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벽신문》65호 (2017.07) 40-43면
동학의 사상과 한국의 근대 다시 보기
보은취회와 전봉준 그리고 동학의 현대화
조성환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보은취회 기념행사에 다녀와서
【박맹수】 오늘은 지난 6월 2일부터 4일까지 ‘제124회 보은취회 행사’에 다녀온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 행사는 올해로 20회째가 되는데, 매년 6월 첫째주 금요일에서 일요일까지 2박 3일 동안 충북 보은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에서 열립니다. 행사의 주요 내용은 동학농민군 위령제와 장승세우기, 그리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프로그램 및 기념공연 등으로 진행됩니다.
동학과 관련된 기념행사는 전국적으로 약 20여개가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이 행사가 가장 21세기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다른 행사는 참가자들의 평균연령도 높고 참가자들도 대부분 유족이나 공무원이 중심인데, 이 보은취회만은 어린애에서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세대가 참여하는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 계신 조성환 박사의 따님 조수아양(6살)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참석했는데, 90이 다 되신 농민운동가 김성순 선생님과 기념사진도 찍고, 80이 넘은 효암학원 채현국 이사장님으로부터 용돈도 받았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는 6살 조수아에서 89살 김성순에 이르는 모든 세대가 한데 어울려 강강수월래를 하였습니다.
보은취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행사가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여느 행사처럼 주최측이 미리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춰서 행사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각자 프로그램을 준비해 와서 그것을 자유롭게 공유하고 있습니다. 가령 붓글씨를 써서 나눠주시는 분, 장승을 깎아서 공원입구에 세우는 분, 전통차를 가져와서 모두에게 대접하는 분, 책을 한 트럭 가져와서 책방을 여는 분, 마당극을 하는 극단 예술인들 등등, 각자의 장기와 개성과 직업에 따라 다양합니다.
참고로 저는 작년부터 동학서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기념공원 안에 있는 인내천정(人乃天亭)에 모여서 뜻있는 분들과 함께 동학과 한국사회에 대해서 자유롭게 대화하고 토론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보은취회와 촛불혁명의 공공성’이라는 주제로 총 4차례에 걸쳐서 이야기마당을 열었습니다.
보은취회의 또 다른 특징은 세대 간은 물론이고 지역적으로도 전국에서 고루 참여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올해는 ‘동학실천시민행동’이라는 단체에서 많은 분들이 와주셨습니다. 동학실천시민행동은 동학정신을 시민사회에 실천하려는 목적으로 올 3월에 결성된 모임으로, 이번행사에는 150여명이나 되는 회원들이 전세버스를 타고 와서 1박 2일 동안 자리를 함께 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이번 행사는 총 500여명이 참여한 그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축제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특히 의미 있었던 것은, 속리산 둘레길을 만드는 시민 몇 분이 속리산 골짜기 골짜기를 조사하다가 1894년에 일본군이 동학농민군 7명을 학살해서 묻은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둘째날에는 직접 그 현장에 가 보았습니다. 약 50여 명이 그 둘레길을 따라서 순례를 하고, 마지막에는 농민군이 묻혀있는 곳에서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내년에는 여기 계신 오니시 선생님과 야규 박사님도 같이 참석하셔서, 조성환 박사와 함께 우리만의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왜 보은인가?
역사적으로 보은은,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전쟁터였습니다. 지리적으로는 한반도의 중심부에 해당되어, 동에서 서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보은을 거쳐야 했습니다. 동쪽 산간지대와 서쪽 평야지대의 경계선에 있는 곳이 바로 보은이니까요. 그래서 전쟁시에는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이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군이 보은을 거쳐서 북상했고, 한국전쟁 때에도 인민군이 보은을 거쳐 남하했습니다.
그래서 보은에는 크고 작은 산성이 굉장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산성은 보은읍에서 약 1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삼년산성입니다. 성을 쌓느라 삼년이나 걸렸다고 해서 삼년산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삼년이나 걸렸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만큼 보은이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성을 튼튼하게 쌓으려고 했다는 뜻이겠지요.
