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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로 여성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의 색깔을 선명하게 칠하여 색채화가라 불리었으며 특히 적색의 표현에 뛰어났다. 대부분 그의 작품은 온화하고 따뜻한 느낌의 그림으로 가득하고 우울하고 어두운 그림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언제나 밝고 환하고 즐거운 세상을 꿈꾸며 그림을 그렸던 르누아르… "내게 그림이란 소중하고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다. 무조건 아름다운 것이어야 한다. 세상에는 불쾌한 것이 많은데 더는 그런 것을 그려서는 안 된다." 그는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을 정도로 그림을 사랑했던 열정적인 화가였다.
<물랭 드 라 갈레트 >1876년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作 캔버스에 유채 131×175cm 오르세 미술관
댄스 홀에 모여든 사람들의 표정은 누구하나 즐겁지 않은 사람이 없고,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사람들 위로 기분 좋게 일렁거린다. 사람들의 신체는 일부분이라도 타인과 닿아있어 그림 전체가 매우 촉각적이고 따스하게 느껴진다. 그림의 외각은 인물이 잘려지게 처리하여 화폭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정지시킨 듯 하고, 그림을 보는 우리도 그림의 일부처럼 느껴지게 한다.
르누아르의 초기 인상주의 대표작인 <물랭 드 라 갈래트>는 정확한 형태와 묘사보다는 빛에 의에 시시각각 움직이는 색체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전형적인 인상주의의 그림이며, 19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그림중 하나로 손꼽힌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몽마르트르 언덕‘을 다녀가지만, 현재 고급 레스토랑으로 이용되고 있는 물랭 드 라 갈레트 현장을 찾아서 식사를 즐기는 우리나라 관광객은 거의 없다. 아마도 이 그림의 소재가 된 ‘물랭 드 라 갈렛트’가 아직도 몽마르트르에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책읽는 여인> 1876년 모네作 캔버스에 유채 46.5×38.5cm 오르세 미술관
르누아르는 다른 인상주의 화가와는 달리 자연의 묘사보다는 인물, 특히 여인을 주제로 빛의 효과를 탐구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창 밖에서 흘러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을 받아, 책에서 나오는 반사광은 얼굴의 윤곽을 투명하게 만들어 준다. 이 작품의 모델은 가난한 ‘몽마르트 언덕’ 화가들의 친구인 화류계 여인 마르고(Margot)라고 한다.
<샤르팡티에 부인과 그딸들> 1878년 르누아르作 캔버스에 유채 153×190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샤르팡티에의 부인인 마르그리트는 남편 못지않게 예술을 사랑했던 여인이다. 예술가들을 무척 좋아했던 이 부부는 가난에 시달리던 화가들의 그림을 많이 사 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샤르팡티에 부인이 아들 폴(개 위에 앉아있음)과 딸 조르제트와 함께 호화로운 소파에 앉아 있고, 부인과 아이들의 옷차림은 눈부시게 화려하다. 바닥에는 중국산 양탄자가 깔려있고, 벽에는 일본산 병풍이 펼쳐져 있다. 당시 최신 유행인 대나무 의자와 고급스런 도자기들도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폴은 여동생과 똑같은 여자 옷을 입고 있다. 당시에는 남자아이에게도 여자아이 옷을 입히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두 자매> 1881년 르누아르作 캔버스에 유채 100×81cm 시카고 미술관
르누아르는 <두 자매>에서 활기 넘치는 색상과 더불어 그즈음 새로 터득한 붓 터치를 활용하고 있다. 계속 변화하는 붓 사용법과 밝은 색상은 그림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두 자매의 표정은 꽤 차분해 보이지만 배경, 모자와 옷의 장식은 그들을 사랑스럽고 생기발랄하게 보이도록 한다. 또한, 이 작품은 색상을 자유자재로 활용했던 르누아르 화풍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는 색채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나 색 조합에 매우 능했고 덕분에 그의 많은 작품은 색채만으로도 촉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이러한 르누아르의 <두 자매>는 현란한 빛과 색의 향연을 보여주면서도 부드럽고 따스함이 느껴지는 감각적인 색채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도시 무도회> 1883년 르누아르作 캔버스에 유채 180×90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시골 무도회>와 짝을 이루는 작품이다. 기존의 인상주의 화풍에서 1880년대 이후 고전주의 화풍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작품을 보면 점차 윤곽이 뚜렷해지고 선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며 물감처리도 더 매끈해졌다. 화면 구성이나 주제의 선택에서 인상주의적 분위기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선의 표현에 있어서는 앵그르, 라파엘로 등의 고전주의 회화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르누아르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림속의 남자는 친구 폴 로트이며 여자는 르누아르 자신이 가장 좋아한 모델이자 화가였던 수잔 발라동이다. 푸른색이 감도는 배경의 대리석 기둥과 역시 푸른빛을 띠는 실내의 나무, 남자가 입은 검은 턱시도와 여성의 흰색 드레스가 대비되면 세련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시골 무도회> 1883년 르누아르作 파리 180×90cm 오르세 미술관
