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유수(일명 "강남의 달")
김서정 작사
김영환 작곡
이정숙 노래
1927년 무성영화 낙화유수 주제가 1929년 3월 음반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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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숙 |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물망초 핀 언덕에 외로이 서서 물에 뜬 이 한 밤을 홀로 새울까
멀고 먼 님의 나라 차마 그리워 적막한 가람가에 물새가 우네 오늘밤도 쓸쓸히 달은 지노니 사랑의 그늘 속에 재워나 주오
강남에 달이 지면 외로운 신세 부평의 잎사귀엔 벌레가 우네 차라리 이 몸이 잠들리로다 님이 절로 오시어서 깨울 때까지
본격적인 ‘(창작)유행가’, 한국 대중가요는, 1927년 ‘낙화유수’라는 무성영화가 상영되었던 단성사 무대 아래서 김서정이 작사, 작곡한 주제가 ‘낙화유수(강남달)’를 이정숙이 부른 것을 그 시발로 본다. 맨 처음 음반으로 발매된 것은 1929년.
'낙화유수' 노래가 정작 지어진 것은 1927년으로, 단성사에서 상영된 같은 이름의 영화 주제가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일본 노래의 번안곡이나, 윤심덕의 ‘사의 찬미’와 같이 외국 곡에 가사를 부친 노래는 있었으나, 우리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순수한 우리 노래는 없었다. 물론 전수린이 작곡한 ‘원정(怨情)’이나 ‘황성옛터(慌城의 跡)’와 같은 막간가요가 만들어진 시기도 ‘낙화유수‘와 비슷했거나 1, 2년 앞섰을 수 있으나, 구전으로만 전하고 공식적인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은 데다가 레코드판으로 나온 시기도 ’낙화유수’가 제일 빨라 보통 ‘낙화유수(강남달)’를 우리 가요의 시발로 보는 것이다.
이 노래는 영화의 인기 못지않게 독자적인 인기를 얻어 전국으로 퍼져나가 2년 뒤(1929)에는 음반으로도 발매되었고, 노래 잘 부르는 인기 배우 김연실이 부른 음반(1930년)이 나온 후 더욱 널리 보급되었다.
지금 ‘강남 달‘로 알려져 있는 이 노래는 ’60년대의 황금심, 신카나리아 등과 최근의 한영애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의 가수에 의해 재취입, 리바이벌되기도 했다.
'낙화유수'가 한 영화의 주제가를 넘어서 유행가로서 그렇게 대대적으로 불려진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곡조는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쉽게 소박하면서도 서정적이고, 가사 역시 드러날 듯 말 듯한 사랑의 정감이 애틋하게 표현되어 있으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쉽게 친숙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상투적인 해석법이기는 하지만, 님을 그리는 간절한 표현은 당시 식민지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노래는 1927년에 무성영화 "낙화유수"가 상영되던 단성사 극장 무대아래서 이정숙이 직접 부른 주제가로 1929년에 유성기 음반으로 취입되어 발매되었다. "강남의 달밤"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8.15 이후에는 "강남달"로 알려져 1960년대에 신카나리아 등 여러명의 가수가 LP음반으로 취입하였다. 1929년에 나온 음반의 음질은 1936년 이후의 음반과 많은 차이가 있다.
1920년대의 음반 취입시설과 기술적인 부족으로 음질이 떨어지고 음악반주 또한 피아노, 바이올린, 트럼펫, 트럼본, 아코디온 등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악단이다. 이정숙이 부른 "낙화유수"가 이러한 음반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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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0월 6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낙화유수" 주연 : 복혜숙, 이원용, 장일성, 정산석 |
1930년에 빅터레코드에서 "낙화유수"를 리바이벌 했는데 인기배우 이면서 노래 잘하기로 유명한 김연실이 불렀다.
김연실은 6.25전 월북하여 80대의 노인으로 현재 평양에 생존하고 있으며 최은희가 납북되어서 김연실과 상면하였다.
