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흰 피부에 길고 까만 생머리를 가진 20대 초반의 여자들이었다.
회식 자리에서 술에 거나하게 취한 소장은 피임약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냐며 여직원들을 훑어보곤 했다. 왜 피임약 광고에 청순한 여자애들이 나오겠어. 여자들은 애인에게 자기도 저렇게 청순하게 보이길 바라는 거지. 소장은 저렇게 생긴 것들이 불규칙한 생리 주기를 바꾼다느니, 생리통이 싫다느니 하면서 피임약을 먹고 꼬박꼬박 생리휴가를 받아가는 나쁜년들이라고 했다. 소장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박팀장은 팀장급 사람 중에 유일하게 여자였고 지독한 생리통으로 고생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두 다 알고 있었다.
남자는 점심시간이 다가올 무렵까지 계속 마케팅팀의 보고서를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첫 번째 보고서나 두 번째 보고서의 뚜렷한 차이점을 알 수 없었다. 원본 제품과 카피제품의 차이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고서도 그런 식이었다. 남자가 읽던 보고서를 보던 박팀장은 마케팅팀을 걱정했다.
괜한 트집 잡으면서 계속 딜레이 시키는 거에요. 그러면 더 좋은 게 나올 줄 알고. 어차피 거기서 거기 아닌가.
박팀장은 작게 소곤거리며 서류뭉치를 남자에게 건넸다. 임상실험 참가자 목록이었다. 남자는 죽은 세 마리 쥐를 떠올렸다. 이 여성용 피임약은 동물실험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되지 않았다. 남자는 실험 대상이 된 다양한 연령대 여자들의 신체정보를 하나씩 훑어보며 아내와 가장 비슷한 조건을 찾아보았다. 남자의 머릿속에는 아내의 모든 정보가 들어 있었다. 약 효과가 비슷하게 날 법한 여자는 세 명으로 줄어들었다.
아내로부터 깔끔하게 비운 도시락 사진과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아무래도 오늘 많이 늦을 것 같아.
*
남자는 퇴근길에 마트에 들렸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남자의 곁에는 아내가 있어야 했다. 남자는 아내에게 전화했다. 아내는 한참 뒤에 받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여덟시까지는 돌아오라고 했지만 아내는 말이 없었다. 남자는 스테이크용 한우를 고르며 당신 일도 이해하지만 오늘은 정말 중요한 날이니 꼭 여덟시까지 집으로 들어오라고 재차 말했다. 아내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며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수산물 코너에서 미역과 다시마를 고르며 아내의 대답을 곱씹었다. 아내는 가구회사에서 일했다. 유명 회사 제품을 카피해서 저렴한 가격에 파는 업체였다. 처음에는 아내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만들기도 했지만 대기업 회사와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내의 디자인은 엔티크 쪽에 가까웠지만 일인가구가 많아지는 요즘에는 단순하고 깔끔한 북유럽 가구가 대세였다. 집안 형편은 아내가 전업주부가 된다 하더라도 무리는 없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다. 첫아이를 유산했을 때 아내는 일이라도 계속 하지 않으면 더 힘들 것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 힘들다는 이유가 어쩌면 어머니 탓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 문제는 자신이 끼어들 것이 아니라고 판단해 아내에게 직접 물어 본 적은 없었다.
남자가 청정해역 완도에서 채취한 미역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오늘이 날이 제일 좋은데 준비는 잘 하고 있냐고 물어본 뒤 전에 주었던 부적을 꼭 침대 이불 밑에 까는 것을 잊지 말라 신신당부했다. 영험한 무당이 아들을 낳게 해주는 거라며 비싼 값에 받아온 부적이었다. 남자는 그 무당을 믿지 않았다. 첫아이도 아들이라며 점지했던 무당이었다. 첫아이 명이 그렇게 짧다는 걸 짐작도 못 한 무당은 돌팔이임이 분명했다. 남자는 자신의 위로 넷이나 있는 누나들도 아들일 것이라 점지했던 무당을 생각하자 기분이 나빠졌다. 모자란 것 없던 집안이라 누나들도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자랐지만 아들인 남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나들이 학교를 마치고 집에 바삐 돌아온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은 철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애들과 싸워도, 성적이 떨어져도 전부 누나들 탓이었다. 친구와 노느라 저녁 먹는 것을 잊었을 때도 누나들은 동생 저녁도 못 챙겨준 모자란 년이라며 맞았다.