친구 폴 로트와 춤을 추며 환하게 웃고 있는 모델 알린 샤리고를 화려한 색조와 산뜻한 구도로 그려냈다. 윤곽선과 소묘가 훨씬 명확해지고 빛의 표현도 본래의 형상을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만 활용했다. 훗날 그의 아내가 된 샤리고는 화려한 드레스보다 더 눈부신 미소로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목욕하는 여인들> 1919년 르누아르作 캔버스에 유채 110×160cm 오르세 미술관
<목욕하는 여인>이라는 테마가 주로 그려졌던 시기는 르누아르에게 있어서 독특한 특성을 가졌던 때로, ‘진주빛 시대’ 라고 일컬어진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들은 이미 인상주의적 이념과 부합하지 않았고, 오히려 인상주의를 넘어서고 있었는데, 특히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미술관에서 접한 경험과 신고전주의자 앵그르의 작품세계에서 얻은 영향을 작품 속에 투영하였다. 이처럼 그는 과거 거장의 교훈과 인상주의의 현대적 감각, 그리고 자신만의 미감을 결합하여 독자적인 여인상을 창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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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도제도의 세인트 토머스섬에서 출생해 프랑스에서 활동한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1830~1903).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가장으로써 최선을 다했던 그는 모범적이고 소박한 생활을 하며 그림도 그의 삶처럼 평범한 풍경을 주로 그려내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거짓 없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의 작품들은 대상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고 그만의 기법으로 색을 입혔고, 섞지 않은 색 본연 그대로 하나 하나가 합쳐져 조화를 이루어내도록 하였다. 그는 항상 성실한 자세로 작품 활동을 했던 화가로도 유명했고, 그의 다섯 아들 모두 그의 뒤를 이어 화가가 되었다.
<퐁투아즈의 외딴집> 1868년 카미유 피사로作 151×200cm 구겐하임 미술관
카미유 피사로. 근대의 가장 훌륭한 풍경화가의 한 사람으로서 초기의 농원(農園)의 연작(連作)도 또한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 피사로의 리얼리즘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창가에서 바느질하는 피사로 부인> 1878년 피사로作 캔버스에 유채 54×45cm 영국 옥스퍼드 애슈몰린 박물관
피사로는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일하던 하녀인 줄리아 벨레(1839~1926)와 결혼한다. 그는 고단한 일상에 파묻혀 사는 부인을 자주 그렸는데 여기는 창가에 앉아 바느질을 하는 모습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내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가의 눈길도 감지된다.
<빨래너는 여인> 1887년 피사로作 캔버스에 유채 41×32.5cm 오르세 미술관
점묘기법을 활용한 가장 탁월한 걸작으로 꼽힌다. 평범한 여인이 잔디밭에 앉아 있는 딸을 바라보며 빨래를 너는 모습을 포착했다. 여인에게 가을빛의 영롱한 색을 입혀 작품 분위기를 거의 성화에 가깝게 묘사했다. 윤곽이 흐릿한 인물과 점묘로 이루어진 몽롱한 채색은 마치 꿈속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점묘기법은 1884년에 쇠라에 의해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 하는 사람들>로 이미 발표되었다
<파리의 이탈리아 대로- 아침 햇살> 1897년 카미유 피사로作 캔버스에 유채 73×92cm 워싱턴 국립박물관
인상주의 운동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가장 인상주의적인 방법을 고수했던 카미유 피사로(1830~1903)는 햇빛이 비치는 파리의 거리가 주는 ‘인상’을 그렸는데 그의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화가 나서 묻곤 했다. “만일 내가 이 거리를 걷고 있다면 나도 이렇게 보이는가? 두 다리는 물론이고 눈, 코가 없어지고 형태도 알 수 없는 작은 점들로 보인단 말인가?”라고. 실제로 그들의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에 대한 판단을 방해한 것은 인체에는 어떠어떠한 부분들이 ‘속해 있다’고 하는 기존의 지식이었던 것이다.