무성영화 "낙화유수"’(김서정 각본, 이구영 감독, 이원용, 복혜숙 주연)는 단성사에서 흥행에 성공을 거두어 1940년에 실시한 유성영화와 무성영화의 10대 영화선정행사에서 무성영화편의 10대 영화에 선정된 작품이다. 연출은 나운규와 함께 활동하던 이구영감독이고 여주인공은 1960년초에 작고한 복혜숙이 맡았다.
진주기생과 화가의 사랑이 비운의 러브스토리로 끝을 맺는 멜로물의 영화로. 이 영화의 스토리와 주제가의 노랫말은 진주 기생이었던 어머니의 이력과 김서정 자신의 성장 환경과 관련된 자전적 성격이 짙은 것으로, 영화화되기 전에 이미 4막 5장의 연극으로
무대에 올린 적이 있는 작품이었다.
영화 촬영 중에는 복혜숙이 깊은 개울물에 빠져 진짜 낙화유수가 될뻔 하였다. 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도중 물속에 잠겨 떠내려 가는 것을 가까스로 구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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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혜숙(30년대, 60년대) |
물깊이도 조사하지 않고 진행하던 초창기의 영화제작의 한 단면이었다. 청량리 일대가 촬영장소였는데 당시의 그곳은 울창한 숲과 큰 개울이 많았었는데 추측으로는 제기동의 용두천이나 중랑천으로 짐작된다.
이정숙
주제가를 부른 이정숙은 전문적인 가수가 아니고 중앙보육학교(중앙대학교 전신)에서 홍난파에게 음악공부를 한 소녀로 "낙화유수" 영화감독 이구영의 동생이기도 하다.
1926년의 무성영화 아리랑의 여주인공인 신일선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정숙은 단성사에서 아리랑을 상영할때에도 아리랑을 노래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정숙은 최초로 동요음악을 유성기 음반으로 취입하여 전국적인 동요보급확산에 일조를 한 인물로, 유명한 "오빠생각" "퐁당퐁당" "고드름" "봄편지" 등을 1927년 부터 1932년 사이에 많이 취입하였다.
이정숙이 취입한 유성기 음반 중 현재 남아있어 들어볼 수 있는 동요는
홍난파 작곡으로 "가을밤" "기러기" "봄편지" "고드름" "오빠생각" 등 10여 곡이 있다.
김서정(金署汀:김영환) ( ~1936)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각본을 쓰고, 주제가를 작사, 작곡한 김서정(金曙汀)은 1920-30년대에 활동하던 활동사진(무성영화)의 인기 변사(단성사, 조선극장의 주임변사)이자
영화감독인 김영환(金永煥)의 예명이다. 노래를 작사, 작곡할 때는 김서정이라는 이름을, 영화감독, 변사 등의 다른 활동에서는 김영환이라는 이름을 주로 썼다.
이 노래의 가사,곡조는 모두 김서정의 작품으로,
김서정은 당대 제일의 변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김영환의 다른 이름이다.
음악 전문가가 아닌 영화 변사가 유행가 작곡까지 해 내고 있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인데,
'낙화유수' 곡조에서 느낄 수 있는 소박한 일면은 그러한 비전문적인 유행가 작가로서
김서정의 특색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곡가 김영환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은 베일에 가린 연예인물중의 한사람이다.
진주 권번 기생의 아들로 알려진 김영환은, 휘문의숙을 졸업하고 1924년에 무성영화 ‘장화홍련전’의 감독으로 데뷔한 영화감독이지만, 감독뿐 아니라, 영화각본을 쓰고 변사활동까지 아우르는 만능 영화인이었고,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영화주제가 중심의 창작가요를 작사, 작곡한 음악인이기도 한, 여러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낸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돈을 물쓰듯 쓰고 인력거로 권번가를 누비고 다닐 정도로 화려한 생활을 하였으나, 하늘을 치솟던 그의 인기도 유성영화의 출현과 변사의 활동영역 축소에 따라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인기가 시든 후, 시에론 레코드에서 가끔 유행가, 만담, 넌센스를 만들거나 레코드를 직접 취입하기도 하였으나, 방황과 좌절의 세월을 보내다 마약에까지 중독되는 처지로 전락한 끝에 1936년, 요절하였다.