무당의 조언에 따르면 내년에 태어날 남자아이는 청마의 기운을 받아 대성할 운세였다. 어머니는 첫아이가 흑룡의 헌신이 될 아이었다며 두고두고 아까워했다. 어머니는 남자에게 찬물로, 아내는 뜨거운 물로 씻을 것이며 새벽 두시가 땅과 하늘의 기운이 만나는 지점이니 그 시간에 애를 가져야 한다고 세 번이나 말했다. 남자는 계산대로 향하며 대답했다.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첫아이 때처럼 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아내를 기다리며 저녁을 했다. 요즘은 블로그에 남자도 손쉽게 따라할 수 있도록 재료를 다듬는 방법부터 자세하게 올려놓은 사람들이 많았다. 남자는 아들을 둘이나 키우고 있는 여자의 블로그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종종 올라오는 셋째가 가지고 싶다는 글에 욕심도 많다고 덧글을 달고 싶은 욕망을 참아야 했다. 남자가 딱히 덧글을 달지 않아도 온갖 사람들이 - 대부분 아이 엄마였다 - 요즘 애 키우는데 들어가는 돈이 얼마나 많은데 둘만 키우라고 나서서 나무랐다.
참기름에 달달 볶은 소고기가 충분히 익자 남자는 불려두었던 미역을 함께 볶다가 물을 넣었다. 전복은 찜통에 쪘고 스테이크용 한우도 팬에 구웠다. 반찬은 아침에 도시락을 싸고 남은 당근감자볶음과 콩자반을 꺼냈고 어린새싹샐러드도 준비했다. 남자는 결혼을 하기 전 아내와 집안일 분담을 약속했다. 일찍 퇴근하는 사람이 저녁을 준비하고 늦게 온 사람이 빨래를 한다는 식의 분담이었다. 다행히 남자는 대학시절 자취경험 덕분에 그럭저럭 집안일을 했다. 납득하지 못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예고도 없이 방문해 남자가 부엌에 있으면 난동을 부렸다. 아내는 똑같이 바깥에서 일하고 왔는데 집안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머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만 하라며 언성을 높였다. 아내가 첫아이를 가졌을 때 어머니 쪽에서 아내를 살뜰하게 챙기기 시작하며 두 사람 사이는 괜찮아진 듯싶었다. 분명 아들일 게다, 내가 용꿈을 다 꿨으니 분명 대성할 아들이야. 첫애부터 아들이라니. 남자는 삼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유산된 아이가 아들이었다는 점을 애석하게 생각했다. 그랬다면 지금쯤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아이 손을 잡고 주말마다 놀이공원이며 수영장을 다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내가 다시 생리를 시작하게 되었을 때 산부인과 의사는 자궁이 약해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일 년이나 흘렀다. 남자가 아내의 생리주기를 바로잡고 건강한 몸을 만드는 기간동안 언성을 높인 적은 딱 한번 뿐이었다. 회식자리에서 마신 소주 한 잔. 남자는 그동안 작성해온 아내의 생리주기표를 다시 살펴보았다. 아내의 몸은 호르몬 분비가 활발해지는 배란기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체중은 늘어났지만 전보다 피곤함을 덜 느꼈고 생리통도 확연히 줄어들자 아내는 남자의 계획을 별 불만 없이 따라주었다. 불만이라고 해봤자 무지방요거트는 맛이 없다는 식의 투정이었다.
아내가 돌아왔을 때는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식탁 오른쪽에는 두꺼운 스테이크가, 왼쪽에는 미역국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사장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디자인을 여러 번 바꾸었으며 결국에는 다시 카피제품을 만든다고 했다. 남자는 잠자코 아내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대학에서 배운 건 하나도 소용없네. 내가 복사기야?
어차피 애 들어서면 그만 둘거니까 조금만 참아.
