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위대한 국민학교 졸업장
이영백
우리나라 재벌의 회장 중에 학력이 “소학교 졸업”이 전부인 H그룹 회장이 있다. 물론 나중에는 명예박사학위를 여러 개 가지기도 하였다. 흔히 사람을 만나면 “학력”을 물었다. 학력은 그 사람 삶의 밑바탕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까딱했으면 나의 학력도 국민학교 졸업만 할 뻔하였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배움이 중요하다. 가정을 이루려면 가장은 그 밑바탕이 사회에서 공부한 일로 밑받침될 것이다. 예전 시골에는 삼시세끼 입에 풀칠하고 살기에도 바빴다. 부모도 오죽하면 중학교를 보내지 못하였을까? 국민학교 동기의 진학률이 겨우 36.3%(61명/168명)에 그쳤다.
나도 중학교 진학하려고 수련장 사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아버지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였다. “막내야! 중학교 갈라고 하나?” “예.” “중학교 가지 마라. 많은 소 관리도 해야 하고, 쇠죽도 쒀야지.” “….” “와? 대답이 없노?” 그대로 몽둥이라도 날아 올 듯하였다. 겨우 억지 대답으로“…예~.”하였다. 갑자기 앞날이 캄캄하였다.
그 이튿날 일찍 집에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급기야 밤, 사랑채에 불리어 갔다. “머 한다고 늦었노?” “….” “신식공부하면 남을 권모술수에 빠뜨리고, 사기꾼이 되는 기라. 너는 낮에 서당 가서 한문 배워야 한다. 축문, 혼서, 제문 등 지을 줄 알면 된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참았다. 아버지 뜻 꺾을 수 없다는 것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큰형 이외는 우리 집안에 공부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둘째․ 셋째 형․ 누나들 모두 무학이다. 넷째 형은 다섯 살 많은데 국교 졸업하고 중 머슴과 먼 산 시태바리와 논갈이하고 산다. 넷째 형은 낮에 서당도 못 간다. 아버지 몰래 밤에 서당 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나에게는 “국교 마치고 낮에 서당 다녀라.”하는 허락은 매우 훌륭(?)하고 넓은 아량 베푼 것이다.
그때 그 시대에는 아버지의 말씀은 곧 법이다. 그렇게 효자 아닌 효자 노릇을 하여야 하였다. 이미 사다 놓은 “동몽선습”이라는 한문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기들은 중학교 가는데 난 다시 서당으로 다녀야 하였다.
나는 대한민국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1899년(근세조선 고종 광무 3년) 왕조시대에 태어나서 시대를 읽으실 줄 몰랐다. 난 그렇게 국졸자가 되었다.
첫댓글 엽서수필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