김서정은,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한 정통파 음악인은 아니었지만, 그가 작사, 작곡한 노래가 지금까지 계속 대중 속에서 이어져 온 것이 증명해 주듯이, 대중성과 음악성을 함께 지닌 가요를 창작한 훌륭한 음악인이었다. 특히, 일본 엔카의 번안곡이나 변형된 민요뿐이었던 당시의 우리 대중 음악계에, 새로운 창작가요를 내놓아 한국 유행가의 시대를 열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김서정의 공적은 높이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특히 그는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가 감독, 출연한 영화 ‘아리랑(1926)’의 주제가 ‘신조아리랑’(나운규 작사, 김서정 편,작곡)을 짓고 아리랑 개봉 극장 무대 아래서 직접 연주되게 하여, 지금 우리와 세계 각국에 나가 있는 동포들이 가슴을 절이면서 부르고 있는 민요 ‘아리랑’이 있게 한 인물이기도 하기에, 그가 남긴 음악적 성과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성영화시대의 일류변사다.무성영화 시대에는 영화내용보다 변사의 인기에 의하여 극장의 관객 숫자가 죄우되던 변사의 영향력이 막강할 때 였다.
영화
김영환의 손을 거친 영화는 ‘장화홍련전’(감독,1924), ‘낙화유수’(원작, 각본,1927), ‘세동무(세걸인; 각본, 감독,1928)’,
‘약혼’(각본, 감독,1929)’, ‘젊은이의 노래‘(감독,1930), ‘연애광상곡’(각본,감독,1931), ‘탄식의 소조’(감독, 출연,1934) 등이 있다. 그 중 ‘장화홍련전‘은 10만의 관객을, 세동무는 15만의 관객을 동원하여 당시로는 이례적인 흥행을 기록한 작품이고, ‘낙화유수’와 ‘세동무’는 10년간의 모든 영화중에서 10편의 우수영화를 뽑는 조선일보영화제에서 무성영화 부문의 우수영화로 선정되기도 했다.
김영환 작사 작곡한 노래
김서정이 작사, 작곡한 노래는 ‘낙화유수’(1927, 이정숙, 강석연, 김연실), ‘세동무’(1928, 김연실), ‘암로’(1930, 강석연), ‘봄노래’(1930, 채규엽), ‘강남제비’(1931, 강석연, 이애리수)‘, ’유랑의 노래’(1931, 이애리수) 등 주로 영화 주제가였다. 그 밖에도 ‘님 찾아 가는 길’(1933), ‘추월색’(1934) 등 10여 곡 정도가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변사활동 중에도 영화 감독을 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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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후 30년대 중반까지 작곡가 김서정의 이름이 시에론레코드에서 발표된 작품에서 종종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그저 한두 곡을 만들어 보는 정도의 순수 아마츄어 수준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정숙이 '낙화유수'를 취입한 이후,
이듬해인 1930년에도 영화배우겸 가수였던 김연실이 역시 이 노래를 취입해 발표했다.
이렇게 '누가 부른 무슨 곡'이라는 공식이 확립되지 않고 같은 노래를
여러 가수들이 계속 취입하는 것은, 유행가의 생산양식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데에서 오는 현상이다. 다시 말해
이미 세간에서 유행하고 있는 곡을 음반에 담은 것이기 때문에, 음반 유통을 통해 비로소 유행하기 시작하는 이후의 전형적인 유행가 생산양식과는 차이가 있다.
SP판으로 보관되어 있는 ‘젊은이의 노래’, ‘부활’, ‘세동무’, ‘심청전’, ‘풍운아’ 등 몇 편의 무성영화의 편집된 육성대사와 여배우와 함께 취입한 만담, 넌센스 등을 제외하면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