아내는 미역국을 한 술 뜨고 남자는 스테이크를 먹었다. 아내의 직장생활은 어디까지나 아이를 갖기 전까지였다. 아내의 후임은 아직 구해지지 않았다. 아내는 디자인 전공한 사람을 복사기로 쓴다는 회사에 아무나 지원하지 않을 거라며 혀를 찼다. 남자는 그런 일들은 사장이 판단해야 하는 일이고 아내는 정해진 기간까지만 근무하면 될 일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일은 계약서, 혹은 계획서대로 진행되는 것이니까. 아내는 미역국 한 그릇을 말끔하게 비웠고 남자는 후식으로 커피를 마셨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남자가 몇 주간 이행해 온 금욕적인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었다. 예정일이 아닌 경우에 남자는 피임법을 정확히 지켰다. 아내의 기분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남자가 아내의 가슴을 어루만지자 아내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남자는 머릿속에 정리해둔 계획표 내용을 하나씩 상기했다. 알람시계가 울었다. 새벽 한 시 오십 분이었다. 남자는 아내의 허벅지와 무릎을 최대한 들어 올리고 깊이 삽입했다. 다시 알람이 울렸다. 두 시. 남자는 알람이 끝날 무렵 사정했다.
*
남자를 깨운 건 전화였다. 다섯 시 반이었다. 아내는 아직 자고 있었다. 남자는 거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니. 저만 일어났어요. 왜 이렇게 일찍 전화 하셨어요.
어머니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으나 받지 않아서 남자에게 걸었다고 말하고는 어제는 시키는대로 부적을 깔고 했는지 물어보았다. 남자는 외투 안주머니에 있는 부적의 존재를 떠올렸다. 첫아이 명도 제대로 짐작 못한 무당이 써준 부적이니 오히려 부정한 물건일지도 몰랐다. 남자는 어머니에게 대충 다 시키는대로 했다며 둘러댔다. 관계 시간이나 사정하는 시간조차 어머니의 미신을 따르긴 했지만 평소 식습관같은 경우는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니 아들이 분명했다. 여섯 시 알람이 울리자 안방 쪽에서 아내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전화를 끊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체온계를 입에 물고 있었다. 36.7도. 남자는 스마트폰에 아내의 체온을 기록했다. 확실한 배란이었다.
오늘 아침은 오리엔탈 드레싱을 뿌린 양상추 샐러드와 삶은 계란, 살구잼을 바른 토스트, 우유였다. 아내는 토스트를 한 입 먹고 임신이 아니면 어떻게 하느냐며 걱정했다가 샐러드를 포크로 찍으면서 아들이 아니면 어머니 얼굴을 어떻게 보냐며 걱정했다. 남자는 일 년이나 준비했는데 분명 아들이 맞을 것이라고 했다. 남자는 아내가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랫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던 지난 일을 떠올렸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이제 회사 정리하고, 집에서 따뜻하게 있어. 그러면 돼.
*
남자가 만난 임상실험 지원자는 총 열 명이었다. 남자는 일렬로 늘어선 굳은 표정의 지원자들 가운데 아내와 비슷한 세 명의 여자를 찾아냈다. 남자는 두 페이지 분량의 형식적인 안내문을 나눠주었다. 임상실험의 다섯 번째 그룹이었고 그 동안 이상증세를 보인 사람이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설명에 지원자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부작용으로 구토나 발열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이미 시판중인 피임약과 마찬가지로 건강에는 큰 영향이 없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남자가 병원을 나와 연구실에 막 도착했을 때 케이지 안의 쥐 두 마리는 교미 중이었다. 소장은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은 수컷 쥐를 불발탄에 비유했다. 박팀장은 그런 소장을 혐오했는데 소장이 나이 사십을 넘어서 아들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지 마누라가 불발탄일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렇게 마누라만 구박하다가 어디서 첩을 얻겠다니 씨받이 하나는 들여야 한다니 하다가 입양했다면서요. 사실 자기가 불발탄인거 아닌가? 남자는 수컷 쥐가 길게 울음소리를 내며 암컷에게서 떨어지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입장에서 소장은 결코 아내를 탓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실험군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연구의 기초 상식이 아닌가.