또 하나는 근대에 도로와 철도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보은이 한반도의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보은에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그래서 1세기 전까지만 해도 여러 가지 점에서 보은은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동학 역시 최초의 본부를 보은에 두었습니다. 1887년에 보은에 동학본부가 설치되어, 보은이 일종의 ‘동학성지’가 됩니다. 1893년에는 ‘보은취회’라는 집회가 열리는데, 이 때 적게는 27,000명, 많게는 80,000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지금과 같이 SNS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인파입니다. 이 수만명의 사람들이 음력 3월 11일부터 4월 2일까지 20여일 이상 집회를 한 것입니다. 그 유명한 전봉준 장군도 이 보은취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전라도에서 올라왔다고 합니다.
집회 규모가 이쯤 되자 정부에서는 이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관리를 파견했습니다. 그가 바로 어윤중입니다. 이전에 신사유람단이 되어 일본에도 다녀온 유명한 개화파 지식인이지요. 이 어윤중이 이 집회를 보고 와서 왕에게 올리는 장계(狀啓), 즉 보고서에서 ‘민회’(民會)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은 보은취회가 아무 생각도 없고 질서도 없는 오합지졸의 모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윤중은 이런 표현을 썼다고 해서 나중에 반대파에 몰려 귀양을 가게 됩니다.
그럼 ‘민회’의 형식으로 나타난 보은집회라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것은 지난 촛불집회 때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수만 명의 참가자들이 끝까지 평화집회로 일관했다고 합니다. 동학군을 탄압한 정부 측 기록에 의하면, 27,000명의 사람들이 떡을 사서 먹었는데 각자 한 푼씩 내서 떡값 270냥을 다 갚았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렇게 보면 작년 말의 평화적인 촛불혁명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124년 전의 보은취회를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동학농민혁명의 최후 격전지도 보은이었습니다. 1894년 음력 12월에 ‘북실’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북실전투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을 비롯하여 그 지휘를 받고 있던 조선군, 그리고 동학에 반대하는 유학자들의 민보군이 연합해서 동학군 2,600명을 몰살시킵니다.
동학의 근본정신
이렇게 보면 1887년 동학본부 설치로부터 1893년의 보은취회, 그리고 1894년의 북실전투에 이르기까지 동학의 굵직한 역사가 새겨진 곳이 보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보은이 지니고 있는 이런 역사적 유래를 오늘날에 계승해서, 현대문명이 안고 있는 反생명적 경향을 생명과 평화의 문명으로 바꾸어 보자는 것이 ‘보은취회 기념행사’의 근본 취지입니다.
이런 취지에서 저는 가해자인 일본까지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동학의 근본정신은 가해와 피해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반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주장이 한국인의 정서상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도 잘 압니다. 실제로 동학서당에서 이런 얘기를 꺼내니까 반발이 대단하더군요.
실은 저 역시도 다나카 쇼조(田中正造. 1841~1913)라는 근대 일본의 사상가를 알기 전까지는 이런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했습니다. 동학농민군의 소식이 한참 일본열도를 뒤흔들고 있을 때에, 유일하게 ‘민란’이나 ‘폭도’가 아니라 “문명적”이라고 평가해준 이가 바로 다나카 쇼조였습니다. 그는 反생명적인 서구 근대문명에 저항한 생명사상가였기 때문에 “불살생”(不殺生)을 기치로 내건 동학농민군의 생명사상에 공감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다나카 쇼조는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합니다. 동학에 대한 편견은 당시는 물론이고 1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전북 고부(정읍)의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부패한 조선왕조의 체제를 뒤엎고, 국권을 강탈하려고 온 일본에 대항하고자 일어난 농민봉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지는 전라도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정읍(고부)이었다... 이런 것이 대다수의 역사학자와 일반인들이 동학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인식입니다. 저항, 투쟁, 싸움, 전라도, 전봉준 등의 이미지가 지배적이지요.
