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하의 ‘남성 우월주의’와
‘수절’과 ‘개가’의 문제를 풍자한 소설 ‘장끼전’
정승희
왜 제목이 ‘장끼전’이야?
『장끼전』은 동물 우화 소설이다. 엄동설한에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남편 장끼가 부인 까투리의 만류를 듣지 않고 붉은 콩을 먹다가 덫에 걸려 죽게 된다. 그러자 홀로 된 까투리에게 각종 새가 와서 구혼(求婚)을 하고, 까투리는 다른 장끼나 혹은 오리와 재혼(再婚)하거나, 수절(守節)한다는 내용이다.
『장끼전』은 원래 ‘장끼타령’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판소리 작품의 하나였다. 판소리가 인기를 누리던 19세기 중반 무렵에는 ‘열두 마당’, 즉 12편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이후 인기를 얻지 못한 작품들이 없어지거나 흔적만 남게 되면서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으로 줄어들게 된다.
‘장끼전’은 소리를 잃은 ‘일곱 마당’ 중 하나에 속한다. 가면극이나 창극 따위를 보고 느낌을 읊은 한시의 한 종류인 관극시에 나타난 ‘장끼전’에는 장끼가 덫에 걸려 죽게 된 부분까지만 나온다. 현재 전승되어 온 까투리의 재혼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공부를 하기 전에 우리가 궁금해 한 것 중 하나가 제목에 대한 것이었다. ‘장끼전’은 수꿩 남편 장끼가 부인 까투리의 말을 듣지 않고 죽은 후,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일찍 죽은 장끼라기보다는 까투리였다. 그러니 의당 ‘까투리전’이라 해야 마땅할 것 같았다. 초기 판소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초기 판소리에서는 장끼의 죽음까지를 기본 서사로 하여 불리어졌기 때문에 전승 과정에서 이야기가 추가가 된 후에도 제목이 그대로 내려온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장끼전’은 19세기 중반 이후 소설로 전환되면서 까투리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또 규방 문화권에서 널리 향유되면서 그 당시로는 파격적인 재혼의 문제도 다루게 되었다.
장끼가 죽은 후 문상을 온 뭇 새들이 까투리에게 구혼을 요구하는 후반부는 여러 가지 각 편들이 존재한다. 오리와 재혼하거나, 억지 혼인을 거부하고 수절을 한다거나 홀아비나 젊은 장끼를 따라가는 경우도 있다. 뭇 새의 협박에 못 이겨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까지 있다.
결말이 다양할수록 주제 또한 마찬가지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결말이 다양하게 전승되었던 이유는 ‘개가’나 ‘재혼’이라는 것이 당시 시대 상황에서 읽는 이의 처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우화 소설이라 그런지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의 모습을 견주어 보기도 쉬웠고, 우회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살펴보기도 좋았다.
무엇을 비판하고 풍자했나?
장끼전에서 우회적으로 이야기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장끼가 처했던 삶의 어려운 상황으로, 그 당시 민중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라 하겠다. 예를 들면 죽음의 위협까지 감수하면서 콩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약자로서의 삶이나, 맹수들에게 위협받거나, 좋은 깃털은 사람들에게 모두 빼앗길 수밖에 없는 짐승의 삶이 그것이다. 일반 민중들은 당시 양반들의 모진 수탈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으니 장끼와 까투리가 처했던 삶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 개가한 까투리를 통하여 ‘남존여비’나 ‘개가 금지’라는 당시의 완고한 유교 규범을 비판하고 풍자한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조선 후기의 서민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양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재혼’이나 ‘개가’의 문제를 풍자하여 양반 사회의 위선과 여권의 신장을 도모했다고 할 것이다.
서유석의 논문을 살펴보자.
“장끼는 부정적인 형상의 인물이다. 『장끼전』의 뒤틀린 인물 형상은 가부장제에서 은폐되어 왔던 다른 시선, 즉 까투리로 대표되는 여성적 시선에 의해 구체화된 왜곡된 남성성을 폭로하고, 이를 통해 가부장제가 가지고 있는 모순을 다른 시각에서 조망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까투리의 눈에 비친 장끼는 실상 왜곡된 가부장제 이념의 희생양일지 모른다. 까투리라는 여성적 시선에서 바라본 남성은 ‘남성성’이라는 그 자체로 왜곡된 사회적 섹슈얼리티에 묶여 있는 존재였다. 가부장제 하에서 은폐되어 있었던 여성적 시선은 드러나지 않았던 남성의 모순되고 왜곡된 모습을 가감 없이 폭로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뒤틀린 장끼의 모습은 『장끼전』 향유층에게 매우 낯설게 다가온다. 장끼의 모습이 낯설게 여겨지는 것은 그간 당연하다고 생각해 오던 일상의 모습을 새롭게 만든다. 그러나 그 새로움이 가져다주는 진실은 장끼로 상징되는 가부장제 질서의 모순을 여성적 시선에서 폭로하고 있다.”
논문, 서유석-『장끼전』에 나타나는 ‘뒤틀린’ 인물 형상과 여성적 시선
장끼의 인물 됨됨이를 통해 본 가부장제 하의 남성 우월주의를 보여 주는 대목은 많이 발견된다. 장끼는 콩을 발견했을 때 부인 까투리는 아랑곳 않고 냉큼 자기만 먹으려고 한다. 그렇게 굶주렸다면 부인 까투리에게 먼저 먹어 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또 장끼가 까투리의 꿈 얘기 들으면서 자기 쪽으로 유리하게 해몽할 때도 그렇다.