<몽마르트 대로, 밤의 효과> 1897년 피사로作 캔버스에 유채 53.5×65cm 런던 국립미술관
19세기 사람들이 세계를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보도록 도와준 두 조력자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인상주의자들의 승리가 그처럼 빠르고 철저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중에 하나는 사진술이었다. 회화는 저명인사의 초상이나 시골 저택의 기록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기계 장치가 더 훌륭하고 값싸게 잘 해낼 수 있게 된 마당에 굳이 그림으로 그릴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미술가들은 점차적으로 사진술이 미치지 못하는 새로운 영역을 탐색하도록 내몰리게 되었다. 사실상 근대 미술은 이런 발명의 충격 없이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일본의 채색 목판화(우키요에)였다. 일본 판화는 프랑스 화가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유럽적 인습이 아직도 그들에게 남아 있는지 깨닫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일본인들은 사물의 우연적이고도 파격적인 면을 즐겼다. ‘그림이 항상 어느 장면의 모든, 또는 관련되는 부분들을 다 보여주어야 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반성도 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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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채색 목판화(우키요에)
일본의 17세기에서 20세기초 에도 시대에 유행한, 당대의 사람들의 일상 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을 그려낸 풍속화의 형태를 말한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우키요에'라고 하면 여러 가지 색상으로 찍힌 목판화인 니시키에(錦絵)를 말하는 경우가 많으나 육필화 등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우키요에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판화였기에 원화를 고가에 구입할 수 없었던 도회지의 서민들에게 많이 받아들여졌다. 우키요에는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사진, 기계인쇄 등의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쇠퇴하였으나,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주목을 받아, 특히 프랑스의 인상파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흐릿하지 않은 확실한 그림체와 대담한 구도, 그림자의 표현이 없는 것이 표현상의 특징이다.
<가나가와 해변의 파도 > 가츠시카 호쿠사이(1760~1849)作 목판화
<붉은 후지산> 가츠시카 호쿠사이作 목판화
<감바라의 밤눈> 우타가와 히로시게作 목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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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카유보트(1848~1894 프랑스)
집안의 거대한 부를 기반으로 당시 인정받지 못하던 인상파 화가들의 최초의 후원자이자 수집가로 유명하다. 화가로서도 훌륭한 작품을 남기기도 했지만, 인상파 화가들이 주류로 올라서는데 후원하며 그들의 작품을 세상에 남기는데 혁혁한 공로를 했던 인물이다. 사후에는 그의 소장품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여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유함이 그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저평가시켰다고들 한다.
<마루를 대패질하는 사람들> 1875년 카유보트作 캔버스에 유채, 102×146cm 오르세 미술관
세 명의 건장한 남자가 같은 복장 차림으로 마루 깎고 있다. 송판을 깔고 바닥을 매끈하게 다듬기 전에 대패질로 송판을 깎는 중이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로 보이지만, 그림 속 세 남자의 단단한 근육질에서 전문가다운 품새가 묻어난다. 대패질하는 세 남자의 동작과 주변의 흩어진 도구들에서 노동의 현장을 세심하게 관찰한 화가의 노력이 느껴진다. 한쪽에 놓여있는 와인병은 고된 노동을 잠시나마 달래기 위한 처방약처럼 보인다. 깎여나간 마룻바닥의 질감과 남아있는 송판의 표면이 창밖에서 흘러든 빛으로 대조를 이뤄 더욱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1875년 살롱전에서 ‘도시 노동자의 삶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자 인상파전에 출품했다. 이 작품은 비교적 어두우 색조와 꼼꼼한 마무리, 견고한 데생에서 전통기법을 따랐기 때문에 일부 평론가들은 이 그림이 인상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아해 했다.
<창가의 남자> 1875년 카유보트作 캔버스에 유채 117×82cm 개인소장
창가에 서서 지나가는 한 여인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뒷모습. 남자는 혼자일 때 여성보다 더 짙은 고독에 빠지는 걸까...... 카유보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는데 예술가로서 그의 고독함은 창밖을 내다보는 한 남자의 모습에서 고스란히 투영되어있는 듯하기도 하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남자는 1876년 갑작스럽게 병에 걸려 사망한 화가의 남동생 르네 카유보트인데 그래서인지 화가 자신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한다.