그러나 제가 30년 동안 동학을 연구하고서 내린 최종적인 결론은, 동학의 중심지는 전라도가 아니고 한반도 전체였고, 핵심인물도 전봉준 이상으로 최시형의 역할이 컸으며, 사상 역시 저항이나 반역보다는 생명과 평화를 지향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해월 최시형은 사상가이고 종교가일뿐 혁명가는 아니라고 이해되고 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해월이야말로 진정한 대혁명가였습니다. 반대로 전봉준 역시 단순한 혁명가가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을 가진 사상가였습니다. 즉 해월을 혁명가로, 녹두를 사상가로 인식할 때 비로소 동학이 제대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상가로서의 전봉준
그럼 전봉준이 왜 사상가인가?
첫째, 동학농민혁명의 슬로건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조선왕조실록에 이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輔國安民’과 유사한 표현으로 ‘保國安民’이라는 표현도 15차례나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핵심은 ‘안민’(安民)인데, ‘안민’(=백성을 편안하게 한다)은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587번의 용례가 보입니다. 특히 세종(53회)과 중종(56회), 그리고 고종(75회) 때에 제일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최제우의 「포덕문」(《동경대전》)과 전봉준의 「무장포고문」에 나오는 ‘보국안민’은 바로 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보국안민,’ 그 중에서도 특히 ‘안민’ 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동양의 중요한 정치철학이 들어 있습니다. 즉 하늘이 천자에게 준 천명(天命)이 ‘안민’인데, 이것을 어겨서 백성들을 학대하거나 버리는 학민(虐民) 또는 기민(棄民)을 하게 되면, 왕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 동양의 혁명사상입니다. 동학의 ‘보국안민’은 이러한 동양적 혁명사상에 바탕을 두고서 잘못된 지도자를 징벌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자는 뜻입니다. 따라서 ‘보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안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 ‘안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시민들의 생명과 생업과 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일본대지진으로 원전피해를 입은 후쿠시마 사람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버려졌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안민’이 아니라 ‘기민’(棄民)입니다. 세월호로 희생된 아이들 역시 국가로부터 구출되지 못하고 버려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이유는 생명을 살리는 데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상이 있었기에 그들은 살생을 하지 않는 “살림의 군대”를 지향했습니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에 의해 죽은 일본군은 단 한 명에 불과했습니다. 반면에 동학군은 일본군에 의해 3만에서 5만이 죽었습니다. 동학군의 전술이 상대방을 겁주어서 물러가게 하는 방어적 전략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무장한 것은 일본군에 대해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자위적 수단이었습니다. 공격용이 아니었죠.
이상에 의하면, 전봉준의 핵심사상은 보국안민으로 대변되는 백성들의 생명과 생업과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신이 수운 최제우의 보국안민과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양자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동학의 생명사상입니다.
둘째, 이러한 동학의 생명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대목 중의 하나는 동학농민군의 규율입니다. 저는 이것을 ‘신사대명의’(新四大名義)라고 부르는데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매번 적을 상대할 때 우리 동학농민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이기는 것을 으뜸의 공으로 삼을 것이며, 어쩔 수 없이 싸울 때라도 간절히 그 목숨을 해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길 것이며, 매번 행진하며 지나 갈 때에도 간절히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물건을 상하게 하지 말 것이며,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이름난 사람이 사는 동네 10리 안으로는 주둔하지 말 것이다.”
그리고 이 밑에 12개의 규율이 있습니다.
