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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현대사회를 대중사회, 그 속에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아노미아’또는 소외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지적인 풍토인 듯하다. 오늘날의 상황을 구조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이렇게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게 되어버린 것은, 불과 1세기 전에 콩트(Auguste Comte)나 스펜서(Herbert Spencer)와 같은 사상가들이 산업사회에 기대했던 찬란한 꿈에 비해 볼 때 인간은 결국 행복을 미래 속에서만 추구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현재의 조건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굳게 한다. 소외라는 개념을 현대 사상가들은 여러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다음 글을 통하여 소외의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고, 개인과 사회의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인간이 소외를 극복하여 진정한 삶이 가능한 사회를 건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연구해 보자. |
소외의 개념
소외의 개념은 사회심리적인 차원에서 특정상황이 개인의 심성에 반영된 상태만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다. 이 소외라는 개념이 사회심리학에서는 현대사회 속에서 생활하는 개인들의 심리상태를 파악하는 분석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 개념이 사회심리학자들에 의해서 대체로 다음 다섯 가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① 무능력(powerlessness) : 소외가 이런 뜻으로 사용된 것은 자본주의 사회 속의 노동자의 상태를 막스(Marx)가 분석하고 있을 때이다. 막스는 인간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또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되는 과정을 분석함에 앞서서, 노동자로서의 인간이 그 생활의 주요 결정권을 자본가에게 빼앗기고 무능력해진다고 느끼는 심리상태를 먼저 문제 삼고 있다. 베버(Weber)는 막스의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 소외라는 개념을 산업사회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확대사용하고 있는데, 즉 그는 현대사회 속에서 노동자가 공자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대는 폭력의 수단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으며 공무원은 행정의 수단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의미로 소외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학자들은 이 개념을 개인이 자기의 행동의 과저이나 결과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고 느끼는 심리상태로 규정하고 있다.
② 무의미(meaninglessness) : 소외를 무의미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 학자들 중에서는 인종간의 있는 편견(prejudice)의 문제를 다루면서 소외라는 개념을 이런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1차대전 후의 독일 사람들은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설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론들 주에서 한 가지도 자신을 가지고 채택할 수 없었다는 뜻에서 생활에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었고, 결과적으로는 강한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러한 생활의 불명료성에서 비롯되는 소외감을 유태인 학대라는 단순한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 속에서 인간의 실질적 합리성(substantial rationality)은 감소되는 반면에 기능적 합리성(functional rationality)만 증가된다는 과저에서 소외를 ‘무의미’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현대의 조직사회 속에서 기능적인 합리성만 강조되기 때문에 인간이 주어진 상황을 자기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의미 있게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쇠퇴해 버리고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외란 한 개인이 무엇을 믿어야 하며 자기의 행동에 필요한 결정을 어디에다가 근거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여 심리적으로 방황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경우의 소외, 즉 무능력으로서의 소외가 인간 행동의 결과를 통제하는 문제에 관련된 것이라면 여기서의 소외, 즉 무의미로서의 소외는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는 문제에 관련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③ 무규범(normlessness) : 이런 의미의 소외라는 개념은 아노미(anomie)라는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노미라는 개념은 무규범상태, 즉 사회적 활동을 규제하는 적절한 규범이 없거나 전통적 규범이 그 힘을 상실해 버린 상태를 지칭하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아노미라는 개념을 사회적 적응의 문제와 연결시켜서 문화적 목표(cultural goal)와 제도화된 수단(institutionalized means) 사이의 괴리현상으로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 소외를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는 아노미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학자들은 행위규범의 상실과 이에 수반되는 극단적 개인주의나 수단주의와 같은, 주로 수단(means)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어떤 행위규범이 그 행위가 궁극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목적과 적절히 연결되지 못하여 규범으로서의 의미가 약화되고 그 구속력도 상실되어 버린 상태 속에서의 개인의 심리상태가 소외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④ 격리(isolation) : 소외가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는 예는 현대의 대중사회 속에 처해 있는 지식층의 역할을 분석하는 연구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예컨대 소외라는 개념을 지식층이 그 사회문화와 