<비오는 날, 파리 거리> 1879년 카유보트作 캔버스에 유채, 239×185cm 시카고 미술관
주요 인물을 오른쪽으로 배치, 크게 확대하였다. 왼편을 바라보는 남녀의 시선은 도시풍경에 매혹된 시선이다. 남녀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 오른쪽 끝에 몸의 1/3만 보이는 우산 쓴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화면의 정중앙에 최신식 디자인처럼 보이는 초록색 가로등을 배치해 역동적인 구도로 만들고, 그 뒤로 거리를 가로지르는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상념에 젖어있는 듯하다. 마치 근대인의 고독한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먼 배경의 인물들은 흐리게 묘사되어 있는데, 앞의 인물들에게 초점을 맟추다 보니 마치 아웃포커싱(흐리게)된 사진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유보트의 비오는 풍경은 우중충하거나 우울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명징한 대기를 흠향하게 만든다. 차도의 블록과 인도의 표면이 물기로 코팅되어 상큼하게 느껴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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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1834~1917프랑스)는 마네와 동년배였고 비록 인상주의자들의 목표에 대부분 동감하였지만 그 그룹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드가는 구도와 소묘에 열렬히 관심을 가졌고 의외의 각도에서 본 공간과 형태들의 인상을 전달하려고 했다. 인상주의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 중에는 고전주의와 사실주의 색채를 띠고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들도 있다.
<국화 옆의 여인> 1865년 에드가 드가作 캔버스에 유채, 74×93cm 뉴욕 매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작품의 구도는 꽃병의 풍성한 꽃과 사색에 잠긴 여인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병렬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가 만약 이 작품의 주제라면 그녀는 작품의 중앙에 놓이거나 적어도 우리가 보기에 잘 보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드가는 그녀를 끝 쪽에 그려 넣었고, 그녀의 모습은 화면 밖으로 잘려져 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구도는 근대적 미술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발레 수업> 1873~1876년 드가作 캔버스에 유채, 83×77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사선으로 이어지는 넓은 실내에 등을 보인 무용수를 전면에 클로즈업하는 특이한 구도로 그려졌다. 인물들은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볼 수 없는 단단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무용수들의 반투명한 옷은 그가 조심스레 찍어낸 붓길 끝에서 하늘하늘 촉감을 자극한다.
<스타>1876~1877년 드가作 종이에 파스텔, 58×42cm 오르세 미술관
이 작품은 현대인들에게는 익숙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놀라우리만큼 새롭고 낯선 시점으로 그려졌다. 대상과 비슷한 눈높이에 캔버스를 두고 그린 것이 아니다. 이 특이함은 그가 카메라로 대상을 촬영한 뒤 캔버스에 옮겼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카메라는 사실상 당대 화가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지만, 한편으로는 드가의 경우처럼 ‘더 새롭고 신선한 시선’을 창조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출연대기> 1879년 드가作 종이에 파스텔, 100×120cm 개인소장
얼핏 보기에도 구도가 단순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무희들 중 몇몇은 다리만 보이고 또 다른 몇몇은 몸만 보인다. 오직 한 인물만이 완전한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지만 그 포즈 또한 미묘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단지 인상주의자들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바라볼 때와 마찬가지로 냉정한 객관성을 갖고 그녀들을 관찰할 뿐이었다.
<경마장, 마차곁에 있는 기수들> 1880년 드가作 캔버스에 유채 65×81cm 오르세 미술관
드가는 중심을 비우거나 주제가 중앙에서 벗어난 비대칭 구도, 위에서 내려다 본 구도 등 다양한 시점과 극단적인 원근법을 활용해 움직이는 대상이 순간적으로 멈춰있는 장면을 연출했다. 드가는 야외에서 스케치를 마친 뒤 나머지는 모두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했는데, 그림의 구상은 여러 스케치들의 조합으로 작품 속 장면은 엄밀히 말하면 현실 포착이 아닌 화가의 상상으로 구성된 허구이다. 그렇게 그려진 작품은 마치 스냅 사진을 보는 듯 경마장의 역동적인 장면들이 말의 빠른 움직임과 함께 감각적으로 담겨져 있다. 이것은 표현하기 매우 힘든 주제였지만 워낙 뛰어난 감각과 기량을 가지고 있던 드가였기에 관객들은 생생한 현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14세의 어린 무용수> 1881년 드가作 직물, 청동 키98cm 오르세 미술관
인상파 화가 에드가 드가가 청동으로 만든 이 무용수가 등장했을 때, 곧바로 적지않은 소동이 벌어진다. 드가는 섬세한 장면의 발레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는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는데 왜 그랬을까? 이 조각에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 것은 드가가 최초로 시도한 디테일 때문이었다.