1. 항복한 자는 사랑으로 대하라.(降者愛對)
2. 곤궁한 자는 구제하라.(困者救濟)
3. 탐관오리는 몰아내라.(貪官逐之)
4. 따르는 자는 공경하고 복종하라.(順者敬服)
5. 굶주린 자는 먹을 것을 줘라.(飢者饋之)
6.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 그만두게 하라.(姦猾息之)
7. 도망가는 자는 쫓지 마라.(走者勿追)
8. 가난한 자는 나누어 줘라.(貧者賑恤)
9. 충성스럽지 못한 자는 제거하라.(不忠除之)
10. 거스르는 자는 잘 타일러라.(逆者曉喩)
11. 병자에게는 약을 줘라.(病者給藥)
12. 불효하는 자는 벌을 주라.(不孝刑之)
(「朝鮮國東學黨動靜ニ關スル帝國公使館報告一件」, 日本外務省 外交史料館所藏, 文書番號 5門3類2項4號. 이상, 박맹수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를 향하여」, 2012 참조)
동학농민군의 규율이 이러했기 때문에 동학을 제일 반대하고 가장 비판했던 유학자 매천 황현조차도 동학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가 쓴 《오하기문》에 의하면, 중앙에서 내려온 정부군은 민폐를 많이 끼친데 반해 동학농민군은 백성들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았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이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식량을 제공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군이 일어난 목적 자체가 백성을 살리는데 있었으니까요. 이런 농민군이 백성을 해치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존립기반이 상실되니까요.
동학농민군의 엄격한 규율은 당시 스기무라 후카시 임시 주한 일본 공사도 인정한 점입니다. 스기무라 공사는 “지금 제1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는데, 한반도에 거주하는 일본인 상인 수백명 중에서 단 한명도 동학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이 없다”고 일본 정부에 보고하였습니다. 이것이 당시 동학농민군의 실제 모습이었습니다. 이 원칙을 전봉준은 2차 동학농민혁명까지 지키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동학의 살림사상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폐정개혁 27개 조항에 나타난 평등사상입니다. 야마베 겐타로 선생은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해서 이후에 조경달과 같은 재일 사학자들의 엄청난 비판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폐정개혁 27개조」는 《도쿄아사히신문》에 그대로 나오고 있습니다. 1895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있었던 전봉준의 5차례 재판과정을 전부 보도하고 있는데, 여기에 ‘27개조’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 폐정개혁안의 내용은 4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치개혁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은 민씨정권 타도입니다. 민씨정권은 민심을 외면하고 소수의 몇몇이서 국정을 농단한 사적 권력 집단이었습니다. 전봉준은《도쿄아사히신문》인터뷰에서도 “민씨정권타도”를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심을 대변하는 새로운 인물을 추대해서,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를 건립할 것을 제안합니다.
두 번째는 경제개혁입니다. 가혹하고 부당한 세금을 폐지하라는 것으로,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이 가장 많습니다.
세 번째는 사회개혁입니다. 백정이나 과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신분제를 폐지하라는 것입니다. 가령 백정들은 양반이 쓰는 갓을 쓰지 못하고 천민을 상징하는 패랭이를 쓰고 다녀야 했는데 이런 차별 제도를 없애고, 과부의 개가를 허용하며 노비를 해방하라는 것 등입니다.
네 번째는 종교개혁입니다. 왜 서학은 인정하면서 동학은 인정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가 폐정개혁의 주요 골자입니다. 이 내용들이야말로 당시 사회 밑바닥에서 고통받고 있는 약자들의 문제를 집약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 「폐정개혁안」의 정신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전봉준의 최후진술에 나타난 평화사상입니다. 전봉준은 1894년 4월의 1차 봉기에 이어서 10월에 다시 봉기를 하게 되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1894년 7월 23일에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 휘하에 있던 21연대 3천명이 조선의 국내법과 당시의 국제법인 만국공법을 위반하고, 조선 국왕을 포로로 삼고 조선 군대를 해산시킵니다. 이어서 일본에 저항하는 대신들을 몰아내고 친일파 중심의 괴뢰정권을 세워 일본의 이익을 보장하는 개각을 강요합니다. 전봉준이 다시 봉기한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1차 봉기의 원인이 국내문제였다면 2차 봉기는 대외문제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전봉준은 결국 이 해 12월에 체포되어 41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데, 처형 직전에 있었던 심문에서 일본 영사가 “왜 봉기했느냐?”고 물으니까, “국가적 위기상황이라고 생각해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서 일어났다”고 답변합니다(전봉준공초).