유리되어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소외라는 개념은 개인의 부적응(maladjustment)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즉 특정 개인의 적극적인 가치판단의 기준이, 기존사회의 그것과 부합되지 않는 상태가 여기서의 소외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격리의 뜻으로 사용되는 소외라는 개념은 어떤 개인이 그 사회에서 통속적으로 큰 가치를 부여하는 신념이나 목표에 자신은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⑤ 자기유리(self-estrangement) : 이러한 의미로서의 소외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이 그의 『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에서 사용하는 개념인데, 그는 여기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낯선 사람인 것처럼 느끼는 심리상태를 소외라는 말로 표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예컨대 ‘판매업에 종사하는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사업에 자신이 수단시되면서부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라고 한 것이라든지, ‘사람들은 은밀히 남을 자기의 어떤 목적에 수단으로 취급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이 서로 간에 만연되면서부터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버린다.’라고 분석한 것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의 이론을 종합해 보면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라는 표현은 결국 인간의 어떤 이상적인 삶의 상태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현대사회의 소외, 그리고 미래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옛날부터 현명한 사람들이 자기가 살았던 시대를 가장 불행한 때로 진단했던 예는 허다하다. 그들의 현재에 대한 진단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그들의 지적인 노력이 인류역사를 발전적으로 창조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따라서 대중사회나 소외라는 개념으로 현대 상황이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곧 그만큼 찬란한 미래를 추구하는 비판적인 노력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이를 일단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의 부정적인 평가가 내일의 꿈을 위한 것이라고 긍정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현재의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내일의 꿈에 연결되기 위해서는 그 부정적인 평가의 정도가 너무 지나쳐서 우리들의 좌절 속으로 휘몰아 넣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현재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없는 곳에는 내일에 대한 소망이 움틀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현재에 대란 부정적인 평가의 도가 지나치면 내일의 소망에 대한 싹이 시들어 버리고 만다.
확실히 산업화를 추진해서 오늘과 같은 형태의 현대사회가 가능한 데 대한 공과는 산업혁명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합리주의에 돌려야 한다. 그러나 인류역사를 회고해 보면 합리주의라는 빛과 낭만주의라는 그늘이 음양법칙의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류사상사의 이러한 양면성은 낮과 밤, 그리고 여름과 겨울의 형태로 구현되는 시간 속에서도 볼 수 있지만 결국은 이러한 자연의 음양을 체현하고 있는 인간존재의 심성 속에서 감정과 이성이라는 형태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양면성이 우리들로 하여금 일을 하게도 하며 놀게도 한다.
그런데 현대사회 속에서 합리성만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감정이 부당하게 무시되는 사례를 많이 볼 수가 있으며, 또 놀이 그 자체가 일로 둔갑해 버린 비정적(非情的)인 현상도 자주 보게 된다. 그래서 오늘의 문화는 마치 몇 푼의 돈에 팔린 고달픈 악사의 손가락으로 만들어지는 흥이 없는 가락과 마찬가지로 그 가장 중요한 정신(Geist)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흥을 돋우기 위한 예술적 재능이 돈벌이에 동원되면서 흥 자체를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모든 능력이 돈으로 환산되고, 삶 그 자체가 물질적인 수단에 압도되면서 우리들의 존재는 진정한 삶의 의미로부터 소외되어 버린 불쌍한 악사의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정신적인 소외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우리들은 오늘날의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 준 합리주의 정신을 멀리 할 수는 없다. 옛날의 원시인들이 허기진 배를 달래며 하루 종일 한 마리의 토끼를 쫓아야 했던 피곤한 생활도 삶 자체의 진정한 의미로부터의 소외였겠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렇게 살바에야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탄식은 현대 지성인들의 보다 더 심각한 소외감의 표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나의 미래에 대한 소망은 이 두 가지 소외로부터 해방되어 모든 인간이 의미있는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사회의 건설을 보는 데 있다. 이러한 사회 속의 인간은 단순히 먹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합리주의 정신으로 획득된 물질적인 풍요 그 자체를 삶의 궁극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하여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의미를 추구하는 삶이 가능한 사회, 즉 모든 사람이 그들 스스로의 삶의 의미에 충실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소외로부터 참으로 해방된 사회라 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성도 이성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며 밤의 놀이도 낮의 일만큼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정의성(情誼性)을 표방하는 낭만주의 정신의 중요성도 강조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 멜빈 씨맨(Melvin Seeman) 『소외의 의미』
죠지 리치맨(George Lichman) 『소외』
생각하기
1. 다섯 가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소외의 개념을 정리해 보자.
2. 에리히 프롬이 사용하는 소외의 개념인 ‘자기 유리’(self-estrangement)란 무엇인가?