이 소녀가 입고 있는 옷은 실제 망사와 천을 사용한 발레복이었고, 뒤에 매고 있는 리본도 정말 리본이었다. 머리카락은 장난감 인형공장에 말총 가발을 받아와서 붙이기까지했다. 사람들은 모두 이 소녀상이 보여주는 낯선 느낌에 반발했다고 한다. 이 정도까지 자연주의 방식으로 제작된 동상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어떤 사람은 신문사 기고글에서 “이 소녀상은 너무 추한데다 자리를 잘못 찾은 것으로 보인다. 이 소녀상이 갈 곳은 동물원이다”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선은 항상 변한다. 가치와 중심점도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은 모두가 이 소녀가 가진 소박하고도 우아한 아름다움이 뭔지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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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양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프랑스의 수잔 발라동(1865~1938)이다. 그녀는 사생아였는데 운명은 유전된다고 그녀 또한 사생아를 낳았다. 그 아들이 파리 몽마르트를 대표하는 화가인 모리스 위트릴로다. 수잔 발라동은 어릴 때부터 청소부, 직공, 양재사 등 온갖 궂은일을 했다. 곡예사로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 화가들의 모델을 서기 시작했는데 그 일은 그녀의 운명을 새롭게 여는 것이었다. 19세기 예술사를 화려하게 수놓은 대가들인 르누아르, 로트렉, 드가의 모델이자 애인으로 그녀는 명화名畫가 되었다. 수잔 발라동에게는 그림 재능이 있었다. 그 재능을 로트렉이 발견했고 드가가 키워 주었다. 그녀는 모델에서 화가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자화상> 1917년 발라동作 캔버스에 유채 65×50cm 개인소장
이 상반신 누드화는 우리가 보통 보는 누드화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우리가 누드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속의 여성이 무엇을 보냐며 오히려 우리를 쳐다보는 느낌이다. 그린 사람도 수잔 발라동이고 모델도 수잔 발라동이다. 성욕의 대상으로서 여성이 아니라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속의 여성이 걸어 나와 자신을 그린 것이다.
<버려진 인형> 1921년 발라동作 캔버스에 유채 129×81cm 워싱턴 DC 국립 여성박물관
어머니와 딸은 언뜻 친밀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가 못하다. 어머니는 목욕한 딸에게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고 있다. 딸은 그런 어머니의 손길이 부담스러운지 한손으로 슬쩍 어머니의 손길을 거부하듯 막으며 등을 돌린다. 발밑으로는 인형이 버려져 있는데, 그 인형의 머리위엔 딸이 한 것과 똑같은 리본이 매여져있다. 어머니에게 딸은 아직도 그저 이 인형처럼 어리고 자그마한 존재다. 하지만 소녀는 더 이상 인형을 가지고 놀 나이가 아니다. 소녀에게는 언제 부터인지 자기만의 세계가 생겼다. 그녀의 왼손에 들고 있는 손거울이 그것을 말해준다. 소녀는 거울을 통해 성숙해진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있다. 거울안의 세계는 타인의 눈으로는 바라볼 수 없는 그녀만의 세계인 것이다.
<푸른 방> 1923년 발라동作 캔버스에 유채 90×116cm 파리 퐁피두 센터 미술관
발라동의 배포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미술사의 전통적인 주제인 비너스와 올랭피아, 오달리스크의 새로운 버전인 셈이다. 그림 속 주인공 여자는 예쁘지도, 날씬하지도, 육감적이지도, 멋진 옷을 입지도 않았다. 게다가 누군가를 전혀 의식하지도 않으며, 담배를 꼬나문 것이 여장부다운 폼새다. 그리고 왼편에 놓여있는 책은 그녀가 추구하는 세계에 대한 메타포(은유)다. 발라동 자신에 관한 그림이다.
<아홉살의 나의 위트릴로> 1892년 발라동作 종이에 크레용
발라동의 결혼생활은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지만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아들 위트릴로였다. 시골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그는 파리근교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몽마르트에 있는 학교에 진학했지만 이른 나이에 술과 만행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발라동은 화가로서의 활동을 접고 아들의 치료에 매달리게 된다. 정서가 불안한 아들에게 치료방법으로 미술을 권유했는데 위트릴로는 미술에 재능을 보인다. 그러나 정신적인 문제는 치료되지 않았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후에 위트릴로는 어머니의 성정과 소질을 물려받은 덕분에 그야말로 몽마르트를 상징하는 화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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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위트릴로(1883~1955) 선천적으로 약한 멘탈을 지니고 태어난 위트릴로는 이미 8살 때 정신병 판정을 받았고, 손자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귀찮았던 마음이 더 컸던 외할머니는 아이에게 술을 먹이고 재워버렸다. 이런 잘못된 양육은 그가 평생 동안 알콜중독에 시달리도록 한 원인되었다. 10대 후반부터 알콜중독 증세로 입퇴원을 반복했던 그가 살기위해 선택한 것이 그림이었다. 어머니 수잔 발라동은 이미 몽마르트의 여러 화가들에게 인정받는 화가였으므로 시작은 어렵지 않았다. 발라동은 어머니로서는 최악이었을지라도 선배로서는 훌륭한 사람이었다.