남자는 아내를 떠올렸다. 아마도 아내는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사장에게 퇴사를 미룰 수 없다고 통보할 것이다. 어머니는 시어머니 노릇을 한다며 집에 와서 임산부에게 좋다는 식사를 준비하느라 부산스럽게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누나들에게 막내집이 애를 가졌으니 각별히 신경 쓰라고 연락을 돌릴 것은 너무도 뻔한 일이었다. 첫아이를 가졌을 때도 온 집안이 난리였으니까. 남자는 다만 그런 소란스러운 일은 피하고 싶었다. 집안일은 가정부를 부르면 될 테고 그것만 누나들에게 부탁하고 싶었다. 남자는 문득 누나들이 먼저 연락해 온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첫째는 첫아이가 유산됐을 때 병원에 오지도 않았다. 둘째와 셋째는 함께 오긴 했으나 아내의 얼굴만 보고 돌아갔다. 남자는 딱히 불쾌하진 않았다. 어머니의 극성을 생각하면 전부 다 이해 할 수 있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때 여자아이가 모자라 남자와 짝을 했고 그것을 들은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 귀한 아들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거냐며 선생의 뺨을 때린 이후로 남자는 어머니가 유난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는 누나들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인터넷을 뒤져 가정부 파견업체를 찾아 음식을 잘하고 깔끔한 사람을 구했다.
*
며칠 뒤 병원 관계자가 남자에게 임상실험자 중 한 사람이 심한 구토 증세를 보인다는 연락을 해왔다. 아내와 비슷해 보이는 세 사람 중 가장 창백했던 여자였다. 케이지 안의 쥐들은 여전히 열심히 교미 중이었다. 다른 연구원이 관리해주고 있긴 하지만 수컷에게 비타민 A의 합성을 억제하는 약물을 투여하고 반응을 기록하는 일은 남자가 하고 있었다. 먼저 연구를 발표한 미국을 따라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연구는 형식적이었고 기존의 논문을 보고 비슷한 약물을 찾는 방식에 불과했지만 순서가 중요했다. 국내 다른 회사보다 먼저, 더 빨리. 특허권이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 복제품이 쏟아져 나올 테지만 소비자들은 가장 먼저 광고를 탄 제품부터 기억했다.
소장은 남자가 가져온 ‘불발탄’의 보고서를 읽고 더 이상 실험 할 수가 없으니 폐사를 권고했다. 불발탄의 시야는 며칠 전, 남자가 임상실험자들을 처음 만난 날부터 차츰 흐려지기 시작해 급속도로 나빠졌다. 남자는 박팀장에게 불발탄의 안락사를 부탁했다.
남자가 만난 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내를 떠올리게 했다. 관계자는 지난 번 남자에게 보낸 보고서에 수정 사항이 생겼다며 다시 가져다주었다. 남자의 시선은 추가된 특이사항 란을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여자의 몸 상태는 유산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했다. 신체적으로 무리가 있는 경우는 임상실험 지원자를 걸러내는 과정에서 모두 빠져나가기 마련이었다. 남자는 잠정적으로 스트레스가 원인일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여자는 상담실 안에서 좀처럼 가만히 있지 않고 부산스럽게 돌아다녔고 의자에 앉아서도 발을 굴리거나 몸을 흔들어댔다.
그러니까 단순 스트레스라 이거군요.
갑자기 복용한 호르몬 억제제 때문에 구토증세를 보이는 사람도 있고 체한 것처럼 속이 미식거리는 사람도 있다.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성격이 예민할 경우 호르몬 영향을 많이 받고 따라서 스트레스가 심했다면 나타날 수 있는 경우였다. 남자는 병원 관계자와 합의한 끝에 여자의 실험참가를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계약서에 쓰인 대로 입원 기간 동안의 금액만을 지불하겠다고 하자 여자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한 번의 유산 끝에 더 이상 아기를 원하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가 자신도 첫아이를 유산했다는 경험이 있다고 말했을 때 여자는 처음으로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
실험관 아이였어요.
두 번이나 해약할 적금도 없고, 아이 때문에 집을 팔수도 없는 노릇이니 더 이상 기대하지도 않는다며 여자는 상담실을 나갔다. 남자는 아기의 성별이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연구실로 돌아오자 박팀장이 케이지를 들고 남자를 맞이했다. 케이지 안은 톱밥이 두껍게 깔려 있었다.
실험쥐의 폐기처분은 내가 없어도 되는데요.