당시의 일본의 군인은 물론이고 정치가, 관료, 저널리스트, 지식인할 것 없이 모든 일본인이 이구동성으로 일본의 행위에 대해서 옳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동학은 괴뢰주의자들의 집단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해 유일하게 일본의 침략행위를 비판하면서 동학을 “문명적”이라고 평가한 사람이 다나카 쇼조입니다.
이 불법행위가 100년만에 나라(奈良)여자대학의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 명예교수에 의해서 밝혀진 것입니다. 나카츠카 교수가 1994년에 후쿠시마현립도서관에 있는 사토문고에서 발견한《일청전사》(日淸戰史) 초안에는 1894년 당시 일본의 경복궁 점령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나와 있는데, 이에 의하면 당시 일본이 완전히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봉준은 이 불법행위에 항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동학농민군이 내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는 배외주의가 아니라 국권수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외세배격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방어인 셈이지요. 실제로 전봉준은 최후진술에서 “다른 나라는 단지 통상만을 요구하는데 일본은 조선까지 넘보려 하기 때문에 봉기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국제법에 전혀 어긋나지 않는 행위입니다. 전봉준이 당시 만국공법을 공부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국제법의 핵심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봉준은 평화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이유로 저는 전봉준을 단순한 운동가나 혁명가로만 보지 말고, 그 이면에 들어있는 사상가나 철학자로서의 측면을 같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대략 이번 보은취회에서 개설한 동학서당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그럼 조성환 박사께서는 이번 보은취회에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요?
동학의 현대화와 세대계승
【조성환】제가 동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 하나의 ‘부채’(負債)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근대화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70년대 산업화와 80년대 민주화를 거치면서 노동자와 지식인 그리고 대학생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피와 땀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근대화는 이미 동학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서구적이고 타율적인 근대화가 아니라 자생적이고 주체적인 근대화의 출발이었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농민과 리더들이 목숨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희생 위에 오늘날의 우리가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앞선 세대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셈이지요.
저에게는 그런 동학의 숨결을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보은취회 기념행사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가 동학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학이 추구한 유무상자(有無相資)의 경제공동체나 살림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생활방식 등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 아쉬운 점은 세대 간의 조화입니다. 여전히 어른들 중심입니다. 이것은 한국학 전반에 걸쳐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함석헌이나 유영모를 연구하는 학회에 가보면 평균연령이 70-80대입니다. 동학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80년대 분위기에 갇혀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은취회에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참여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전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에게 동학사상을 널리 알릴 수 있는 ‘동학의 현대화’ 작업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6살짜리 딸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지식 이전에 먼저 ‘몸’으로 동학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저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동학대장정’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신라시대의 화랑이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풍류적인 수련과 리더십을 길렀듯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동학의 숨결이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을 다니면서 주체성과 창조성을 기르는 교육프로그램을 디자인해 보고 싶습니다.
【박맹수】 사실 제가 동학서당에 공을 들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보은취회에 와서 과거지향적이고 타자비판적인 논의만 해서는 희망이 없다, 보다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동학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런 취지에서 서당을 연 것입니다. 다행히 작년보다는 분위기가 한층 진지해진 것 같습니다. 첫날(2일) 저녁에 행사를 준비하신 30여 분들과 함께 동학서당을 열었는데 대단히 차분한 분위기로 진행되었습니다. 아울러 이 분들 중에서 5명이 중심이 되어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보은에 거점을 마련하여 지역살림과 생명살림을 전개해 나갈 생각입니다.
【국담】 저도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최시형이나 전봉준의 사진이 실려 있는데 너무 어둡고 남루합니다. 자칫 학생들에게 동학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좀 더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의 사진은 없을까요?