<코탱의 골목> 1910년 위트릴로作 마분지에 유채 62×46cm 파리 국립현대 미술관
위트릴로의 ‘백색시기’의 대표적 작품. 건물과 돌계단이 모두 직선으로 질서정연한 구도를 가지고 있으며 흰 벽들이 인상적이다. 거기에다 모든 창문이 닫혀져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계단에는 몇 사람이 오르고 있어 한편의 詩라해도 어울릴 그림이다.
몽마르뜨의 라셀가> 1922년 위트릴로作 캔버스에 유채 45×60cm 파리 폴 페트리데스 갤러리
엉덩이가 큰 육감적인 여인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위트릴로의 이전 그림에서는 별로 볼 수 없었던 인물이 그의 그림에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랭 드 라 갈레트> 1923년 위트릴로作 캔버스에 유채 개인소장
19세기 몽마르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살던 파리의 달동네였다. 파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빈민촌이자 환락가였으며 세기말의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예술가들의 안식처였다. 위트릴로는 몽마르트에서 태어났고, 몽마르트에서 자랐고, 몽마르트를 그렸고, 죽어서도 몽마르트에 묻혔다. 그를 ‘몽마르트의 화가’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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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1864~1907) 남프랑스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부터 뼈가 극히 약했던 그는 14살에 의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다리의 성장이 멈춰버리는 장애를 갖게 된다. 장애 때문에 외부 활동을 거의 할 수 없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보였던 예술활동에 몰두한다. 후에 몽마르뜨에 정착하여 고흐와 교류를 갖기도 하면서 후기 인상주의 예술가들의 서클에 활발히 참가하던 그는 물랑루즈의 포스터를 그려주면서 생계비를 유지하는 한편 무용수나 성매매 여성들을 그리면서 소외받은 아픔과 신체장애에 대한 한을 달랬다. 그는 압생트와 같은 독한 술을 즐겨마셨고 결국 잦은 폭음은 그의 건강을 빠르게 해치게 된다. 게다가 매춘에서 얻은 매독까지 더해지면서 결국 툴루즈는 3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로트렉과 물랑루즈 지배인 샤를 지들러
<거울앞에선 자화상> 1883년 로트렉作 판지에 유채 32.4×40.3cm 알비(프랑스 남부) 미술관
장식적인 색채와 독특한 그림체로 알려진 로트렉의 자화상은 매우 보기 드물다. 자주 그리지 않았을뿐더러, 자화상을 그리더라도 피사체와 거리를 두고 형상을 분해하였다. 위 그림에서도 얼굴을 그림자로 가려, 누구를 그린 것인지 식별하기 어렵다. 그는 정상적으로 자란 상체에 비해 하체는 매우 약했다고 한다. 로트렉은 보는 이들이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눈치챌 수 없도록 그렸다.
<수잔 발라동>1888년 로드렉作 캔버스에 유채 47×55cm 미국 캠브리지 Fogg 미술박물관
원래 작품 제목이 <숙취>이고 모델은 수잔 발라동이다. 이 그림을 보면 우선 멍한 표정을 한 발라동의 얼굴에 가장 먼저 시선이 가게 된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술병에 시선이 가면 “술을 반 이상 마셨구나”하고 알게 된다. 턱을 고인 왼손, 늘어진 어깨, 내려간 입꼬리에서 뭔가 지치고 재미없는 기분이겠구나 하고 느껴진다. ‘사는 게 피곤하구나’
<화장하는 여인> 1889년 로트렉作 판지에 유채 66×53cm 루브르미술관
상반신을 벗어 버린채 등을 보이고 있는 여자. 그 아름다움이나 미모를 그리는 다른 작가와는 달리 화폭에 꽉 찬, 등을 보이는 한 모델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을 생각하게 한다. 지극히 평범한 포즈이지만 보이지 않는 얼굴에서 긴 여운을 남긴다.