남자의 말에 박팀장은 고래를 저으며 케이지를 건넸다.
두 마리면 할 수 있었는데…….
남자는 케이지를 받아들고 나서야 박팀장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껍게 쌓인 톱밥 옆에서 수컷은 무언가를 잔뜩 경계하는 듯 숨을 몰아쉬며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넣어 톱밥을 헤집자 둥글게 몸을 말고 있는 암컷이 나타났다. 암컷은 남자의 손길을 피하며 좁은 케이지 안을 돌아다녔다. 암컷의 배가 요동첬다. 새끼가 태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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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체온은 꾸준히 고온을 유지했다. 남자는 37도 부근에서 내려오지 않는 체온을 어플에 옮길 때마다 꾸물거리며 새끼를 낳고 있던 암컷을 떠올렸다. 암컷은 아홉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소장은 무엇이 잘못 된 건지 알아보라며 남자를 추궁했다. 수컷은 분명 생식능력이 없었다. 눈이 먼 수컷은 후각이 예민해졌고 남자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새끼에게 달려들었다. 남자는 박팀장에게 안락사를 부탁했다. 어플에 임신 확인 사실을 검사하라는 안내창이 깜빡거렸고 남자는 인터넷으로 임신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머릿속에 있는 정보만으로는 벌써 아이 다섯쯤은 낳은 것 같았다. 남자가 가입한 임신 정보 카페는 수십 개에 달했다. 가입자들은 대부분 여자였다. ‘아들 낳는 방법, 아들 낳고 싶어요, 이번에도 딸이래요, 딸만 셋인데 다음에 아들 낳을 수 있을까요’ 라는 게시글마다 남자는 요즘 세상에 성별이 무슨 상관이냐는 덧글을 보고 항상 이상하게 생각했다. 기왕 낳는다면 아들이 좋은 편 아닌가. 대를 잇는 것은 물론이고 늙어서 의지하기도 아들이 더 좋을테니. 남자는 만약 딸이 생기면 어떨지 상상했다. 인형놀이를 함께 하고 장난감 당근과 감자로 만든 밥을 맛있게 먹어주는 척 하며 볼에 뽀뽀를 받는 상상이었다. 하지만 그 이상을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아들은 장성해서 군대에 들어가 각이 잡힌 군복을 입고 경례를 해주면 넌지시 아버지는 최전방에 있었다며 군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밤새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는 장면까지 눈앞에 그린 듯 떠올랐다.
역시 아들이지.
남자는 쇼핑몰 사이트에서 임신캘린더를 샀다. 첫아이의 임신캘린더는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도 창고 구석에 있거나 폐지 수거함에 버려졌을 것이다. 남자는 임신캘린더 첫 장에 넣을 초음파 사진에 넣을 문구를 몇 가지 정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없어 잠시 고민중일 때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아내를 바꿔달라고 했지만 아내는 한참 단잠에 빠져 있었다.
애가 들어선 게 아니면 어쩌나해서 전화했다. 통 용한 꿈을 꾸지도 못해서. 혹시나 해서 느이 누나들한테 전화도 했는데 어째 다들 시원찮아. 그년들은 막내가 아들이 생겼다는데 집에서 살림 좀 봐주고 할 것이지. 딸년들 셋이나 키웠는데 다 소용없어.
남자는 아침에 아내가 가져온 임신테스트기의 선명한 두 줄을 설명했다. 요즘 성별은 초기에 진단해주지 않지만 아들이 분명할 것이며, 안정기에 들어가면 아는 친구에게 양수검사를 받을 예정까지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너는 뭐 꿈 꾼 거 없니. 필시 용이나 말 꿈을 꿔야 할 텐데. 아들한테 사과니 복숭아는 안 좋아. 안되겠다. 내가 올라가마.