3. ‘현대 사회에 있어서 소외의 극복 방안’이라는 논제로 논설문을 작성해 보자.(1000자 내외)
프리츠 파펜하임(Fritz Pappenheim)의 『현대인의 소외』
현재의 허무주의는 18, 19세기의 특징인 인간의 위대성, 진보의 무한한 가능성, 이성의 지배 등에 대한 신념이 쇠퇴한 결과다. 오늘날 이런 허무주의적 분위기는 실존주의자에 의해 되풀이되고 있다. 게오르그 짐멜이 설명한 바와 같이 현대인은 자신의 개성이 파괴될 것이라는 공포, 자신의 자아로부터 소외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공포를 지니고 있다. 실존주의가 이성의 길을 포기하고 충동과 무분별한 주정주의에 굴복한 것이므로 비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실존철학이 지니는 강력한 호소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호소력을 인정한다고 해서 실존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소외를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소외, 고향의 상실을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라고 보는 하이데거나 사라트르의 추종자들과는 달리 소외를 역사적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소외 원인은 최근의 몇십 년 간의 정치적 사건에서 찾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1930년대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의 정체(政體)에 중대한 변화가 생김으로써 더욱 확신을 갖는 주장이 되었다. 왜냐하면 정체의 변화 이후에 비로소 인간생활이 비인격화되고 개인을 단순히 객체로 보게 하는 힘을 의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권력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일 뿐이며 행사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2차대전에 참가하고 있는 병사들이 ‘공이 그렇게 튀었으니까’ 하는 숙명론적인 말로 자신의 전쟁 참가 이유를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정치가 소외의 원인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제도의 속에서 움직이는 사회 ․ 경제적 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를 두고서는 퇴니스의 견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류가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를 떠나 게젤 샤프트(Gesellschaft)로 나아가고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현상에 직면하여 대응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해는 퇴니스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마르크스로부터 받은 영향의 결과이며, 양자는 매우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마르크스는 현대인의 존재가 주로 상품교환의 발생 및 그 지배적 영향에 의해 형성되며 인간적 관계는 상품의 관계로 ‘물신화(物神化)’되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사회의 이와 같은 비인격화는 노동의 성격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과정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충족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부정되고 대상화 ․ 수단화되어 노동과정으로부터 소외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조건 속에서 노동의 산물인 상품이 인간에 대해서 적대적인 것으로 대립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마르크스의 소외론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조차도 수긍하고 있다.
그러나 창조적인 일에 종사하는 작가나 예술가 ․ 성직자나 교사 등과 같은 사람들은 노동자를 지배하는 소외의 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지식인의 사회에서 매우 특수하고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고, 칼 만하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는 이러한 경향을 대변한다. 그러나 소우의 지식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식인이 억압적 체제에 순응했던 사실들을 상기해 보면 그의 주장이 얼마나 환상적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런 소외의 원인을 사회적 ․ 경제적 구조에서 발견하려는 경향에 대한 비판은 있을 수 있다.
첫째, 기술의 중요성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계는 윤리적으로 중립적이며 기술의 잠재적인 힘은 좋게도, 나쁘게도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간과해서 안 될 것은 기술의 진보가 우리의 목표달성을 엄청나게 촉진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목표를 선택하게 되는 가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둘째, 소외를 자본주의시대의 특징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실존철학자들은 소외가 현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조재의 보편적 운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간존재는 소외를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란 말인가. 물론 소외가 자본주의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났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사회에 이르러 소외는 중대한 질적 변화를 겪었으며 오늘날의 그 의미는 과거의 그 의미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말해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소외는 과연 극복될 수 있는가? 사회 ․ 경제적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정신적 변화, 특히 종교 ․ 철학 ․ 교육 심지어 정치적 변화를 통해 소외가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결코 성공한 적이 없다. 소외의 문제는 소외를 낳는 토대인 전체적 사회상황의 한 부분으로 이해될 때에만 치유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마르크스가 주장한 것처럼 소외가 없는 천년왕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아니다. 헝가리와 그 밖의 동구 국가들의 최근 역사는 이미 상품생산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회질서도 소외의 힘에 희생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 사례이다.
프리츠 파펜하임(Fritz Pappenheim)
1902~1964년 (독일에서 출새). 퀼른 대학에서 사회학 ․ 철학 수학. 미국 앨라배마주 탤러디거 대학에서 사회학 강의. 저서로는 『현대인의 소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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