<물랭 루즈에서의 춤> 1890년 로트렉作 캔버스에 유채 113×148cm 필라델피아 미술박물관
‘빨간 풍차’라는 뜻을 가진 ‘물랭 루즈’는 지금도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에 있는 유명한 캬바레로 여자 무용수들이 치마를 들고 좌우로 흔들면서 다리를 위로 번갈아 들어 올리는 흥겨운 춤인 ‘프렌치 캉캉’이 첫 선을 보인 곳이다. 1889년에 개장해 당시 선풍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파리의 사교계 인사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했다.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는 콘서트를 여는 중앙의 무도장과 관객들을 위한 연회장이 있었으며 외부에는 손님들이 휴식과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정원도 있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1890년 ‘물랭 루즈’의 지배인이었던 ‘조셉 올레르’가 구입하여 현관에 걸어 두었던 작품으로 중앙 부분에 당시 ‘물랭 루즈’의 인기 무용수였던 ‘라 굴뤼’와 그녀의 파트너가 흥겨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그 앞쪽으로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 손님이 걸어가고 있는 전경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중앙의 무용수들을 중심으로 가장자리에 수많은 손님들을 배치하여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당시의 북적이는 파리의 밤, 명소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정확한 인물들의 움직임을 포착하여 로트렉 특유의 묘사력과 거친 듯 자유분방해 보이는 붓질의 선들의 움직임, 그리고 인상적인 색채의 표현으로 인해 역동적인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또한 화면 가운데 길게 그려진 바닥 위에 무용수들의 움직이는 모습의 그림자는 구불거리는 선들에 의해 움직임을 암시하면서 한층 더 짜임새 있는 공간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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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은 모네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는 고전기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열렬한 연구자였으므로 그와 전통 미술 간의 근본적인 충돌이 일어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비평가들에게는 인상주의 반항아들과 같은 취급을 받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다른 인상주의자들처럼 그도 ‘마무리’된 외관을 혐오했다. 로댕도 자신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기를 좋아했다. 심지어 형상이 막 나타나 모양이 갖추어지는 인상을 주기위해 거친 돌의 일부를 그대로 놔두기까지 했다. 작품의 완성은 미술가가 그의 목적을 달성한 때라고 주장했던 램브란트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했다.
<칼레의 시민> 1889년 로댕作 청동 프랑스 칼레 시청앞
1347년 잉글랜드의 공격을 받은 프랑스 해안도시 칼레는 악조건 속에서도 1년여간 영국군에게 대항하나, 결국 항복을 선언한다. 처음에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의 모든 시민을 죽이려했다. 그러나 칼레 측의 여러 번의 사절과 측근들의 조언으로 “모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그러나 시민들 중 6명을 뽑아와라. 그들을 칼레 시민 전체를 대신하여 처형하겠다” 고 했다. 모든 시민들은 한편으로는 기뻤으나 한편으로는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고민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때 상류 부유층 중 한 사람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죽음을 자처하고 나서게 된다. 그 뒤로 고위관료, 상류층 등등이 직접 나서서 영국의 요구대로 목에 밧줄을 매고 자루옷을 입고 나오게 된다. <칼레의 시민>은 바로 이 순간을 묘사한 것이다.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던 이들 6명은 당시 잉글랜드 왕비였던 필리파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닥칠 것이라고 설득하여 극적으로 풀려나게 된다. 결국 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된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후대에 왜곡 및 과장된 것이다. 에드워드 3세는 당초부터 이들을 처형할 의도가 없었으며, 시민 대표들 또한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은 상태에서 항복 의례의 일부로 연출한 장면이라는 것이다.
<신의 손> 1898년 오귀스트 로댕作 대리석 95×75×56cm 파리 로댕 박물관
다듬어지지 않은 대리석 덩어리에서 돌연 나타난 듯한 커다란 오른손은 대지의 일부를 손에 들고 있다. 그 안에 아담과 이브가 조각되어 있다.
<지옥문> 파리 로댕 박물관
단테 ‘신곡’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기 시작한 로댕의 <지옥문>은 각각의 개별 작품으로도 유명한 로댕 작품들의 집대성이다. 단테의 지옥편에서 영감을 받아 수 백개의 드로잉과 습작들을 만들어내고 조각 하나 하나를 완성해 덧붙여 나간 지옥문은 1880년 프랑스 정부의 신축 장식 미술관 입구 대형 청동문 제작 의뢰로 시작되었으나 그의 생전에 완성되지 못하였다. 미완성 석고 모형으로 남아 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1938년에 주조되어서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아담> 로댕作
아담의 집게손가락은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에서처럼 신의 호흡을 받기 위해 뻗어 있다. 그러나 그의 굽힌 무릎, 가슴을 지나는 비스듬한 팔, 어깨쪽으로 숙인 머리 등은, 때때로 미켈란젤로의 <노예상>(파리 루브르미술관)을 연상시킨다. <아담>은 조각가의 생애 동안 <노예>라고 불려졌으며, 이는 로댕에게 끼친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분명히 입증한다.