남자는 아내가 곧 회사를 그만 둘 예정이며, 집에서 혼자 차분하게 태교를 하는 것이 좋겠다며 어머니를 말렸다. 가정부까지 구했으니 어머니가 올 필요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럼 잠깐이라도 들려 부적만 전해주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무당을 만난 뒤에는 유독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남자는 할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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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의 임신을 놓고 가장 말이 많은 건 소장이었다. 소장은 불발탄이 사실은 실탄이었다는 걸 알고 미묘한 표정으로 쥐가 담겨있던 케이지를 보았다. 미국에서 비타민 A의 합성을 억제하는 방식의 남성 피임은 4주 동안만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새롭게 발표되었다. 남자는 소장이 가져온 미국의 발표문과 자신의 실험 보고 계획을 한데 묶어 폐휴지함에 넣었다. 남자의 책상 위로 다음 실험을 기다리는 쥐들이 배달되었다.
아내는 후임을 구하기 전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사장이 아내의 디자인 포트폴리오를 빼돌려 다른 회사에 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장은 아내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소송이 하루 이틀 걸리는 일도 아니고, 임신까지 한 마당에 좋지 않은 일로 괜히 힘들지 말고 자기 선에서 끝내자고 하소연하지 않았다면 그날 당장 변호사를 만나고 왔을 아내였다. 가정부는 두 번이나 바꾸었다. 첫 번째 가정부는 음식을 잘 못했고 두 번째는 깔끔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 간다던 아내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쌍둥이래.
남자는 쌍둥이를 위해 임신캘린더를 하나 더 샀다. 어머니는 태아 성별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아들이 둘이나 된다며 잔치라도 할 기세였다. 담당의사가 아이 성별을 애매하게 이야기 할 때마다 남자를 똑 닮은 잘생긴 아들이 맞을 거라며 흥분했다. 어머니에게 무당은 신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는 고향에 내려가자마자 무당에게 두 배의 가격을 주고 부적을 받아왔다. 두 장이었다. 아내는 자궁 양 쪽에 사이좋게 착상한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임신캘린더 앞장에 붙여놓고 용용이, 용돌이라는 태명을 붙여주었다. 촌스럽게 붙여야 건강하게 태어난데. 어머니는 태명을 듣고 용이라니 이보다 더 좋은 태명은 없다며 칭찬했다.
그 즈음에 첫째 누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임산부에게 좋다는 영양제를 택배로 보냈다고 했다. 남자는 그 동안 잘 지냈냐고 물었다. 조카들의 안부도 물었다. 남자의 기억이 맞는다면 연년생 조카들은 나란히 고등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누나는 큰애가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은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수학이나 과학 올림피아에서 몇 차례 큰 상을 타오더니 자기가 알아서 미국에서 생화학 공부를 하고 싶다며 유학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축하해. 첫째가 남자애였지?
누나는 둘 다 여자애라 어머니가 시댁 어른 얼굴을 어떻게 보내며 울었던 것도 다 잊어버렸냐며 소리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잠시 멍한 얼굴로 발신자 목록을 보았다. 남자는 누나가 화난 것을 이해는 하면서도 자신이 크게 잘못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입장에서 그렇게 잘난 자식은 아들인 것이 당연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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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광고 모델은 모델학과 출신으로 결정되었다. 마케팅 팀은 다섯 번에 걸쳐 새 보고서를 가져왔으나 소장은 처음 받았던 보고서로 결정했다. 광고 모델은 모델학과 출신으로 가장 청순해보이는 타입이었다. 광고 내용을 확인한 박팀장은 피임약이나 생리대 같은 여성물품 광고는 항상 청순가련형 여자들만 나온다고 했다. 남자는 화장실 선반 구석에 놓여있던 아내의 생리대 이름을 떠올렸다. 좋은느낌과 화이트. 깨끗하게 느껴지는 브랜드 이름이니 당연히 광고 모델도 그런 이미지에 어울리는 여자를 쓰는 편이 맞는 일이었다. 반대로 소주 광고는 섹시한 가수나 모델이 나오지 않던가. 남자는 쉽게 상상하지 못했던 딸의 성장한 모습을 좋은느낌과 화이트에서 찾았다. 만약 딸을 낳는다면 참이슬이나 처음처럼은 분명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오히려 딸보다 아들이 데려올 며느리 쪽으로 상상하는 쪽이 편했다. 아들이 쌍둥이니 며느리도 둘이 될 테고, 나란히 좋은느낌과 화이트 느낌이었으면. 남자는 이제 고작 몇 개의 세포로 분열중일 쌍둥이들의 먼 미래를 그려보고는 기분 좋게 웃었다.