【박맹수】 우리에게 알려진 해월 최시형의 사진은 처형 직전에 러시아 기자가 찍었다고 합니다. 이 사진은 유럽에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당시에 러시아를 통해서 폴란드나 유럽 등지에 널리 알려졌다고 하니까요. 그 무렵에 유럽에 소개된 사진은 교토대학 농학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책에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전봉준의 사진에 대해서는, 근대 한국사에 등장하는 중요한 사진들을 수집하고 계신 재일동포 김문자 선생이 그 사진의 경위와 유포 등에 대해서 논문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이런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영정을 그려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허남진】 이번 행사에는 천도교도 참여했나요? 보통 동학이라고 하면 운동의 성격이 강하고, 천도교라고 하면 종교적 성격이 강하다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박맹수】 천도교에서는 개인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지적하신대로 동학은 종교학에서 보면 종교이고, 철학에서 보면 철학이고, 사회과학에서 보면 혁명입니다. 반면에 천도교는 제도종교로 굳어진 느낌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동학이 탈근대적 지향이라고 한다면 천도교는 근대 지향에 치우친 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21세기에는 천도교보다는 동학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역사학자들은 대개 동학이라고 하면 종교로 치부합니다. 관념론이라는 것이지요. 반면에 종교학자들은 동학하면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성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지요. 각각 운동과 종교를 구분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 영성과 사회적 실천을 동시에 추구한 것이 동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에 와서는 이 부분이 약해진 게 아닌가 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마지막은 동학은 일본과의 관계가 명료합니다. 당시 일본은 서구적 근대를 추구한 반면에 동학은 그에 반대하는 자생적인 탈근대를 지향했으니까요. 동학은 反생명적인 근대 문명을 반대하고 생명 중심의 탈근대를 모색했습니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반봉건·반외세’에 더해서 ‘반근대’가 추가되어야 합니다. 반면에 손병희 선생은 일본의 근대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 부분이 동학과 천도교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조성환】 저도 천도교가 지금 한국 사회와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은 안 듭니다. 동학은 보은취회나 한살림 등으로 계승되고 있는데 반해서요. 동학에 비하면 천도교는 일반인들과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의 최전선에서 가장 치열하게 고민한 집단이 천도교일텐데, 어느 시점에서인가 그 동력이 사라진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것의 원인을 단지 정치적인 탄압으로만 돌리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천도교에서도 세대계승의 문제가 시급합니다. 이 문제는 대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이런 점들 때문에 오늘날 동학과 천도교를 하나로 동일시하기가 애매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만 사상사적으로는 동학이 자생적인 근대화운동으로서의 ‘개벽’을 지향했다면, 천도교는 자생적 개벽과 서구적 개화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삼대개벽’을 내세우면서 동학의 개벽을 시대 상황에 맞게 확장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벽》 등을 통해서 서양사상을 소개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는 현실적인 선택이었고, 개벽과 개화를 동시에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원불교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드러난 결과입니다. 저는 천도교에 와서 개벽적 동력이 약화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저도 좀 더 시간을 갖고 충실하게 공부해야 합니다만...