<세망령> 로댕作
‘지옥문’ 맨 위에 있는 <세 망령>을 확대한 작품으로 지옥문 오른쪽 정원에 전시되어있다. <아담>을 변형한 이 작품은 <아담>의 머리보다 좀 더 낮게 처리해 어깨와 거의 수평에 가깝다. 이 세 망령들의 모습은 서로 다른 망령이 아니라 극적 표현을 높이기 위해 로댕은 같은 동상을 똑같이 세 개를 복제해 각도만 달리하여 나란히 놓은 것이라 한다.
“이 곳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 신곡의 지옥편
<순교자> 로댕作 안타깝게 밑으로 떨어지면서 위를 바라보며 절규하는 순교자의 모습에서 비애와 고통으로 가득찬 인간의 처절한 모습을 잘 나타내었다.
<우골리노> 로댕作
13세기 도시국가간 전쟁에서 반역죄로 체포된 우골리노는 자신의 두 아들과 손자 2명과 함께 피사에 있는 ‘굶주림의 탑’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감방 열쇠는 강에 던져졌고 그들은 결코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결국 어린 손자들과 아들들은 죽어갔고 우골리노는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시체를 먹었다. 그러나 그도 결국 굶어 죽게 되었고 반인륜적 행위로 인해 지옥에 떨어졌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로댕作
파울로와 프란체스카는 12세기 말 이탈리아 라벤나에 실제했었던 비극의 주인공들이다. 라미나의 영주 말라테스타 가문의 장자 지안치오토와 라벤나 군주 폴렌타 가문의 상속녀였던 프란체스카는 그 당시 귀족들처럼 가문의 이익과 번영을 위해 정략 결혼을 한다. 그런데 말라테스타 가문의 장남 지안치오토는 추남에 절름발이였고 성격도 난폭했다고 알려진다. 그래서 말라테스타 가문에서는 프란체스카를 데려오기 위해 지안치오토 대신 잘생긴 차남인 파울로를 보낸다. 정략 결혼에 심드렁했던 프란체스카는 파울로를 보자 첫눈에 반해 기꺼이 결혼하지만, 첫날밤 어두운 밤에서 깨어나 본 신랑은 자신이 사랑한 파울로가 아닌 못생긴 지안치오토였다. 이른바 사기 결혼이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인생과 운명을 저주하고 후회했지만, 이혼이 불가한 카톨릭 중세 시대에 프란체스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지안치오토는 추남인 대신 통치와 외교에 남다른 면모를 보이고, 가문은 날로 번창한다. 그 일로 지안치오토는 성을 자주 비우게 되고, 이미 서로 교감을 주고 받은 파울로와 프란체스카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사랑과 기침은 숨길 수 없다고, 이 둘의 밀애는 곧바로 지안치오토에게 알려지게 되고, 둘은 재판과정도 없이 잔인한 지안치오토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다. 교회의 사면과 면제의식이 없었기에 이 둘은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원래 <지옥문>을 위하여 제작하였으나, 나중에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아 그냥 떼어내고 살롱전에만 출품하였다.
<허무한 사랑> 로댕作 단테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이야기. 육욕죄를 지고 형벌을 받은 남자를 등에 업고 도주하는 여인의 모습을 담았다 . 여인의 등은 깊이 파였으며, 남자의 토르소는 평평하고 다리가 늘어져 있다. 이중 젊은 남자의 얼굴을 로댕은 '슬픔의 머리'라고 불렀다.
<생각하는 사람> 로댕作
"벌거벗고 바위에 앉아, 발은 밑에 모으고, 주먹은 입가에 대고, 그는 꿈을 꾼다. 이제 더 이상 그는 몽상가가 아니라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로댕이 밝힌 '생각하는 사람'의 의미다. 단테, 혹은 로댕 스스로가 모델이었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가장 대중적인 로댕의 작품으로 통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지옥의 문' 위에 앚아, 현재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들을 관조하고 있다.
<Eternal Spring> 1900년 로댕作 대리석 71×74×46cm 상트페테르부르그 Hermitage Museum 2016년 약 240억에 낙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