아내는 안정기에 접어들자 병원을 옮겼다. 남자가 아는 사람이 운영하는 종합병원의 산부인과로 기형아 검사와 임신중독 검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남자와 함께 검사 결과를 듣던 아내는 담당의사에게 넌지시 아이 옷은 어떤 색이 좋은지 물어봤다. 어머니가 준비한 배냇저고리와 침구, 발싸개, 손싸개는 똑같이 생긴 파란색이었다. 이미 옷까지 다 마련해놓고 아이만을 기다린다는 여자의 말에 의사는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는 분홍색을 준비하셔야겠는데요. 사이좋게 여자아이, 남자아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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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어쨌든 아들이 맞다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소장은 요즘은 아들 하나 딸 하나 고르게 낳는 것도 능력이라며 내심 부러워했다. 아내 역시 적어도 한 명이 아들이니 괜찮다고 했다. 첫아이를 유산하고 어머니 눈치를 많이 봤던 모양이었다. 문제는 어머니 쪽에 있었다. 어머니는 그 의사가 제대로 못 봤다며 병원을 바꾸자고 했고 본인이 잘 안다는 의사까지 만나고 난 뒤에야 납득했다. 두 배의 값을 주고 사온 부적은 다시 가져갔다가 다른 것으로 받아왔다. 다른 무당이 썼으니 이번에는 틀림없다며 아내에게 베갯잇에 넣으라고 했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기를 뺏어가지 못하게 하는 부적이었다. 아내는 둘 다 건강하게 태어나면 되니 부적은 필요 없다며 치웠다. 남자는 부적을 종이에 싸서 지갑에 넣어두었다. 어머니에게는 아내 몰래 넣어두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기왕이면 여자아이보다 남자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면 좋겠지만 한참 예민한 아내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머니는 부적으로도 만족하지 못해 새벽마다 천지신명에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종종 절에도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밤에는 귀신을, 낮에는 부처를 찾았다. 길을 걷다 교회의 십자가를 보면 예수와 하나님을 찾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건강하게 태어나는 것 말고도 아들이 먼저 태어나길 빌었다. 남자는 두 개의 임신캘린더를 나란히 놓고 개월수별로 붙여진 초음파 사진을 보았다. 손바닥 만했던 아이들은 어느새 머리와 팔다리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아내는 흔한 입덧도 없이 초기를 무탈하게 보냈고 뜨개질과 수학문제를 풀며 태교에 열중했다. 반 고흐나 피카소의 그림을 모작하기도 했다. 임산부 전용 요가 수업을 듣고 올 때는 아이들이 발길질을 하느라 놀라기도 했다. 그때까지 딸아이는 아들일 때 태명을 그대로 썼다. 아들쪽을 용용이라 부르기로 했으므로 딸은 용돌이었다. 용용이의 캘린더는 모서리가 닳았다. 어머니가 올 때마다 펼쳐보았기 때문이었다. 캘린더의 마지막 사진은 산달이 가까워졌을 무렵에 찍은 것으로 아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딸아이가 먼저 자궁문 쪽을 향해 누웠기 때문이었다. 딸이 먼저 태어날 모양이라고 하자 어머니는 그건 안 된다며 배를 째서 낳자고 했다. 아내는 상황을 보고 결정하자고 했지만 남자는 제왕절개로 아들이 먼저 태어 날 것이 눈앞에 그려졌다.
남자가 비타민 과다 투여로 샛노란 오줌을 싸고 있는 수컷 쥐를 보고 있을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진통을 느낀 아내가 가정부와 함께 병원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정일보다 보름이나 빨랐다. 남자는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가며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야 할까 고민했다. 남자가 고민하는 사이 택시는 남자를 병원 정문에 데려다 놓았다. 남자는 지갑을 열어 잔돈을 찾았으나 오만 원짜리와 네모반듯하게 접힌 부적만 눈에 띄었다. 한참 부적을 보던 남자는 그대로 오만 원과 부적을 기사에게 건넸다. 기사가 무슨 부적이냐며 물어보았지만 남자는 잔돈도 받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택시기사가 뭐라 소리치는 것이 들리긴 했지만 남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남자는 병원 입구에 들어서면서 휴대전화 전원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