【허남진】 종교학에서는 ‘신종교운동’이라는 말이 있듯이, 보통 신종교를 하나의 ‘운동’으로 이해합니다. 두 분 말씀을 듣고 보니 현대 한국인들은 천도교가 지닌 역동성보다는 동학이 지닌 역동성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맹수】 손병희 선생이 왜 일본으로 망명을 했는가? 이 부분에 대한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900년대 초에 미국에 가려다 좌절되어 일본에 가게 되는데, 5년간의 일본 체류 동안 「삼전론」(三戰論)을 구상하게 됩니다. ‘삼전’이란 ‘도전(道戰)·언전(言戰)·재전(財戰)’으로, 손병희의 일본 망명의 사상적 집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전론」은 동학이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동학 원전 강독이 일단락되면 천도교 문헌도 같이 읽을 생각입니다. 마침 야규 박사께서 「삼전론」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잠깐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야규 마코토】 ‘전론’(戰論)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무력투쟁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삼일운동 때도 그랬죠. 먼저 이념을 세우고 그것을 언설로 뒷받침하며 경제적 실력을 기르는,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일본 제국과 싸운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만주 등지에서 무력투쟁을 한 단체들과는 성격이 많이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념과 언설 쪽은 일본이 약합니다. 이미 나와 있는 자료를 가지고 세밀하게 분석하는 연구는 잘하는데, 이념을 세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작업은 잘 못합니다. 당시 일본의 슬로건은 ‘부국강병’이었습니다. 결국 군사력(강병)과 경제력(부국)을 기르자는 것인데, 특히 군사력이 주였습니다. 경제력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수단에 불과했죠. 반면에 손병희 선생은 5년 동안 일본에 있으면서, 힘으로 싸워서는 상대를 이길 수 없고 사상과 언어가 있어야 진정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박맹수】 흥미로운 것은 일본에 가서 외무성 문서를 열람해 보니까, 당시 일본 정부가 손병희의 동향을 다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가명을 쓰고 다녔다고 하는데, 가명을 쓴 것까지 다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조성환】 손병희가 ‘도전’(道戰)을 주장했다는 점만 보면 탈근대나 전통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도’가 동학에서 말하는 ‘생명’이나 ‘평화’일 수도 있으니까요...물론 박맹수 교수님께서는 이 지향이 약화됐다고 보시는 것 같고, 저도 그 부분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야규 마코토】 ‘도전’이 지니는 함축은 일본과 같은 ‘마당’에서 싸우지 않겠다는 취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맹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원전강독을 하면서 다시 한 번 논의하도록 합시다. 참고로 천도교의 초기사상을 집대성한 자료가《한말천도교자료집》(2권, 1997)으로 나와 있습니다. 저와 서강대학교 최기영 교수님이 편집한 것인데, 나중에 이런 자료도 같이 읽어보도록 합시다.
【국담】 제가 자료를 찾아보니까 목포지역 극단 ‘갯돌’에서 2013년에 「칼의 노래 칼의 춤」이라는 공연을 했는데, 이 연극을 연출한 손재오씨가 이 연극을 소개하면서 “일본군의 압도적인 무력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동학농민군이 일어섰다”고 하더군요. 이 표현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걸까요?
【박맹수】 그 극단에 대해서는 저도 잘 아는데, 동학에 대해 꽤 깊이 있게 공부한 극단입니다. 4.19 직후에 우리 것을 제대로 알자고 하는 문화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맥을 잇고 있는 극단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금치 전투에서 보름간 대격전을 벌인 것이 사실입니다. 당시 우금치 전투에 참여한 지휘관이 쓴 동학농민군 토벌기록 「선봉진일기」(先鋒鎭日記)를 보면, “저들은 대체 어떤 담략과 지략이 있길래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쓰러지면 또 일어나고 쓰러지면 또 일어나는가?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해진다”고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압도적인 무력에 굴하지 않았다”는 말은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얘기를 마무리 하면, 격동하는 1894년 전쟁시에도 해월은 충북 옥천군 청산면 문바위골의 동학 본부에서 수련과 공부를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도 수행을 계속한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는 대종교의 “수전병행”(修戰竝行)과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조성환】 그 점이 바로 ‘탈근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의 군대는 전쟁시에 수행을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하물며 고대 중국의 묵가 집단도 전쟁하면서 수행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종교도 그랬다고 한다면, 이것이 혹시 한국 종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맹수】 저도 대종교에 탈근대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쟁 중에 수행을 했다는 것은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나섰다는 겁니다. 보통 우리는 ‘전쟁’ 하면 죽이는 이미지를 생각하는데, 반대로 전쟁을 살리는 이미지로 읽어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 지난 호 제22면 좌단의 “홍계훈의《동학난지록》”은 “홍종식의《동학난실화》”로 정정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