덫에 걸린 장끼를 보고 까투리가 서러워하자 장끼가 하는 말은 더 가관이다.
“자네 너무 서러워 말게. 과부 팔자 타고난 자네 가문에 장가든 내 실수로 명을 재촉한 게 아닌가? 그래서 가문을 따지는 게지.”
덫에 걸려 죽게 된 것이 자신의 잘못된 판단이 아니라 까투리 가문에 장가들었기 때문이라는 억측을 부리고 있다. 더군다나 덫에 걸려 죽으면서까지도 까투리더러 수절하라고 하는 대목을 보고 있으면 황당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시각이 그 당시 유교 도덕에 가려진 양반사회의 단면이기도 했다. ‘장끼전’은 이러한 왜곡된 남성성이나 양반 사회를 우화 소설로 잘 형상화한 작품이었다.
‘장끼전’에서 또 흥미로웠던 부분은 까투리의 꿈 이야기이다.
장끼가 콩을 먹으려고 하자 까투리가 말리면서 여러 가지 꿈 얘기를 한다. 장끼는 자기가 꾼 꿈을 먼저 말한다. 황학을 타고 하늘에 올라 옥황상제께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그러자 상제가 산림처사 자리를 주고 만물 창고에서 콩 한 섬을 주었다고 한다. 콩은 하늘에서 내린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까투리는 장끼의 꿈 얘기를 듣고 나서 자신의 꿈 얘기를 한다. 해시(밤 9시)에 꿈을 꾸었는데 북망산 음지 땅에 궂은비가 흩뿌리더니 하늘이 맑아지며 쌍무지개가 떴다. 그 무지개가 갑자기 칼이 되어 장끼의 머리를 베는 꿈을 꾸었다며 흉몽이니 콩을 먹지 말라고 한다. 까투리는 또 자시(밤 11시), 축시(새벽 1시), 인시(새벽 3시), 마지막으로 새벽녘에 꾼 꿈 얘기를 한다. 시간대별로 이렇게 자세하게 꾼 꿈 이야기는 어떤 의미였을까? 이것은 세상일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일면을 보지 말고 다양한 측면을 봐야 한다는 교훈을 준 것은 아닐까.
결국 무엇이 되었을까?
장끼가 덫을 놓은 탁 첨지에게 잡혀가고 까투리는 길가에 떨어진 깃털을 가져다가 장례를 치른다. 그런데 청혼하러 온 동물들이 까마귀(장례식에 오자마자 청혼)와 물오리(까투리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혼인 잔치 준비하고, 육지에 사는 까투리에게 물속 자랑하며 청혼)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장끼가 오기도 한다.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른 동물들이 와서 청혼을 하게 했던 장면도 색달랐다. 다른 동물들이 상징하는 것은 까투리의 선택의 폭이 그만큼 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들이 나와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더불어 다양한 결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볼 수 있다.
현재 책으로 나온 것들은 상당수가 청혼한 장끼와 까투리가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 조개가 되었다라고 끝나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다른 결말들도 있다. 개가하는 것, 수절하는 것, 자결하는 것 등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결말이 존재했던 이유는 다양한 여성적 시선과 선택으로 다양한 주제를 구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재혼을 하는 것도 수절을 하는 것도 자결을 하는 것도 그 당시 까투리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결국 까투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개가한 후에 둘은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서 조개가 되었다는 결말을 보자. 둘이 조개가 된 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치입대수위합’이라 하였으니 치위합(雉爲蛤 '치'는 꿩, '위'는 되다, '합'은 먹는 조개)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육지 생물이 죽어서 왜 뜬금없이 수중 생물인 조개가 되었을까? 조개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의견들 속에서 설득력 있는 주장이 있었다. 『예기』 월령가에 9월에는 참새가 대합이 되고, 10월에는 꿩이 큰 조개가 된다는 말이 나온다. 즉 시간의 변화에 따라 사물도 변한다는 말이다.
오래된 조류, 즉 뭍의 동물은 양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 양의 동물이 바다에 들어가 음의 성질을 가진 조개가 된다는 것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조개는 물속에 들어가 딱딱한 껍데기 안에 있는 음의 기운을 뜻한다고 한다.
까투리는 결국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어 잘 살았다는 결말이다.
‘장끼전’에서 장끼는 당시 가부장적인 남성상과 뒤틀린 인물을 형상화한 캐릭터이다. 남성의 모순되고 왜곡된 모습을 가감 없이 폭로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또 까투리의 개가가 지니는 유교 규범은 민중들보다는 양반들에게 해당되는 것들이었다. 현실 속에서 민중들은 ‘개가’라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큰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까투리의 수절과 개가의 문제는 양반 사회의 위선과 그 당시 변화하는 사회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당시 당연하다고 생각해 오던 일상의 모습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해 준 ‘장끼전’은 현대의 변화하는 가족 제도 속에서도 새롭게 읽혀질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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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희 : 동화를 써서, 두 번 상을 받았고 한 번 창작 지원금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지도』, 『알다가도 모를 일』, 『손을 들면 흥이요, 발을 들면 멋이라』, 『공주의 배냇저고리』(공저)가 있다. 청소년 테마 소설 『울고 있니 너?』(공저)가 지난달에 나왔다.